최강의 "뇌영상과 정신의학"

현직 정신과 의사인 필자가 최근 뇌영상과 정신의학 연구의 성과를 아우르며 뇌영상에 바탕을 둔 정신질환 해설에 나선다. 정신질환에 대해 여전히 큰 편견과 오해를 풀어주고자 한다.

때론 조울증에 창조성도 있다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36] 양극성장애, 가벼운 또는 심각한




1991년, 이범학이라는 신인 가수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데뷔곡 <이별 아닌 이별>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 그는 <가요톱텐>에서 5주 연속 1위에 올랐고, 각종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휩쓸었다. 훤칠한 외모, 호소력 짙은 목소리, 귀에 착 감기는 노래. 대중의 사랑은 폭발적이었다. 인기 예능 프로그램 <일밤>의 인기 꼭지 ‘몰래카메라’에서 ‘새발의 피’로 대변되는 어리숙한 모습을 보인 것마저 매력으로 받아들여졌다.


[유투브 https://youtu.be/Z4JCAuuOcsk

 젊은 시절 풋풋한 모습의 이범학이 부르는 ‘이별 아닌 이별’.]


하지만 이범학의 이름은 곧 잊혀졌다. 2집의 실패, 소속사와의 갈등, 급변하는 음악 시장에 대한 부적응 외에도 그가 조울증을 앓았던 것이 활동을 제약한 또 다른 이유였다. 데뷔하기 전에 “내가 예수다”라는 과대 망상 때문에 입원 치료를 받은 적이 있던 그는 전성기 시절 4차례나 자살을 기도했다.[1] 또한 “선후배에 대한 예의가 없고, 정신질환까지 앓고 있다”라는 루머 때문에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심하게 당했다.[2]


이범학이 3집을 낸 것은 무려 20년이나 지난 2012년 봄이었다. 그러나 대중이 기억하던 풋풋한 모습 대신 트로트 곡 ‘이대팔’을 구성지게 부르며 가사처럼 ‘뽀마드 기름 손에 붓고… 이대팔 머리 넘긴’ 중년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자신의 변화를 “야구로 치면 투수가 구사하는 구종이 늘어난 것”으로 표현하면서 배수의 진을 치는 심정으로 무대에 복귀했다.[3]


1.jpg » ‘이대팔 가르마’에 뿔테 안경을 쓰고 트로트 가수로 돌아온 이범학. 출처/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mFwbUS5xVKk 갈무리


그맘때 나는 군복무 내내 준비했던 미국에서 정신과 수련을 받는 것에 최종적으로 실패하고 향후 진로에 대해 한창 고민하고 있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패잔병의 귀환 정도로 여기던 내게 이범학의 변신은 신선한 자극과 도전이었다. 우연히도 비슷한 시기에 <사이언스온>을 알게 되었고, 1년 여의 습작(?) 기간을 거친 뒤 다음 해 필진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범학처럼 파격적이지는 않았지만 나름 삶의 궤도가 바뀐 셈이다. 매년 봄이 되면 여기 연재에서 조울증을 다뤄야지 하다가 번번히 기회를 놓쳤는데, 벌써 5년째이니 이제 더 이상 미루지 않고 마음의 빚을 털어보려 한다.



기분이 널뛰기 했던 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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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울증(躁鬱症)은 명칭 그대로 조증과 울증이 나타나는 병인데, 한자를 살펴보면 의미가 보다 명확해진다. ‘조(躁)’라는 글자는 나무(木) 위의 입(口) 세 개가 있는 형상을 통해, 나무에서 새들이 조잘거리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데, 게다가 발(足)과 함께하니 조급하고 부산한 움직임을 더욱 강조해주는 듯하다. 반면 복잡한 모양의 ‘울(鬱)’이라는 글자는 뜻풀이도 다채로운데 대개 생김새처럼 답답하고 꽉 막힌 모습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기분, 활력, 인지가 양극단으로 나타날 수 있는 조울증을 정신 의학에서는 양극성장애(bipolar disorder)라고 부른다.


극성장애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흔히 아침에 즐거운 표정으로 인사한 친구가 오후에 짜증을 부리거나 고객과 통화할 때는 연신 미소 짓던 상사가 통화가 끝난 뒤에 인상을 찌푸리며 잔소리할 때 “왜 저래? 조울증 아냐?”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양극성장애는 단순히 성격이나 변덕의 문제가 아닌 이름 그대로 질환이다. 이와 관련해 사도세자를 정신의학적 입장에서 살펴본 흥미로운 논문[4]을 살펴보자.


