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눈으로 보고 과학의 언어로 말하라

__book.jpg  이대한의 책꽂이: '생명의 느낌' 연재

 생명 또는 생명과학과 관련된 고전 및 최근 명저들에 대한 독서 에세이. 생명과학 박사과정 이대한 님이 책의 내용이나 주제를 소재로 생명에 대한 느낌과 감상을 담으면서 생명 현상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미학적 접근의 접목을 시도한다.

  

   00feeling.jpg


 


  생명의 느낌



      이블린 폭스 켈러 지음, 김재희 옮김, 양문


      A Feeling for the Organism, Evelyn Fox Keller,

      W. H. Freeman and Company





나는 세포를 관찰할 때면 현미경을 타고 내려가서 세포 속으로 들어가거든. 거기서 빙 둘러보는 거야.

- 바바라 매클린톡

투명한 존재가 되어 세상을 보면,

나는 문득 거기서 사라지네.

그리고 모든 것을 온전히 보네.

- 랄프 왈도 에머슨

특별한 지식을 획득할 때의 느낌이나 상태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환희나 구도자들의 삼매경과 비슷하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리의 입은 섣부르다. 모르는 말을 쉽게 내뱉는다. 말들은 속이 텅 비었다. 비눗방울처럼 뿜어져 나온 말은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터져버린다.


내가 시를 사랑하는 것은 입술의 주저함 때문이다. 겨우 입을 뗀 그 자리가 시일지라. 주저하는 입술 사이로도 여전히 물거품이 새어나온다. 절박한 물거품은 터질 것이다. 누군가 시는 실패이며 시인은 실패의 성자라 했다.


생명과학은 시적 행위다. 감각 가능한 대상은 오직 생명체뿐이다. 생명은, 만약 존재한다면, 생명체의 뒷면이며 그리하여 만질 수 없는 무엇이다. 시와 세계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생명과 생명체는 가깝고도 멀며, 멀고도 가깝다. 생명과학자는 시인만큼이나 실패하는 자들이며, 생명과학은 생명에 대한 텅 빈 말이다.


00feeling2.jpg » 바바라 매클린톡. 출처/ 양문출판사 제공 생명을 살린다, 생명을 파괴한다는 말은 생명체를 살린다, 생명체를 파괴한다는 말보다 흔하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은 죽을 위기를 넘긴 생명체와 넘기지 못한 생명체뿐인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생명이라는 텅 빈 말 속엔 어떤 확고한 믿음이 있다. 아주 오래된 믿음이다. 적어도 생명이란 말이 오래된 만큼은 말이다.


말은 만져지지 않는 무언가를 담는 그릇이자 거품이다. 생명, 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그 무엇은 바로 ‘생명의 느낌’이다. 착각일지라도, 우리는 생명을 느낀다. 그렇기에 본 적도 만진 적도 없는 생명에 대해 말한다. 느낌은 감각 이상의 것이다. 생명체에 대한 감각은 그 감각을 넘어선 생명에 대한 느낌을 준다.


명과학은 바로 그 생명의 느낌에 대한 말거품이다. 생명과학이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면 말이다. 대답을 위한 모든 말의 원천은 생명의 느낌일 수밖에 없다. 느낌이 먼저 오고 뒤늦게 말이 느낌을 붙잡는다. 매달린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부모와 자식이 닮았다는 느낌이 먼저 오고, 그 느낌을 ‘유전’이라는 말로 부여잡는다.


우리의 인지작용은 결코 이성 따로 감성 따로 오지 않는다. 항상 전체로서 인지가 작용하며 그 결과가 바로 느낌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그 느낌을 잃으면서 뱉는 것이다. 과학이 꼭 그렇다. 자연 혹은 생명체와 접촉할 때 어떤 느낌이 발생한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어떤 우주의 느낌을 느끼고, 꽃을 바라보며 어떤 생명의 느낌을 느낀다. 과학자가 하는 일은 그 느낌에 말을 붙여주는 일이다. 그 일을 위해 실험을 설계하고 그 결과물을 아주 조심스럽게 과학적 언어로 표현한다. 과학자의 말은 시인의 말만큼이나 소심할 때 미덕이 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접촉의 순간이 가져다 준 생생한 느낌을 조금씩 잃는다.


과학이 오로지 경험 가능한 대상만을 상대해야 한다면, 그렇기에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면, 생명과학이 가장 먼저 침묵해야 할 말은 바로 ‘생명’이다. 하지만 생명과학자들은 생명체에 대해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기어코 생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생명과학의 현실적 정의는 바로 생명체에 대한 과학과 생명에 대한 미학의 결합이자 융합이다. 나는 이 섣부른 말들을 바바라 매클린톡에게 배웠다.

