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민의 "추리과학소설 '해석기관'"

과학자를 동경했지만 수학 성적 때문에 문과로 진로를 튼 대학생 성여울, 그리고 과학자의 길을 걷던 중 불의의 사고로 꿈을 접고만 도나혜 석사. 서먹한 자취방 룸메이트인 그들에게 차례로 찾아오는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 두 사람은 과학지식과 경험과 증거를 열쇠삼아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무너져야만 한다면 -제7화①


clock-407101_640.jpg » 출처 / pixabay.com


제7화. 미래




“허나 체제가 더욱 크게 성장할수록 그 파국의 결과는 더욱 참담할 것이기에, 무너져야만 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무너지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시어도어 카진스키(미국의 수학자, 테러리스트)




뒤로 일주일이 지났다.


나혜 언니는 다행히도 목숨을 건졌다. 피투성이가 된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져버린 언니 앞에서 나는 경황없는 와중에서도 어떻게든 구급차를 부를 생각을 해냈고, 바로 병원으로 옮겨져서 수술에 들어간 덕분에 언니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수술을 마치고서 병상에 누워 있는 언니를 본 뒤에야 비로소 머릿속의 폭풍도 진정되었다. 살아 있다. 갑작스러운 일이 일어났지만, 그래도 내 소중한 룸메이트는 이렇게 살아 있다. 그렇게 몇 번이고 확인하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다음에는 경찰과 이야기할 차례였다. 언니를 찌르고서 도망간 범인을 잡아야만 했으니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용의자는 바로 얼마 전에 나와 언니가 해결했던 사건, ‘헬시퀀텀’ 공장의 관계자 중 누군가. 회사를 완전히 뒤집어놓은 셈이니 원한을 품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경찰 조사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원한을 가질 만한 인물은 전부 알리바이가 있었으니까. 주변인들까지 조사해 보았지만 나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두운 골목길이었기에 범인의 인상착의는 거의 기억나지 않았고, 시시티비(CCTV)에 제대로 찍힌 것도 없었다. 수사가 난항에 빠진 이 시점에서 다행스럽게도 수수께끼 풀이의 전문가가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했다. 내가 할 일은 전문가에게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과학자 룸메이트는 사실의 조각들을 꿰어 보이지 않던 진실의 윤곽을 드러내 줄 테니까.


단지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는 게 문제지만.


00openclipartorg_7_1.jpg 나혜 언니는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칼에 찔려놓고도, 범인을 알 수 없다는 말을 듣고도, 정체불명의 범인에게 당한 직후인데도! 수수께끼가 있으면 정신 못 차리고, 밤을 새서라도 어떻게든 해답을 찾아내고야 말던 사람이, 이제는 병상에 가만 앉아서 명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가끔씩 한두 마디 하는 것 빼고는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건의 충격이 너무 커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더 지나도 나혜 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마치,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사건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 그래요, 언니?”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대면해 온 그 어떤 수수께끼보다도 큰 수수께끼 앞에서, 나혜 언니가 입을 다물어버린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무서워서 그래요? 더 파헤치면 또 이런 일을 당할까봐?”


언니는 아주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서워하는 건 아니었다.


“그럼 아직 회복이 덜 돼서? 괜찮아요. 저는 멀쩡하니까 발로 뛰는 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번에도 언니는 그럴 필요 없다는 몸짓만을 취했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이런 건, 이런 언니는 너무나도 익숙하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익숙한 모습이기도 했다. 첫 번째 사건을 해결하기 전, 중학교 동창의 사촌동생이 어린이 과학캠프에서 겪은 일의 진상을 파헤치기 전 언니가 딱 저랬으니까. 룸메이트면서도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앉아 있기만 했던,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무뚝뚝하고 사교성이 없었던 바로 그 도나혜라는 사람. 지금의 언니는 딱 그때의 언니 같았다.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만 같았다.


단지, 이번에는 내가, 그때와는 다르다는 게 문제다.


