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민의 "추리과학소설 '해석기관'"

과학자를 동경했지만 수학 성적 때문에 문과로 진로를 튼 대학생 성여울, 그리고 과학자의 길을 걷던 중 불의의 사고로 꿈을 접고만 도나혜 석사. 서먹한 자취방 룸메이트인 그들에게 차례로 찾아오는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 두 사람은 과학지식과 경험과 증거를 열쇠삼아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독성을 없애는 것 -제5화②

◐ 전편 '만물은 독이니 ①'에서 이어집니다.


medical-681119_640.jpg » 출처 / Pixabay.com



제5화. 만물은 독이니




 “만물은 독이니 독 없는 것 없도다. 독성을 없애는 것은 오직 그 용량뿐이라”

파라셀수스(스위스의 연금술사, 본초학자)




실을 알고 싶다면 서둘러야 했다. 만일 나혜 언니의 작은아버지가 정말로 아내를 독살했다면, 얼마든지 완전범죄로 만들 수 있을 상황이니까. 말기 암 환자가 돌연 사망했다고 해서 수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테고, 혹시 의심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가족들이 전부 슬퍼하는 한복판에 나서서 괜한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 언니의 사촌동생이 증거를 폭로하는 대신에 몰래 숨기는 길을 택하려 했던 것처럼. 그리고 무엇보다도, 독살의 사실 여부를 입증해 줄 가장 강력한 증거인 시신은 며칠 뒤면 화장되어 한줌 재로 변해버릴 것이다. 만일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 싶다면, 그 시간제한 내에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찾아내 제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어려운 문제를 앞에 두고서 내 믿음직스러운 룸메이트는 침착하게 계획을 세웠다.


“나는 먼저 돌아가서 집안 어른들끼리 나누는 얘기를 들어 볼게. 혹시라도 수상한 정황이 있었다면 분명히 말이 나올 거야. 그리고 여울이 너는……,”


내게 지시를 내리려던 언니는 잠깐 멈칫하더니, 옆에서 슬픔과 불안이 반씩 뒤섞인 표정을 하고 있는 사촌동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고등학생이고, 어머니를 잃은 데에 이어서 아버지까지 범죄자가 된다면 앞으로 너무나도 힘든 삶을 살아야 하겠지. 하지만 그 앞에서 진실을 찾는 걸 포기할 내 룸메이트가 아니었다. 이윽고 평소보다도 더 절제되고, 아주 약간이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언니의 입술 사이로 천천히 흘러나왔다.


“아직 너희 아버지가 범인이라고 확정된 건 아니야. 의심하고 진실을 숨기기로 마음을 정하기 전에, 먼저 확실히 진상을 알아내는 게 옳다고 생각해.”


“하지만……, 아빠가 진짜 엄마를 죽인 거면 그때는요? 그땐 어떻게 하실 건데요?”


00openclipartorg_5_5.jpg “그건 당사자인 네가 결정하도록 해. 어떤 진실이 밝혀지든지, 그걸 알릴지 묻어둘지는 상주인 네 몫으로 남겨둘게. 우리는 그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조사해서 너한테 알려줄 뿐이야.”


녀석은 한참 동안이나 나혜 언니의 말을 곱씹어보더니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추정만으로 아버지를 의심하며 평생을 살아가는 것보단, 다른 진실이 존재할 약간의 가능성에 걸어보고 싶은 거겠지. 그 진실을 찾아낼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시선이 다시금 내게로 돌아왔다.


“내가 택시로 먼저 가서 어른들한테 얘기해 놓을 테니까, 여울이 너는 얘랑 같이 버스로 느긋하게 오면서 이야기를 나눠 줘. 작은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어떤 수상한 정황은 없었는지, 조금이라도 이상한 점은 없었는지 알아보고 나한테 말해줬으면 해.”


