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민의 "추리과학소설 '해석기관'"

과학자를 동경했지만 수학 성적 때문에 문과로 진로를 튼 대학생 성여울, 그리고 과학자의 길을 걷던 중 불의의 사고로 꿈을 접고만 도나혜 석사. 서먹한 자취방 룸메이트인 그들에게 차례로 찾아오는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 두 사람은 과학지식과 경험과 증거를 열쇠삼아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알아야만 한다 -제6화 ②

◐ 전편 '상자 속 입자 ①'에서 이어집니다.



labyrinth.jpg » 출처 / Pixabay.com



제6화. 상자 속 입자




“어리석은 ‘우리는 알지 못하리’ 정신에 대항하는 우리의 슬로건은 이러하리라: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다비드 힐베르트(독일의 수학자)




“확실한 게 없다면 모든 가능성을 따져보는 수밖에.”


숙박업소의 낯선 침대 위에서 눈을 떴을 때, 나혜 언니는 이미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서 내게 대뜸 그렇게 말했다. 늦게 잔데다가 잠을 설치기까지 한 내가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다행스럽게도 내 룸메이트는 과학자인 동시에 과외 선생님이기도 했고, 잠기운에 푹 빠진 뇌가 기지개를 켜는 동안 기다려 줄 정도의 인내심은 있었다. 기다려도 이해를 못 하는 학생에게 부연설명을 해 줄 만큼의 친절함도.


“그 공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지, 누가 연관되어 있을지, 확실하게 아는 건 없어도 가능한 시나리오는 세워 볼 수 있어. 가능한 한 전부 떠올려 보고, 그 중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걸 골라보자.”


00openclipart_622.jpg 비틀비틀 일어나 몸을 씻으면서 나는 언니의 말대로 그 ‘모든 가능성’이란 것을 생각해 보았다. 양자치료기를 가장한 빈 상자 속에 들어 있던 구조 요청, ‘헬시퀀텀’ 공장에서 보고 들은 여러 정황증거들, 그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는 한 가지 결론을 떠올릴 수 있다. 공장에 한때 누군가가 있었고, 지금은 없다는 것. 그리고 이 결론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의문이 피어난다. 그 사람은 누구일까? 왜 공장에 왔고, 왜 지금은 없는 것일까? 구조 요청을 보낸 건 그 사람이겠지? 그렇다면 왜 그런 쪽지를 넣은 걸까?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이 의문들을 설명할 수 있는 시나리오 역시도 무수히 많겠지만, 그 중에 실제로 일어난 것은 하나뿐일 것이다. 그리고 과학자 룸메이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수히 많은 그 가능성 중에서 일어났을 확률이 가장 높은 단 한 가지를 골라내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시나리오가 제일 확률이 높은지, 그건 어떻게 알아내죠?”


샤워를 하고 나오면서 던진 질문에, 이미 나갈 채비를 마쳐놓은 나혜 언니는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나름대로 기준을 세우는 수밖에. 논리적으로 타당한 기준으로.”


멍한 얼굴로 쳐다보니 이번에도 부연설명이 날아왔고,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새로 생겨나는 의문이 적을수록, 실제로 일어났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는 거야.”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는 동안에 하나가 더 날아왔다.


“이를테면 이런 시나리오를 세워보자. 공장에 누군가 있었는데, 외계인이 내려와서 납치해간 다음에 모든 목격자의 기억을 조작한 거야. 실종 원인을 설명하는 한 가지 가능성이지.”


“하지만 그 시나리오가 의문을 해결해준다고 해도, 다른 의문이 생긴다는 거죠? 외계인이 존재하는지, 왜 하필 그 사람을 납치했는지, 어떻게 기억을 조작했는지, 같은 것들 말이에요.”


“바로 그거야. 기존의 의문을 많이 해결할수록, 새 의문이 적게 생겨날수록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라고 가정해 보고 시작하자고.”


안개상자 속에서 나아갈 길이 정해진 기분이었다. 여전히 엷고 희미한 길이었지만, 그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 방향만큼은 확실했다. 모텔을 나선 나와 언니의 목적지는 물론 ‘헬시퀀텀’ 공장이었다. 다시 수수께끼의 상자 속으로 들어가서, 사라져버린 입자의 수수께끼를 풀어 볼 때였다.




