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에이즈 30년: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거대한 파장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 (20)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아프리카 스와질랜드에서 11개월 동안 의료봉사 활동의 시간을 보내면서 수많은 에이즈(AIDS: 후천성 면역결핍 증후군) 환자를 만났다. 우리 자원봉사 클리닉에 날마다 몇 명씩 찾아오고 무의촌 진료일이면 하루에 수십 명씩도 만날 수 있는 에이즈 환자들. 스와질랜드는 세계에서 인구 대비 인간 면역결핍 바이러스(HIV) 감염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다. 현재 비율은 성인 기준으로 4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유엔(UN) '새천년 개발 목표(MDG)'와 함께 에이즈 예방을 위한 부단한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지만 그 증가세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2000년에서 2005년 사이에 60세 정도이던 평균 수명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낮은 35세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내가 스와질랜드에서 살던 집에도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 열두 명 살고 있으며,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할아버지가 아이들을 거둬 키우고 있다. 내가 여기에서 본 에이즈 환자들은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것처럼 에이즈는 마약 중독자들이나 동성애자,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남편 이외에는 연애도 해본 적 없는 아주머니, 쑥쓰러움을 많이 타는 13살 소년, 어머니 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태어난 지 한달 된 아기... 대체 이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과연 에이즈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대가일 뿐인 것일까. 아니면 이들이 고통 받는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21세기 흑사병' 에이즈는 전례 없는 유행병
1981년 에이즈와 HIV의 유행을 인간이 처음으로 알아차린 이래, 이제 30년의 세월이 흘렀다((HIV 바이러스를 처음으로 분리한 것은 1983년이다). 전세계를 유린하고 있는 HIV/에이즈 대유행이 시작된 이후 세기가 바뀌고, 바이러스와 질병에 대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국제 사회가 유행 억제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지만,여전히 에이즈의 위세는 꺾일 줄 모른다.
유엔 국가들이 모두 참여한 새천년개발목표의 주요 과제 중 하나는 HIV의 증가세를 낮추고 궁극적으로 하락세로 바꾸자는 것이지만, 목표 시점이 2015년에서 불과 4년만이 남은 지금에서 보면 그 목적을 얼마나 달성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인도 아대륙은 감염자 규모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바짝 뒤쫓고 있다. 최대 인구를 지닌 나라인 중국의 피해 규모는 거의 집계되지도 않고 있는 실정이다. 옛소련의 붕괴 이후에 동유럽 역시 HIV 감염의 폭풍을 경험하고 있으며 라틴아메리카나 카리브해 지역에서도 감염자 증가 추세는 심상치 않다.
1981년 HIV/에이즈 대유행이 확인된 이래 에이즈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30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으며, 해마다 500여만 명의 새로운 환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동시에 300만 명 이상이 에이즈로 사망하고 있다. 세계에서 HIV에 감염된 채 살아가는 인구가 4000만 명을 넘어섰으며,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고아의 수는 2000만명을 넘어섰다.
이제 '21세기의 흑사병'이라 불리는 HIV/에이즈 질병의 유행은 개인의 죽음과 고통을 넘어 근본적인 사회, 문화, 경제적 근간을 흔들어 놓고 있다. 에이즈는 더 이상 의학적 관점에서 말하는 질병의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 또한 지금의 대유행은 과거 인간이 겪어왔던 질병의 유행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른 아주 독특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런 HIV/에이즈 대유행 사태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하며,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이제 이를 살펴보기 위해 일반적으로 질병의 유행을 바라보는 의학, 생물학적 시야를 잠시 벗어나 보자.