오늘 처음 만난, 게다가 어머니를 잃은 직후의 고등학생 남자애하고 무겁기 짝이 없는 대화를 나눠야만 하는 어려운 과제. 하지만 언니의 추리를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나는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내가 노리는 것은- 이 녀석과 나혜 언니는 내가 언니의 룸메이트가 되기 한참 전부터 조카와 사촌동생으로서 서로 알아 온 사이라는 사실. 그리고 수많은 수수께끼를 핑핑 돌아가는 머리로 마법처럼 풀어내면서도 정작 자기 이야기만큼은 마지막 수수께끼로 남겨 두는 룸메이트와 같이 살다 보면,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기가 꽤 힘들다는 사실. 나혜 언니의 가족이 얽힌 일에 뛰어들게 된 이상 자연스럽게 언니에 대해서도 알게 될지 모른다고 나는 조금이나마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니의 사촌동생인 이 녀석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그 첫걸음이 되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꼭 그걸 노리지 않더라도 어차피 내 룸메이트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었다. 대뜸 사건에 대해 물어보기에는 아직 너무나도 어색한 사이니 먼저 공통의 관심사를 꺼내야 하는데, 나와 이 녀석의 공통 관심사가 달리 뭐가 있겠는가. 그래서 언니를 먼저 보내고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나는 이 불안해하는 고등학생한테 대뜸 이렇게 물었다.


“너네 사촌언니도 독특한 사람이지?”


그랬더니 별안간 풋, 하고 마른 웃음을 터뜨린다. 혼란과 슬픔의 와중이라 하더라도 나혜 언니가 ‘독특한 사람’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모양이었다. 가만 내버려두었더니 이제는 그 독특함에 대해 알아서 말해주기 시작했고,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서 그 이야기를 경청했다. 자아, 말해 보렴. 네가 보는 네 사촌언니는 어떤 사람이었니?


“똑똑하죠. 진짜 똑똑해요……. 천재는 아닌데, 끝까지 물고 늘어지죠. 그래서 똑똑해진 것 같아요. 뭐든 알아보지 않으면 성이 안 차니까.”


내가 아는 나혜 언니를 한 문장으로 설명해도 아마 이렇게 될 것이다. 가족들 앞에서도 궁금증을 주체하지 못하는, 평소에는 조용하다가도 스위치가 들어가면 말려 있던 스프링이 튀어오르듯 어마어마한 행동력으로 반드시 진실을 캐내고야 마는 신기한 사람. 정말로 한결같은 사람이구나 싶어서 어쩐지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누나 오랜만에 본 건데, 예전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 보였어요.”


이건 다른 얘기였다. 내 룸메이트가 기분이 좋은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게 되기까지 나는 정말로 오랜 시간이 걸렸고, 아직까지도 내 측정 결과를 100% 신뢰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알아 온 녀석한테는 또 다른 요소가 보이는 걸까? 답답한 궁금증이 머릿속을 안개처럼 메워갔기에 나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어땠는데?”


“대학원 다닐 때는 엄청 힘들어했죠. 왜 그랬는지는 말 안 했는데, 뭐 공부가 힘들든지, 아니면 인간관계 문제든지 아니었겠어요?”


그야 석사학위는 있는데 박사과정을 밟다가 도중에 그만두었다면 대학원 생활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거겠지. 이 정도는 나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다음에 녀석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그렇지 않았다. 나와 만나기 전, 내가 모르는 나혜 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러다가, 그, 사고 당했죠. 실험실에서.”


“사고? 어떤 사고?”


“폭발사고요. 그래서 팔이 그렇게 됐잖아요. 그 일 있고서 1년 동안이나 거의 말을 안 했어요. 영혼이 나간 사람처럼.”


지난번 타로 카페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났을 때 언니가 충격 속에서 한참 동안이나 빠져나오지 못했던 걸 나는 비로소 떠올렸다. 트라우마 때문이었던 걸까? 팔 한쪽을 앗아가 버리고 과학자의 꿈까지 불태워버린 실험실 폭발 사고 때문이었을까? 더 알고 싶었지만 녀석은 이제 고개를 저었다. 이 이상은 아는 게 없다면서, 사고의 정황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면서. 결국 수수께끼의 룸메이트는 끝까지 수수께끼, 그것도 간단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어느새 도착한 버스를 올라탄 뒤부터는 그 퍼즐을 붙들고 있을 여유조차 없었다. 내게는 주어진 임무가 있었으니까.



“엄청 싸우셨어요, 진짜. 아빠 매일같이 소리 지르시고.”


한동안 녀석은 이런 이야기만 했다. 그야 싸울 만한 사안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살인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화를 참지 못해서 우발적으로 죽인 것도 아니고, 일부러 독약을 구해서 약상자에 섞어 넣는 식으로 계획적인 살인을 저지르기에는 녀석이 말해주는 증오의 수준이 그렇게 크게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남편이 범인이라는 가설의 근거가 약하다면 뭔가 다른 요소가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남편 이외의 다른 사람이 약상자에 손을 댄 걸까?


“혹시 최근에 다른 사람이 집에 다녀간 적은 없니?”


