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생물학은 마음-행동을 얼마나 설명할 수 있나?

_올해의 과학책 - 9·10월 서평___

문지문화원 사이와 사이언스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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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물학 대논쟁
김동광, 김세균, 최재천 엮음 | 이음


이렇게 보면, 이 책에서 누구의 주장이 맞고 누가 틀렸는지 최종판단을 내리기 위해 이 책을 잃는다면 그건 독자한테 큰 고역이 될 게 틀림없다. 그보다는 좀 더 여유 있는 독서를 권하고 싶다. '맞다/틀리다' 식의 판단을 하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이 바라보는 인간에 대한 해석과 설명이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는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통섭’이 촉발한 논쟁



‘통섭(統攝)’은 어느덧 우리 사회의 한 켠에서 널리 쓰이는 말이 됐다. 지난 2005년, 이름난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책 <컨실리언스(Consilience)>(1998)가 우리나라에 <통섭: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된 이래, 이 말은 대체로 ‘이질적인 두 학문 또는 문화의 융합’이라는 신조류를 뜻하는 말로 널리 쓰이며 익숙한 말이 되었다.


하지만 널리 퍼진 뜻과는 달리, 통섭의 본래 의미를 둘러싸고 여러 논란이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윌슨이 애초에 쓴 ‘컨실리언스’는 자연과학, 특히 생물학을 중심으로 한 지식의 대통합을 역설하고 있다면, <통섭>의 공동번역자인 진화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이화여대 통섭원장)가 ‘큰 줄기를 잡는다’는 뜻으로 새겨 쓴 컨실리언스의 번역어 ‘통섭’은 윌슨의 주장과는 다소 다르게 확장된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윌슨 식의 지식 대통합은 '생물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학, 사회과학의 통합'의 의미를 담았다면, 최 교수의 통섭은 이런 강한 의미와는 달리 다소 느슨한 의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번역어가 저자의 의도와 일치하는지, 또는 저자와 번역자의 해석이나 주장이 적절한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진행됐으며, 이어 사회생물학(또는 진화생물학 또는 진화심리학)은 과연 인문학·사회과학에 대안적인 설명의 틀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둘러싸고 이른바 더 큰 '사회생물학 논쟁'으로 번졌다.


최근에 나온 <사회생물학 대논쟁>은 윌슨의 책 <통섭>이 국내에 번역 출간된 이후에 국내에서 이어진, 이른바 ‘통섭 논쟁’을 한자리에 비교적 체계적으로 모아놓은 책이다. 최 교수를 비롯해 <통섭>의 공동번역자인 과학철학자 장대익 서울대 교수(자유전공학부)와 이병훈 전 전북대 생물학과 교수, 전중환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진화심리학)가 통섭의 관점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고, 김환석 국민대 교수(과학사회학), 이정덕 전북대 쌀·삶·문명연구원장, 김동광 고려대 교수(과학사회학)가 통섭의 관점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서, 지상 논쟁을 벌이는 형식을 취했다. 최재천 교수와 함께 논쟁을 기획한 김세균 서울대 교수(정치학)가 논쟁의 마무리 글을 보탰다. 2009년 가을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과 이화여대 통섭원, 한국과학기술학회가 함께 연 심포지엄 ‘부분과 전체: 다윈, 사회생물학, 그리고 한국’에서 벌어졌는데, 발표된 글 중 일부를 수정하고 보완해 펴낸 게 이 책이다.




유전자, 행동, 문화



드워드 윌슨도 <통섭>의 서문에서 “(철학 진영은) 나에게 혼합주의, 단순주의, 존재론적 환원주의 그리고 과학주의 같은 혐의를 뒤집어씌울 게 분명하다”(44쪽)고 예견했듯이, 이 책은 1998년 출간 이후에 서구 사회에서 사회생물학 논쟁을 이미 불러일으켰다. 그러니 국내 번역서의 출간을 계기로 이어진 국내 논쟁은 대체로 앞선 논쟁을 되짚어보는 형식으로 7년 뒤늦게 시작한 셈이다.


<사회생물학 대논쟁>에 실린 글들은 각자 분명한 자기 주장을 펼치며 상대 주장에 반박하는 상당히 논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니 오래 이어진 논쟁의 쟁점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데 좋은 길잡이의 구실을 할 만한다(그러나 저자마다 글의 형식이 다르고 관심사가 달라 책 전반에 걸친 논쟁의 집중도는 떨어지는 편인데, 이는 이 책의 약점이다). 여러 쟁점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책의 표지에서도 부각됐듯이 ‘과연 사회생물학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는가'와 관련한 논쟁일 터이다. 이정덕 원장과 전중환 교수가 책의 2부에서 각각 "지식 대통합이라는 허망한 주장"과 "문화의 진화적 종합"에 관한 글에서 사회생물학을 비판하거나 옹호한다.


