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 아닌 뇌 탓” 주장의 오류
[14] 뇌가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생겨난 특징들 ①
» 확산텐서영상(DTI; diffusion tensor imaging)으로 촬영한 신경세포의 축삭돌기(axon)들. 긴 축삭돌기들은 뇌 부위들이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연결한다. 이처럼 뇌는 신경 세포들이 복잡하게 연결된 거대한 네트워크이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뇌는 네트워크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한 말인데도 막상 이 말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뇌가 네트워크이면 어떤 특징들을 갖기에, 네트워크 네트워크 하는 걸까?
뇌가 네트워크임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무슨 문제라도 생기나?
뇌가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특징,
뇌가 네트워크라는 점을 과소평가하고 환원적으로만 접근했을 발생하는 오해에 대해 알아보자.
‘할머니 세포’ (Grandmother Cell)
심리학, 언어학, 혹은 뇌과학 서적을 좀 읽은 사람이라면 ‘브로카 영역’과 ‘베르니케 영역’이라는 뇌 부위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아래 그림). 브로카 영역이 손상되면 말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베르니케 영역이 손상되면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고 통합하지 못해서, 타인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의미를 가진 문장을 만들어내지도 못하게 된다.[1] 이런 사실을 접하면 “뇌 영역별로 담당하는 마음의 기능이 있고, 어떤 뇌 영역이 손상되면, 이 영역이 담당하는 마음의 기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구나”라는 추론을 할 수 있다.
» 브로카 영역(왼쪽)과 베르니케 영역(오른쪽). 출처/ Wikimedia Commons
마음의 기능을 구획(module)하고 특정한 뇌 영역과 일대일로 연결하는 환원적인 접근은 대상, 특히 기계를 이해할 때 유용하다. 자동차를 생각해보자. 엔진은 바퀴를 굴리는 힘을 내고, 냉각기는 엔진을 식혀주며, 연료통은 엔진에 필요한 연료를 공급하고, 바퀴는 굴러가면서 자동차가 앞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이렇게 각 부위들의 기능을 모두 이해하고 나면 자동차의 원리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좀 더 파고 들어가 보자. 베르니케 영역은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고 통합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했다.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기능별로 구획했듯이, 베르니케 영역의 기능도 세부적인 하위 기능들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사용한 추론 방식을 따르면, 아마도 이 하위 기능들은 베르니케 영역의 세부 부위들과 연결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위 기능으로 세분화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마침내는 “할머니”처럼 특정한 단어 하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신경세포(Grandmother cell)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2]
정말 그럴까? 뇌 속에는 ‘할머니’를 나타내는 신경세포가 있어서, 우리는 이 신경세포를 잃어버리고 나면 평생 동안 ’할머니’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걸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환원적인 인식과 뇌 영상에 대한 오해
뇌영상 연구들에는 뇌에 대한 환원적 인식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뇌영상 연구들은 특정한 정신적인 작업을 수행할 때의 뇌 활동과, 이 작업을 하지 않을 때의 뇌 활동의 차이를 색깔로 표시하곤 한다. 예컨대 피험자들에게 웃는 표정 위에 “슬픈(sad)”이라고 적은 사진을 보여주고 글자를 읽게 하면, 슬픈 표정 위에 “슬픈(sad)”이라고 적어두었을 때보다 반응 속도가 늦어진다. 이는 표정이 주는 정보와 글자가 주는 정보가 상충(conflict)하기 때문이다. 상충하는 정보를 뇌가 어떻게 처리하는지 연구할 때는, 얼굴 표정과 글자가 상충할 때의 뇌 활동과 얼굴 표정과 글자가 일치할 때의 뇌 활동의 차이를 아래 그림처럼 색깔로 표시한다.