숙주에 기나긴 고통 안기는 에이즈 바이러스
1979~1980년, 미국 의사들은 과거에는 극히 드물게 나타나던 질병들이 점차 흔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미국 질병관리본부의 1981년 6월5일치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이런 증례 보고를 찾을 수 있다. 불과 몇 달 지나지 않아 미국 뿐만 아니라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도 관련 증상들이 보고되기 시작했고, 1983년에 이르러서는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등을 아우르는 세계적인 유행병이라는 인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같은 해에 프랑스 연구팀이 에이즈의 원인 바이러스인 HIV-1을 발견했다. 대유행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이 독특한 바이러스가 이렇게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HIV는 여러 모로 독특한 바이러스다. 1970년대에 들어서야 처음 밝혀진 '레트로바이러스(retrovirus)'에 속하는 HIV는 유전정보를 DNA 대신에 RNA에 담고 있다. 레트로바이러스들은 돌연변이 발생 비율이 높아 약물이나 면역계가 대응하기 힘들 뿐 아니라, 면역계나 뇌를 공격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HIV는 인간 면역세포 중 하나인 T세포, 특히 CD4 세포들을 침입해 번식한다. 바이러스를 공격하고 억제하는 면역세포 자체를 공격하기 때문에 면역계가 감염을 억제하기도 힘들고, 바이러스가 면역세포를 먹이로 삼아 폭발적으로 번식하기 시작하면 면역세포의 숫자가 줄어들어 숙주, 즉 인간의 면역력이 낮아지기 시작한다. HIV에 혹사당하는 면역계가 다른 감염성 질환이나 암세포를 억제할 수 없어 일반적으로는 감염되지 않는 질병들이 감염 환자에 나타나면, 바로 '에이즈 증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HIV 감염이 에이즈로 이어지는 데 8~10년, 그리고 에이즈가 사망으로 이어지는 데 또 12-24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HIV 유행이 기존의 대유행 질병들과 다른 첫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잠복기와 질병에 의해 숙주가 고통 받는 시간이 다른 질병에 비해 유독 길다는 것이다. 인간이 겪어 왔던 대유행 병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 중 인간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질병들을 꼽아보자면, 흑사병, 말라리아, 독감, 홍역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질병들은 모두 감염이 폭발적으로 확산되어 짧은 기간에 발병하며, 그 짧은 기간에 높은 사망률을 보이며 수많은 목숨들을 앗아갔다. 따라서 대유행은 흔히 짧게는 수 개월에서 수 년 사이에 마무리되었으며, 면역력이 없는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거나 탄생하기 전까지 질병이 재유행하는 일은 드물었다. 즉 사람들이 질병, 특히 대유행을 바라보는 시각은 우리가 겪어온 유행병에 비추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대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에 반해 에이즈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HIV 감염자가 별 다른 약물 치료 없이 사망에 도달하는 데에는 짧아도 9년, 길면 12년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특히 별 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감염 초기 몇 년 동안은 감염자 자신도 감염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겪는 에이즈 사망자의 폭증이나 그로 인한 경제적 부담은 적어도 10여 년 전에 일어난 유행의 후폭풍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또 지금 감염된 사람들이 겪을 고통, 그리고 여기에 대한 사회적 부담은 10년 후의 우리가 지게 될 것이라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즉 에이즈 대유행은 적어도 전후 10년, 그리고 그 이상의 시간대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관점으로 우리의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사회적 편견의 낙인을 새기는 에이즈 바이러스
HIV 유행의 두번째 특성은 바로 HIV가 대체로 성관계, 주사바늘 공유 등으로 전파된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 처음 확인된 에이즈 환자들은 대체로 남성간 성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나 마약 중독자들이었다. 항문성교나 마약을 주사하는 과정에서 감염될 위험성은 이성간 성관계에서 감염될 위험보다 상대적으로 높다. 따라서 초기 유행은 이렇게 위험한 환경에 처해 있는 그룹, 즉 성매매 종사자, 남성간 성관계를 맺는 사람들, 또는 마약 중독자들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의학에서는 이들을 '위험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는 개개인이 위협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들이 처해 있는 환경 자체가 더 높은 감염의 위협에 처해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대중과 미디어, 정치권에서는 '위험 집단'을 말 그대로 받아들였다. 즉 '위험한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동성애, 마약남용, 성매매를 하는 사람들을 위험하고 더럽다고 생각하는 관점은 에이즈가 비교적 낯선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서는, 어렵지 않게 예상 할 수 있듯이, 에이즈는 곧 사회적 낙인이 되었다. HIV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은 곧 자신이 위험한 행동을 했기 때문이며, 감염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에 대가라는 개념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역학적 개념을 오해한 대중들이나 미디어는 둘째 치고 정치권 역시 이를 충실히 활용했다. HIV 대유행을 관리하지 못한다면 정권의 정당성이나 능력이 의심 받을 수 있다. 사회 내에서 위험 집단을 만들어내고, 사실은 피해자인 이들을 피의자로 둔갑시켜 마치 이들의 잘못인냥 호도하고, 이들을 사회에서 격리시켜 정권이 HIV 확산을 억제하는 데 성공한 것처럼 광고하는 것은 분명 정치적으로 좋은 선전도구가 되었다. 위험 집단을 만들어내고 이들을 관리, 통제하려는 시도는 HIV 유행이 더 뿌리 깊은 원인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게 아니라 단순히 의학적, 과학적, 기술적 문제라는 환상을 낳았다. 섹스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와 동성애나 마약중독 같은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의 조합은 이러한 꼬리표 달기에 이상적인 바탕을 제공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피해자, 즉 감염자들은 사회에서 점점 소외되어 갔다.
