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령의 "뇌과학/인공지능과 우리"

인간의 과학과 기술인 뇌과학과 인공지능은 다시 ‘나, 너, 우리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뇌과학 박사과정 송민령 님이 생명과 기계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대의 모습을 전하면서 나, 너,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지의 이야기를 독자와 나눈다.

기억의 일생: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변하는가

[13] 기억의 형성, 변형, 회고


1.jpg » 기억은 녹화된 비디오와 비슷한 걸까? 출처/ Pexels


리는 많은 것을 빨리 외우고 오래 기억하기를 바란다.

대개는 시험을 잘 치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토익과 취직 걱정이 없는 동물들도 기억을 한다.

기억은 왜 필요한 걸까?


기억은 왜 필요한가? (1): 상상과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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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지금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며 미래에 어떤 행동을 할지 따져보는 데 필요하다. 뇌에서 양쪽 해마(hippocampus) 부위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던 에이치엠(HM)이라는 환자는 수술 이후에 새로운 장기 기억을 형성하지 못하게 되었다.[1]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의사가 방을 나갔다가 잠시 후에 돌아오면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하는 식이었다.


2.jpg » 해마의 위치. 출처 /Wikimedia


는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미래의 일을 계획하지도 못했다. 그는 “내일 뭐할 거예요?”라는 단순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으며, 씻고 밥 먹는 것 같은 일상적인 활동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마치 현재에 갇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과거도 미래도 생각할 수 없었다.


좌우 해마가 손상된 환자들에게는 가상의 상황을 상상하는 것도 어렵다.[2] "아름다운 열대 해변의 모래 사장에 누워 있다고 상상하고, 상상한 내용을 이야기해 보세요”라고 요청하면 공간과 장면에 대한 이들의 묘사는 대체로 빈약하고 모순적이다. 반면에 건강한 사람들은 지시된 상황을 풍부하고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다.


해마는 사건 기억과 공간 탐색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해마의 이런 기능들이 가상의 상황이나 미래의 계획을 생생하게 시뮬레이션 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3][4] 과거의 사건을 회상할 때는 방대한 기억 중에서 관련된 정보만이 선택되어 ‘말이 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야 하는데, 이는 상상하고 계획할 때도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기억의 회상은 어떻게 이뤄질까?



기억은 왜 필요한가? (2): 기억의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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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의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무수히 많은 곳을 지나고, 많은 사람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온갖 감정을 느끼며 살아왔다. 이 무수한 경험을 통해 시각, 청각, 후각 등의 감각 정보와 지식, 감정, 사건이 연결된 패턴들이 뇌 신경망 속에 형성돼 간다. 이 패턴들이 기억의 내용이며 대개는 내 안에 이토록 방대한 기억들, 패턴들이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토록 많은 패턴들 중에 지금 생각하거나 경험하는 것과 관련된 패턴을 선택적으로 활성화하는 과정이 기억의 회상이다.[5][6][7] 예컨대 아래와 같은 패턴을 가진 사람이 귀여운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을 봤다고 하자. 그러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웃집 강아지와 놀았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를 수 있다. 또 의식적으로 지각하지는 못하더라도 꼬리 치기, 충성심, 애완동물 등의 정보가 평소보다는 떠올리기 쉬운,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쉬운 상태가 된다.

이처럼 패턴 속의 일부 정보를 활성화하면 패턴 전체에 있는 정보들이 연쇄적으로 활성화 되는 과정을 ‘패턴 완성(pattern completion)’이라고 한다. 패턴 완성은 기억 회상의 원리이다.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패턴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8][9]


8.jpg » 패턴 완성. 위 그림의 동그라미들은 어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자주 관련 지은 경험적 사건, 지식, 감정, 감각의 패턴을 보여준다. (A) 이와 같은 패턴을 가진 사람이, (B) 귀여운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람을 봤다고 하자. (C) 그러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웃집 강아지와 놀았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를 수 있다. (D) 또 의식적으로 지각하지는 못하더라도 꼬리 치기, 충성심, 애완동물 등의 정보가 평소보다는 떠올리기 쉬운, 행동에 영향을 끼치기 쉬운 상태가 된다. 이처럼 외부 자극이나 정신 활동으로 패턴의 일부(채색된 동그라미)만 활성화시켜도 패턴의 대부분이 활성화되는 과정을 패턴 완성이라고 한다. 패턴 완성은 기억 연상의 원리이다.