먼저, 이정덕 원장은 사회생물학과 문화연구가 서로 다른 관심사를 다루는 '다른' 분야임을 강조하며, 비교적 짧은 시간 규모에서 변화하는 다양한 문화 현상은 생물진화의 긴 시간 규모에서 변하는 유전자의 자연선택으로는 다 설명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편다. 그렇다고 그가 인간을 설명하는 데 유전자라는 생물학적 기초를 아예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유전자의) 허용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즉, 인간 문화의 창발성, 우발성, 다양성은 "유전자가 방향 짓고 있다기보다는 '허용'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현실에 더 부합한다"는 주장이다. 유전자 결정론을 부정하되 유전자 허용론을 받아들이는 관점인데, 이렇게 보면 이런 '유전자의 허용' 바깥에 있는 인간의 특성은 유전자 외의 다른 요소로 설명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실제로 그는 “유전자로는 허용된 외적 한계만 설명할 수 있을 뿐, 그 안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내용은 설명 불가능”하기에 “유전자 논리로부터 벗어난 논리(즉, 인문학과 사회과학)로 연구해야 할 부분이 남”는다는 주장을 폈다(141~142쪽). 그는 “학문 간에 협동할 필요는 있지만, 서로의 작동 논리가 다르기 때문에 통합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지식대통합의 논리는 거부되고 지식 협동의 논리가 인정된다”고 주장했다(142쪽).


이에 반해, 전중환 교수는 '문화'와 '생물학'을 완전히 무관한 별개로 바라보는 기존의 이분법적 관점은 생물학적 진화로 나타나는 인간 행동을 이해하는 데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며, 오히려 문화가 마치 실존하는 '초유기체적 실체'인 듯이 바라보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했다. 예컨대 어떤 사회와 문화의 문제를 바라볼 때 그 원인을 다시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에서 찾으려는 태도는 제대로 된 '인과적 설명'을 구하는 게 아니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사회를 바라보는 일종의 환원 논리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문화를 학습하는 능력 역시 심장이나 콩팥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물학적 적응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한 주장을 펼친다(164쪽). 뱀에 대한 공포, 근친상간 금기, 성 역할 분화, 단맛에 대한 선호, 남성의 공격성 같은 우리의 보편적인 마음과 행동은 진화 과정에서 자연선택되어 살아 남아(158쪽), 마음의 물질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또한 각 지역의 전염성 병원균의 유행 정도가 서로 다른 문화적 가치 체계를 부분적으로 형성했다는 인과관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161쪽). 전 교수는 문화적 진화와 유전적 진화를 지나치게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유연하게 둘의 관계를 바라보며, 또한 문화권마다 다른 문화적 차이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쪽으로, 사회생물학 또는 진화심리학이 발전해왔다고 소개했다. 그는 “많은 일선 과학자들이 내다보듯이, 유전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를 다윈이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통합함으로써 사회과학의 진화적 종합을 성취하는 날이 점차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고 주장했다(165쪽)




환원주의는 나쁜가?



재천 교수가 이 책의 서문에서 “결국 이 모든 논란의 배후에는 환원주의에 대한 불신과 과신, 그리고 오해가 깔려 있다”(22쪽)고 말했듯이, 사회생물학 논쟁의 뿌리에는 이른바 ‘환원주의’를 바라보는 태도가 놓여 있다. 윌슨 식의 통섭이 생물학을 지식 대통합의 토대로서 제안하고 있듯이, 과연 인간 마음과 행동의 저 밑바닥에 유전자가 도사려 지휘하며, 그리하여 진화의 과정에 놓인 유전자의 자연선택이야말로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설명하는 근본적인 설명의 도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문화, 행동, 사회를 생물학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는 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김환석 교수는 '생물학적 환원주의'와 '사회학적 환원주의'를 모두 다 비판하면서, 사회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런 환원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인간의 공격성, 성적 행동, 종교 등이 유전자의 생존과 증식이라는 근본 목적에 봉사한다고 바라보는 윌슨 식의 사회생물학이나, 인간 심리도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고 보는 진화심리학이 마음과 행동을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바라보는 한계를 보여주며, 또한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이분법으로 나누고 인간의 행동과 사회 현상을 ‘사회적인 것’으로만 환원해 설명하려는 사회학적 환원주의도 역시 뚜렷한 한계를 드러내고 있으므로 모두 다 극복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어 “환원주의를 포기하고 사물 간의 관계를 환원이나 연역이 아닌 동맹의 관계로 보[려는]”, 이른바 행위자-연결망 이론(ANT)이라는 브루노 라투어의 관점이 이런 한계를 넘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 간의) 진정한 협력의 틀은 오히려 비환원주의를 기반으로 할 때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통섭’이 아니라 ‘합생’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길”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합생(合生)이라는 용어를 "각 요소들이 독립성과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전체의 부분으로 통합되는 과정"의 의미로 썼다).