사회안전망의 변방을 노리는 에이즈 바이러스
여기서 HIV 유행의 세번째 특성, 그리고 가장 중요한 특성이 등장한다. HIV는 성매매 종사자, 마약 중독자, 남성간 성관계를 맺는 사람들,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인도 아대륙의 빈곤층에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사회적 안전망의 변방에 놓여 있거나,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즉 HIV가 가장 유행하는 지역, 집단, 계층은 바로 불평등이 가장 심화되고 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과 가치를 누릴 수 없는 곳에 놓여 있다는 의미다. 간단히 줄이자면, HIV 감염은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 혹은 개인적인 행위의 응당한 대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해서도 안 된다는 이야기다. HIV 감염은 사회경제적 불평등, 빈곤, 성적 불평등, 정치적 혼란 등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 몇 가지 예들을 통해 이런 요인을 하나하나 짚어 보자.
"식민의 역사 아프리카는 HIV에 맞설 수단이 없었을뿐"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 동남아시아 지역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제국주의에 의해 철저히, 그리고 조직적으로 착취당해 왔다. 물론 구조적인 착취는 단순히 개인적인 고통에 그치지는 않았다. 우간다의 예를 보자. 1900년, 영국 제국이 우간다 남부 부간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곳에는 광대한 봉건적 장원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지역을 집어삼킨 영국은 지역 농민들을 당시에 가장 높은 부가가치를 낳던 목화와 커피 재배에 묶어두기 위해 장원 시스템을 폐지하고 개인 소작 시스템으로 사회를 급변시켰다. 이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농업 생산에 묶어두기 위해 더욱 '충실한 제국의 신민'들을 인도에서 이곳으로 이주시켜 중간 상인 계급으로 만들었다. 아프리카인들이 농업으로 자본을 축적해 지방 농업 생활을 탈피해 다른 분야로의 진출을 하면 노동력이 저하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제국이 형성한 사회 제도는 장기적으로 뿌리 깊은 불평등과 불만을 초래할 수 밖에 없었다. 불만과 불평등은 화약고와 같았다. 소작 시스템을 이용해 자본을 축적한 일부 부농을 중심으로 1940년대부터 불평등을 조장하고 아시아인 상인 계급을 옹호하는 우간다 정부에 대한 강력한 불만의 목소리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1960년대, 세계 시장에서 목화와 커피 가격이 폭락한 사건은 화약고에 불을 붙인 것이나 다름 없었다.
목화와 커피 사업에 의존하고 있던 우간다 경제는 크게 흔들렸고, 결과적으로 사회에 급격한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아시아인들은 축출되었으며, 신흥 아프리카인 중인 계급은 군대와 손을 잡았다. 군대를 무력화 시키려는 정부의 노력은 역으로 군사 쿠테타로 이어졌으며, 국가 내의 심각한 분열이 계속 되었다. 1979년 탄자니아 군대가 이디 아민을 축출하기 위해 진군해 들어와 주둔한 곳도 바로 부간다였다. 사회와 경제가 파탄난 곳에 HIV 감염을 모니터하고 관리, 교육할 수 있는 인력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물론 사회 기반 시설의 문제 뿐만 아니라 개개인에게 지워지는 위험 부담도 늘어났다.