이지 않는 입자라 할지라도 찾아낼 수 없는 건 아니다. 지나가며 다른 물질과 충돌하고 반응한 흔적, 전자기장에 일으킨 요동, 그런 것들을 통해 직접 관측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입자의 성질에 대해 알아낼 수 있다. 지난번에는 이 공장 안에 누군가가 있었으리라는 존재의 흔적만을 겨우 찾아냈다면, 오늘 할 일은 그 사람이 어디에서 왔고 또 어디로 갔는지 그 궤적을 뒤따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문제의 실종자와 충돌하고 반응했을 다른 입자들을 관측해 볼 필요가 있었다.


“솔직히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지.”


사장실 문을 두드리며 나혜 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의 처형대로 끌려가는 죄수의 표정이었다.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주워섬기는 양자역학, 대책 없는 긍정론, 그 모든 것을 정말로 순수하게 믿어 마지않는 태도의 사장이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자에겐 거의 마왕이나 다름없게 느껴지겠지. 그렇게 홀로 마왕을 상대하러 떠나면서 나혜 언니는 내게 임무를 하나 남겨두었다.


“다른 직원들하고 얘기해 보면 되죠?”


“계속 가능한 시나리오를 생각하면서. 뭔가 알아내면 바로 메시지 보내 줘.”


“맡겨만 주세요.”


이 공장에 직원이라고는 연구원 하나, 그리고 양자치료기를 조립하고 포장하는 아주머니 몇 분이 전부. 이들 중 누군가는 분명 의문을 해결해 줄 진실의 조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트로트가 울려 퍼지는 작업대로, 텅 빈 상자를 분주하게 조립하고 계신 아주머니께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게 내려진 임무가 쉬운 게 아니라는 사실은 금방 밝혀졌다.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가 딱 한 곡뿐이어서 귀에 심하게 거슬렸기 때문도 아니었고, 어머니의 친구분들이나 친척들과 이야기할 때 종종 겪는 취직 걱정-결혼 걱정-그 외의 모든 것들 걱정 레퍼토리가 시작되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 공장의 직원들은 전부 긍정주의에 푹 빠져 있었으니까. 그 ‘푹 빠져 있다’는 게 어느 정도인가 하면, ‘부정적’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해고, 실직, 어려움, 피곤함, 그 외의 모든 부정적인 어휘를 쓸 때마다 매번 똑같은 지적을 받아야 하니 정보 수집은커녕 대화가 이어질 기색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번에 말씀하신 그 젊은 직원이 말이죠, 혹시 무슨 사고라도……,”


“또, 또 그런다! 긍정적인 생각만 하고 살아도 인생이 짧다니깐? 학생이 얼마나 그런 말을 많이 쓰고 다녔는지 이제 알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좋은 일이 온다고 과학자 선생님들이 다 말하셨다니까?”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부정적인 어휘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그래도 뭔가 확실한 것 하나는 건지고 싶었기에, 나는 머릿속을 굴러다니는 단어를 가능한 한 그러모아 어떻게든 질문을 만들어보았다. 그 결과는 이런 애매모호한 문장일 뿐이었지만.


“그럼 정말로 그 젊은 직원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건가요?”


그리고 그 대답 역시도 애매모호할 뿐이었다.


“남 일에 괜한 걱정해서 뭘 해? 그럴 시간에 긍정적인 생각을 더 해야지.”




휘의 절반가량이 묶여버린 어려움 가운데서도 작업 중인 직원 전부와 이야기를 마쳤지만, 그 고생을 하고서도 해소된 의문은 거의 없었다. 단지 사장이 작은 전자제품 공장에서 해고당한 ‘젊은 직원’을 하나 데려왔고, 가난하게 혼자 살던 청년인데 사장이 먹여주고 재워주며 일을 시켰지만, 잘 나오다가 어느 순간부터 안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을 뿐. 하지만 그것만이 성과의 전부는 아니었다. 무엇이 진실일지는 아직 모르더라도 무엇이 진실이 아닐지는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비록 사장의 터무니없는 긍정론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이지만, 정말로 이 공장에서 무슨 사건이 일어났다면 적어도 이 직원들은 범인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부정적인 생각조차 안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부정적인 행동은 무슨 수로 하겠어?’


