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호의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

영국 대학의 첨단 실험실에서 기생충학을 공부하던 정준호님이 어느 날 의료봉사단을 따라 아프리카 스와질랜드로 날아갔습니다. 실험실을 벗어나 세상 속으로 뛰어든 그가 아프리카에서 겪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전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과학과 의학의 모습을 아프리카의 시선으로 낯설게 다시 바라봅니다.

[마지막회] 안녕, 아프리카! 그래도 못 잊을 사람들아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 (22, 마지막회)






지난해 6월25일 “실험실 밖으로, 아프리카 세상 속으로”라는 첫번째 글을 시작으로, 그동안 스와질랜드에서 의료봉사를 하며 겪었던 일, 새롭게 품은 생각들을 모아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라는 연재 글을 써왔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연재 제목은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였지만, 주로 아프리카에서 "배운" 이야기만 하고 아프리카에서 "살며" 겪었던 이야기는 많이 하지 못했다. 아프리카에서 얻은 배움들은 아프리카에서 살았기 때문에 가능했고, 아프리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덕분에 가능했다.


‘아프리카에서 보낸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은 기생충학, 나아가 과학에 대한 내 관점을 바꿔 놓았다. 이제는 아프리카에서 ‘살며’ 찍었던 사진들을 소개하며 그 이야기를 이번 연재의 마지막 글에 담아보려 한다.




따뜻한 밥 세끼에서 변화가 시작됐다


▶ 관련 글 : "해맑은 센조의 얼굴에 겹치는 에이즈 현실" (2010년 7월2일치)


스와질랜드에서 만난 센조는 올해 열네 살이 된 소년이다. 부모님은 에이즈로 모두 돌아가시고 조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다. 센조는 에이즈에 감염된 부모님을 통해 어릴적에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HIV)에 감염되었다. 많이 진행된 에이즈 질환 때문에 귀에는 고름이 멈추지 않고, 피부병이 심해 피가 날 때까지 긁기도 하고 목이 부어 밥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는 날도 많으며, 아예 밥이 없는 날도 많다. 병원에 꼬박꼬박 방문해 에이즈를 억제하는 항레트로바이러스제를 투여받고 있지만 상황은 썩 좋아지지 않았다.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도 많았고, 가난한 가정 형편에서 센조의 의료비는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었다. 하루에 먹는 약의 종류만 해도 결핵약, 급성 기관지 감염증 예방약, 피부 진균 감염증 치료약, 항레트로바이러스제, 비타민, 간보호제 등등, 말 그대로 밥 한그릇 분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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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량의 약을 투여하고 있는데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영양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센조와 나누었던 얘기들 중에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말이 있다. 목과 겨드랑이에 림프절이 부어 아프다는 센조에게 소염진통제를 주며 위가 상할 수 있으니 ‘하루 세번 밥 먹고 나서 약을 먹어’라고 말해주자 센조가 이렇게 답했다. ‘밥이 없는데...’. 이 짧은 대답 안에는 빈곤 지역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점들이 담겨 있다. 아무리 약품과 의료서비스가 무상으로 공급된다한들 기초적인 영양 상태가 악화되면 질병의 악순환은 끊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술과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들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활 수준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 효과는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지금은 닭이나 생선 등 단백질과 열량을 충분히 공급해주는 영양 사업을 자체적으로 시작해 센조의 상태도 많이 좋아졌다. 약을 아무리 먹어도 잡히지 않던 귀의 고름도 많이 줄어들었다. 결국 모든 노력은 따뜻한 밥 세끼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길 없는 집’ 아주머니가 되찾은 수다


▶ 관련 글: "에이즈 30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거대한 파장" (2011년 3월3일)