역사적 요인으로 정치적 불안이 일어나고 경제 정책의 실패로 빈곤이 만연한 곳에는 암시장이 생겨났다. 그런 곳이 바로 부간다였다. 사회, 정치, 경제가 극도로 불안한 곳에서 물리적 폭력은 일상이 되었다. 물리적 폭력이 일상화된 곳에서 남성들은 생존을 위해 과장된 남성성을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타개할 만한 물리적 힘을 지니지 못한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남성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 밖에 없다. 경제적 의존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여성들이 성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남성성의 과장은 대체로 자신의 성적 능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즉 성관계 파트너를 자주 바꾸는 것이 그 중 하나에 속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HIV의 유행에 기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어찌 보면 개개인의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행동 때문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극도로 불안정한 사회 상황 속에서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하는 길이었다.
부간다의 농업 사회로 다시 눈을 돌려보자. 환금 작물 가격이 폭락하면서 농업 경제와 이에 기반하고 있는 사회는 파국을 맞이했다. 소규모 농민들이 농작물 가격의 폭락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은 생산성을 높이는 것 뿐이다. 하지만 빈곤한 소규모 농민들이 기계나 비료 등 자본을 필요로 하는 생산성 증대 방식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이 택하는 방법은 바로 노동력의 기초가 되는 가족 구성원을 늘리는 방법 뿐이었다. 하지만 가족 구성원이 늘어나도 노동력 집약적인 농경 사업은 획기적인 생산성 증대로 이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말라리아 같은 질병의 유행이나 더 낮은 생활의 질을 불러왔을 뿐이다. 결국 막대한 부채를 이기지 못하고 땅을 팔거나 빼앗긴 농민들은 일자리를 위해 도시로 흘러들어왔다. 여기서 이들은 도시 주변에 슬럼을 형성하고 사회에서 소외된 빈곤 계층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진입 할 수 있는 소득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불법적인 사업, 혹은 범죄에 발을 들이거나 성매매, 마약 같은 HIV 위험 요소에 더 자주 노출되는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반, 부간다는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HIV가 심각한 수준으로 유행하고 있다는 증거를 제공한 지역이 되었다. 당시 학자들은 아프리카의 문화적 특수성, 예를 들면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주장 등을 들어 아프리카에서의 HIV 유행을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세계 시장에 지나치게 민감할 수 밖에 없는 농민들과 그로 인한 빈곤, 제국의 침탈 과정에서 발생한 역사적 요인과 이로 나타난 불평등, 정치적 불안 등이 HIV의 유행을 만들어냈다. 즉 이들이 선택한 길은(그리고 다른 선택의 길도 없었지만) 아프리카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처한 극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다. 구조적으로 소외되고 빈곤해진 사람들은 HIV에서 자신을 지킬만한 충분한 수단도, 그 위험에서 회피할 수 있는 선택권도 지니지 못했다.
삶을 송두리채 빼앗긴 2500만명 에이즈 고아 세대의 미래
그런 질병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무책임할 뿐 아니라 아주 위험한 관점이다. HIV가 개개인에 끼치는 영향과 손실은 정량화할 수 없다. 에이즈로 숨진 사람들, 그리고 HIV에 감염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사회적으로 낙인 찍혀 소외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부모 잃은 아이들, 자식 잃은 부모들의 슬픔을 어떻게 정량화해 분석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의 분석 도구들로는 이런 손실을 정량적으로 측정해 분석할 수 없다. 하지만 분석할 수 없다고 해서 이런 손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많은 학자나 정책 결정자들은 데이터로 나올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성격의 손실들을 망각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손실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이들이 바로 고아들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현재 추산으로 에이즈로 고아가 된 아이들(유니세프 등 국제기구에서는 부모를 모두 잃은 아이들 뿐 아니라 어머니가 숨진 경우에도 모계 고아로 본다. 