이 사람들은 진심으로 사장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이 파동이 되어 우주로 퍼져나가 부정적인 일을 가져올 거라고 믿고, 조금이라도 불길하거나 나쁜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사건사고 소식으로 가득한 뉴스도 보지 않고, 애초에 바깥과 연락하는 경우조차 적다. 그렇게 수도사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나쁜 마음을 먹고서 나쁜 일을 저지를까? 그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럴 사람이 왜 이 곳에 남아 있겠어?


‘하지만 문제는,’


어설프게 지워진 화이트보드, 빈 신발장, 그 모든 것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보면서 내 생각은 빠르게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신나는 음악으로도 덮을 수 없는 불길함이 분명 이 공장에는 있었다. 적어도 누군가가 치료기 안에 도와달라는 쪽지를 넣은 건 사실이고, 누군가가 사라진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누군가는 나쁜 일을 했으리라는 거지.’


나혜 언니가 사장실에서 나오기까지는 두 시간 정도가 걸렸고, 걸어 나오는 언니의 표정은 짜증이라든지 피곤을 넘어서 거의 인생에 대한 회한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당장 달려가서 위로해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그저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듯 사장은 언니에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으니까.


“그 유범운 교수한테 말 좀 잘 전해주세요! 아, 이럴 때가 아니지. 과학 공부했으면 진짜 연구실을 보고 싶어할 텐데! 지금 당장 보여줄 수 있어요. 아주 대단하거든.”


그러고서 사장은 연구원을 소리쳐 불렀고, 연구원은 바쁘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또 ‘긍정적으로 말하라’는 핀잔을 듣고, 언니는 사장에게 이끌려 속절없이 연구실로 향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휴대폰 메시지로 내게 물어보는 것뿐.


‘뭐 좀 나왔어?’


‘젊은 직원 얘기요’


‘그건 사장한테도 들었어. 증거는?’


‘별 거 없었어요’


연구실 안에서 고통을 받고 있을 언니는 내 실망스러운 대답에서 바로 뭔가를 읽어낸 모양이었다.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 하나를. 우리가 찾고 있는 문제의 직원이 숙소와 작업장만을 왕복했을까? 다른 곳에 머물렀을 확률은 없을까?


‘공장 바깥은 찾아봤어?’


그 다음에 덧붙인 한 마디는 참으로 과학자 룸메이트다웠다.


‘상자 속 입자 모델에서도 문제가 되는 건 경계선이야’




장 뒤편의 공터에는 잡동사니가 군데군데 쌓여 있었다. 낡은 탁상이며 작업대, 공구들, 합판과 철물들. 그런데 그 어지러운 공간에서 어지럽지 않은 것이 딱 하나 있었다. 합판 사이에 놓인 책상과 의자만큼은 어쩐지 정돈된 분위기를 풍겼다. 수상한 것을 찾아냈다면 지체할 이유는 없는 법. 즉시 책상 서랍을 열어보았더니 눈에 띈 것은- 이 공장에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책 한 권이었다.


“『쉽게 이해하는 양자역학』.”


00openclipart_623.jpg 제목의 ‘쉽게 이해하는’이라는 부분은 약간 허위 과장광고에 가깝다는 사실을 나는 책을 펴자마자 깨달았다. 양자역학을 아무리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한들, 현대물리학에서 가장 난해한 개념 중 하나를 오류 없이 설명하려면 어느 정도 어려워지는 것은 감수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명백한 것이 몇 가지 보였다. 밑줄, 메모, 접힌 자국. 이 책의 주인은 독서에 아주 열심이었으며, 노력의 결실을 맺어 나름대로 양자역학을 이해해나가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다시 가능한 시나리오를 떠올려 볼 때였다. 이 책의 주인은 누굴까? 사장이 양자역학을 이만큼 이해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연구원이라면 조금 더 가능성이 높았지만, 지난번에 본 피피티(PPT)의 수준을 생각하면 그 사람 역시 양자 신비주의에 더 마음이 기울어 있을 것이다. 그럴듯한 과학 용어와 알기 쉬운 긍정론에 푹 빠진 직원들에게는 이 책의 수준이 결코 쉽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 전자제품 공장에서 일했던, 그래서 약간이나마 물리학이나 공학을 접한 적이 있을 젊은 직원이라면? 이 가능성이 아무래도 제일 높았다.