세자의 신분이었지만 뒤주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이한 사도세자의 비극적 삶은 흔히 노론과 소론 간 당쟁의 희생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논문의 교신저자인 울산대학교 서울아산병원의 김창윤 교수는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가 기록한 <한중록>을 바탕으로 실질적인 원인을 양극성장애에서 찾았다. 사도세자가 정신 질환으로 인해 기이하고 예측할 수 없는 언행을 일삼았기에 27세란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고 추측한 것이다.


2.jpg » 양극성장애를 앓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도세자. 영화 ‘사도’의 한 장면. 출처/씨네21


도세자에게 우울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0세(1755년) 무렵이었다.


“병 증세는 종이가 물에 젖듯이 하여, 문안도 더 드물게 하시고 강연에도 전념하지 못하시며, 마음의 병이시라 늘 신음이 잦아서 병폐하신 모양이니.”


우울한 기분과 의욕 저하는 다음 해에 더 심해져 자기 관리도 하지 못하고, 자살 행동까지 나타났다.


“소세[얼굴을 씻고 빗질하는 것]도 단정치 않으셨다.”,

“그 날 그 일을 지내시고 가슴이 막히셔서 청심환을 잡숫고 기운을 내시며 ‘아무래도 못살겠다’하시고서, 저승전 앞뜰에 있는 우물로 가셔서 떨어지려 하시니.”


양극성장애에서 나타나는 우울증은 일상 생활에서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나타나는 우울감과는 궤가 다르다. 증상이 2주 이상 지속되고, 이로 인해 사회적, 직업적 기능 영역에서 심각한 고통이나 손상을 초래해야 한다. 조증도 마찬가지이다. 적어도 1주간 증상이 나타나면서 일상적 기능에 현저한 저하가 동반되어야 한다. 일시적이고 단순한 양상의 기분 변동은 실제 조울증과는 거리가 있다.


조증은 고양된 기분, 기분과민성, 난폭한 행동과 같은 모습으로 21세(6-7월) 때 처음 나타났다.


“지나친 행동도 하시며(중략) 나인들을 데리고 노시니, 그 내관들이 나팔 불고 북치는 것까지 했다고 한다.”,

“그대로 격화와 병환이 점점 더하셨다. 그래서 내관들에게 매질하시는 것이 그 때부터 더하시었다.”


23-24세 사이에는 비교적 안정된 상태였지만 25세부터 26세의 해 3월 사이에 다시 조증이 나타난 듯하다. 이 시기에는 사도세자의 폭력성이 두드러져 세자빈에게 바둑판을 던지고, 자신의 아이를 낳은 후궁을 죽도록 쳐서 죽음에 이르게 하고, 특별한 사유 없이 여러 내관과 나인을 죽였다. 26세의 해 5-9월 사이에는 잠시 상태가 나아졌지만, 10월부터 증상이 다시 나타나 부적절하고 기이한 언행, 폭력적이고 과장된 행동이 사망 시점까지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세자가 환각과 망상을 경험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러한 정신병적 증상은 기분 증상의 중증도가 심각할 때에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기분 증상의 악화와 호전이 반복되었고, 증상이 없을 때에는 이전의 일상 생활로 무난하게 복귀한 점을 고려하면 사도세자의 증상은 양극성장애 때문인 것으로 충분히 의심해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사도세자에 대한 이런 묘사들이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자기 집안을 방어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 사후에 왜곡된 내용을 기록했기 때문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한중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신 증상에 들어 맞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어 혜경궁 홍씨가 순전히 상상력을 동원해 기술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아울러 혈족 중에 기분장애의 가능성이 높거나 진단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기분 증상을 의심할 수 있는 인물들이 있는 가족력도 역시 사도세자에게 양극성장애가 있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7.jpg » 사도세자의 가계도. * : 기분 장애를 배제할 수는 없음. ; † : 우울증이 강하게 시사됨. 출처/ 주 [4]



조증, 좋은 게 꼭 좋은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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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 미국에 로버트 로웰(Robert Lowell)이란 뛰어난 시인이 있었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퓰리처상을 받을 정도로 문학성을 인정받았지만 사실 그의 삶은 기행으로 뒤덮여 있었다.[5] 고교 시절에 자신을 성모 마리아라고 믿고 친구와 논쟁을 벌이거나 질주하는 차를 멈추겠다며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팔을 벌리고 서있기도 했다. 싸움과 폭음, 이혼 등으로 점철된 그의 삶은 불안정했지만 대중은 이마저도 신성한 시적 영감이 분출한 것으로 여겼다. 그는 1950년대와 60년 대에 많은 상을 받았고, 그가 쓴 책은 수만 권이나 팔렸다.