기억은 왜 필요한가? (3): 현재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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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회상으로 활성화 된 정보는 현재의 행동을 편향시킨다.[10] 6개의 상자가 각각 한 가지 과자를 담고 있다고 하자(아래 그림 A). 배고픈 피험자들에게 과자 3가지는 위치를 1번씩, 나머지 과자 3가지는 위치를 2번씩 알려주면, 2번씩 알려준 과자의 위치를 더 잘 기억할 것이다. 그 뒤 상자의 뚜껑을 덮고, 두 개의 상자 중에서 사고 싶은 상자를 고르게 한다(아래 그림 B).


그러면 피험자들은 어떤 과자가 들어 있는지 더 잘 기억하고 있는 상자(2번씩 알려준 상자)를 고르는 경향이 있다 (물론 더 잘 기억하고 있는 상자 속의 과자를 아주 싫어할 때는 다른 상자를 골랐다). 상자 속에 어떤 과자가 들어 있는지 모르면 고려 대상조차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더 잘 떠오르는 기억이 지금의 선택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


4.jpg » 최근의 기억이 현재의 행동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A: 과자의 위치. B: 상자의 뚜껑을 덮은 뒤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된 두 상자 중 하나를 고르게 하였다. 출처/ pixabay


식적으로 지각되지 않은, 암묵적으로 떠오른 기억도 지금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11] 다음 실험을 살펴보자(아래 표). 피험자들을 모아 시험을 치르게 하고 시험 점수에 따라 돈을 줬다. A 집단에서는 실험자가 시험지를 채점했고, B 집단에서는 피험자가 채점한 뒤에 시험 점수만 실험자에게 보고하게 해서 점수를 속일 여지를 주었다. 그러면 시험 점수의 평균은 A집단에서는 3.1점에 불과한 반면, B집단에서는 33%나 높은 4.1점이 나온다. 시험 점수를 속일 수 있는 상황(B 집단)에서는 피험자들이 점수를 속였다는 뜻이다.


실험을 조금 바꿔 보았다. C 집단은 B 집단과 동일하게 진행하되, 시험을 치르기 전에 성경에 나오는 십계를 생각나는 대로 적게 했다. 그랬더니 B 집단처럼 점수를 속일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C 집단의 점수 평균은 점수를 속일 수 없었던 A 집단과 비슷한 3.0점이 나왔다. C 집단의 피험자들은 속일 수 있는데도 속이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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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피험자들이 십계를 통해서 도덕 규범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게 되었고, 그 결과 점수를 속이는 부도덕한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정한 자극에 대한 경험이 한동안 무의식을 맴돌며 머무르다가 다른 경험에 영향을 주는 이런 현상을 ‘점화(priming)’라고 한다.[12]



요점별로 뭉뚱그린다 (1): 세부와 요점의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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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미래 계획과 행동에 이토록 큰 영향을 끼친다면, 계획과 행동에 유용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형태로 기억이 저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일까?


많은 이들이 최대한 많은 정보를 빨리 외우고, 오래 기억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세밀한 정보가 지나치게 많으면 필요한 정보를 꺼내 쓰기가 불편하다. 마음에 드는 바지 한 벌을 사려고 검색했더니 수천 개의 바지가 나왔을 때의 복잡한 심경을 떠올리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오래, 많이 기억하는 것에 대한 미련을 떨치기 어렵다면 다음 사례를 보자.


면서 만난 모든 얼굴들, 그들이 입었던 옷, 그들이 했던 말을 세세히 기억하는 솔로몬 세레솁스키라는 사람이 있었다.[13] 그는 각각의 정보를 너무나 정확하고 세밀하게 기억했기에 같은 사람의 얼굴도 표정이 바뀌거나 조명이 달라지면 그에게는 다른 얼굴로 보였다. 불필요한 세부 정보는 솎아내고 핵심이 비슷한 것끼리 뭉뚱그려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을 알아보려면 방대한 기억을 뒤져서 눈앞의 얼굴과 맞춰보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했다. 당연히 말의 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애를 먹었다. 자신의 이런 처지가 사무칠 때면, 기억을 종이에 적어 태우곤 했지만 불꽃도 그의 기억을 태워주지는 못했다.