그리고 그 가능성으로부터 다른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들이 의문을 하나하나씩 해결하며 줄기를 뻗어나간다. 물리학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이 있던 젊은 직원은, 사장이나 연구원이 말하는 양자역학 이야기에 대해 조금이나마 의심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긍정적 사고가 지배하는 닫힌 상자. 의혹도 비판도 용납되지 않고 말조차 꺼낼 수 없는 분위기. 그런 곳에서 품은 의심을 해결하려면, 몰래 숨어서 양자역학을 공부하는 방법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게 위험한 일이 되었구나.”


불길한 부정적 사고가 확 머릿속을 덮쳐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무의식중에 그렇게 말했다. 젊은 직원은 분명 의심을 품고 있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공장에서 부정적인 것은 전부 사라져야만 한다. 외부와는 연락조차 하지 못하게 하고, 24시간 직원들과 숙식을 같이하는 곳. 이곳에서 자신의 의심을 들킨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로 ‘부정적인’ 일이 일어나고 마는 건 아닐까?




지만 마지막 의문 하나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젊은 직원이 구해달라는 쪽지를 넣을 이유는 충분했다. 위협적인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누가 그런 일을 했느냐는 건 다른 문제였다. 이미 확인했듯이 직원들은 나쁜 짓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긍정적’이었으니까- 조직 내의 불순분자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마음가짐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이 범죄만이 아니야.”


이를테면 사기. 빈 상자나 다름없는 치료기기를 절박한 환자들에게 팔아서 돈을 챙기는 일. 나쁜 마음을 먹어야 할 뿐만 아니라, 들통이 났을 때를 대비한 위기관리 능력도 필수적이다. 그리고 사업. 경영의 기본은 위기에 대처하는 것. 긍정적인 생각만으로는 기업을 일굴 수도 없고 사기를 칠 수도 없으며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도 없다. 부정적인 일을 생각하고, 나쁜 가능성들을 떠올리고, 최악의 사태를 상정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한 가지 가능성이 걸러지고 나머지 하나만이 남는다.


긍정론을 굳게 믿고 직원들에게 전파한 사람, 우리를 의심조차 하지 않고 모든 정보를 공개한 사람, 정말로 자기 회사의 양자치료기가 대단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 범인일 가능성은 낮다.


이 공장에서 유일하게 ‘바쁘다’면서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 그래서 몇 번이고 핀잔을 받았던 사람, 하지만 이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연구’가 실제로는 사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면?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다. 가능성을 계산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최악의 가능성이 이미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연구원의 한 손에는 큼지막한 스패너가 들려 있었고, 눈빛은 명백하게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했다.


00pixabay_spanner.jpg “대놓고 뒤를 캐고 다니면서, 여기에 바보만 있는 줄 알았냐?”


한 발짝,


“너랑 같이 온 여자 말인데, 아무래도 수상해서 그 유범운 교수라는 사람한테 메일을 넣어 봤지. 박사과정 때려치고 나간 지 오래라면서?”


또 한 발짝.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떨리는 목소리라도 어떻게든 내 본다.


“어제 뒤를 밟은 것도 당신이었나요?”


“양자가 어쩌구 저쩌구, 재밌게도 얘기하더라? 이 공장은 그런 똑똑한 놈이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야. 연구한답시고 사장이란 놈한테 타먹은 돈이 얼만데, 그 젊은이도 그렇고 너희들도 그렇고 남의 사업을 방해하면 안 되지!”


이제 연구원은 두 발짝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더는 물러날 곳도 없다. 상대는 사장을 속여 넘겨 아무 효과도 없는 치료기를 팔게 한 사기꾼이고, 아주아주 높은 확률로 흉악한 범죄자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가능성을 점치는 머릿속 계산기는 계속해서 부정적인 결과만을 토해낸다. 도망칠 수 있을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가능하긴 한 걸까?


“그거 아냐? 여기 사람들은 너무 긍정적이어서, 너희들이 대놓고 없어져도 의심도 안 할 걸? 사장이랑 직원들만이 아냐! 그 젊은이도 멍청하지. 빈 깡통을 비싼 돈 주고 사는 놈들이 그걸 뜯어볼 생각을 하겠냐고!”


“제가 합니다만.”


우울한 계산 사이에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혜 언니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 발짝, 다시 한 발짝. 자로 잰 듯 명확한 걸음걸이였다. 