»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으로 촬영한 스트룹 작업(Stroop task) 동안의 뇌 활동과 대조 실험 동안의 뇌 활동의 차이. 오른쪽에 보이는 긴 막대는 뇌 활동 차이의 정도를 어떤 색으로 나타냈는지를 표시하는 색채 눈금자(color scale bar)이다. 기능성 자기공명영상 연구 결과를 나타낼 때는 이처럼 색채 눈금자를 함께 제시해야 한다. 통계적으로 무의미하고 사소한 차이도 색깔을 조작하여 엄청난 차이인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3]
이는 색깔로 표시된 뇌 영역이 상충하는 정보의 처리와 일대일의 관계를 갖는다거나, 표시된 뇌 영역이 실험된 상충하는 정보의 처리를 단독적으로 수행한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실험의 세부 사항이나 제반 전문 지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오해를 받기 쉬웠다. 이 오해에 따르면, 특정한 뇌 영역이 손상되면 더이상 관련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해진다. ‘할머니’ 세포가 없으면 더이상 ‘할머니’라는 단어를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오해는 법적 책임 공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 ‘맥락을 놓치기 쉬운, 만들어진 ‘자유의지 논란’’ 참고). 예컨대 감정 조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이 손상된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고는 ‘내 의지로 한 게 아니라 내 뇌가 했어요’라고 주장하는 것이다.[4][5] 분산된 네트워크에서 정보가 어떻게 표상되는지를 살펴본 뒤에 이 주장에 얼마나 타당한지 살펴보기로 하자.
환원적인 뇌 인식의 변화
‘뇌영상 연구는 특정 부위와 특정 뇌기능을 일대일로 연결한다’라는 오해에 따르면, 뇌영상 연구는 기술만 최첨단으로 바뀌었을 뿐 19세기에 유행했던 가짜 과학인 골상학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골상학에서는 마음을 기능별로 구획(module)할 수 있고, 각각의 기능은 뇌의 특정 부위에서 수행된다고 가정한다. 나아가 각각의 기능이 성격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는 뇌 부위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며, 뇌 부위의 크기는 인접한 두개골 부위의 크기에 반영된다고 추론했다.
실제로도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연구의 초기에는 골상학과 유사한 측면이 있었고 그 때문에 블라볼로지(Blobology; blob[색깔로 표시된 부분]의 학문)라는 조롱을 받기도 했다. 뇌의 작동방식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하지 못한 채 색깔로 표시된 뇌 영역과 실험한 뇌 기능을 적당히 관련 짓는 것으로만 보였기 때문이다.[6]
» 골상학 (phrenology). 출처/ Wikimedia Commons
골상학은 나중에 가짜 과학으로 밝혀져 퇴출되긴 했지만 뒤이은 신경심리학 (neuropsychology)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신경심리학에서는 뇌의 특정 부위에 손상이 생길 때 이런 손상이 심리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에 대한 연구(lesion study)를 통해 발전했다. 골상학과 달리 신경심리학은 엄밀하고 재현 가능한 실험을 한다는 점에서 과학적이지만 골상학과 마찬가지로 뇌와 마음에 대한 기계적이고 환원적인 인식에 근거한다. 사람이나 동물이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 특정한 뇌 부위의 활동을 측정하거나 조작하는 최근의 뇌과학 연구들도 신경심리학에서 사용되던 손상 연구(lesion study)의 발전된 형태인 측면이 있다. 뇌와 분자생물학적 기전을 “기계”로 묘사하는 경향도 여전히 드물지 않다.
하지만 인간 커넥톰 프로젝트(Human connectome project)에 힘입어 시시각각 변하는 뇌의 기능적 연결(dynamic functional connectivity)을 조사하는 연구가 늘어나는 등 네트워크 관점의 접근이 증가하는 추세다(☞ ‘기계는 결코 알 수 없는… 나와 우리 뇌의 ‘지금’’ 참고).[7] 또, 기계적이고 환원적인 접근으로는 간단한 마이크로 칩의 작동 원리조차 규명하기 힘들다는 논문이 발표되는 등 자체적인 반성도 일어나고 있다.[8]
분산된 네트워크
뇌를 네트워크로 인식하면 어떤 점들이 달라질까? 뇌가 네트워크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특징은 뭘까? ‘인공신경망의 표상 학습’에서 다룬 개의 인식 과정을 생각해보자 (☞ ‘인공지능과 우리 뇌에서, 구별하기와 표상하기’ 참고). 아래 그림의 뇌 신경망에서 개를 인식하는 데 필요한 단위들만 따로 골라낼 수 있는가? 혹은 노란색으로 표시된 단위가 정확히 어떤 내용을 표상하는지 알 수 있는가?