우리는 세레롑스키보다 핵심을 잘 파악하기에 간추려 기억하고, 그러다 보면 잊어버리거나 잘못 기억하기도 한다. 다음 단어들을 주의 깊게 읽어보자.[13] 사탕, 시큼한, 설탕, 쓴, 맛있는, 맛, 이빨, 좋은, 꿀, 소다, 초콜릿, 하트, 케이크, 먹다, 파이. 이 단어들을 좀더 살펴본 뒤에 손으로 가리고,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자.


다음 단어들 중, 위 목록에 있던 단어를 모두 골라보자: 맛, 점, 달콤한. 연구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목록에 없었던 “달콤한”이 목록에 있었다고 회상한다고 한다. 목록의 요점에 따라 기억이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요점별로 뭉뚱그린다 (2): 일반화와 패턴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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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사항은 다르지만 요점이 비슷한 내용을 뭉뚱그려 기억하는 과정을 ‘일반화(generalization)’ 라고 하고, 비슷해 보이지만 중요한 측면에서 다른 내용을 분리해서 기억하는 과정을 ‘패턴 분리(pattern separation)’라고 한다.[5][7]


컨대 아래 그림에서 붉은 색으로 표시된 정보는 고양이에 대한 나의 패턴, 노란 색으로 표시된 정보는 개에 대한 나의 패턴이다. 개와 고양이의 패턴이 분리되어 있기에, 나는 ‘애완동물’과 ‘고양이의 사진’이라는 정보를 접했을 때 개가 아닌 고양이를 떠올릴 수 있다.


6.jpg » 개(노란색)와 고양이(빨간색)에 대한 나의 패턴들.


앞에서 얘기한 세레솁스키의 사례는 요점에 따라 뭉뚱그리는 과정인 일반화는 안 되고, 패턴 분리는 지나쳤던 경우를 보여준다. 정보들이 일반화되지 못하고 따로 놀았기 때문에 쓸모 있는 패턴을 형성하지 못했다.


레솁스키와는 반대로 패턴 분리는 못하고, 일반화는 지나칠 때에도 문제가 발생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가 그런 경우다.[14] 사나운 개에게 물린 이후, 개에 대한 나의 패턴이 아래처럼 일반화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대충 보아도 표에서 노란 색으로 표시된 부분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 이제는 멀리서 고양이를 봐도 개로 보이고, 애완동물이라고 하면 개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감정적으로 강렬했던 대상인 개를 중심으로 패턴이 지나치게 일반화 되어, 개가 아닌 것들을 봐도 개부터 떠올라서 무섭다.


7.jpg » 개에게 물린 이후 개(노란색)와 고양이(빨간색)에 대한 패턴들.


팝콘 터지는 소리만 들려도 식탁 밑으로 숨는다는 참전 군인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의 경우도 폭탄이 터지는 소리와, 팝콘이 터지는 소리가 다른 패턴으로 구분되지 않고 지나치게 일반화 되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을 기억한다 (1): 선택적 주의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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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기억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다면 중요한 것을 선별해서 기억해야 한다. 실제로 기억은 비디오 카메라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저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일부에 선택적인 주의를 기울이며(selective attention), 내가 주의를 기울였던 것들만을 기억할 수 있다.


래 동영상의 10초에서 40초까지 사이에 흰 셔츠를 입은 사람이 공을 패스하는 횟수를 세어보자. (재미있는 실험이니 다소 귀찮더라도 동영상을 꼭 보시기 바란다) 몇 번인가?


[ 유투브 https://youtu.be/IGQmdoK_ZfY ]


답은 16번이다. 그런데 이 동영상에는 화면 중앙을 당당하게 가로지르는 고릴라가 등장했다. 당신은 공을 세던 중에 이 고릴라를 보았는가? 믿기지 않는다면 동영상을 다시 돌려보라. 고릴라가 나온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으로 알려진 이 실험을 처음 접한 이들의 반 정도가 고릴라의 등장을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한다. 저 고릴라는 작지도 않고, 화면 중앙을 천천히 걸어가는데도 말이다.


이 실험에 대해 들어본 사람이라면 아마 동영상 속의 고릴라를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무대 뒤쪽의 커튼 색깔이 붉은 색에서 금색으로 바뀌었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는가? 혹은 검은 셔츠를 입은 사람이 공을 던지던 중에 슬그머니 무대 밖으로 사라졌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는가?