3.jpg »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시인 중 하나로 꼽히는 로버트 로웰. 출처/Wikimedia commons


이한 언행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로웰이 문학 분야에서 성공한 밑바탕에는 양극성장애가 자리잡고 있었다. 조증을 겪을 때 열정이 증가하고 활력이 넘치고 기분이 고양되고 자기 확신감이 가득하고 생각이 계속 솟아오르고 두뇌 회전이 빨라지고 심신의 행복과 안녕을 강하게 느끼면서, 창조성과 생산성이 급격하게 상승했던 것이다. 양극성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음악가 슈만도 역시 기분의 변화에 따라 작품 수가 큰 차이를 보였다.


4.jpg » 슈만의 작품량(숫자는 작품 번호)은 시기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기분의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출처/주 [6], 변형


양극성장애와 창조성 사이의 연관성은 우연한 계기로 밝혀졌다. 1970년대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병원의 낸시 안드레아슨(Nancy Andreason) 교수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디어지는 조현병에서 창조성이 높을 것으로 기대하고 창조적인 작가 15명과 일반인 15명의 정신 질환 여부를 조사했다.[7] 하지만 예상과 달리 작가 집단에서 조현병은 관찰되지 않았고 대신 기분 장애가 67퍼센트(%)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구에 참여하는 작가의 수가 점점 늘어 최종적으로 30명이 되었다. 다시 살펴보니 작가 집단의 80퍼센트(%)에서 기분 장애가 있었고, 그 중 양극성장애가 43퍼센트(%)로 가장 많았다.[8]


른 후속 연구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확인되었다. 자신이 양극성장애 환자이기도 한 미국의 케이 레드필드 재미슨(Kay Redfield Jamison) 교수는 예술 분야에서 유명한 상을 받은 적이 있는 영국인 예술가 47명의 정신 질환 병력을 조사했다.[9] 예술가의 38퍼센트(%)가 기분 장애로 치료받은 적이 있었고, 그 중 시인 집단이 유일하게 조증으로 치료받은 과거력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아놀드 루드비히(Arnold Ludwig) 교수 역시 59명의 여성 작가와 일반인 59명을 비교해 작가 집단에서 우울증(56%)과 조증(19%)의 비율이 높은 것을 보고했다.[10]


안드레아슨, 재미슨, 루드비히의 연구는 넓게는 정신 질환과, 좁게는 양극성장애(주로 조증)와 창조성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이들의 연구는 참가자가 너무 적고 협소하며, 주관적이고 일화적인 정보에 주로 의존해 조사가 진행되었고, 연구자의 주관이 개입할 요소가 적지 않았기에 주의해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양극성장애가 마치 예술가적 소양인 듯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조심해야겠지만 최근의 연구에서도 여전히 양극성장애과 창조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2012년 스웨덴의 카롤린스카 연구소(Karolinska Institute) 연구소에서 약 120만 명을 40년 동안 추적 관찰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정신 질환 중에서 양극성장애만이 창조성을 필요로 하는 직종과 연관되어 있었다.[11] 또한 2015년에는 유전자 분석을 통해 양극성장애에 대한 유전적 위험성이 창조성을 예측할 수 있다는 연구가 보고되었다.[12]


쯤 되면 양극성장애를 치료하는 것이 부정적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창조성과 영감의 원천을 막아버리는 것이니까.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조증과 우울증은 그 자체만으로 개인의 사회적, 직업적 기능을 저하시켜 생산성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실제 안드레아슨 교수가 추적 관찰했던 작가들 역시 조증 시기에는 산만하고 주의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우을증 시기에는 활력과 두뇌 활동이 감소하기 때문에 창조적으로 작업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13] 양극성장애를 앓았던 것으로 알려진 작가 버지니아 울프 역시 자신의 증상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했지만 기분의 변동이 있을 때에는 정작 글을 거의 쓰지 못했다.[14]


앞서 소개했던 로버트 로웰을 다시 살펴보자. 양극성장애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그는 병원에 입원한 뒤 절박한 마음으로 새로운 치료제였던 리튬(lithium)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빠르게 안정되었고, 한번은 완치되었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의 창조성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부 사람들은 치료 후 문체가 거칠어지고, 덜 세련되어졌다면서 약물 치료를 부정적으로 바라봤지만, 당사자는 정반대로 이전보다 자신이 더 창조적이라고 밝혔다. 1974년 퓰리처상을 또 다시 수상한 것을 보면 로웰의 고백에 더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울증, 그 종류도 여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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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양극성장애를 조증과 우울증으로만 묘사했는데, 질환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보도록 하자. 기분의 변동이 심해 일상 생활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삽화(episode)라 부르는데, 지나치게 들뜨는 조증 삽화, 축 가라앉는 주요우울 삽화, 들뜨긴 했지만 입원이 필요한 정도는 아닌 경조증 삽화로 나뉜다. 조증 삽화와 주요우울 삽화가 동시에 나타나 불안정하고 변동이 심한 상태를 일컫던 혼재성 삽화는 새로운 진단 기준(DSM-5)에서 혼재성 양상으로 바뀌어 적용 범위가 넓어졌다.[15]