그날 내가 들고 온 수수께끼에 나혜 언니가 반응한 그 순간부터 많은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때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일들을 지금의 나는 겪어 왔다. 버려진 게시판에 올라온 수수께끼의 영상을 해독했고, 갑작스레 쓰러진 교수에 얽힌 비밀을 풀었으며, 폭발과 독살을 지나왔고 사기꾼에게 위협 당하기까지 했다. 단지 수수께끼가 남아 있으면 잠을 못 자는 룸메이트에게 질질 끌려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고민하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과 관찰을 통해 답을 찾아내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수수께끼 풀이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답으로 향하는 길은 존재하리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믿게 되었다.


그런 내게 또다시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 찾아왔다. 평범한 사건이 아니었다. 지금껏 함께 수수께끼를 풀어 온 룸메이트가,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 칼에 찔렸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예전의 나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이런 사건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미 모든 것이 바뀌었다. 뒤로 돌아갈 수 없다면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나혜 언니가 이 사건에 뛰어들지 않겠다면 이번에는 내가, 지금까지 배운 것을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할 때였다.


“그러니까 말리지 마세요, 언니. 언니한테 이런 짓을 한 놈이 누군지, 궁금해서 도저히 못 참겠으니까.”


병상에 가만히 앉은 채로, 언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취방으로 돌아와서 의자에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서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려 본다. 방에 혼자밖에 없는 감각은 조금 이상하지만 집중하기에는 오히려 더 좋다. 지금은 처음으로, 나 혼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니까.


문제해결의 첫 번째 단계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가장 큰 수수께끼는 물론 나혜 언니를 찌른 범인의 정체이다. ‘헬시퀀텀’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갑자기 언니를 찌른 걸까? 강도는 아닐 것이다. 돈도 귀중품도 빼앗지 않았으니까. 무차별 범죄일까? 그렇다면 옆에 있는 나를 가만 놔두고서 언니만을 찌르고 도망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어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감정일까? 누가 나혜 언니에게 앙심이라도 품은 걸까?


그리고 이 질문은 두 번째 커다란 의문으로 이어진다. 왜 나혜 언니는 가만히 있을까? 자기 일에도, 가족 일에도, 룸메이트의 중학교 시절 친구의 사촌동생의 일에도, 심지어 엉터리 치료기기 안에 들어 있는 쪽지 한 장에도 반응해서 수수께끼를 풀겠다고 머리를 싸매던 사람이, 왜 자기가 칼에 찔리는 초유의 사건에서는 입을 다물기로 결심했을까? 분명 이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냥 이상한 일이라고 넘길 수는 없다. 분명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테니까. 모든 수수께끼에 의문을 품는 사람이 이번 사건에는 조금의 관심조차 없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야 당연히-


“-수수께끼가 아니라는 거지.”


나혜 언니에게는, 자신이 칼에 찔린 게 전혀 수수께끼가 아닌 건 아닐까? 그렇다면 관심조차 없는 것도 이해는 간다. 언니는 그런 사람이니까. 궁금한 것엔 온 신경을 쏟지만, 그렇지 않다면 철저하게 무관심해질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이 사건의 진상이 전혀 궁금하지 않은 이유는?


00openclipartorg_7_2.jpg “답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답을 아는 문제만큼 시시한 건 없다. 이미 나혜 언니의 머릿속에 해답지와 풀이과정까지 전부 들어 있다면 더 이상 의문도 수수께끼도 없다. 다시 말해서, 언니는 도대체 누가 왜 자신을 칼로 찌르고 도망쳤는지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모든 의문이 해소되지는 않는다. 만일 답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함께 사건을 해결해 온 나에게 왜 언니는 이번 사건의 진상을 말해주지 않는 걸까? 그러고 보니 내가 언니에 대해 아직 모르는, 언니가 말하려 하지 않는 주제가 하나 있다.


“연구실 다닐 때 일이랑 관련되어 있구나.”