‘길 없는 집’이라 부르던 곳에 살던 아주머니다. 에이즈가 ‘보편적’이라 말할 정도의 상황에 놓인 스와질랜드 지역에서도 에이즈는 여전히 낙인이며 소외의 상징이다. 아주머니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이런 곳에 집이 있을까 싶었다. 풀이 무성히 자라 길도 보이지 않는 가파른 언덕을 더 내려가자 작은 집 두 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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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말기 에이즈 환자한테 나타나는 전형적인 소모성 증상 때문에, 앙상하게 말라 있는 아주머니가 힘 없이 앉아 계셨다. HIV는 면역 세포를 파괴하기 때문에 치료제의 효과를 파악하기 위해 혈액 내 면역세포(CD4 세포)의 수를 확인하곤 하는데, 이전 검사에서는 0이 나왔다. 즉 체내에서 감염성 질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면역 세포가 거의 남아 있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적극적인 영양 개선과 치료 노력 이후에 아주머니는 완전히 달라졌다. 웃음과 농담, 수다를 그렇게 좋아하시는 분이 어떻게 저렇게 참고 사셨을까 싶었을 정도였다.


아주머니의 남편은 먼 곳에서 일을 하는 이주 노동자 중 한 명이었다. 이런 이주 노동자 계층은 HIV 감염에 특히나 취약하며, 결과적으로 그 가족도 또한 HIV에 쉽게 노출된다. 이주 노동자 가정은 심각한 빈곤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으며, 이는 다른 감염성 질환의 위험을 증가시킨다. 아주머니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시피, 지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고립되어 살아가시는 분들은 알맞은 때에 적절한 도움을 구하기가 힘들다. 이 계층에게 안전망을 주는 데 과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약물 교육, 기생충 채변검사 ...


▶ 관련 글: "쫓고 쫓기는 인류와 기생충, 그 과거와 미래..." (2010년 7월22일치)

▶ 관련 글: "이토록 중요한 똥, 과학은 왜 이리 무심했을까?" (2010년 12월2일치)


기생충학으로 가장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역시 장내 기생충 감염률을 조사하고 장내 기생충 약을 배포해주는 일이었다. 인구밀도가 낮은데다 산악 지역인 스와질랜드에서는 주민을 대상으로 일괄적인 기생충 조사와 약 배포 사업을 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가장 좋은 방법은 학교를 대상으로 한 조사와 배포였다. 난생 처음 채변검사를 하는 아이들은 똥을 가져오라는 ‘털복숭이’를 신기하게 바라보곤 했다. 과거에 한국에서도 그랬겠지만, 소똥을 담아오거나 흙을 담아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약을 나눠주면 먹은 척하고는 눈치를 보는 아이들이 있어 한 알 한 알 입에 직접 넣어 주어야 했다.


00africa031 » 학교를 중심으로 학생들에게 장내 기생충 약을 일괄 투여했다.



00africa032 » 약물 투여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교육이다. 아주머니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은 특히 반응이 좋았다.



00africa033 » 똥을 가져다 달라는 당황스러운 요청에 고맙게도 똥을 모아주는 학생들.


물론 기생충 조사 작업이 간단치만은 않았다. 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스와질랜드에는 보건부가 운영하는 국가적인 기생충 약 배포 프로그램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 2009년 장내 기생충 약과 더불어 주혈흡충 치료제인 프라지콴탈을 함께 배포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났다. 독성이 높은 프라지콴탈을 아이들에게 투여할 경우에는 몸무게에 맞추어 투여해야 하는데, 배포를 맡은 학교 교사들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30여명이 넘는 아이들이 약물 과용으로 죽거나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이다. 기생충약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심이 증가하자 국가는 사고에 대한 철저한 조사나 교육, 홍보에 집중하는 대신 손쉽게 기생충 사업을 중단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결국에 2009년 이래 지금까지 스와질랜드 전 지역에서 기생충 박멸 사업이 중단된 상태다.


교사와 부모, 학생을 대상으로 기생충 약의 안전성을 설명하고 주혈흡충 약과 일반 장내 기생충 약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동시에 정부와 과학자들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불친절한 설명만을 제공했는지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기도 했다. ‘대중의 무지’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수는 없는 일이다.




