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민의 "추리과학소설 '해석기관'"

과학자를 동경했지만 수학 성적 때문에 문과로 진로를 튼 대학생 성여울, 그리고 과학자의 길을 걷던 중 불의의 사고로 꿈을 접고만 도나혜 석사. 서먹한 자취방 룸메이트인 그들에게 차례로 찾아오는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 두 사람은 과학지식과 경험과 증거를 열쇠삼아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미래는 너무나 빨리 -제7화②

◐ 전편 '미래 ①'에서 이어집니다.


pixabaycom.jpg » 출처 / Pixabay.com


제7화. 미래




 “나는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는 너무나 빨리 찾아오니까.”

-앨버트 아인슈타인(독일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제 해결의 시작은 문제를 인식하는 것. 언니는 충격 때문에 눈치를 채지 못했겠지만,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제 우리 둘 모두 무엇이 수상한지 알게 되었다. 나혜 언니의 예전 연구실에서 시작된 불협화음이 왜 하필 지금 덮쳐온 것일까? 왜 이런 방식으로? 무슨 계기라도 있는 것일까? 그것을 생각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묘한 우연이 하나 있다.


“‘헬시퀀텀’에 갔을 때였죠. 의심을 피하려고 그 때 언니는 어떻게 말했죠?”


“유범운 교수님하고 일한다고 했지. 물리학자가 관심을 가져주길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죠?”


00openclipartorg1.jpg “우릴 의심한 연구원이 교수님한테 메일을 보내 봤다고 했어. 진짜 내가 유범운 교수님 연구실 소속인지를 확인하려고…….”


그리고 그 사건을 해결한 뒤 돌아오던 중에, 언니는 그 유범운 교수의 연구실에서 현재 박사과정 중인 정윤하라는 사람의 아버지에게 습격당했다. 언니가 그 연구실에서 일하던 시절 고백을 거절했고, 그 때문에 심적 고통으로 졸업이 늦어질 지경에까지 이르자 화가 난 아버지가 극단적인 마음을 품었다는 설명 그 자체로는 크게 말이 안 되는 부분은 없다. 다만 수상한 것이다. 언니가 뭘 하고 있는지가 메일을 통해 유범운 교수에게 전달된 직후 이런 일이 생긴 게 과연 단순한 우연일까? 의문에서 한 발짝 나아가기 위해서 나는 질문을 하나 더 던져보았다.


“연구원이 유 교수한테 메일을 보냈다면, 아마 대학이나 연구실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주소를 사용했겠죠. 혹시 그 계정을 다른 사람이 관리하나요?”


언니는 거의 즉시 고개를 저었다. 단호하게 좌우로 두 번.


“교수님은 꼼꼼한 사람이야. 모든 걸 아셔야 하고 통제할 수 있으셔야 하고, 그러지 않을 땐 화를 엄청나게 내시고. 그래서 직접 관리하실 수 있는 건 직접 관리하시지.”


그렇게 말하는 언니의 눈이 점점 커졌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고 있을 테니까, 언니도 스스로 무언가를 깨달았을 테니까. 불길한 이야기다. 생각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예전에 언니의 손 하나를 앗아가고 끝난 사건인데, 다시 들춰내서 더욱 어두운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내 룸메이트에게는 지나치게 괴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진실을 알고 싶었고, 의문을 해결하고 싶었으며, 이 호기심을 가르쳐 준 언니 역시도 진실 앞에서 멈춰버릴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음 수수께끼에 직면해 발을 동동 구르던 내게 나혜 언니가 말해 주었듯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가설을 세워보아야 한다.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을 수립하고 그 타당성을 검증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눈앞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가설은 하나뿐이다.


00openclipartorg5.jpg “역시 유범운 교수라는 사람이 수상하죠.”


언니는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조심스러워할 뿐.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단정지을 수 없어.”


가설을 확실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모아야 한다. 어떤 데이터가 가설을 지지하는가? 어떤 데이터가 가설에 반대되는가? 편견 없이 모든 데이터를 모아서, 내 가설이 이것들을 얼마나 잘 설명해줄 수 있는지를 체크한다. 데이터 수집의 기본은 관찰. 관찰 대상은 바로 내 앞에, 얇은 환자복을 입고 병상에 누워서 두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전 과학자 룸메이트다.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려줘요, 언니. 연구실에서 있었던 일을. 그 때의 정황을.”