“글쎄요, 가족 친척들 말고는? 전 학교에서 늦게 들어오니까 잘 모르기도 하고요. 그런데, 어, 생각해 보니까……,”


녀석의 얼굴에 작은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고, 이윽고 그 깨달음은 말이 되어서 내게도 전해졌다. 그 출처는 한 달쯤 전의 부부싸움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야자 때문에 집에 늦게 왔더니 아빠가 또 소리 지르고 계셨어요. 집에 또 누가 찾아왔다고. 막 울부짖고 있기에 일단 들어오시라고 해서 차라도 드시고 가라고 했더니만 펑펑 울었다고. 그리고 엄마한테 막 ‘왜 남들한테까지 피해를 주고 다니느냐’면서 화를 내셨죠.”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 또 다른 깨달음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중요한 용의자 집단을 통째로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혜 언니의 돌아가신 작은어머니는 자칭 자연치유 전도사였고, 암을 천연물질로 고칠 수 있다면서 블로그에서 각종 건강식품이며 수상한 약과 의료기기 따위를 광고했다. 그리고 나혜 언니가 약 하나하나를 지적하며 말했던 바에 따르면 그 모든 것은 의학적 근거라고는 전혀 없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만일 자연치유 전도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그 무용지물들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은 사람이 있다면? 건강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 되었다면? 본인이, 아니면 그 주변 사람들이 이 모든 일의 원흉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을까?



례식장으로 돌아가 이 이야기를 언니에게 전했더니, 과연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눈치였다. 다만 이것만으로는 용의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집에 또 누가 찾아왔다’는 말의 의미는 그렇게 들이닥쳐 온 사람이 한 명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연치유 전도사의 블로그에 들렀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 용의자가 존재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찾아보는 수밖에 없지. 블로그에 자주 방문하고, 댓글을 고정적으로 다는 사람이 있었을 거야. 그런 사람들 위주로 조금 뒤져보면 뭔가 나올지도 몰라.”


그야말로 정론이었고, 그렇다면 이건 이제 내 일이었다. 시간도 있으니 자취방으로 돌아가서, 이 불편한 드레스는 벗어던진 다음에 컴퓨터를 붙잡고 한참 동안 찾아보면 단서가 하나는 걸려 줄 테니까. 다만 앞으로도 한참 동안이나 드레스를 못 벗게 생긴 언니가 안쓰러울 뿐이었다. 대놓고 피곤해하는 기색이 엿보였고, 무엇보다도 저 팔……, 익숙하지 않은지 오히려 평소의 갈고리 모양 의수보다도 훨씬 어색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실험실에서 사고가 났다고 했지, 하는 생각이 홱 지나갔다.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냈다.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고 싶었다. 내 룸메이트에 대해 더 알고 싶었고, 감추고 있는 수수께끼를 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당장 직면한 문제부터 푼 뒤에, 조금 더 서로를 알게 된 뒤에 물어보아도 늦지 않는다.


문득 언니의 팔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내게 언니는 아주 희미한 미소를 되돌려주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불편한 의수 때문인지 약간 삐걱거리는 걸음걸이로.



‘자연치유 전도사의 행복한 녹색정원’이라는 블로그는 검색하자마자 바로 튀어나왔고, 언니의 말대로 모든 게시물마다 같은 사람들의 댓글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대부분은 좋은 정보를 공유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추종자들의 찬양, ‘살구씨 달인 물을 마시면 피곤한 게 좀 나아질까요?’ 따위의 질문, 그리고 걱정하지 말고 식이요법만 충실히 하면 암이 씻은 듯 나을 거라는 격려들이었다. 인터넷을 통해서 잘못된 정보를 마주하고, 믿게 되고, 서로의 믿음을 공고하게 하면서 의심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악순환의 시스템. 그 속에서 죽어간 사람이 비단 나혜 언니의 작은어머니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이 시스템을 무너뜨리기로 결심한 사람 역시도 한 명쯤은 있겠지. 반박하는 댓글의 대부분은 현직 의료 종사자들이었고 어마어마한 양의 불신과 비방에 밀려 곧 블로그를 떠났지만, 그 중 한 명만큼은 예외였다. 2개월쯤 전부터 약 한 달 정도 꾸준히 추종자들과 싸우던 사람이 있었다.


00openclipartorg_5_3.jpg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의사선생님 말씀이 이제는 가망이 없답니다. 여기서 보고 산 약을 갖다드리면서 말씀을 드렸더니 질겁하시더군요. 지금까지 독약을 먹고 있었다는 겁니다. 아내가 죽으면 그땐 어떻게 책임을 지실 생각입니까?’