반면, 장대익 교수는 ‘환원주의가 모두 다 나쁜가’라고 반문하며 여러 가지 환원주의를 조목조목 따져보면서, 인간 마음과 행동을 파악하는 데 ‘진화론적 환원주의’가 적절한 방법론이라고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진화론에 충실한 환원주의란 무엇인가? 그는 세 가지의 지적 흐름을 정리해 소개했다. 먼저 생명체의 현상을 복제자(유전자)의 진화 게임으로 보는 ‘자연선택과 복제자 이론’, 인간의 마음을 신체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적응들로 구성된 정신기관으로 보는 ‘진화심리학’, 그리고 문화 전달의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로 도킨스가 제안한 ‘밈(Meme)’의 환원주의가 이런 적절한 진화론적 환원주의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적 환원주의를 옹호하는 장 교수는 비진화론적 환원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보여주었다. 여기에서 그가 지목하는 비진화론적 환원주의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은 생물학적 법칙을 적용할 수 없는 예외로 바라보며 사회와 문화만으로 설명하려는 사회과학 표준모형이나 자극과 반응의 관계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스키너 식의 행동주의를 말한다. 이어 그는 사물 간의 관계에 주목하며 새로운 사회학의 방법론으로 등장한 '행위자-연결망 이론'도 역시 넒게 보면 진화론적 환원주의에 서 있는 이론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한편, 최재천 교수는 서문에서 사회생물학의 통섭 기획을 지나친 환원주의로 몰아붙이지는 말아달라며 '유연한 환원주의'를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진화생물학자 또는 사회생물학자들은 골수 환원주의자가 아니다”(23쪽)라고 해명하며, 이어 다음과 같은 좀더 넓은 해석을 주문했다. “…행동도 어느 정도 유전자의 결정 범위 내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행동들의 집합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는 문화 역시 궁극적으로는 긴 유전자의 팔 안에 있는 셈이다. 결국 생물의 모든 생명 현상들은 유전자가 깔아 놓은 멍석 위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유전자 결정론은 궁극적으로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 사이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변수들이 존재한다. 생물학 분야만 보더라도 유전자 결정론이 유전학의 영역이라면, 거기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에 이르는 과정에는 발생학, 생태학, 사회생물학과 같은 분야들이 버티고 있다”(23쪽).


결국에 여러 논쟁자들은 서로 다른 자신의 관점을 부각하면서도, 큰 틀에서 보면 생물학뿐 아니라 사회과학 안에서도 발견되는 '경직된 환원주의'에는 반대하며, 생물학과 사회과학 또는 유전자와 문화의 관계에 유연한 해석으로 접근하려는 '유연한 환원주의'를 옹호하는 태도를 대체로 보여주는 것으로 읽힌다.




좋은 설명의 도구는?



실 환원주의 그 자체가 나쁠 이유는 결코 없다. 오늘날 우리가 지닌 수많은 지식 체계의 상당 부분은 이런 환원주의 덕분에 이뤄진 게 아닌가? 환원주의의 방법론을 적절한 용도로 적절하게 활용할 때 그것은 우리의 지식 체계와 성찰에 도움을 주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갑론을박의 논쟁을 읽다보면, 논쟁의 궁극적 종착점은 결국에 '무엇이 인간의 사회적 행동과 문화, 마음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적절한 도구이냐' 하는 문제로 모아질 법하다.


사실, 설명의 도구가 인문학이건, 사회과학이건, 생물학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랴. 우리가 놓치고 있던, 몰랐던 어떤 통찰의 단서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그런 설명의 도구가 무엇이냐에 앞서서 그 자체로 좋은 일은 아닌가?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이나 생물학이 본래 훌륭한 지식체계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더 적절하게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지식 체계가 훌륭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논쟁을 읽다보면, 인문학·사회과학과 생물학이 저마다 다른 지식의 전통과 관심사를 지니면서 인간 사회와 문화, 마음의 현상과 진화사를 다양하게 설명하는 다양한 도구를 우리한테 제공하는 게 아니냐는 생각에 이른다. 생물학의 원리를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동물종으로서 인간의 마음과 행동, 문화, 그리고 그 인간의 사회는 유전자, 자연선택, 생물진화의 틀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생물종들이 저마다 다른 다양성을 지니듯이, 인간도 생물학의 보편적인 원리 안에서만 살아가며 모든 문화와 사회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주 많은 부분이 여전히 보편 원리로 다 확정할 수 없으며, 우리의 지식 체계는 여전히 이런 문제들에 대해 유보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런 생각에 이르러 다시 보니, 이 책의 사회생물학 논쟁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리다는 식의 오엑스(OX) 게임이 아니라, 저마다 독특하고 유효한 설명의 도구를 우리에게 제안하고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른다.