언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열기까지는 다소간의 마음의 결심이 필요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목소리는 떨림 없이 확고했다.


“뭐부터 시작하면 좋을까- 그래, 정윤하가 나한테 고백했어. 돌이켜보면 그건 확실히 고백이었다고 생각해. 단지 당시의 내가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있었을 뿐이지.”


“언니답다면 언니답지만, 정말로 아무 낌새도 없었어요?”


이렇게 물었더니 잠시 생각해본 뒤,


“미안, 그래도 나는 눈치 못 챘다니까.”


“그러면 그, 고백하던 순간에 그 사람이 한 말 같은 건요?”


만일 이 모든 사건이 그 당시의 사랑과 원한 시작되었다면, 다시 말해서 유 교수가 배후에 있는 게 아니라면, 분명 나혜 언니의 기억 속에 단서가 있을 것이다. 언니가 기억하고 있기만 하다면. 다행스럽게도 언니는 적어도 한 마디만큼은 확실히 머릿속에 담아놓고 있었다. 아무리 남자랑 연애하는 데 관심이 없는 내 룸메이트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기억하게 될 만한 말이었다.


“다른 사람들하고 내기했는데 이겨서, 자기가 먼저 고백하기로 했다고.”


“와, 그게 고백 대사였어요?”


언니가 아니라 그 누구더라도 받아들여주지 않을 만한 고백이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언니를 좋아하던 사람이 그 연구실에 한 명뿐이 아니었다. 순서를 정해 고백하자고 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으면 실험에도 지장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네요.”


“생각해보니 그 즈음에 교수님이 종종 화내긴 하셨지. 나도 엄청 혼났고.”


00openclipartorg4.jpg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 유 교수가 말했던 게 생각났다. ‘사실 연구실 내에서 연애하는 건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지만요. 연애도 문제지만, 깨지면 분위기가 엉망이 되니까.’ 그 즈음 실험실에는 유 교수가 진저리를 칠 만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를 많이 혼냈다고요? 다른 사람은요?”


“글쎄, 유난히 나한테 그러셨던 것 같기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유 교수 입장에서는 나혜 언니가 실험실 분위기를 흐려놓는 원흉으로 보였을 테니까.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요동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으니 화를 참지 못해서 괜히 더 혼낸 것일까? 아니면 일부러 괴롭혀서 그만두게 만들려고 한 것일까? 하지만 언니에게 먹힐 만한 방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걸 알아챌 정도로 예민하지가 못하니까. 연구실 내의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지고 교수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도를 넘는다면, 하지만 그 원인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렇게까지 미친 분이었다고 생각하긴 싫지만-”


하지만 만일 유 교수가 정말로 그렇게나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사고를 일으켜서라도 나혜 언니를 쫓아내려 했다면? 그 작전은 성공이었다. 나혜 언니는 과학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연구실을 떠나고 말았으니까. 언니에 대한 일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겠지. 적어도 얼마 전까지는.


“그런데 메일이 한 통 도착한 거죠. 언니가 유 교수 이름을 대고 뭔가 수상쩍은 일을 하고 있다는 메일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겠지만, 자신이 알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 교수에게는 스트레스가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 졸업이 걸려 있는 박사과정생의 아버지를 이용해 언니를 감시하게 했던 것이다. 만일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챈다면 극단적인 방법도 서슴지 말라고 말해 두면서. 하필 내가 뒤를 돌아본 것이 잔뜩 긴장한 범인에게는 방아쇠가 되었겠지.




“그렇게 생각할 만한 근거는 있어?”


언니는 침착하게 물었고, 나에게는 대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연구실에 찾아갔을 때 들은 얘기요. ‘하지만 그 학생 뜻대로 움직여주는 사람이 있었을 수는 있죠.’ 이걸 단서로 정윤하의 아버지가 범인이란 걸 알아내서 경찰에 제보했고요. 하지만 이상하죠? 꼭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잖아요. 답으로 유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로 그게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진실을 알아내려고 찾아가자 미리 준비해 둔 정답으로 추리를 유도해, 혹시라도 추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것. 연구원이 보낸 메일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아마 이런 생각을 해 볼 기회도 없었겠지. 아무에게도 들키는 일 없이, 다시 한 번 나혜 언니를 꺾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까지가 제 가설이에요.”