언니가 아직 ‘과학자’였을 때, 박사과정을 진행하며 연구실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던 때, 그러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바로 그때. 언니는 그때의 이야기를 한 번도 제대로 한 적이 없다. 개인적인 일이라고 생각해 나도 캐어묻지는 않았고. 하지만 만일 이번 사건이 나혜 언니의 과거와 관련되어 있다면, 언니가 다녔던 연구실에 분명 해답의 조각이 떨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곳으로 향할 단서를 갖고 있었다. 지난번 사건에서 언니가 공장 사장의 환심을 사기 위해 꺼낸 이름, 과학자 룸메이트가 많은 걸 배웠다는 전 지도교수의 이름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유범운 교수님?”


다짜고짜 보낸 메일에 언니의 전 지도교수는 친절하게 답장을 보내 주었고, 중간고사 기간이었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내 방문했더니 반갑게 맞이해주시기까지 했다. 그 반가운 환대의 대부분이 연구 성과 소개와 실험실 견학이긴 했지만. 알지 못하는 실험도구와 그래프, 그리고 혼란스러운 생각 속에서 헤매다가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가기까지는 수십 분이 걸렸다. 유 교수는 안경을 고쳐 쓰며, 기억을 더듬는 듯 한참 먼 곳을 보더니 아득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나혜 학생 이야기라고요?”


“네, 교수님. 기억나시나요?”


“기억하다마다요. 그런 큰일이 있었는데.”


직접 말을 꺼내기 싫어하는 기색. 그럴 만도 했다. 교수 입장에서도 실험실에서 일어난 대형 사고를 일부러 기억해내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궁금한 건 나혜 언니의 오른손에 대한 게 아니다. 오래전의 부상은 아무래도 좋다. 바로 얼마 전에 상처를 입었으니까.


“그런 일이 있었나요? 세상에, 운도 없지.”


내 정황 설명에 그렇게 반응하더니, 다시 안경을 고쳐 쓰고, 한 템포 쉬고,


“혹시라도 여기 다니던 시절 일과 관련된 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서 찾아온 거죠?”


“혹시 기억이 나시는 게 있나요?”


유 교수는 한참 동안이나 기억 속을 헤매는 듯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목소리를 냈고, 그 내용은 바로 내가 찾아 헤매던 정보였다.


“박사과정 동기랑 큰 갈등이 좀 있었죠.”


“어떤 갈등이었는데요?”


“뭐, 연애사였죠.”


이건 기대하던 게 아니었지만. 듣고 싶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아니, 사실 관심이 아주 많기는 했다.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우고 교수의 목소리를 경청하게 될 정도로.


아주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00openclipartorg_7_3.jpg 나혜 언니와 함께 입학해서 아직까지 이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정윤하라는 사람이 있는데, 언니가 박사과정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이 사람이 언니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것 같다. 적어도 당시 학생들이 하는 얘기를 듣자면 그런 정황이 보였다면서 교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연구실 내에서 연애하는 건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지만요. 연애도 문제지만, 깨지면 분위기가 엉망이 되니까.”


연애를 한 건 아니었다. 남자 쪽에서 일방적으로 고백했고, 남자한테 하나도 관심이 없는 우리 언니는 놀랍도록 무뚝뚝한 태도로 일관했을 뿐이지. 지극히 언니다운 태도였지만 물론 사태를 진정시키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차였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정윤하라는 사람은 점점 더 예민해져서 거의 싸움이 나기 일보직전의 상황까지 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고 한다. 실험을 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면서 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와중이었으니 나혜 학생이 실수를 한 것도 이상하지 않죠.”


“실수요?”


“그 일이요. 실험장비를 다루다가 그렇게 됐으니까요.”


아, 그런 정황이라는 거군. 언니가 그 일 때문에 갑작스럽게 실험실을 나오게 되었다면, 그 정윤하라는 사람의 마음속 앙심이 해결되지 않고 아직까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스토킹이라도 하고 있던 걸까? 그러다가 언니를 가까이서 보고서 분을 참지 못하게 된 걸까? 자취방에 늦게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던 걸까?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아뇨, 그건 아닐 겁니다.”


유 교수는 내 추리를 단호히 부정했다.