삽화가 나타나는 양상에 따라 양극성장애는 제1형과 제2형으로 나뉜다. 제1형은 적어도 1회의 조증 삽화가 있는 경우이고, 제 2형은 적어도 1회의 경조증 삽화와 1회의 주요우울 삽화가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아울러 양극성 관련 장애로 순환성 장애(cyclothymic disorder)라는 질환이 있는데, 적어도 2년 동안 여러 차례의 경조증 기간과 우울증 기간이 나타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5.jpg » 만성 경과를 보이고 있는 한 양극성장애 환자가 보인 기분 변화 양상. 색깔별로 검은색은 조증, 밝은 회색은 경조증, 회색은 중등도 이상의 우울증, 어두운 회색은 경도의 우울증을 나타낸다. 출처/ 주 [16]


상 현장에서 조증 삽화 중인 환자를 평가하고 진단하는 일은 사실 어렵지 않다. 하루 1-2시간 수면으로도 끄덕 없고, 쉬지 않고 말하면서, 물 쓰듯이 돈을 사용하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쉽게 흥분하는 등의 변화가 짧은 기간에 워낙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자가 주요우울 삽화로 병원을 방문할 때에는 진단을 내리는 데에 어려움이 발생한다. 이전에 경조증 삽화가 있었다면 제2형 양극성 장애로, 그렇지 않았다면 주요우울장애로 진단을 내리겠지만 이 둘을 병력 청취만으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6.jpg » 3차원 화소 기반 측정법(voxel-based morphometry; VBM)을 통해 형태학적으로 비교한 단극성 우울증(UD) 집단과 양극성 우울증(BD) 집단 사이의 뇌. 출처/ 주 [18] 더욱이 과거에 경조증 삽화마저 없었다면(혹은 인식하지 못했다면) 환자가 주요우울 삽화를 보일 때 단극성 우울증(unipolar depression; 일반적으로 흔히 말하는 우울증)인지 양극성 우울증(bipolar depression)인지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다. 실제 미국에서 2000년에 시행된 조사에서 양극성장애 환자의 69퍼센트(%)가 최초에 잘못 진단되고, 일부 환자는 정확한 진단을 받는 데 10년이 더 걸린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17] 단극성 우울증을 치료할 때처럼 항우울제를 처방하면 양극성장애 환자에서 주기가 빨라지거나 (경)조증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처음에 두 진단을 잘 감별해야 한다.


빠르게 발전 중인 뇌영상학은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만으로는 구분이 쉽지 않은 두 종류의 우울증을 진단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한 예로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와 독일 뮌스터 대학교의 연구진이 2014년에 발표한 논문을 살펴보자.[18] 연구진은 양극성 우울증 환자 58명, 성별과 나이를 맞춘 단극성 우울증 우울증 환자 58명, 정상인 58명의 뇌를 3차원화소기반 측정법(voxel-based morphometry; VBM)으로 비교했다.