물론 진실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신빙성을 인정받으려면 동료 평가를 거쳐야 한다. 나혜 언니는 의수를 까딱이며 생각하다가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말은 되지만 부실해. 결정적으로 물증이 하나도 없어.”


이게 결정적인 문제였다. 알고 있었지만 언니의 목소리로 듣는 건 훨씬 뼈아픈 일이다. 전부 논리로 꿰어 만든 허술한 이야기일 뿐, 말이 된다고 해도 실제 증거가 없다면 그걸로 끝이다. 연구원이 메일을 보낸 직후에 나혜 언니가 습격당한 것이 아무리 절묘한 우연이더라도, 그래서 우연이라고 생각하기 힘들더라도, 우연이라는 것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이상은 이 가설이 사실이라고 결코 단언할 수 없다.


“혹시 이메일 기록을 뒤져보면 뭐가 나오지 않을까요?”


희망을 걸어 보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겠지만 쉽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 일처리가 꼼꼼한 사람이야. 네 말이 사실이라면 절대 기록이 남는 방식으로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을 거야. 설령 지시했더라도 ‘알아봐라’라거나 ‘조치를 취해라’ 같은 식이었겠지. 그렇게 사고도 일으키고, 이번 일도 일으켰을 거야. 자기 손은 조금도 더럽히지 않고서.”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가설을 생각해냈지만 사실인지 아닌지 증명해 볼 방법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잠깐 동안이나마 수수께끼 풀이에 대한 열망으로 타오르던 나혜 언니의 눈동자도 지금은 그 빛을 잃은 것만 같았다. 어쩌면 어떤 가설은 결코 검증할 수 없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말이죠,”


방법이 있지 않을까? 물증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뛰어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한 번 더 알아볼래요. 연구실 사람들이랑 주변 사람들하고 얘기도 해 보고, 검색도 해 보고. 그러다 보면 뭔가 증거가 나오지 않을까요? 그래도 안 나오면 제 가설이 틀린 거고, 뭔가 나오면……, 가만 둘 수 없으니까요.”


나는 그렇게 말했고, 언니는 또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다가- 가볍게 웃었다. 포기하고 체념하는 미소가 아니라, 뭐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하는 미소로.


“그래, 궁금한 게 있으면 해결해야지.”


그러고서,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네 가설이 맞는다면 준비해둘 게 있어. 편지봉투랑 편지지 좀 사와 줘.”


그렇게 말하는 언니의 목소리에 깃든 흥분을 나는 분명히 알아챌 수 있었다. 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가설을 검증할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그리고 가설이 검증되는 그 순간을 두근두근하는 가슴을 안고 기다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내 심장도 함께 뛰기 시작했다.




과적으로 말하자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 주장이 틀렸을 가능성은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모든 사건의 배후에 유 교수가 있을 가능성만큼이나, 이 모든 것이 그저 절묘한 우연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으니까. 간신히 시간을 내서 연구실 사람들을,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을 만나고 다녀 보았지만 심증은 점점 후자 쪽으로 굳어져갔다. 정말로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괜한 사람을 의심한 것만 같았다. 며칠 동안 백방으로 수소문해 본 결과가 그거였다.


“뭐, 역시 내가 틀렸나보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자취방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늦은 밤이었고 길은 어두컴컴했다. 요즘 이 길을 걸을 때면 나혜 언니가 쓰러지던 바로 그 순간이 생각나 자연스레 가슴이 아파왔다. 발걸음이 빨라지고 숨이 가빠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경이 곤두선다. 누군가가 미행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되어서-


-아마 그 덕분이었을 것이다.


내 뒤를 밟던 누군가의 존재를 눈치 챈 것은.


그렇다고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이 내 팔을 붙잡는 동안 나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맞서 싸우기에는 체격 차이가 너무 컸고, 뿌리치고 도망가기에는 손아귀의 힘이 너무 매서웠다. 그 상황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보다도 먼저 다른 대응방법이 생각난 것은 전적으로 과학자 룸메이트 덕분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예측한 나혜 언니의 선견지명 덕분이었다.


‘넌 이미 교수를 방문한 적이 있어. 자취방 위치를 알고 있다면 네가 어디 사는지도 아는 셈이고. 만일 네 가설이 맞는다면, 교수가 정말로 날 죽이려고 한 거라면, 그 사실을 밝히려는 너도 가만 두지 않겠지.’