» 인공신경망의 개와 고양이 인식. 신경망 부분 출처/ http://neuralnetworksanddeeplearning.com/
어렵다. 신경 네트워크에서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단위를 찾는 것은 신경망이 분산된 표상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더 어렵다. 아래 그림에서 빨간색은 고양이를 표상하는 단위를, 파란색은 개를 표상하는 단위를, 초록색은 할머니를 표상하는 단위를 나타낸다. 색깔이 짙을수록 해당 색깔의 표상과 더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뜻한다.
왼쪽 신경망에서는 딱 하나의 단위가 개 또는 고양이라는 표상과 일대일로 분명하게 연결된다. 이런 표상 방식을 지역적인 표상(localist representation)이라고 부른다.[2] 지역적인 표상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매개변수(parameter)나 변수(variable)를 분명하게 정의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런 신경망이라면 ‘할머니 세포’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른쪽 신경망에서는 개, 고양이, 할머니가 더욱 두리뭉실하게 표상된다. 각각의 단위는 여러 내용을 표상할 수 있다. 예컨대 개와 고양이 사이에 있는 단위들은 약하게나마 개도 표상하고 고양이도 표상한다. 이처럼 두리뭉실한 표상 방식을 분산된 표상 방식(distributed representation)이라고 부른다.[2] 분산된 표상 방식을 사용하는 신경망에서는 ‘할머니 세포’라든가, 특정한 기능을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영역이 존재하지 않는다. 한 부위가 여러 기능을 수행하며, 하나의 기능도 신경망에 널리 퍼진 여러 영역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뇌는 분산된 표상을 사용하는 네트워크이므로 특정한 내용과 그 내용을 표상하는 부분을 일대일로 연결하기 어렵다.
» 지역적인 표상과 분산된 표상의 비교.
인공신경망에서는 얼마나 두리뭉실하게(얼마나 분산해서) 표상할지를 층(layer)별로 설정할 수 있고, 뇌 신경망에서는 뇌 회로의 구조적 특성에 따라서 두리뭉실함의 정도(분산된 정도)가 달라진다.[2] 예컨대 사건 기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해마는 비교적 ‘똑 떨어지게‘ (비교적 지역적으로) 표상하는 편이다. 지역적인 표상에 가까울수록 서로 다른 내용을 분리해서 표상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해마의 구조는 서로 다른 사건들을 분리해서 기억하고, 빨리 기억하기에 적합하다. 하지만 상충하는 내용이 입력되면 이전의 내용을 빠르게 잊어버린다. 이와 달리 두정엽(parietal lobe)은 훨씬 더 두리뭉실한, 분산된 표상에 적합한 구조다. 두정엽은 다소 막연하지만 거시적이고 일반화된 패턴을 천천히 학습하며, 느리게 학습하는 대신 안정적으로 기억한다.
분산된 표상 방식은 여러 특징들을 통합하고 추상화 하는 데 유리하며, 아래에 살펴볼 것처럼 손상으로 인한 피해도 완충할 수 있다.[2]
신경 네트워크의 중복과 여분(redundancy)
신경심리학에서 손상 연구(lesion study)를 하듯이 층(layer)의 일부를 손상시키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아래 그림에서 검게 표시된 부분). 신경망이 한동안은 예전과 다르게 동작할 수 있지만, 훈련을 거듭하다 보면 남아있는 단위들이 변화된 환경에 맞게 학습하며 이전의 능력을 그럭저럭 회복하곤 한다. 뇌졸증 직후에는 움직이기 힘들어 하던 환자들이, 재활 훈련을 하다보면 회복되는 것과 비슷하다.
» 신경망에 가해진 손상 (검은 부분).