처음에는 이런 식이었던 댓글에는 아니나 다를까 ‘의사들은 이익에만 급급해서 진짜 치료법은 말해주지 않는다’, ‘식이요법을 게을리 한 아내의 잘못’ 따위의 답이 달렸다. 그러니 가장 마지막에 남긴 댓글이 이렇게 과격해진 것도 이해할 만 했다.


‘아내가 죽었다, 이 살인자들! 독약 먹고 죽으려거든 혼자 죽지 왜 죄도 없는 사람을 저승으로 끌고 가냐!’


이 정도라면 집에 찾아가서 울부짖을 확실한 동기는 될 만 했다. 게다가 ‘의사에게 약을 보여주었더니 독약이라고 했다’는 언급도 수상한 점. 집에 찾아갔을 때 눈을 피해서 약을 섞어놓은 걸까? 아내가 죽은 방법 그대로 당해보라는 복수의 의미에서? 그 사실을 알아낼 단서 역시도 댓글 속에 있었다. 어느 병원에 입원했는지, 담당 의사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면 어떤 약을 보여주었는지도 자연스럽게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그 약이 약상자에 섞여 있던 것과 일치한다면 범인을 확정할 수 있는 셈이다.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서 뻔뻔하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메일을 보내보는 것도 이젠 익숙해진 일. ‘말씀을 들어보니 그래도 좋은 의사를 만나신 것 같습니다. 지인의 일 때문에 그 의사분을 찾아뵙고 싶은데, 혹시 어느 병원의 누구였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정도면 되겠지. 거짓말하는 건 좀 찔리지만.


“아, 답장 엄청 빠르네.”


정말로 새로고침 몇 번 만에 답장이 메일함으로 날아왔다. 일이 쉽게 풀려간다고 생각하며, 하지만 한편으로는 살인범을 밝혀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두근거리면서 나는 커서를 천천히 움직여 메일 제목을 클릭했다. 딱 두 줄, 병원 이름과 의사 이름뿐인 본문.


하지만 그 두 줄이 암시하는 내용은 내가 기대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급한 검색 몇 번, 그러자 익숙한 얼굴이 검색 결과창에 떠올랐다.


전혀 다른 두근거림이 몸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다.



음날 아침. 내 말을 전해들은 언니조차도 약간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지만, 평소의 그 무뚝뚝함 덕분에 장례식장에서 일을 거드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 보였다. 한편 나도 장례식장에 따라왔지만 이번에는 답답한 검은 드레스 차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 목적지는 죽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니까. 장례식장은 대형 병원에 딸려 있었고, 이 병원에는 나름대로 이름이 알려진 암 전문 의사가 있다. 평소라면 만날 일도 없었겠지만 그 의사의 얼굴을 어디선가 분명히 본 적이 있었다. 전날 장례식장에 갔을 때 본 사람들 중 하나였으니까.


“작은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작은아버지는 용의자였고, 여기에 또 한 명이 얽히다니. 언니네 집안도 참 다사다난하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내가 향한 곳은 문제의 의사- 즉 나혜 언니의 큰아버지의 사무실. 본인을 만나러 온 것은 아니었다. 그건 너무 부담스러웠다. 그보다는 주변 사람들, 동료 의사나 직원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최근에 담당했던 환자, 하지만 결국 살려낼 수 없었던 환자에 대해서. 그 환자의 보호자가 들고 온 수상쩍은 약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일 이후 사람이 어떻게 변했는지에 대해서. 여러 사람에게 조금씩 물어보아 얻은 정보는 내 머릿속에서 하나로 합쳐졌고, 케이크 위에 체리를 얹듯이 그렇게 쌓인 정보의 위엔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턱 올라갔다.


“선생님이 그 약을 보여주셨다고요? 몇 주 전에?”


“그래, 성분표를 보니까 어처구니가 없었지. 청산 성분을 어마어마한 농도로 농축해 놨더라고. 해외에서 만들어진 걸 불법 루트로 구매한 것 같은데, 돈 주고서 독을 산 셈이야.”


“그렇게나 위험한 건가요?”


“사실 건강한 사람이라면 먹는다고 죽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말기 암 환자한테 특효약이라고 팔다니, 아주 악랄한 짓이지. 그분들은 몸이 훨씬 약하시니까 더 적은 농도만으로도 치명적일 수 있거든. 독이 있는지 없는지는 결국 농도가 결정하니까.”