최근에는 아버지를 잃은 경우에도 부계 고아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는데, 이렇게 보면 고아의 숫자는 현재 규모를 훨씬 웃돌 게 된다)이 약 25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고아가 된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보호받기 힘든 집단이 된다. 빈곤이 만연한 지역에서 가사 노동은 전체 노동력에서 엄청난 부분을 차지한다. 물을 떠오고 땔감을 베어오는 일상은 다른 도구나 자본이 없는 상황에서 굉장히 노동집약적인 일이 된다. 이 때문에 어머니가 숨진 경우에 아이들은 학교에 가는 대신에 이런 일들에 내몰리게 되고, 아버지가 숨져 가정 수입이 줄어든 경우에는 학업을 계속하기도 힘들다. 이는 부모의 잘못이나 고아를 돌보는 사람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사회적 역할모델을 경험하지 못한 채 법적으로 성인이 되어 성인의 특권이나 권리를 누리기도 전에 성인으로서 행동하기를 강요받는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장래에 과연 어떤 사회를 형성할까? 교육이나 다른 삶의 기회를 선택할 기회를 잃은 아이들은 자라나 또 다른 취약 집단을 형성한다. 지금 당장 HIV 유병률이 줄어든다고 해서 과연 이 취약 계급이 2차 HIV 유행의 희생양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을까? 게다가 이렇게 나타난 에이즈 고아들은 대부분 사회가 불안정하거나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지금 당장만 해도 기존의 5배 이상에 달하는 고아 발생률에 허덕이고 있는 이 국가들이 고아들에게 충분한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해 줄 수 있을까? 여기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질문은 바로 HIV가 사회의 기본적 틀, 즉 문화적, 역사적, 사회적 기억과 지식을 단절하고 있지 않느냐 하는 점이다. 이런 문제들은 HIV를 단순히 생물학적, 의학적 관점에서 볼 수 없는 사태라는 점을 명확히 밝혀준다.
고아의 양산은 HIV 유행이 지니는 또 하나의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 바로 HIV가 20~50대의 젊은 사람들을 가장 심하게 유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HIV 전파의 생물학적 특성과 깊은 연관이 있는데, 주로 성관계를 통해 매개된다는 특성이다. 따라서 HIV 대유행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가장 높은 생산성을 보이며, 가장 낮은 사망률을 보이는 집단(그리고 성적으로 가장 활발한 집단)에서 가장 크게 유행하게 된다. 다른 감염성 질환들은 대체로 노인이나 어린이처럼 면역력이 취약한 집단을 목표로 삼는다. 하지만 HIV는 이와 정 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HIV가 더 크게 유행할수록 본래 사회를 지탱해야 할 인구가 점차 줄어들고, 기형적인 인구구조 변화가 일어난다. 본래 인구구조의 변화는 교육과 삶의 질이 상승하면서 점진적으로 일어난다. 사망률이 낮아지는 동시에 출산률도 낮아지고, 10-40대에 집중된 피라미드형 인구구조가 중장년층이 주를 이루는 종 모양의 구조로 변화한다. HIV는 이런 점진적 변화의 기회를 박탈한다.
청장년층의 상당수가 사망하거나 에이즈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서 이런 노동력의 부담은 노인이나 아이들에게 넘겨진다. 전반적인 사회의 생산성이 낮아지면서 개발의 기회는 꺾어지고, 빈곤은 심화된다. 극단적인 관점을 지닌 사람들은 이를 인구 폭증의 억제 기작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인구 폭증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연하는 과정일 뿐이다. HIV로 인해 빈곤이 심화된 상황에서 교육의 기회나 다른 삶의 기회가 박탈되고, 이후 HIV라는 압력이 사라진다면 오히려 더 심각한 인구 폭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에 앞서 사회적 구조의 근간이 흔들리고, 결과적으로 사회 불안정으로 이어지며, 이것이 곧 취약 계층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렇듯이 HIV 대유행이 정말 무서운 이유는, 단순히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 뿐 아니라 그들의 아래와 위 세대에도 영향을 끼치며 삶의 질과 기회를 빨아들인다는 점이다. 많은 자식을 낳아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노년을 약속받던 과거의 사회적 계약은 깨져가고 있다. 이로 인한 문화적, 역사적 손실은 얼마나 될 것인가? 부모의 죽음을 목격하며 자신의 삶 속에서는 장기적인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는 체념 어린 삶의 방식을 체득해버린 아이들은 어찌될 것인가?