물론 조심하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진실을 알아내겠다면서 사방을 뛰어다니는 것 자체가 효과적인 실험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뭔가 자극을 주고 그 반응을 얻어내는 것이 실험의 기본이고, 그 실험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지만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진실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흥분이 분명하게 섞여 있었다. 이제는 이 다음 단계 실험을 할 차례였다.


“정윤하 씨, 멈춰요! 할 얘기가 있어요!”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범인은 내 외침에 잠깐 멈춰 섰다. 그리고 나한테는 정말로 할 얘기가 있었다. 준비해 둔 그대로, 외투 안주머니에서 주섬주섬,


00openclipartorg2.jpg “여기, 편지가 있어요. 나혜 언니가 전해달라고 했어요.”


“나한테……, 편지를 썼다고?”


영혼이 빠진 듯 힘 풀린 목소리가 범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 팔을 쥔 손아귀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두 발짝 물러나는 그의 몸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충격으로 크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네. 당신이 올 거라고 예상하고, 꼭 전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했어요.”


내가 내민 편지를 그는 가만히 받아들었다. 손이 심하게, 내 손보다도 훨씬 더 떨리고 있었다. 한때 자신이 좋아했던, 고백까지 했지만 거절당했던 여자에게서 온 편지. 그가 편지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나는 황급히 자취방까지 뛰어 올라갔다. 아무튼 무서운 건 사실이었으니까.


‘정말로 그런 일이 생긴다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줘.’


나는 언니가 말한 그대로 따랐다. 문부터 다 잠그고, 이불도 뒤집어쓰고, 오들오들 떨면서. 벨소리가 몇 번 울리지 않아 언니의 목소리가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괜찮아?”


참으로 안심되는 침착한 목소리. 덕분에 숨을 조금 고를 수 있었다. 여전히 떨렸지만 그래도 소식을 전하는 데는 다행스럽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정윤하 그 사람이었어요. 언니 말대로.”


“그럴 줄 알았어.”


담담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내 믿음직한 과학자 룸메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단호하게. 주장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려는 것처럼.


“너한테까지 손을 대려고 했단 말이지. 그건 용서받을 수 없어.”




음날, 늦은 아침.


나혜 언니는 병원 앞 벤치에 나와 있었다. 환자복 위에 외투를 걸친 채로. 날이 추워서 떠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고, 내가 건넨 커피를 받자 표정 변화는 적어도 적잖이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그런 언니 옆자리에 내가 앉았다. 의수가 다리에 닿으면서 싸늘한 한기를 온 몸에 전했다. 한동안 우리 둘은 그렇게 나란히 앉아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 사람이 올 거라는 걸.”


이대로라면 추위 속에서 가만히 앉아만 있을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주장이 맞는다면 누군가가 날 습격하려 할 것이니, 그 때를 대비해서 편지를 써준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다른 학생들이 아닌 정윤하가 올 거라고 예상한 걸까? 언니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대답했다.


“네 가설에 따르면 그 사람은 이미 한 번 교수를 위해 범죄를 저질렀고, 아버지까지 같은 길을 걸었어. 유 교수님 아래에는 학생들이 여럿 있는데, 밝혀져서는 안 되는 일을 처리할 땐 그 사람을 계속 쓰고 있다는 거지.”


그러고서 같은 한숨을 쉬더니,


“졸업이 걸려 있고 연구는 잘 안 돼. 자기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까지 목줄로 잡혀 있어. 교수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서 또 한숨. 어쩌면 나혜 언니는 그 사람을 조금이나마 동정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적어도 그 심정만큼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한때 같은 연구실에서 일한 사이니까. 아마 그래서 편지 한 통으로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었겠지.


“그 편지의 내용은요?”


나는 그걸 읽어보지 않았다. 사적인 내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조금 걱정되는 건 사실이었다. 설마 연애편지 같은 건 아니라고 확신했지만, 100% 확신하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도 언니는 내 불안을 잠재워주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썼어. 왜 교수가 계속 너한테 이런 일을 지시하고 있는지. 왜 졸업이 늦어지고 있는지. 내가 대학원 들어가기 전에 들은 얘기가 있는데, 너무 유능한 학생은 교수가 졸업시키기 싫어한다는 거야. 계속 옆에 두고 써먹어야 하니까.”


아아, 그거였구나. 순조로이 졸업하기 위해서라면 범죄마저도 기꺼이 저질러줄 사람이기에, 가족마저도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기에 유 교수는 그 사람을 졸업시키기 싫어했을 것이다. 나혜 언니는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교수의 손에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했다.