아이도 나를 믿고 나도 아이를 믿고


▶ 관련 글: "부자국가와 빈곤국 의료인력 '부익부 빈익빈'" (2010년 7월9일)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아이는 심한 화상을 입어 의료봉사 클리닉에 온 아홉살 난 여자 아이였다. 집에서 나무 장작에 불을 때던 도중에 불이 옷에 옮겨 붙어 상반신 전반에 2~3도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엉덩이 쪽 피부를 떼어 옆구리에 이식하는 수술까지 하고 입원 치료도 한 달가량 받았지만 여전히 상태는 좋지 않았다. 아직도 붕대에 피가 배어나올 정도인 상태에서 퇴원했다. 이유는 하나, 병원비를 낼 수 없어서였다. 아이가 병원에서 겪은 심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스와질랜드 병원의 입원실은 환경도 열악하고, 지칠 대로 지친 의료진에게 친절한 서비스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빠듯한 의약품 공급 사정으로 화상용 연고를 충분히 바르지도, 붕대를 자주 갈아주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상처에 늘러 붙은 붕대를 억지로 뜯어내는 일도 다반사였다.


00africa041 » 방문 초기


00africa042 » 치료 한 달 반 경과.


우리 클리닉에 처음 왔을 때 내가 붕대에 손을 대자마자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긴장으로 몸에 힘이 들어가자 수술한 자리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붕대에 손만 대면 울음을 터뜨리는 상황이 몇 번이나 지나갔다. 이제 붕대를 가는 일이 예전만큼 그리 아프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치료에 잘 순응해줄 무렵, 아이의 어머니가 더 이상 오기 힘들 것 같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교통비 때문이었다.


만약 그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자원봉사 활동의 상식, 즉 직접적인 금전 지원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믿었다면, 아이의 상처는 어찌 되었을런지 모르겠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한 달치 교통비를 드렸고, 아이는 꼬박꼬박 클리닉을 방문했다. 단백질 공급을 위해 올 때마다 계란을 하나씩 삶아 주었고, 피부용 로션도 챙겨주었다. 아이는 놀라운 속도로 회복해 나갔다. 아이도 나를 믿게 되었고, 나도 아이를 믿게 되었다.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내가 품은 물음들, 삶에서 내가 얻은 답들


▶ 관련 글: "고백한다, 내가 배운 열대의학은 허깨비였다" (2011년 3월24일)


아프리카에 가게 된 계기는 단순히 기생충 때문이었다. 기생충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다, 실제 기생충을 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본 것은 사람이었다. 과학적 사실 이전에 사람들과 나눈 신뢰와 소통. 눈부신 과학이 아니라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 현실의 과학 그리고 과학과 현실의 괴리. 과학은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의 의문. 그곳에 살지 않았다면 내 삶에서 배우지 못했을 것들 그리고 품지 못했을 물음들이다.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 쓴 글들은 이런 물음들에 대한 내 나름의 공부이자 설명이기도 하다.


독자 분들께서 이런 나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의미 있게 읽어주셨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품으며 이 글과 연재를 이제 모두 마칩니다. 고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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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호 기생충 애호가,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 저자
영국 런던대학 위생열대의학대학원에서 기생충학 석사학위를 받았다(2008). 아프리카 스와질랜드에서 자원봉사자로 1년간 기생충 관리 사업과 의료봉사 활동에 참여했으며(2010-2011), 다시 1년 간 굿네이버스 탄자니아에서 주혈흡충 관리사업 책임자로 있었다(2013-2014). 지은 책으로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2011)가 있으며, 우리말로 옮긴 책으로 <말라리아의 씨앗>(2014), <바이러스 사냥꾼>(2015)이 있다. 2016년 현재는 소속 없이 독립 연구자로 활동 중이다.
이메일 : byontae@gmail.com       트위터 : @byont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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