“혹시 그 약이 동그랗고 좀 진한 분홍색에……,”


거기까지 말했는데도 동료 의사는 바로 그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움직임. 이제 몇 가지만 더 확인하면 범인을 확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밝혀지고 만 진실을 과연 어떻게 알려야 할까 하는 것이었다.



“잠깐 나와 봐. 할 얘기가 있어.”


점심시간을 노려서 언니는 잠깐 사촌동생을 밖으로 불러냈다. 상주이니만큼 할 일은 많지만 한편으로는 다들 안쓰럽게 생각하고 있으니, 잠깐 나가서 쉬고 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와 나혜 언니, 그리고 언니의 사촌동생은 장례식장 1층의 작은 카페에 모여 앉았다. 잠깐 침묵이 흘렀지만 그걸 깨는 것이 내 일이었다.


00openclipartorg_5_1.jpg “있잖아, 친척들도 너희 집에 찾아왔다고 했잖아? 누가 언제 왔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


고등학생의 얼굴에 복잡한 혼란이 스쳐 지나가는 건 별로 마음이 편치 않은 광경이었지만, 그래도 녀석은 가능한 한 침착하게 기억을 되살려가며 방문했던 가족들을 하나하나 말해 주었다. 병세를 걱정해서 들른 동생들, 그렇게 추천하던 건강식품을 받아가려고 오신 할머니, 그리고 몇 번이고 찾아와서 병원에 입원하라고 설득하려 했던 큰아버지까지.


“혹시 마지막에 오셨을 때, 너도 그 자리에 있었니?”


불안한 동의의 목소리. 하지만 진실을 밝히려면 이 뒤를 물어볼 수밖에 없다.


“그때 그분이 뭘 하셨는지 기억을 되짚어 봐. 그리고 뭔가 생각나는 게 있으면 말해 줘.”


그 말이 암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바뀌는 표정. 변화는 그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기억 속에서 큰아버지가 한 일들을 되짚어 보면서 그 표정은 혼란에서 절망으로, 절망에서 다시 분노로 바뀌어갔다.


“약 하나하나 봐야겠다고 하셨어요. 다 꺼내보시고. 그런데, 그런데 그러고 그냥 가셨죠.”


“그게 언제였어?”


“엄마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퍼즐조각이 하나하나 맞춰지기 시작한다. 내 머릿속에서, 과학자 룸메이트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이 비극의 한가운데 선 상주의 머릿속에서. ‘자연치유 전도사’가 광고하던 ‘비타민 B17’을 주문한 환자는 곧 중태에 빠졌고, 환자의 남편이 가져온 약을 보고서 담당 의사는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블로그에서 추천해서 보고 산 약, 그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 그렇게나 말을 했는데도 듣지도 않고 건강식품에 의지하면서 때로는 그것들을 다른 가족들에게까지 나눠주었던 한 사람. 의사는 결국 환자를 살릴 수 없었고, 누군가는 그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고농도의 청산 성분을 함유한 알약이 말기 암 환자인 문제의 인물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오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 알약을 슬쩍 섞어놓을 수 있을 만큼 문제의 인물과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다.


“말했듯이, 이걸 알릴지 말지는 네 몫-”


언니는 평소같은 목소리로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녀석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간 뒤였다. 나와 언니는 다급하게 그 뒤를 좇아 뛰었지만 고농도의 분노로 가득 찬 발걸음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고, 장례식장 입구에 도착한 순간 그 안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차마 들어갈 수가 없어서 발을 멈추고 말았다.



“엄마를 죽였어! 이 살인자!”


상주는 이렇게 소리쳤다. 주먹질하는 소리도 났다. 주변 사람들은 말리려고 달려들다가도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멈칫하며 웅성거릴 뿐.


“엄마 약에다가 독을 섞었잖아! 아직 그 약 갖고 있거든? 지문도 묻어 있을 걸?”


용의자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범행을 부정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모든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저 이렇게 맞받아치며 소리를 지를 뿐.


“누가 진짜 살인자인지 아냐? 네 엄마가 광고한 약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게 생겼는지 아냐고! 충분히 살 수 있는 환자였는데 독약을 사 먹고, 결국엔 수술도 못 해보고 내 눈 앞에서 죽었어! 암으로 죽을 때까지 가만히 내버려 뒀다가는 네 엄마가 몇 명이나 더 죽였을지 몰라!”