A층의 일부가 아닌 전체가 손상되더라도 C층을 사용해서 보완할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예컨대 정상적인 사람들은 눈을 감고도 자기 팔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는데, 이를 고유 수용성 감각(proprioception)이라고 한다. 고유 수용성 감각이 손상된 환자들은, 눈으로 자기 팔의 위치를 확인하고 움직이는 대체 방법을 훈련할 수 있다.[9]
뇌에서는 A층 전체의 손상으로 아무런 입력을 받지 못하게 된 B층의 신경세포들이 연결을 재구성(reorganization)하면서 생기는 변화도 있다.[10] 예컨대 사고로 손을 잃으면, 손으로부터 입력을 받던 신경세포들은 예전만큼의 입력을 받지 못한다. 그러면 이 신경세포들은 자신에게 입력을 줄 만한 신경세포를 찾아 수상돌기를 뻗으면서 주변의 신경세포들과 연결을 재구성한다. 그러다보면 손으로부터 입력을 받던 신경세포들이 근처에 있는 얼굴로부터 입력을 받는 신경세포와 연결되기도 한다 (아래 그림). 그러면 얼굴을 만져도 손으로부터 입력을 받던 신경세포가 활성화되어, 얼굴을 만졌는데 있지도 않은 손이 느껴질 수 있다. 이를 환상지(phantom limb)라고 한다. 시각 장애인의 경우에도, 눈으로부터 정보를 받지 못하게 된 시각뇌의 신경세포들이 청각 등 다른 자극을 처리하도록 변해간다.[11]
» [왼쪽]: 체감각 피질(보라색)의 위치. 체감각 피질은 신체 각 부위의 촉감, 압력, 진동, 온도 정보가 전해지는 곳이다. [오른쪽]: 오른쪽 체감각 피질을 얼굴과 평행한 방향(관상면; coronal plane)으로 자른 모습. 체감각 피질 위쪽에 그려진 신체 부위는 체감각 피질이 어떤 신체 부위의 감각에 관여하는지를 나타낸다. 손 아래에는 얼굴 부위들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손의 감각에 관여하는 뇌 부위 바로 아래에 얼굴(눈, 코, 입술, 혀)의 감각에 관여하는 뇌 부위들이 있음을 나타낸다. 출처/ Wikimedia Commons
이처럼 신경망에는 중복과 여분(redundancy)이 많고 가소성이 있어서, 뇌의 일부가 손상되어도 보완이나 대체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사람마다 다른 신경 표상
똑같은 구조의 신경망이라도 어떤 정보를 접해왔는지에 따라 표상하는 내용이 달라진다. 예컨대 초기값과 구조가 똑같은 두 신경망 중 하나에는 동물 사진만을 보여주고, 다른 한쪽에는 건축물의 사진만 보여준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러면 두 신경망에서 같은 위치에 있는 단위(예: 빨간 색으로 표시한 단위)가 표상하는 내용은 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뇌 부위라도 표상하는 내용이 사람마다 다르다.
» 경험이 다르면 신경 표상의 내용도 달라진다.
그러면 구조가 조금 다른 두 신경망에 똑같은 데이터를 제공하는 경우는 어떨까? 비슷한 위치에 있는 단위(아래 그림에서 빨간 표시)가 표상하는 내용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을까? 아마 조금 다를 것이다. 사실 비슷한 위치에 있는 단위를 정하는 작업부터가 쉽지 않다. 두 신경망의 구조가 다른데 어떻게 ‘같은 위치’라는 게 있을 수가 있겠나.
뇌영상 분석을 할 때 실제로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게 생긴 것처럼, 뇌의 주름과 모양도 사람마다 제법 다르다. 자기 공명 영상으로 촬영한 뇌 구조를 보면 비전문가라도 금방 차이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르다. 그래서 뇌영상 분석을 할 때는 수백명의 뇌를 평균해서 ‘표준 뇌’라고 할만한 것을 만들고, 개인의 뇌를 촬영한 영상을 변형해서 표준 뇌와 같은 모양이 되도록 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변형 과정 때문에 두 개의 다른 뇌에서 찾아낸 같은 부위에는 작지만 오차와 불확실성이 생겨난다.[12]
» 신경망의 구조가 다르면 각각의 신경 세포가 표상하는 내용도 달라진다.
더욱이 실제의 뇌는 사람마다 구조만 다른 것이 아니라 단백질의 발현 패턴, 뇌의 에너지 대사 등도 다르다 (☞ ‘사랑은 화학 작용일 뿐일까?’ 참고). 같은 위치로 추정되는 뇌 부위라고 해서 사람마다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리라고 단정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 뇌가 시켰어요!