나는 둘 다 알아차리지 못했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커튼의 색깔이 바뀐 줄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놀랍다. 고릴라의 등장은 알아차렸으면서, 고릴라 가까이 있던 사람이 고릴라의 등장과 동시에 무대 밖으로 나가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점도 놀랍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접하는 세상의 일부에만 주의를 집중하고, 중요하지 않은 정보는 적당히 흘려버린다.


런 일은 일상에서도 흔하게 일어난다.[13] 행인이 당신에게 길을 물어보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10초쯤 이야기하고 있는데 커다란 문짝을 든 이들이 당신과 행인 사이를 지나간다. 문에 가려 행인을 보지 못하는 몇 초 사이에 행인이 다른 사람으로 슬쩍 바뀐다. 그리고는 마치 아까부터 길을 물어보던 사람인 양 당신과 대화를 이어간다면, 당신은 행인이 바뀐 것을 알아챌 수 있을까? 놀랍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한다(변화 맹시). 엄청난 미남미녀가 아니고서야 지나가던 사람1의 외양은 중요한 정보가 아닌 것이다.


반면에 마음을 쏟고 있는 주제에는 거의 자동적으로 주의가 집중된다. 떠들썩한 회식 자리에서도 누군가 내 이름, 내가 관심 있는 주제를 언급하면 귀가 쫑긋해지는 것(칵테일 파티 효과)은 그 때문이다.



중요한 것을 기억한다 (2):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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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 주의 집중은 감정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감정은 나의 생존과 번식에 중요한 상황에서 일어나, 중요한 정보를 더 집중해서 처리하고, 더 잘 기억할 수 있도록 뇌와 몸의 작동 양식을 조절한다. 내가 호기심과 흥미를 느꼈던 것, 두려웠던 것, 기뻤던 것, 슬펐던 것, 즐거웠던 것들이 나에게 중요한 정보인 셈이다.[15]


래서 감정이 중요하다고 표시해둔 일들은 기억도 잘 된다. 때로는 지나치게 기억되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처럼  삶을 침해하기도 한다. 공포 감정은 뇌와 몸 속에서 에피네프린 계열의 신호와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공포스러운 사건이 장기 기억으로 고착되기 전에 에피네프린 계열의 신호를 억제하는 약물(beta blocker)을 복용하면, 사건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약화시켜 PTSD를 예방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도 논의되고 있다.[16][17]


사람마다 중요시하는 대상이 다르기에, 복잡한 세상의 어떤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는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설혹 동일한 측면에 주의를 기울였더라도 어떤 감정을 어떤 강도로 느꼈는지, 어떤 사전 정보(과거 경험)를 가지고 사건을 해석했는지가 사람마다 다르다. 동일한 사건도 감정과 사전 정보에 따라 다르게 채색되고, 다르게 기억된다. 나란히 앉아서 같은 영화를 보고도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처럼 인식 단계부터 사람마다 기억이 다르다.



기존의 지식과 통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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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한 정보를 행동과 미래 계획에 유익하게 사용하려면, 기억은 있었던 일을 그대로 저장하는 녹음 같은 것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정보는 기존의 지식과 신념에 통합되어야 한다.


틀릿이라는 연구자가 수행한 실험을 보자.[13] 바틀릿은 피험자들에게 아메리카 원주민 설화를 읽어주고 15분 뒤에 줄거리를 말하게 했다. 그리고 불규칙한 간격(몇 주나 몇 개월)으로 몇 번씩 다시 불러 줄거리를 말하게 하고 줄거리의 변화를 추적했다. 사람들의 기억은 잊혀지기만 한 게 아니었다. 이해하기 힘든 요소들은 빠지고 새로운 부분이 추가되면서 어떻게든 ‘말이 되는’ 형태로 변형돼 갔다.