이렇게 보면, 이 책에서 누구의 주장이 맞고 누가 틀렸는지 최종판단을 내리기 위해 이 책을 잃는다면 그건 독자한테 큰 고역이 될 게 틀림없다. 그보다는 좀 더 여유 있는 독서를 권하고 싶다. '맞다/틀리다' 식의 판단을 하려고 시도하기보다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이 바라보는 인간에 대한 해석과 설명이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는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 왜 생겨나고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는 게 더 실용적이지 않을까?


하나의 대상을 설명하는 데에는 반드시 한 가지 설명의 모형만이 있는 게 논리적일까? 여러 가지 설명 방식이 있다면 그 중에서 하나만 맞고 나머지는 틀린 것일까? 아니면 경중의 차이나 적절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하나의 대상이 지닌 여러 측면을 여러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도 가능한 일 아닌가? 우리 인간 문화에도 하나 이상의 측면이 있지 않을까? 논쟁의 결말은 늘 하나가 맞고 나머지가 틀리다는 쪽으로 나아갈까? 서로 다른 설명의 모형이 있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서 생겼고 어떻게 다른지 살피려는 노력이 더 필요한 게 아닐까?  그래서 '틀림'에 대한 지나친 경계를 버리고 '다름'에 대한 이해를 넓힐 때에, 인간의 마음, 문화, 사회를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아쉬움 남긴 통섭 논쟁



의 제3부에서는 사회생물학 논쟁이 국내외에서는 그동안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되돌아본다. 이병훈 교수는 그동안 출간된 관련 서적들을 중심으로 사회생물학 논쟁이 국내외에서 어떤 반향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는지를 주제와 연대 순으로 꼼꼼하게 정리해 관련 논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김동광 교수는 국내에서 통섭 논쟁은 있었지만 그 논쟁이 주로 ‘통섭’ 번역어를 둘러싼 혼란과 논쟁, 그리고 윌슨 식의 통섭이 사실상 ‘생물학을 중심으로 한 수직적 지식 통합'일 뿐이라는 인문학자 중심의 일방적인 문제제기 이외에 이렇다 할 본격 논쟁이 없이 벌어지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정작 사회생물학의 내용에 대한 논쟁, 특히나 생물학자들의 참여가 부족해, 다양한 쟁점이 부각되지 못하고 사회생물학에 대한 비판적 담론을 제대로 접할 기회가 없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지적됐다.


독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 책은 기존에 서구 사회에서 벌어졌던 사회생물학 논란의 쟁점을 정리해 보여주고는 있지만 무미건조한 이론 논쟁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낯선 사회생물학 논쟁을 잘 정리한 주장을 읽는 즐거움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딱딱한 이론 강의를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정작 일반 독자들이 더 궁금하게 여길 법한 주제, 즉 ‘사회생물학이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해 과연 얼마나 좋은 설명을 제공하는가’에 관한 생생한 읽을거리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물론 이 책이 학술 심포지엄의 발표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구체적인 어떤 대상을 두고서 인문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사회생물학(또는 진화심리학)이 어떻게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집중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실증적인 논쟁도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학 이론으로 인간 행동이나 사회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생물학 분야를 넘어 점점 늘고 있다. 사회적 행동에 대한 신경과학적 기초를 연구하는 분야는 물론이거니와(이 분야는 앞서 말한 생물학 분야에 이미 포함돼 있는 것이지만), 인간 행동의 패턴이나 연결망을 수학과 물리학 법칙, 그리고 이론 모형으로 설명하려는 사회물리학(또는 네트워크 과학, 데이터 과학) 분야의 시도도 따지고 보면 사회생물학 논쟁에서 다룬 주제와 겹쳐 있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사회생물학 논쟁은 이 분야에 한정된 특수한 논쟁이 아니라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마주하게 될 여러 비슷한 논쟁의 한 국면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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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온 운영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을 거쳤으며 주로 과학담당 기자로 일했다. <과학의 수사학>, <과학의 언어>, <온도계의 철학> 등을 번역했으며,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를 썼다.
이메일 :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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