'개인 건강'과 '공공 건강'을 분리시키는 현대 의학
그렇다면 HIV에 대한 국제사회나 학계의 관점은 지난 30여년 동안 얼마나 변해 왔을까? HIV 대유행을 둘러싼 복잡한 사회, 경제, 문화, 역사적 관점들을 충분히 반영하고 대응하고 있을까? HIV 대유행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점이 어떠한지는 현재 유엔에서 에이즈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유엔에이즈계획(UNAIDS)의 지위에서 엿볼 수 있다. UNAIDS는 단일 질병, 혹은 사태에 대해 유엔이 단독 기구로 편성해 만든 아주 이례적인 사례다. 현재 UNAIDS는 독립적인 기구로서 HIV 예방·관리 사업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세계보건기구의 의학적 지원과 식량농업기구의 취약 계층 식량 지원, 유네세프의 에이즈 고아 지원 사업을 '하나로 끌어 모아' 조율하는 중재자의 역할도 맡고 있다. 본래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하게 접근해야 하는 질병 관리 사업의 특성으로 볼 때에, 유엔 산하에 여러 분야로 나뉜 여러 국제기구들의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일은 필수적이고 그런 면에서 UNAIDS는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신자유주의 물결은 국제기구에도 영향을 끼쳐 운영비 절감이나 기구 축소 같은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UNAIDS를 세계보건기구 산하 기관에 편입하려는 움직임도 눈에 띄게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즉 HIV 대유행이 유엔 산하 전문 기관들의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보건의학적 문제라는 기술만능주의의 관점으로 대체되는 추세가 강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관점은 192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의학협회에서 나온 여러 발언들을 보면 공공의 건강과 개인의 건강을 다루는 의학은 별개라는 말을 자주 볼 수 있다. 즉 공공의 건강은 공중보건에서, 개인의 건강은 임상의학에서 다루게 되었다. 이런 배경에는 의학계 내부의 정치적 이해관계 등 다양한 배경이 있겠지만, 어쨋든 궁극적으로 이런 관점의 분립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일단 두 가지 관점이 분리되고 각자 다루는 분야가 철저히 갈라지면서, 공공의 건강과 개인의 건강은 별개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하지만 공공의 건강은 개인의 건강을 반영하고, 개인의 건강은 공공의 건강을 반영한다.
또한 개인의 건강과 공공의 건강이라는 두 개념이 갈라지면서, 둘의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역사적 맥락도 배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의 시대를 지나면서 공중보건과 임상의학을 연계해 생각하는 관점은 사회주의적인 시각, 또는 전체주의적 시각으로 비춰져 보수 우파 집권당에 의해 철저히 억압되었다. 이는 말라리아의 역사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냉전시대가 끝나고 시대 분위기가 바뀌었지만 공중보건과 임상의학의 결합은 여전히 요원하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몰아치면서 공중보건의 입지는 크게 축소되었고, 개인의 건강은 자본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의학이 곧 건강(개인의 차원에서)이라는 개념이 뿌리깊게 자리잡은 지난 세기 이후에, 의학적 기술을 자본을 통해 구입하는 행위는 자본의 유무에 따라 사람들이 누리는 건강의 질을 더욱 벌려 놓았다. HIV에서 그 차이는 극적으로 드러난다. 바이러스를 억제할 수 있는 항레트로바이러스제를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에이즈의 발병과 질병의 진행을 억제하고 건강을 얻을 뿐만 아니라 '시간과 목숨'을 살 수 있다. 그에 반해 이에 접근할 수 없는 소외 빈곤 계층은 여전히 고통 속에 죽어간다. 말 그대로 돈으로 시간과 목숨을 살 수 있는 세상인 것이다. 이러한 간극은 다시금 불평등을 초래하고, HIV의 유행의 밑거름이 된다.
'항바이러스제'의 문제는 과학인가 정치인가?