나중에 접한 추가 정보나 뉘앙스는 ‘말이 되는’ 기억이 뭔지에 영향을 끼친다.[18] 예컨대 피험자들에게 자동차 두 대가 추돌하는 짧은 영상을 보여주고, 두 차량이 부딪혔을 때(hit) 속도가 대략 얼마였는지 물어보면 응답의 평균은 시속 34 마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두 차량이 박살 났을 때(smash) 속도가 대략 얼마였냐고 더 강한 표현을 써서 물으면 응답의 평균은 시속 40.8 마일이라고 한다. 표현의 강도에 따라 속력에 대한 기억이 바뀐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은 더욱 말에 맞춰졌다. 일주일 뒤 피험자들을 다시 불러서 영상 속에서 깨진 유리조각을 보았냐고 물어보았다 (영상에 깨진 유리조각은 없었다). 그랬더니 두 차량이 부딪혔을 때(hit) 속도가 얼마였냐는 질문을 받았던 그룹에서는 14%가, 두 차량이 박살 났을 때(smash) 속도가 얼마였냐는 질문을 받았던 그룹에서는 32%가 깨진 유리조각을 보았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표현이 기억을 바꾼 것이다.



지속적으로 갱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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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 주변 상황은 끊임없이 변해간다. 변화에 맞춰 계획과 행동을 수정하려면, 기억도 업데이트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떠올린 시점부터 약 5시간 동안 변하기 쉬운 상태가 된다. 공포의 기억은 쉽게 잊혀지지 않지만 기억의 이런 특성을 활용하면 안전한 기억으로 재해석될 수 있다.


를 들어서, 쥐에게 삐~ 하는 소리를 들려준 뒤 강한 전기 쇼크를 주면, 쥐는 나중에 삐~ 소리만 듣고도 몸을 떨게 된다. 이를 공포 학습(fear conditioning)이라고 한다. 그 뒤 쥐에게 전기 쇼크 없이 삐~  소리만 여러 번 들려주면, 쥐는 삐~ 소리가 들려도 예전만큼 떨지 않게 된다. 이를 공포의 소거(fear extinction)이라고 한다. 이 방식은 PTSD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공포의 소거는 공포의 기억을 없애는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삐~ 소리가 어떤 맥락에서는 전기 쇼크를 예고하지만, 다른 맥락에서는 삐~ 소리가 들려도 전기 쇼크가 없더라’는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공포의 소거가 이뤄진 다음에도,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면 삐~ 소리만 들어도 몸을 떠는 반응이 되살아나곤 한다. 그밖에 공포 학습이 이뤄진 공간에 돌아가거나, 전기 쇼크를 한번만 더 받아도 삐~ 소리에 대한 두려움이 되살아나 버린다. 공포의 소거는 PTSD 치료의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변하기 쉬운 상태가 되는 성질을 이용하면 어떨까? 예컨대, 공포의 소거 (전기 쇼크 없이 삐~ 소리만 여러 번 들려주는 과정)를 하기 10분 - 5시간 전에 삐~ 소리를 딱 한번만 들려주는 것이다. 그러면 쥐는 삐~ 소리에 대한 두려운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이 기억은 갱신되기 쉬운 상태로 바뀐다. 이 상태에서 공포의 소거를 진행하면 삐~ 소리는 더 이상 무서운 기억이 아닌, 안전한 기억으로 업데이트 된다. 이 방법은 쥐는 물론이고, 사람의 공포 기억을 다루는데도 대단히 효과적이라고 한다.[19][20]


올릴 때마다 갱신하기 쉬운 상태로 변하는 기억의 특성은 저장된 기억을 상황 변화에 맞게 수정하는 데 유용하다. 하지만 과거 사건을 확인하는 데는 불리하다. 기억을 떠올린 상태에서 어떤 뉘앙스로 어떤 정보를 접하느냐에 따라 기억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자동차 추돌 영상을 본 피험자들에게 “부딪혔을 때(hit)”라고 약한 표현으로 물을 때와 “박살 났을 때(smash)” 라고 강한 표현으로 때 피험자의 회상이 달라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피험자들이 자동차 추돌 영상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상태에서 접한 질문자의 표현이 기억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반복되는 증인 심문은 증인의 기억을 바꿀 수 있고, 기억이 왜곡된 증인은 자기도 모르게 위증을 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디엔에이(DNA) 검사법 덕분에 뒤늦게 무죄가 확인된 수감자들의 75%가 잘못된 기억에 의한 증언으로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한다.[20] 이 때문에 증인 심문에도 전문적인 훈련과 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22]


* * *

사가 현재의 행동과 비전에 영향을 끼치듯, 기억도 현재의 행동과 미래 계획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기억은 과거가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이다. 역사가 과거의 사실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기억도 과거 사실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다. 서유럽의 관점에서 정리된 세계사와 인도의 네루가 저술한<세계사 편력>은 다르고, <전쟁의 역사>와 <커피의 역사>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보고 들어도 각자의 경험과 관점에 따라 기억이 달라진다.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면 역사 서술이 변하듯이, 기억도 수시로 갱신되고 변해간다. 이에 따라 과거가 지금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도 변해간다. 당신에게 지금 영향을 끼치는 기억은 어떤 것인가.