앞에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의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에 이상이 있으면 “내 의지로 한 게 아니라 내 뇌가 했어요”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은 감정 조절과 의사 결정에서 중요한 뇌 부위인데, 전전두엽의 손상 때문에 행동을 통제하지 못해서 살인에 이르렀을 뿐, 의도적인 살인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경우, 전전두엽의 손상이 진짜로 행동에 대한 통제력을 손상시켰는지가 쟁점이 된다. 그런데 전전두엽이 행동 통제에 중요하다고 해서, 전두엽이 손상되면 행동 통제가 반드시 불가능해진다는 뜻은 아니다.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배운 ‘논리 및 집합’ 단원을 떠올려 보자 (아래 그림). ‘X는 Y이다’라는 명제는 대우 관계에 있는 다른 명제 ‘not Y이면 not X이다’라는 명제와 동치이다. 동치란, ‘X는 Y이다’가 옳으면(그르면) ‘not Y이면 not X이다’도 항상 옳다(그르다)는 뜻이다. 하지만 ‘X면 Y이다’라는 명제는 ‘이’ 관계에 있는 명제 ‘not X면 not Y이다’ 와는 동치가 아니다. 동치가 아니라는 것은 ‘X면 Y이다’ 가 옳아도(틀려도), ‘not X면 not Y이다’는 틀릴(옳을) 수 있다는 뜻이다. 전전두엽이 손상되면 행동통제를 못한다’는 주장은 ‘전전두엽은 행동 통제에 중요하다’는 명제의 ‘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두 명제는 동치가 아니다. ‘전전두엽은 행동 통제에 중요’ 하지만, 전전두엽이 손상되도 행동 통제를 할 수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 명제와 명제의 ‘이’는 동치가 아니다.
‘X면 Y이다’ 라는 명제와 이 명제의 ‘이’인 ‘not X면 not Y이다’가 동치가 되려면, X와 Y 사이에는 일대일의 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즉, 전전두엽과 행동 통제 능력의 사이에 일대일의 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뇌를 환원적으로 인식하면 전전두엽과 행동 통제 능력 사이에는 일대일의 관계가 성립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할머니 세포가 없으면 할머니를 더이상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이제 전전두엽이 손상되도 행동 통제를 할 수 있는 경우가 있음을 안다. 분산된 네트워크인 뇌는 어느 한 부위가 손상되더라도 다른 부위를 통해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마다 뇌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특정한 영역의 손상이 반드시 꼭 같은 결과로 이어진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뇌는 계속 변해가므로 재판될 무렵에 관측된 뇌 병변이 범행 당시의 뇌 병변과 동일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즉, 전전두엽의 손상과 행동 통제력의 상실 사이에 개연성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전전두엽의 손상이 행동 통제력의 상실을 ‘입증’할 수는 없다.[4][5] 판사가 전전두엽의 손상과 행동 통제력 사이의 관계를 일대일로 인식하느냐, 개연성으로 파악하느냐에 따라 살인죄에 대한 정상 참작의 정도가 달라질 것이다.
내 탓이냐, 뇌 탓이냐
뇌를 환원적으로 인식하든, 분산된 네트워크로 인식하든 상관없이 ‘내 탓이 아닌 뇌 탓’이라는 주장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예컨대 만취 상태일 때는 뇌를 어떻게 인식하든 ‘뇌 탓’이라고 할만 하다. 환각 및 자살 충동 논란을 일으켰던 졸피뎀 과복용으로 인한 자살도 ‘뇌탓’이라고 보곤 한다.[14] 두 경우 모두 ‘나’를 자각하고 조절하는 의식이 흐리멍덩해서 ‘내 탓’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식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통상적인 상황에서는 (‘의식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상황’의 경계가 가끔은 대단히 모호하지만) ‘뇌 탓 = 내 탓’이라고 여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고 자각하고 ‘내가 무엇을 할지’에 핵심적인 영향을 끼치는 뇌 활동이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는 자유 의지를 가진다고 보고 법적 책임과 권리를 부여한다. 물질인 뇌의 특정한 조건이 의식을 일으키고, 의식이 있을 때는 자의식과 자유의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몇 가지 혼란이 일어난다. ① 물질은 물리법칙을 따라 움직인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는 없고 행동과 생각은 미리부터 결정된 게 아닐까? ② ‘나’라는 의식을 비롯한 마음이 물질의 작용(뇌)으로 일어난다. 그럼 자아는 환상일 뿐일까? 마음이 물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③ 자유의지가 없고 자아는 환상이라면, 모든 게 다 뇌 탓 아닐까? 내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데 이건 내가 하는 걸까, 내 뇌가 하는 걸까? 나의 삶, 나의 노력, 나의 책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④ 그나마 ‘나’와 ‘자유의지’가 있다고 우겨볼 수 있을 때가 ‘의식’이 있을 때인데 도대체 의식이라는 게 뭘까? (5) 자유의지와 자아가 환상이고, 물질인 뇌만 진짜라면, 이러다가 인공 신경망에서도 ‘자유의지’나 ‘자아’ 비슷한 게 생길 수 있는 것 아니냐?