00feeling1.jpg » 바바라 매클린톡. 출처/ 양문출판사 제공


…느낌이라는 방법론


생명에 대한 온전한 ‘이해(understanding)’. 이 말에 담긴 각별한 의미는 바바라 매클린톡이 수행하는 과학의 핵심이었다. 매클린톡에게는 아주 조그만 흔적 하나가 그 생명 전체를 이해하는 단서였다. 깊이 들어가다 보면 결국 전체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옥수수 한 그루 혹은 씨앗 하나, 아니 염색체 하나라도 상세한 부분까지 초점을 맞춰 열심히 파고들다 보면 마침내 옥수수라는 생명 전체가 살아가는 일반적인 생명의 원리, 즉 ‘생명의 느낌’에 대해 더 잘 배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생명의 느낌>, 175쪽)


바라 매클린톡(Barbara McClintock: 1902-1992)은 ‘뛰는 유전자’에 대한 연구로 1983년에 여성 단독으로는 최초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생명의 느낌(원제 Feeling for the organism)>은 마찬가지로 여성 과학자인 이블린 폭스 켈러가 바바라 매클린톡을 인터뷰하고 쓴 전기다.


과학이 무엇인가에 대해 여기저기서 들었다. 어떤 이들은 과학의 요체가 방법에 있다고 했다. 가설을 이론화, 법칙화하는 실증적인 과정과 방법론이 과학의 힘이자 비밀이라고 말이다. 그것이 가설에서 연역된 실험으로 귀납적으로 입증하는 가설-연역적 방법이든, 끝없는 반증 시도로 가설을 굳건히 하는 반증법이든 간에 말이다. 특징적인 방법으로 정당화된 지식이야 말로 과학의 정수란다. 동시에 과학이라면 그리해야한다고도 했다.


어떤 이는 과학은 그냥 과학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과학이었던 것이 바로 과학이며, 그 과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패러다임이 있고 과학혁명이 있단다. 과학은 과학자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 활동이며,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지금 ‘정상과학’이라고 불리는 퍼즐풀이를 하고 있다고 말이다.


클린톡이 말하는 과학은 다르다. 그에게 과학은 어떤 정식화된 학문이 아니라 특별한 체험이다. 아주 작은 것을, 아주 가까이에서 살펴보다 그것이 놓여 있는 전체를 문득 느끼게 되는 것, 그 느낌이 바로 ‘이해’이며 과학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옥수수 한 알을, 그 안에 든 염색체 하나를 들여다보면 마침내 옥수수 전체를 향한 어떤 느낌이 내면에서 생겨난다는, 그런 과학적 방법론을 나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현미경과 망원경이 비슷하게 생긴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느낌을 중심에 두는 매클린톡의 과학관은 낯설 수 있다. 그의 과학관은 직관적인 것을 넘어 종교적이다. 신비주의적 과학관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겠다. 가령 이런 식이다.


“덧붙여 알게 된 것은, 내가 그 일에 빠져들수록 점점 더 염색체가 커지더라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정말로 거기에 몰두했을 때, 나는 염색체 바깥에 있지 않았어요. 그 안에 있었어요. 그들의 시스템 속에서 그들과 함께 움직였지요. 내가 그 속에 들어가 있으니 모든 게 다 크게 보일 수밖에 없죠. 염색체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훤히 보였어요. 정말로 모든 게 거기 있었어요. 나 자신도 무척이나 놀랐지요. 내가 정말로 그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리고 그 작은 부분들이 몽땅 내 친구처럼 여겨졌어요. … 지극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들이 나의 일부가 되지요. 그러면 나 자신은 잊어버려요. 그래요, 그게 중요해요. 나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거 말이에요. 거기에는 더 이상 내가 없어요.”(<생명의 느낌>, 202쪽)


신비주의 종교의 핵심은 신과의 직접적인 교감이다. 신과 하나 된 체험 속에서 나는 없다. 나와 우주가 구분되지 않는 것, 그것이 해탈이고 합일이다. 메블라나 교단의 데르비시들이 밤새 빙글빙글 도는 이유다. 바바라 매클린톡은 옥수수밭에서, 현미경 앞에서 깨우친 자가 되었다. 나는 모두이며 모두가 나라는 느낌. 석가의 보리수가 그에겐 옥수수였던 것이다.

00feeling3.jpg » 바바라 매클린톡. 출처/ 양문출판사 제공


…시인의 눈으로 보고 과학의 언어로 말하라


“거기에는 더 이상 내가 없어요.”

‘나’ 라는 자의식이 없어진다는 얘기였다. 그렇다. 예술가나 시인,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남녀 혹은 신비주의자들도 이런 상태를 즐겨 노래했다. 진정한 ‘앎’은 이러한 자기 해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이다. 그에 비해 과학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확연한 분리를 통해 지식을 구하는 게 상식인데, 매클린톡은 오히려 이렇게 엄격한 분리가 아니라 온전한 합체를 통해 더욱 진정한 지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과학자답지 않은 생각이었다.(<생명의 느낌>, 203쪽)


학과 신비주의는 언뜻 양립불가능해보일 수 있다. 과학이야말로 세상의 온갖 미신을 타파하고 새로운 문명을 일구지 않았던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냉철한 이성과 딱딱한 말들로 견고한 지식 체계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과학의 최종 목표가 아니던가. 무엇보다 탐구 대상에 대한 객관적 태도야말로 과학의 최소 규범이지 않나. 그런데 매클린톡은 이성이 아닌 느낌을 강조하고, 주체와 객체의 분리가 아닌 온전한 합체를 말한다.


