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시간의 역사' 오해와 신화를 뒤집다

00ichthyosaurus1 » 중생대 쥐라기 파충류인 이크티오사우르스를 소재로 삼은 19세기 풍자 그림. 이크티오사우르스 교수가 학생 무리에 둘러싸인 채 기묘한 화석, 즉 인간의 두개골에 관해 강의하고 있다. “우리 앞에 있는 두개골이 하등동물에 속하며 그 이빨과 턱은 아주 보잘것없습니다. 이 생물이 어떻게 음식물을 구했는지 불가사의합니다.” 굴드는 이 그림이 당대의 지질학자 라이엘을 ‘허망한 이론가’로 풍자한 것이라는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출처/ <시간의 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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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이철우 옮김 | 아카넷

성경에 뿌리를 둔 지구이론을 펼쳐 과학 발전을 가로막은 '악당' 정도로 비난받는 17세기 토머스 버넷, ‘심원한 시간’을 발견한 지질학의 아버지로 칭송되는 18세기 제임스 허튼, 그리고 마침내 경험과학인 현대 지질학을 세운 과학의 영웅으로 추앙되는 19세기 찰스 라이엘이라는 세 거장을 중심으로, 굴드는 이 책에서 ‘이런 표준적인 역사 서술은 과연 맞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만일 에펠탑의 높이가 지구 생성 이후의 시간 길이를 가리킨다면, 인간 출현의 역사는 에펠탑 꼭대기에 칠한 페인트 두께에 불과하다.” 46억 년 지구 역사에 견주면 인간의 존재는 얼마나 미약한지를 강조한 영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비유다. 지구 나이를 24시간으로 보면 인류는 마지막 몇 초에 등장했다는 식으로, ‘심원한 시간’을 드러내는 비유는 이제 우리에게 낯익다.


하지만 우리 몸뚱아리가 체험하는 시간은 길어야 100년도 안 되니 심원한 시간은 늘 은유와 비유를 통해 간접 경험될 뿐이다. 게다가 그런 은유와 비유에는 인간 중심의 뿌리깊은 관념과 문화가 달라붙게 마련이다. 그러니 화살처럼 날아가 돌아오지 않는 사건(시간의 화살)과 장구한 시간에서 되풀이되는 자연의 패턴(시간의 순환)이라는 어느 한 관념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시간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일은 쉽잖은 일이다.


걸출한 진화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가 세상을 뜬 지 10년이 지난 올해 우리말로 나온 그의 책 2권은 심원한 시간과 장구한 진화의 눈으로 역사, 자연, 사회을 바라보는 과학자의 깊디 깊은 성찰의 이야기다. 지질학의 역사를 교정하는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1987), 그리고 글 31편을 묶은 <여덟 마리 새끼 돼지>(1993)는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결국에 ‘시간과 역사란 무엇이냐’라는 하나의 물음에 묶일 만한 책이다.


<시간의 화살…>은 굴드가 밝히듯이 신화처럼 전해지는 지질학의 역사를 뒤집어 보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지닌 책이다. 지질학사에 단골로 등장하는 세 사람이 이 책에서도 주인공들이다. 성경에 뿌리를 둔 지구이론을 펼쳐 과학 발전을 가로막은 '악당' 정도로 비난받는 17세기 토머스 버넷, 그리고 ‘심원한 시간(deep time)’을 발견한 지질학의 아버지로 칭송되는 18세기 제임스 허튼, 또한 경험과학인 현대 지질학을 세운 과학의 영웅 쯤으로 추앙되는 19세기 찰스 라이엘이라는 세 거장을 중심으로, 굴드는 이 책에서 ‘이런 표준적인 역사 서술은 과연 맞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는 ‘종교 대 과학’ 또는 ‘창조론 대 진화론’의 이분법으로 현대 지질학 승리의 역사를 서술하는 통념에 균열을 가하고자 한다. 종교 대 과학의 이분법으로는 시간에 대한 인간의 뿌리깊은 인식틀을 볼 수 없다고 그는 말한다. 오히려 '시간의 화살'과 '시간의 순환'이라는 두 가지 뿌리깊은 은유의 대립과 상호작용이야말로, 근대 지질학의 전개에서 종교와 과학의 대립보다 더 실질적인 관여를 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굴드는 후대인이 쓴 의미를 덧칠한 해설서나 교과서들을 믿지 않고 당시의 그 원문들을 직접 파고드는 전략을 취해 ‘교과서의 허구성’을 찾아내고 새로운 해석을 던진다. 과학의 발전을 막았다는 버넷은 성경에 의존했지만 자연에도 ‘역사성'(시간의 화살)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데엔 위대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보다도 더 유연했으며, 도리어 허튼이야말로 자연에 역사성이 있음을 거부하고 뉴턴의 전통을 이어받아 지구를 침식과 복원을 반복하는 거대한 기계(시간의 순환)처럼 여긴 완고한 인물로 드러난다. 라이엘은 다윈의 진화 개념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지구의 시간은 균일하며 변화가 없음을 강조했던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지난 과거를 현재의 승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른바 휘그주의는 이 책에서 굴드가 내내 비판하는 역사관이다. “휘그주의식 역사관, 곧 역사를 진보에 관한 기술로 봄으로써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지적 성취에 공헌한 역할에 따라 과거 인물을 평가하려는 역사관을 따른다.” “(나는) 휘그주의식 역사 해석으로 기술된 심원한 시간의 발견사에서 악당으로 낙인찍힌 토머스 버넷이, 허튼과 라이엘과 달리 시간에 관한 이분법의 두 극단 가운데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했다는 점을 부각하려 한다.”