“자수하라고 썼어. 더 놀아나고 싶지 않으면, 아버지랑 같이 진실을 털어놓고 경찰에 모든 걸 말해주라고. 그러면 혹시라도 물증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유 교수님이 해온 일이 밝혀질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래서 언니는 ‘용서할 수 없어’가 아니라 ‘용서받을 수 없어’라고 말했는데, 어떻게든 유 교수가 벌을 받도록 하려고 했을 뿐인데,


“실험이란 게 생각대로 결과를 내놓는 법은 없는 모양이네요.”


“항상 그렇더라고.”


실험 계획은 완벽해 보였다. 내가 설치고 돌아다니며 주목을 끌고, 유 교수의 반응을 유발하고, 그 반응조차 통제해 원하는 반응으로 유도할 방법까지 준비해 두었으니까. 두 번째 단계까진 성공적이었고 정윤하가 날 습격함으로써 내 가설은 증명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 반응이 언니의 예상보다 훨씬 격렬했던 것이다.


자신의 삶이 지금까지 유 교수에게 놀아나고 있었다는 걸,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도 그렇게나 교수의 말에 열심히 따랐지만 교수는 처음부터 일찍 졸업시켜 줄 생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정윤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자수하라는 언니의 부드러운 제안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휘발유 통을 들고 교수의 사무실로 향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난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살아남지 못했다.


“정말로 예상 못 했어.”


실험의 결과를 온전히 예측할 수는 없었다.




와 언니는 가만히 앉아 다시금 허공을 응시했다. 모든 일이 끝났다. 의문은 전부 해결되었고 원한은 모두 사라졌다- 그것이 이상적인 형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끝난 건 끝난 것이고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실패한 실험에서 배울 점을 찾아내서 다음을,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그렇기에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떨면서도, 후회를 지우지 못하면서도.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야, 성여울.”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구해줘서 고마워요, 나혜 언니.”


00openclipartorg3.jpg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차가운 의수를 꼭 잡았다. 갈고리가 손바닥 아래에서 가볍게 당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의수를 만들어낸 일은 끝났으니, 이제부터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충격과 후회 속에서도 언젠가는 다시 일어나서 움직여야 하겠지. 어쩌면 나혜 언니는 다시 공부를 시작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일을 찾아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건, 무엇이 됐든 문제 풀이를 멈추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뛰어들 것이다. 다음번에는 더 나은 해답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궁금한 게 생기면, 잘 부탁해요.”


내 말에 나혜 언니는 이쪽을 보면서 작게 웃었다. 희미하지만 분명한, 존재를 의심할 수 없는 미소였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

<제7화 끝, ‘해석기관’ 연재 끝>   



   ■ 작가의 말

이것으로 <해석기관> 연재를 시작할 때 계획했던 에피소드는 모두 마무리했습니다. 처음 기획과 달라진 부분도 있고 어려웠던 점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를 무사히 끝맺을 수 있었던 것은 한겨레 사이언스온과 독자 여러분 모두의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언젠가 나혜와 여울 두 사람에게 다른 수수께끼가 찾아올지도 모르고, 어쩌면 전혀 다른 이야기로 또 찾아뵙게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잠시 숨을 돌리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해석기관>을 읽으며 두 사람의 이야기에 동행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해석기관 연재 모두 보기


박상민 광주과학기술원 대학원생(화학전공)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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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민 광주과학기술원 석사과정 대학원생, 화학 전공
화학 전공 대학원생 겸 초보 작가. 과학이 좋은지 글쓰기가 좋은지 계속 갈팡질팡했지만, 지금은 죽을 때까지 갈팡질팡하기로 결심했다. 제대로 갈팡질팡하는 것도 어렵다는 사실을 매일 느끼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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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군가에겐 음식인 것  -제5화①누군가에겐 음식인 것 -제5화①

    추리과학소설 '해석기관'박상민 | 2015. 08. 14

    제5화. 만물은 독이니①“어찌하여 만물 간의 거리와 차이가 이토록 커서, 누군가에게는 음식인 것이 또 어떤 자들에게는 맹독이 되는가.” -루크레티우스(고대 로마의 시인, 철학자) 방에서 나오는 바로 그 순간부터 답답하게 죄어오던 검은 드레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