매클린톡의 세계관은 성공가도를 달린 여느 주류 과학자들보다는 오히려 예술가나 시인, 수도자의 그것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그는 과학자였다. 그것도 단독으로 노벨상을 수상할 만큼 유능하고 인정받는 과학자였다.


매클린톡 역시 다른 자연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규칙을 정교하게 표현하는 노력에 동참했다. 차이가 있다면 오로지 실험과 논리에만 의존하는 그런 작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뿐이다. 그 이상의 어떤 게 더 필요하다는 그의 입장이 다른 과학자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예외적인 경우는 물론 아니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또 한번 인용해보자.

“오로지 직관과 마음의 공명을 통해서만 이러한 법칙에 도달할 수 있다. 특별한 작품은 머릿속에서 정교하게 끼워 맞춘 결과로 생산되는 게 결코 아니다. 그것은 가슴에서 곧장 튀어나온다.”(<생명의 느낌>, 333쪽)


00feeling4.jpg » 바바라 매클린톡은 옥수수를 대상으로 한 ‘뛰는 유전자’ 연구로 1983년에 여성 단독으로는 최초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출처/ 양문출판사 제공

실 논리와 실험이라는 두 축으로 과학을 정식화하려 한 과학철학자들조차 일찍이 한계를 인정한 바 있다. 과학이 실은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이라는 두 가지 맥락의 접목이며, 정당화의 맥락과 달리 발견의 맥락에는 설명하기 힘든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먼저 발견이 있어야 그 발견에 대한 정당화가 가능하다. 상상이 앞서야 현실에서 실험이 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은 발견의 방법론이란 직관과 마음의 공명이라고 말한다. 머리로 하는 과학은 가슴에서 시작된다는 말이다. 매클린톡은 한 발 더 나아가 그 시작이 우리의 눈과 귀라고 말한다.


어떻게 매클린톡은 다른 동료들보다 더 멀리 그리고 더 깊이 유전학의 신비 속으로 빠져들곤 했던 것일까? 그녀의 답은 간결하다. 언제나 똑같은 대답을 한다. 충분히 시간을 갖고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대상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에게 와서 스스로 얘기하도록’ 마음을 열고 들으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생명에 대한 느낌’을 개발하는 일이며, ‘생명이 어떻게 자라는지를’ 깨우쳐야 하며, ‘생명의 각 부분을 빠짐없이’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생명의 느낌>, 328쪽)


요컨대 시인의 눈으로 보고 과학의 언어로 말하는 것, 그것이 과학의 본질이며 과학의 정체란다. 생명과학은, 시인의 눈으로 포착한 생명의 느낌을 과학의 언어로 말하는 미학적 사태이며 사건들이다. 느낌이 우릴 앎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바바라 매클린톡의 말과 삶은,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위대한 유산이다.


정말 보고 싶어요. 놀라운 사실이 많이 드러날 거예요. 엄청난 일이지요. 자연에 대한 이해가 전혀 달라질 테니까요. 생명의 그물이 여태까지 우리가 알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때가 오리라 믿어요.(<생명의 느낌>, 344쪽)


00dot.jpg

이대한 서울대 생명과학부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 구글
  • 카카오
  • 싸이월드 공감
  • 인쇄
  • 메일
이대한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유전과 발생 연구실, 박사과정
예쁜꼬마선충이라는 모델 생명체로 행동의 유전적 기반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성공하는 과학자보다는 성찰하는 과학자를 지향합니다. 글을 읽고, 쓰고, 나누는 데서 큰 기쁨을 얻습니다. 말하는 연구자, 글쓰는 과학자를 꿈꿉니다.
이메일 : phman1121@naver.com      

최신글




최근기사 목록

  • 우주의 작가정신, 세포의 독해력우주의 작가정신, 세포의 독해력

    책꽂이: 생명의 느낌이대한 | 2014. 05. 13

      이대한의 책꽂이: '생명의 느낌' 연재 생명 또는 생명과학과 관련된 고전 및 최근 명저들에 대한 독서 에세이. 생명과학 박사과정 이대한 님이 책의 내용이나 주제를 소재로 생명에 대한 느낌과 감상을 담으면서 생명 현상에 대한 ...

  • 양자물리학자 슈뢰딩거가 말하는 ‘기억으로서, 생명’양자물리학자 슈뢰딩거가 말하는 ‘기억으로서, 생명’

    책꽂이: 생명의 느낌이대한 | 2014. 04. 18

      이대한의 책꽂이: '생명의 느낌' 연재 생명 또는 생명과학과 관련된 고전 및 최근 명저들에 대한 독서 에세이. 생명과학 박사과정 이대한 님이 책의 내용이나 주제를 소재로 생명에 대한 느낌과 감상을 담으면서 생명 현상에 대한 ...

자유게시판 너른마당

인기글

최근댓글

트위터 팔로우

sub2 untit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