“윤하 학생은 알리바이가 있거든요. 언제나 그러긴 하지만, 그날도 늦게까지 실험을 하느라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짧게, 하지만 의미심장하게 한 마디 덧붙이는 건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학생 뜻대로 움직여주는 사람이 있었을 수는 있죠. 그냥 가설이지만요.”




정적인 증거를 손에 넣은 뒤부터는 모든 일이 간단하게 풀려나갔다. 정윤하의 뜻대로 움직여 주는 사람이라면 아마 가족이나 친한 친구일 거라 생각해, 소셜 네트워크를 뒤져 간단한 신상정보부터 알아내 보니 바로 단서가 잡혔으니까. 정윤하는 이혼한 아버지가 홀로 키웠으며, 아무래도 아버지의 기대를 어마어마하게 받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자랑인 그 아들이 여자 문제로 오래도록 고민하며 연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다면? 아들이 대기업에 입사할 거라고, 혹은 교수가 될 거라고 굳게 믿는 아버지가 극단적인 수를 쓴 건 아닐까? 한 가지 가능한 가설이었다. 적어도 경찰에 제보해 볼 가치는 있었다. 


“그리고 그게 정답이었던 것 같네요.”


이제 많이 기운을 차린 언니에게,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다시 한 번 말했다. 언니의 옛 연구실에 방문해서 교수와 이야기하고,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경찰에 신고해, 결과적으로 범인의 검거까지 이어진 일련의 일들을. 정윤하의 아버지는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순순히 전부 털어놓았다. 집에서는 범행에 사용된 칼도 발견되었다. 물증도 동기도 모두 명확했다.


“고마워.”


언니는 정말로 오랜만에 목소리를 냈다. 전혀 놀라는 기색이라고는 없이, 이런 결론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조용하고 담담한 한 마디였다. 그리고 내 대답은,


“아직 끝난 거 아니거든요?”


범인은 찾아냈다. 하지만 두 번째 수수께끼가 아직 남아 있다. 나혜 언니는 정말로 이 사건의 진상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확실한 사실부터 짚고 넘어갈게요. 언니는 이번 일이 그 정윤하란 사람이랑 연관되어 있단 걸 알았죠. 처음부터는 아니었을 거예요. 아마 언니가 깨어나고 나서, 제가 ‘헬시퀀텀’ 사람들은 알리바이가 있었다는 얘기를 해 준 순간부터겠지.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빠졌으니 두 번째 가능성을 바로 떠올렸는데, 그게 정윤하였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 연구실에 있었으니까 오래도록 퇴근 못 하고 있을 정윤하 본인은 범인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을 거고, 그 사람 가족 사정은 같이 일할 때 들어서 알고 있었을 테니 아버지가 범인이라고 추측했을 거고. 그런데 말이죠, 왜 이걸 저한테 바로 말해주지 않았을까요?”


희미한 단서라면 있다. 연구실에서 큰 갈등을 빚은 뒤에 기다렸다는 듯 일어난 사고. 정말로 언니의 실수일까? 그 연구실에 언니에게 원한을 단단히 품은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단순한 실수 때문에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 말고도 다른 가설을 생각해낼 수 있지 않을까? 만일 언니의 손을 앗아간 그 폭발이 그저 사고가 아니었다면, 언니가 이렇게 입을 다물어버린 것과도 어떤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사건 현장에 있었던 것이 아니니 이 이상으로 가설을 펼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눈 앞에는 증인이 있다. 사고에 휘말렸던 바로 그 당사자가,


나혜 언니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네 생각대로야. 그건 사고가 아니었어.”


오른손의 갈고리 모양 의수가 병상 가장자리를 톡, 톡, 두드렸다. 시곗바늘처럼. 진실이 다가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이.




발 사고에 휘말린 나혜 언니는 그때도 지금처럼 병상에 누워 있었다.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분명히 실수한 게 없는데 도대체 왜 폭발이 일어난 걸까? 의문이 있다면 해결해야만 했고, 생각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덕분에 언니는 병상에 앉아 사건 당시를 몇 번이고 떠올리며 하나하나 분석해 볼 수 있었고, 그 결과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폭발을 유도했다는 결론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연구실 구성원 중 하나일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친 순간 언니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사람이 있었다.