HIV 대유행은 우리 현실에서 굉장히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 때문에 언뜻 HIV 문제가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해결 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당사자들에게 맡겨두자는 책임 방기를 낳기도 한다. 하지만 그 줄기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해도 그 뿌리는 하나다. 바로 HIV와 수많은 감염성 질환의 유행은 바로 불평등과 소외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평등과 소외에 내몰린 사람들은 질병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사회적 안전망을 얻기 위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도, 혹은 질병의 회피 수단을 제공하는 경제적 지원도 얻지 못하고 있다. 과연 이 문제를 우리는 어떻게 풀어 낼 수 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투표권자로서, 그리고 소비자로서 자기 권리를 충실히 행사하면 된다. 정책 결정자들이 HIV를 정치적 이슈로서 인식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게 하려면 우리가 먼저 관점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이를 이룩해낸 예가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HIV 감염자 수는 세계 최대의 수준이 되었다. 당시에만 450만 명의 감염자가 남아공에 거주하고 있었고, 이들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또한 항레트로바이러스제(HIV를 억제해 에이즈 발병을 늦추고 정상에 가까운 일상 생활을 하게 해주는 약품. 하지만 완치는 할 수 없다)가 개발되면서 이를 국가에서 무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압력이 거세졌다. 하지만 가격이 문제였다. 당시 항레트로바이러스제는 머크, 글락소스미스클라인 같은 거대 다국적 제약기업들이 특허권을 지니고 있었으며, 일반인들은커녕 남아공 정도의 재정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가격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중의 압력이 거세지면서 남아공 정부는 국내에서 특허권을 파기하고 복제약을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제약회사들이 이를 가만 두지 않았다. 39개 제약회사들은 남아공의 정책에 반대하며 집단 소송을 걸었다.
막 소송이 진행되던 때, 제약회사의 내부 고발자가 진실을 밝혔다. 제약회사들이 매기는 약품 가격의 상당수는 마케팅이나 로비에 쓰이며, 실제 개발비는 국가의 공적 자금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가격 인하를 하더라도 실제로는 이익에 큰 차이가 없으리라는 내용의 고발이었다. 이 고발이 있은 뒤에 소송은 즉각 취하되었고, 2000년 환자 한 명당 1만 달러에 가깝던 약값은 다음해에 700 달러대로 떨어졌고, 2005년에는 160 달러선으로 낮아졌다. 하지만 여기에서 끝난 게 아니다. 약값은 낮아졌지만 여전히 남아공 정부는 무상공급 정책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정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들고 일어섰다.
2003년 8월, 전국적으로 항레트로바이러스제 무상 공급을 보장하라는 항의 시위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총선을 불과 반 년 앞두고 있던 상황에서 장부는 황급히 무상공급 정책을 세우고 발효시켰다. 물론 실제 적용되는 과정은 정부 발표보다 훨씬 느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많은 사람들이 무상으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렇다면 남아공 정부가 처음 주장했던 것처럼 약품의 무상공급으로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게 되었을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약품에 대한 사람들의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에이즈 환자가 줄어 의료비 지출이 줄어들었으며, 사람들의 생산성도 높아졌다. 또 이후 추가적으로 약값이 대폭 낮아진 덕분에 정부는 재정적 부담을 한결 덜게 되었다.
현실사회의 불평등과 약자에 귀 기울여야 할 과학
남아공 사례는 질병의 유행이 어떻게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며, 이런 정치적인 영향력이 질병 유행의 억제와 관리에 어떤 중요성을 지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비록 감염자들을 중심으로한 운동이기는 했지만 이들의 권리 찾기 목소리는 제약회사의 비밀을 폭로시키고, 불합리한 가격 정책을 반전시켰으며, 국가 정책을 만들어냈다. 최근 들어 질병은 정치적이며 경제적이라는 주장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질병, 그리고 그 질병에 노출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역사적 요인들에 의해 형성되는가를 대변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질병이 사회·정치·경제적 요인들에 휘둘리고 있다는 말은, 질병이라는 이슈를 이용해 사회·정치·경제적 변화를 올바른 방향으로 유도할 필요가 있다는 말도 된다.
이제 질병의 문제는 과학적, 의학적 문제를 넘어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과학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질병을 단순히 기술적 문제에서만 바라보는 시야에서 벗어난다면 사실 과학적 도구들은 질병의 유행에서 이러한 문제 제기를 할 때 가장 탄탄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는 도구로 활용될 수 있다. 즉 과학이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과학적 도구를 이용해 정치적 이슈를 만들고 사회적 평등과 약자들을 위한 문제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과학은 이런 요구를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무시해왔다. 과학과 정치가 섞이는 것이 싫다는 말은 고상하게 들리지만, 사실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고아한 상아탑에 갖히겠다는 말과 다름 없다. 말로는 현실을 연구하고 개선하겠다고 하면서 현실적인 부름에 귀 기울이고 힘을 실어줄 수 없다면 과연 과학에서의 '현실'과 현실에서의 '과학'은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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