00pigs » <여덟 마리 새끼 돼지>|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명남 옮김 | 현암사또 다른 책 <여덟 마리…>에서 굴드는 인간, 생명, 진화, 우연, 진보 같은 다양한 주제와 에피소드를 다루는데, 역시 진화생물학자가 인간, 사회, 자연에 던지는 깊디 깊은 물음과 성찰을 읽을 수 있다. 멸종은 지구 역사에서 흔하다는 토목 개발업자의 논리엔 종 복원에 걸리는 지질학적 시간의 '규모'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자연과 인간 역사에서 우연을 하찮게 여기는 통념에 대해선 ‘우연은 얼마나 풍요롭고 환상적인가’라며 반문한다. 화살처럼 흐르는 시간, 도저한 규모로 이어지는 시간은 이 책의 밑바닥에 흐르는 무거운 주제이며, 그런 시간의 인식을 통해 기억, 진보, 과학에 관한 고정관념도 그의 글에서 무너진다.


그의 글쓰기는 “독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경로로, 즉 개인 경험에서 길어 올린 특이한 일화를 통과하여 샛길들의 숲으로 들어간 뒤 서서히 본론의 윤곽을 묘사하는 방식”에 충실하다. 그래서인지 과학책에서 보기 힘든 유연한 생각의 그물망에 빠지는 재미를 줄 만하다. <여덟 마리…>를 펴낸 현암사는 곧 굴드 선집을 몇 권 더 출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독서 메모 : <시간의 화살...>



시간의 화살이라고 부르는 시간의 이분법의 한 극단에서 보면 역사는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의 불가역적인 연속이다. 각 순간은 한 시계열에서 고유한 위치를 차지하므로 적합한 사건 계열을 통해서 보면 한 방향으로 진행하는 연관된 사건들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시간의 이분법의 또 다른 극단인 시간의 순환에서 보면 사건은 우발적인 역사에 인과적인 영향을 끼치는 주목할 만한 계기라는 의미가 전혀 없다. 시간 속에 내재하는 근본적인 모습은 항상 현재 속에 존재하며 절대 변하지 않는다. 외면적인 변화는 반복되는 순환의 한 부분이며 과거의 차이들이 바로 미래의 현실이 될 것이다. 이 경우 시간에는 방향성이 없다. (34-35)


이런 식으로 판에 박힌 듯이 잘못 알려진 버넷의 부정적인 모습을 부각하는 저변에는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 또는 논쟁이 진행 중이라는 가정이 있다. 그런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만일 일차적으로 구분되는 논쟁 집단이 있더라도 전통주의자(대부분 기독교 신자)와 근대주의자(대부분의 과학자가 포함되나 대개 다수의 성직자도 포함된다)로 구분될 뿐이라고 학자들이 지겹도록 주장해왔지만, 과학과 종교 간의 갈등을 가정하는 호소력이 크고 단순한 이분법적 사고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54)


그러나 시간의 화살과 시간의 순환이라는 이분법의 경우에는 우리가 정말로 역사의 의미를 파악하기를 소망하면 대립적인 두 주장은 서로 필요하다. 시간의 화살과 시간의 순환은 ‘영원한 은유’이다. (276)


우리는 (시간의 화살과 시간의 순환이라는) 두 가지 관점 가운데 하나를 배제하기 위해 다른 하나에 집착하지는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대립적인 두 관점을 잘 정의되지 않는 어중간한 혼합물로 취급함으로써 각 관점의 핵심인 역사의 고유성과 법칙의 내재성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맥 빠진 다원론의 형태도 경계해야 한다. 어쨌든 시간의 화살과 시간의 순환은 우리가 시간을 명쾌하게 이해해보려는 목적으로 꾸며낸 범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혼합물이 아니라 서로 갈등과 긴장 속에서 풍성한 상호작용을 이끌어내는 동거자이다. (283)


과학은 자연적인 대상의 구성과 작용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다른 지적인 활동과 다르다. 그러나 과학자는 자연현상에서 관찰되는 규칙성만으로 사물의 구조와 특성을 규명해내는 로봇 같은 귀납 기계는 아니다. 과학자는 문화에 속박된 인간으로서 정신이 허용하는 추론의 모든 도구, 이를테면 은유와 유추에서 퍼스(C. S. Peirce)가 외전(abduction, 外轉)이라고 부른 풍성한 상상력의 비약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한 궁금증을 풀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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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온 운영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을 거쳤으며 주로 과학담당 기자로 일했다. <과학의 수사학>, <과학의 언어>, <온도계의 철학> 등을 번역했으며,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를 썼다.
이메일 :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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