두 집단의 뇌를 비교한 결과, 양극성 우울증 환자에서 해마(hippocampus)와 편도체(amygdale)의 회색질이 줄어든 반면에 단극성 우울증 환자에서는 전측대상회(anterior cingulated gyrus; ACG)의 회색질의 부피가 감소했다. 이런 특징을 고려해 뇌 영상을 분석하자 최대 79.3퍼센트(%)의 정확도로 두 우울증 집단을 구분할 수 있었고, 한 쪽 기관에서 분석 훈련을 받은 뒤에 다른 쪽의 자료를 분석할 때의 정확도도 69.0퍼센트(%)까지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향후 관련 기술이 더 발전하면 양극성 우울증 환자와 정신과 의사가 겪고 있는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봄이 되면 느는 환자…제대로 된 진단과 치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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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봄이다. 보통 사람들은 싱그러운 공기와 각양각색의 꽃에서, 새롭게 맞이하는 교실과 친구에서,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달콤한 노래에서 봄이 왔다는 사실을 느낀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들은 조증이 발생해 병원에 입원하는 양극성장애 환자 수가 늘어나는 것에서 봄의 귀환을 체감한다. 적지 않은 환자가 춥고 어두운 겨울철에는 우울하게 지내다가 따뜻하고 밝은 봄이 되면서 조증으로 넘어가는 계절성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력이 과도하게 넘치는 양극성장애 환자를 치료하다 보면 종종 힘들 때도 있지만 환자가 좋아져서 평소의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하면 그간의 피곤함도 잊게 된다. 오히려 나를 포함한 정신과 의사를 지치게 만드는 것은 양극성 장애에 대한 사회의 인식 부족과 오해이다. 기분, 활력, 인지의 명백한 변화가 있고, 일상 생활에서 문제를 초래하는 데도 단순히 성격 문제로 여기거나 치료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2011년 전국 정신질환실태 역학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한 연구에서 양극성 스펙트럼 장애(bipolar spectrum disorder)의 국내 평생유병률이 4.3퍼센트(%)이고 상당수가 다른 정신 질환으로 잘못 진단될 수 있음이 드러났다.[19] 혹 기분과 활력의 잦은 변동으로 고통받고 있다면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지 말고, 정신과를 꼭 찾기 바란다. 그래야 양극성장애라는 마음의 겨울에서 벗어나 건강함이라는 봄이 찾아올 것이다.


[주]


[1] http://hei.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4082850187

[2] http://enews24.tving.com/news/article.asp?nsID=82746

[3]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194957

[4] 정하은, 김창윤, 사도세자에 대한 정신의학적 고찰 : 사도세자, 양극성 장애 환자인가 당쟁의 희생양인가. J Korean Neuropsychiatr Assoc, 2014. 53(5): p. 299-309.

[5] Kean, S., The Disappearing Spoon (번역도서-사라진 스푼). 2010: Little, Brown.

[6] Jamison, K.R., Manic-depressive illness and creativity. Sci Am, 1995. 272(2): p. 62-7.

[7] Andreasen, N.J. and A. Canter, The creative writer: psychiatric symptoms and family history. Compr Psychiatry, 1974. 15(2): p. 123-31.

[8] Andreasen, N.C., Creativity and mental illness: prevalence rates in writers and their first-degree relatives. Am J Psychiatry, 1987. 144(10): p. 1288-92.

[9] Jamison, K.R., Mood disorders and patterns of creativity in British writers and artists. Psychiatry, 1989. 52(2): p. 125-34.

[10] Ludwig, A.M., Mental illness and creative activity in female writers. Am J Psychiatry, 1994. 151(11): p. 1650-6.

[11] Kyaga, S., et al., Mental illness, suicide and creativity: 40-year prospective total population study. J Psychiatr Res, 2013. 47(1): p. 83-90.

[12] Power, R.A., et al., Polygenic risk scores for schizophrenia and bipolar disorder predict creativity. Nat Neurosci, 2015. 18(7): p. 953-5.

[13] Andreasen, N.C., The relationship between creativity and mood disorders. Dialogues Clin Neurosci, 2008. 10(2): p. 251-5.

[14] Figueroa, C.G., [Virginia Woolf as an example of a mental disorder and artistic creativity]. Rev Med Chil, 2005. 133(11): p. 1381-8.

[15] Association, A.P.,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5®). 2013: American Psychiatric Publishing.

[16] 하라연 외, 길고도 험해지는 기분 순환 : 안정화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J Korean Neuropsychiatr Assoc, 2010. 49(3): p. 272-81.

[17] Hirschfeld, R.M., L. Lewis, and L.A. Vornik, Perceptions and impact of bipolar disorder: how far have we really come? Results of the national depressive and manic-depressive association 2000 survey of individuals with bipolar disorder. J Clin Psychiatry, 2003. 64(2): p. 161-74.

[18] Redlich, R., et al., Brain morphometric biomarkers distinguishing unipolar and bipolar depression. A voxel-based morphometry-pattern classification approach. JAMA Psychiatry, 2014. 71(11): p. 1222-30.

[19] Kim, J.H., et al., Lifetime prevalence, sociodemographic correlates, and diagnostic overlaps of bipolar spectrum disorder in the general population of South Korea. J Affect Disord, 2016. 203: p. 248-55.

최강 의사, 서울명병원 정신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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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의사, 서울명병원 정신과 과장
우울하던 의과대학 시절에 운명처럼 찾아온 정신과학과 여전히 연애 중인 정신과 의사. 환자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고 정신과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줄이고자 늘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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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뇌영상과 정신의학최강 | 2017. 0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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