‘미치고 폴짝 뛸’ 만한 질문들이다. 뇌과학자들이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철학자들이 뇌과학을 외면하기 힘든 이유도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①번 질문은 ‘맥락을 놓치기 쉬운, 만들어진 ‘자유의지 논란’’에서 다루었고, ②번 질문은 ‘신경과학으로 다시 보는 ‘나’’와 ‘사랑은 화학 작용일 뿐일까?’에서 다루었다. ③번 질문은 ‘맥락을 놓치기 쉬운, 만들어진 ‘자유의지 논란’’ 과 ‘신경과학으로 다시 보는 ‘나’’에서 살펴봤다. 다음 글에서는 간단하게나마 ④번 질문을 다뤄보기로 하자.◑
[출처]
[1] Connors BW et al. Neuroscience: Exploring the Brain, 3rd Edition. Lippincott Williams and Wilkins (2006)
[2] RC O‘Reilly & Y Munakata. Computational explorations in cognitive neuroscience. MIT Press (2000).
[3] Ovaysikia S et al. (2011) Word wins over face: emotional Stroop effect activates the frontal cortical network. Front Hum Neurosci. 4:234.
[4] The brain on trial. (Science 2010.02.21), http://www.sciencemag.org/news/2010/02/brain-trial
[5] Owen D et al. (2013) Law and Neuroscience. J Neurosci. 33:17624–17630.
[6] Smith K (2012) Brain imaging: fMRI 2.0. Nature 484:24-6.
[7] Hutchison RM et al. (2013) Dynamic functional connectivity: promise, issues, and interpretations. Neuroimage 15:360-378.
[8] Jonas E & Kording KP (2017) Could a Neuroscientist Understand a Microprocessor? PLoS Comput Biol. 13:e1005268.
[9] David Eagleman. The brain: the story of you. Pantheon (2015)
[10] Flor H et al. (2006) Phantom limb pain: a case of maladaptive CNS plasticity? Nat Rev Neurosci. 7:873-81.
[11] Brain Rewires Itself to Enhance Other Senses in Blind People (Neuroscience News 2017.03.22)
[12] Huettel SA et al. Functional magnetic resonance imaging. Sinauer (2004)
[13] Greely HT et al. (2016) Neuroethics in the Age of Brain Projects. Neuron 92:637-641.
[14] 졸피뎀과 자살충동, http://slownews.kr/55628
코카인 등의 마약류가 아니라도 신경계에 작용하는 약물은 중독되기 쉽다. 가소성(환경, 경험, 신체 상태에 따라 신경계의 구조와 기능이 유연하게 변하는 성질)이 강한 뇌가 약물에 적응해 버리기 때문에, 약효에 내성이 생기면서 복용량이 늘어나고 점차 약물에 의존하게 될 수 있다.
금단 증상 때문에 중독된 약물을 단번에 끊기란 정말 어렵다. 약물 섭취를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복용량을 서서히 줄여야 끊기 수월하다 (의사의 지도를 따라야 한다). 예컨대 매회의 복용량을 아주 조금 줄인 뒤 그 복용량에 1주일간 적응하고, 복용량을 아주 조금 더 줄인 뒤 1주일간 적응하는 방식을 반복한다. 약물 중독에 이르게 했던 뇌 가소성을 약물을 끊을 때도 활용하는 것이다. 힘들면 줄이는 양과 속도를 조절한다.
나는 커피를 안 마시면 두통이 올 정도로 카페인 중독이 심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2개월에 걸쳐 서서히 줄여서 커피를 완전히 끊었던 적이 있다. 독하게 작심하고 단번에 커피를 끊었던 적도 있는데 그 때에 비해 훨씬 쉽게 커피를 끊었다. 커피 향을 좋아해서 끊은 지 1-2달만에 다시 마시기 시작했지만 요즘은 끊기 전보다 훨씬 적게 마신다.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사이언스온의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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