“계속 여울이가 위험한 데에 간 건 아닐지 찾아보고 오겠다고 하셨죠? 그야 절박하셨던 건 이해합니다만, 이렇게 다들 긍정적인 곳에서 그런 부정적인 태도는 눈에 띕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연구원이 스패너를 들고 언니에게 달려들었지만, 여기서 활약하는 건 물론 보통 사람들이 잘 생각하지 않는 가능성이었다. 오른팔의 의수로 스패너를 막아내자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쨍 하고 울렸고, 연구원은 순간이나마 당황했고, 나혜 언니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서 왼손을 힘껏 뻗어- 연구원에게 주먹을 날렸다. 성인 남자가 비틀거릴 정도로, 나조차도 놀랄 정도로 세게.


“언니?!”


그리고 언니 본인도 좀 놀란 것 같았다. 과학자다운 철저한 원인 분석이 뒤따랐다.


“몇 시간 동안 양자 얘기 들어서 그런가 봐.”


물론 그걸로 연구원을 쓰러뜨릴 순 없었다. 한 대 때렸다고 해서 체격조건의 불리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아무리 양자역학 때문에 짜증이 나 있더라도 맨몸으로 혼자 싸움을 벌이겠다고 나설 내 룸메이트가 아니었다. 경찰차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져왔다. 망연자실한 표정이 연구원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 표정 앞에서 나는 이 말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부족했나보네요.”




런저런 일을 마치고 자취방이 있는 동네로 돌아왔을 땐 이미 한밤중이었지만, 피곤한 가운데서도 나는 언니에게 양자역학 얘기를 좀 더 해달라고 졸랐다. 어려운 물리학을 갑자기 즐기게 된 건 아니었다. 단지 쉽지만 부정확한 설명에, 과학을 빙자한 달콤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어려운 것을 쉽게 생각하고 싶은 건 당연한 본능일지도 모른다. 이 정도 이해했으면 됐다고 생각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설명만 받아들이는 게 덜 귀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가 사기에 넘어가는 거라면, 부정확한 믿음에 온 삶을 바치는 거라면, 그 믿음에 남들까지 전부 끌어들이고 마는 거라면 나는 얼마든지 어려운 이론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 경우의 영점 에너지가…….”


00openclipart_621.jpg 물론 이런 얘기를 골목길을 걸어가면서 듣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불쌍한 젊은 직원처럼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공부해야 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며칠 동안 머리가 좀 아픈 건 감수해야겠지. 다행히도 모르는 일이 있을 때 내 곁에는 항상 과학자 룸메이트가 있을 테니까, 어렵더라도 조금씩 물어보면서 답을 구해나가면 되니까. 그렇기에 아직까지도 따라붙는 등 뒤의 서늘함을 떨쳐내며 나는 언니에게 다시 한 번 영점 에너지라는 게 뭔지 물어보려고 했고,


이게 단순한 서늘함만이 아니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연구원이 살의를 품고 바로 등 뒤까지 다가왔을 때의 그 발소리와 기척, 오늘 오후에 느낀 그 섬뜩함을 아직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와 너무나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홱 뒤를 돌아보았고, 그 순간 내 눈에 비친 것은-


누군가가 이미 저만치 도망가고 있었다. 어두운 골목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소리만이 똑똑하게 들렸다. 뭔가 푹 찔리는 소리, 짧은 비명소리, 쓰러지는 소리. 나혜 언니가 한 번 크게 비틀거리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언니! 언니, 괜찮아요?”


내 다급한 물음에 언니는 너무나도 확실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고개를 가로젓고, 떨리는 눈짓으로 감싸 안은 배를 가리킨다. 뚝뚝 떨어지는 소리, 몰아쉬는 숨소리, 비릿한 냄새. 피가 번져나가 언니의 옷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째서? 왜 이런 일이? 머릿속에 수십 가지의 의문이 스쳐 지나갔지만, 언제나 내 의문을 해결해 준 과학자 룸메이트는 이미 차가운 길바닥에 쓰러진 채였다.

<제6화 끝>  


박상민 광주과학기술원 대학원생(화학전공)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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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민 광주과학기술원 석사과정 대학원생, 화학 전공
화학 전공 대학원생 겸 초보 작가. 과학이 좋은지 글쓰기가 좋은지 계속 갈팡질팡했지만, 지금은 죽을 때까지 갈팡질팡하기로 결심했다. 제대로 갈팡질팡하는 것도 어렵다는 사실을 매일 느끼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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