00openclipartorg_7_4.jpg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사람이 날 좋아한다는 것도 몰랐어. 평소처럼 그냥 연구만 했을 뿐이야. 내 할 일 하고, 남 실험 도와주고, 궁금한 게 있으면 밤새서 답을 찾고. 다른 일에는 관심도 없었지.”


바로 그 태도가 화를 불렀다는 것을, 내 룸메이트는 그때서야 깨달은 것이다. 관심없는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이, 궁금한 일에 너무 몰두한 것이, 연구에만 열심이었던 것이 사건의 불씨였다는 걸.


“그리고 다들 문병을 왔을 때 한 가지를 더 깨달았지. 진실을 알아냈지만, 알려 봐야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걸. 아무도 이 일을 공론화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어. 사건 현장은 치워버렸고, 증거는 사라졌고, 교수님도 자기 연구실에서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걸 절대 인정하려 하지 않을 거고. 내 부주의였던 걸로 하는 게 편했을 테니까.”


그래서 언니는 연구를 그만두었다. 연구실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그저 궁금한 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진실을 찾아내고 싶었을 뿐인데, 그런 게 좋아서 과학을 했을 뿐인데, 과학과는 상관도 없는 일에 이렇게 당하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아무도 그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런 건……, 내가 원하던 게 아니었어.”


가장 말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언니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울고 있지는 않았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가 눈물처럼 뚝뚝 떨어졌다. 타로 카페에서 폭발에 휘말렸을 때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가냘프게 떨던 언니가 문득 생각났다. 단지 부상당한 기억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수께끼를 풀어도 자신의 실수만이 드러날 뿐인, 진실을 밝혀내도 알릴 수조차 없는 상황의 기억이 덮쳐왔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이번에도 진상을 알아채는 순간 언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과거의 충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내 소중한 과학자 룸메이트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 두 마디였다.


“그건 언니 잘못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아직 이상한 점이 남아 있기도 하고.”




니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미 뭐라고 대답할지는 생각해 둔 뒤였다. 지금 내 소중한 룸메이트에게 필요한 건 수수께끼였다. 언제까지고 끈적하게 발목을 붙잡는 기억 따위가 아닌, 미래를 바꿔놓을지도 모르는 거대한 수수께끼. 의문이 전부 해소되어간다고 느끼려는 순간 그 수수께끼의 한 조각이 어느새 태어나, 내 머릿속에서 톱니바퀴처럼 끊임없이 빙빙 돌고 있었다.


00openclipartorg_7_5.jpg “생각해 봐요, 언니. 시간이 이만큼이나 지났는데도, 정말 정윤하라는 사람은 아직까지 연구에 지장이 갈 정도로 언니한테 집착하고 있었던 걸까요? 그렇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면 진작 언니한테 연락을 하든, 해코지를 하든 하지 않았을까요? 왜 그 사람의 아버지는 이제 와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걸까요?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오히려 아들 연구에 지장을 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을까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언니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아왔다. 내 말도 그에 비례해서 더욱 빨라졌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언니를 찌르러 왔다는 건 뭔가 납득이 가지 않아요. 무슨 계기가 있지 않고서야.”


“계기?”


“기억 안 나세요, 언니?”


지금으로서는 단순한 의혹 제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완전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소름끼치는 우연 하나가 있다. 언니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눈을 크게 떴고, 그 순간 시곗바늘이 더욱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거의 사고로부터 벗어나, 크게 뒤집힐지도 모르는 미래를 향해.


<제7화 ②에서 계속>  


박상민 광주과학기술원 대학원생(화학전공)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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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민 광주과학기술원 석사과정 대학원생, 화학 전공
화학 전공 대학원생 겸 초보 작가. 과학이 좋은지 글쓰기가 좋은지 계속 갈팡질팡했지만, 지금은 죽을 때까지 갈팡질팡하기로 결심했다. 제대로 갈팡질팡하는 것도 어렵다는 사실을 매일 느끼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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