여기에 세 번째 목소리가 가세했다. 피해자의 남편, 그러니까 나혜 언니의 작은아버지. 그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서 그저 원망과 분노의 불협화음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주먹 소리가 더 이어졌고 사람들은 그때서야 뜯어 말리기 시작했지만 이젠 그냥 거대한 난투극으로 번질 뿐. 그 한 발짝 바깥에 나와 언니는 서 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00openclipartorg_5_2.jpg “알려져야 하는 일이었죠?”


언니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런 형태가 아니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미 늦었지.”


나혜 언니의 작은어머니가 건강식품을 추천하며 블로그로 자연치유를 알린 것은 순수한 선의에 기반을 둔 행위였을 것이다. 한편 큰아버지는 살릴 수 있었던 환자의 죽음을 목도하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만큼 의사로서의 사명감에 충실했겠지. 그리고 아버지도 어머니도 결코 잃고 싶지 않았던 고등학생도 한 명 있었다. 그 하나하나만으로는 파국을 불러올 요소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병원에서 만난 의사의 말대로 결국 독이냐 약이냐를 결정하는 건 농도였다. 순수했던 감정들이 지나치게 짙어지고, 또 서로 섞였을 때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것들이 비극의 형태를 결정하고 만다. 그렇게 만들어진 난장판을 앞에 두고 나혜 언니는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점심 먹으러 가자. 이번엔 진짜로.”


그 비틀거리는 발걸음 뒤를 나는 천천히, 불안하게 흔들리는 언니의 오른쪽 팔에 끊임없이 시선을 빼앗기면서 따라갔다. 하지만 그렇게 불안한 모습이면서도 장례식장 밖으로 걸어 나가는 언니의 발걸음에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마치 어떠한 비극이라고 해도, 결과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숨겨진 진실은 밝혀내야만 한다고 온 몸으로 말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제5화 끝>  


박상민 광주과학기술원 대학원생(화학전공)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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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민 광주과학기술원 석사과정 대학원생, 화학 전공
화학 전공 대학원생 겸 초보 작가. 과학이 좋은지 글쓰기가 좋은지 계속 갈팡질팡했지만, 지금은 죽을 때까지 갈팡질팡하기로 결심했다. 제대로 갈팡질팡하는 것도 어렵다는 사실을 매일 느끼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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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과학소설 '해석기관'박상민 | 2015. 11. 13

    ◐ 전편 '미래 ①'에서 이어집니다. 제7화. 미래② “나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는 너무나 빨리 찾아오니까.” -앨버트 아인슈타인(독일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문제 해결의 시작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 언니는 충격 때문에 눈치를 채...

  • 무너져야만 한다면 -제7화①무너져야만 한다면 -제7화①

    추리과학소설 '해석기관'박상민 | 2015. 10. 23

    제7화. 미래①“허나 체제가 더욱 크게 성장할수록 그 파국의 결과는 더욱 참담할 것이기에, 무너져야만 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무너지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시어도어 카진스키(미국의 수학자, 테러리스트) 그 뒤로 일주일이 지났다.나혜 언니...

  • 알아야만 한다  -제6화 ②알아야만 한다 -제6화 ②

    추리과학소설 '해석기관'박상민 | 2015. 10. 09

    ◐ 전편 '상자 속 입자 ①'에서 이어집니다. 제6화. 상자 속 입자②“어리석은 ‘우리는 알지 못하리’ 정신에 대항하는 우리의 슬로건은 이러하리라: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다비드 힐베르트(독일의 수학자)“확실한 게...

  • 이해하지 못한다  -제6화①이해하지 못한다 -제6화①

    추리과학소설 '해석기관'박상민 | 2015. 09. 25

    제6화. 상자 속 입자①“아무도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리처드 파인만(미국의 물리학자) “자, 그럼 뜯어보자.”왼손으로는 드라이버를 꼭 쥔 채, 과학자 룸메이트의 눈은 호기심이 상당부분 섞인 기묘한 빛...

  • 누군가에겐 음식인 것  -제5화①누군가에겐 음식인 것 -제5화①

    추리과학소설 '해석기관'박상민 | 2015. 08. 14

    제5화. 만물은 독이니①“어찌하여 만물 간의 거리와 차이가 이토록 커서, 누군가에게는 음식인 것이 또 어떤 자들에게는 맹독이 되는가.” -루크레티우스(고대 로마의 시인, 철학자) 방에서 나오는 바로 그 순간부터 답답하게 죄어오던 검은 드레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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