[출처와 각주]


[1] Henry Molaison: the amnesiac we'll never forget (The Guardian 2013.5.5)

[2] Hassabis D et al. (2013) Patients with hippocampal amnesia cannot imagine new experiences. PNAS 104:1726-31.

[3] Schacter DL et al. (2012) The Future of Memory: Remembering, Imagining, and the Brain. Neuron 76: 677-694.

[4] Hassabis D et al. (2009) The construction system of the brain.Phil. Trans. R. Soc. B 364:1263-1271.

[5] RC O'Reilly & Y Munakata. Computational explorations in cognitive neuroscience. MIT Press (2000).

[6] Horner AJ et al. (2015) Evidence for holistic episodic recollection via hippocampal pattern completion. Nature Communications 6:1-11.

[7] Rolls ET (2016) Pattern separation, completion, and categorisation in the hippocampus and neocortex. Neurobiol Learn Mem 129:4-28.

[8] Chadwick MJ et al. (2016) Semantic representations in the temporal pole predict false memories. PNAS 113: 10180-5.

[9] Huth AG et al (2016) Natural speech reveals the semantic maps that tile human cerebral cortex. Nature 532:453-8.

[10] Gluth S et al. (2015) Effective Connectivity between Hippocampus and Ventromedial Prefrontal Cortex Controls Preferential Choices from Memory. Neuron 86:1078-90.

[11] 상식밖의 경제학 (2008) 댄 애리얼리. 청림출판

[12] Schacter DL  & Buckner RL (1998) Priming and the Brain. Neuron 20:185–195.

[13] “새로운” 무의식: 정신 분석에서 뇌과학으로 (2013)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까치.

[14] Kheirbek MA et al. (2012) Neurogenesis and generalization: a new approach to stratify and treat anxiety disorders. Nat Neurosci 15:1613-20.

[15] McGaugh JL (2013) Making lasting memories: remembering the significant. PNAS 110: 10402-7.

[16] Villain H et al. (2016) Effects of Propranolol, a β-noradrenergic Antagonist, on Memory Consolidation and Reconsolidation in Mice. Front Behav Neurosci. 10:49.

[17] Lonergan MH et al. (2013) Propranolol's effects on the consolidation and reconsolidation of long-term emotional memory in healthy participants: a meta-analysis. J Psychiatry Neurosci. 38:222-31.

[18] Loftus EF & Palmer JC (1974) Reconstruction of Automobile Destruction: An Example of the Interaction Between Language and Memory. J Verbal learn & Verbal Behav 13:585-589.
https://www.simplypsychology.org/loftus-palmer.html

[19] Monfils MH et al. (2009) Extinction-reconsolidation boundaries: key to persistent attenuation of fear memories. Science 324:951-5.

[20] Agren T et al. (2012) Disruption of reconsolidation erases a fear memory trace in the human amygdala. Science 337:1550-2.

[21] Elizabeth Loftus (2013) How reliable is your memory? TED global
https://www.ted.com/talks/elizabeth_loftus_the_fiction_of_memory

[22] The Royal Society (2011) Neuroscience and the law. https://royalsociety.org/~/media/Royal_Society_Content/policy/projects/brain-waves/Brain-Waves-4.pdf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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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 : 기억, 해마, 패턴, 점화
송민령 카이스트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과정
빗소리를 좋아하고, 푸름이 터져나오는 여름을 좋아합니다. 도파민과 학습 및 감정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뇌과학이 나를 이해하고, 너를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이 되기를, 우리가 이런 존재일 때,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학문이기를 바랍니다.
이메일 : ryung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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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생명과 기계의 경계 ②: 흐려지는 경계  (①편에서 이어짐) 지난번 연재 글(“모방하며 진화하며, 기계들 생명에 다가서다”)에서는 기계가 생명을 모방하며 얼마나 생명에 가까워졌는지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생명이 어떻게 기계와 가까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