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민의 "추리과학소설 '해석기관'"

과학자를 동경했지만 수학 성적 때문에 문과로 진로를 튼 대학생 성여울, 그리고 과학자의 길을 걷던 중 불의의 사고로 꿈을 접고만 도나혜 석사. 서먹한 자취방 룸메이트인 그들에게 차례로 찾아오는 수수께끼 같은 사건들. 두 사람은 과학지식과 경험과 증거를 열쇠삼아 문제를 해결해나간다.

누군가에겐 음식인 것 -제5화①


nutrient-additive.jpg » 출처 / Pixabay.com




제5화. 만물은 독이니




“어찌하여 만물 간의 거리와 차이가 이토록 커서, 누군가에게는 음식인 것이 또 어떤 자들에게는 맹독이 되는가.”

-루크레티우스(고대 로마의 시인, 철학자)




에서 나오는 바로 그 순간부터 답답하게 죄어오던 검은 드레스는, 버스에서 내려 병원으로 걸어가는 동안 익숙해지기는커녕 끊임없이 몸을 불편하게 만들 뿐이었다. 가을이 오기 전 여름이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는 듯 더운 날씨에, 새까만 옷감은 내리쬐는 햇빛을 닥치는 대로 흡수하면서 점점 무거워지는 느낌조차 들 정도였다. 혹시라도 입을 일이 생길지 모르니 한 벌 마련해두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주장 때문에 사 둔 옷이었지만, 아무래도 살 때 조금 더 몸에 맞는 걸 골랐어야 했다는 후회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밀려왔다. 그렇게 후회 가득한 먼 길을 걸어 에어컨 바람 가득한 병원으로 들어서고 나니 일단 피로는 조금 가셨지만, 그때서야 내 몸을 짓누르던 답답함이 단지 맞지 않는 드레스 때문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이 옷, 이 건물, 이 분위기 모든 것이 미지의 파동을 내뿜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여전히 가슴 한쪽이 답답했다.


00openclipart_health.jpg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조차도 파동에 억눌린 듯 무의식적으로 작아졌다.


“장례식장에서 활기가 생길 수는 없잖아.”


나혜 언니의 친척 누군가가 죽었다. ‘그래도 룸메이트니까 예의상 가 줘야지’ 같은 느낌으로 왔다기보다는, 이제는 이 정도 일에 참석하는 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몇 번이나 함께 이런저런 문제를 해결해 온 사이니까- 언니가 있는 곳은 지하 1층의 3호실이었고,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계단으로 발길을 돌렸다. 여전히 옷은 불편했고 공기의 흐름조차 바깥보다 몇 배는 무겁게만 느껴졌다.



름을 적고, 조의금을 내고, 구두를 비틀대며 벗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내 얼굴을 알 리가 없겠다는 생각에 살짝 머뭇거리는 동안 시선들이 온통 내게로 날아와 꽂혔다. 전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언니의 가족일까? 그리고 그 가족의 지인들일까? 수수께끼 같은 과학자 룸메이트에 대해서 나는 이제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룸메이트마저도 지난번에 폭발 사고를 겪었을 때는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여줬던 것이 곧 떠올랐다.


아직 나혜 언니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자기 얘기를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니, 가족이나 친척들에 대해서 알 수 있을 리가 있나. 전혀 알지 못하는 나혜 언니의 삶 속으로 나는 용기를 내어 들어갔고, 국화꽃을 집어 영정 아래에 놓고, 절을 하고, 나와서 다시 두리번거려 보니 그때서야 이 낯선 공간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언니는 줄지어 놓인 식탁들의 맨 구석에, 사람보다는 검은색 현대미술 조각품처럼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말을 걸고 나서야 비로소 반응이 돌아오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 예쁘장한 조각상은 현대인의 소통 부재를 상징하기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아, 왔네.”


00openclipart_mourn.jpg 기력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목소리로 언니가 말했다. 그야 평소에도 활기찬 목소리를 들려 준 적은 없지만, 이렇게나 맥 빠진 건 또 처음 들어봐서 조금 걱정이 될 정도였다. 친척의 죽음이 쇼크였던 걸까? 그보다는……, 그냥 이 자리에 있는 게 불편한 거겠지. 생전 처음 보는, 저런 걸 갖고 있는지도 몰랐던 검은 옷은 잘 어울리기는 했지만 동시에 이상하리만치 어색하게 보였다. 아니, 첫인상부터 ‘검은 조각상 같다’는 느낌을 준 낯선 어색함이 나혜 언니를 휘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문제를 더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이런 곳에 온 이상 처음 보는 사람들하고 인사를 하게 되는 건 필연이니까. 어디를 보나 평범한 인상의 부부가 내 쪽으로 다가왔고, 그 두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한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네가 그, 같이 산다는 애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질문한 사람은 아마 나혜 언니의 아버지겠지. 그 옆에서 뭐라 설명하기 애매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사람은 어머니일 것이고. 이곳에 오면 언니의 부모님을 만나게 될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으며, 사실 어떤 분들일지 조금 기대도 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두 분은 그냥, 정말로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두 분 앞에서 언니는 뭔가 편치 않은 기색으로 시종일관 딴 데를 보고 있었다.


“나혜야, 아는 사람이 왔으면 나와서 먼저 인사도 하고 그래야지.”


“알겠어요.”


조금 퉁명스러운 대꾸에 나혜 언니의 어머니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나는 사실 작게 웃을 뻔 했다. 내가 아는 룸메이트의 말투 그대로여서, 이 언니는 가족 앞에서도 한결같구나 싶어서. 뭐든지 하나하나 알아간다는 건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나는 요즘 들어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그럼 우리는 그만 가 봐야겠다. 일이 많아서……. 나혜도 점심 아직일 텐데, 여기서 같이 밥이라도 먹고 가렴.”


그럭저럭 인사를 마치고 앉아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몰라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내게, 나혜 언니의 어머니는 친절하게 식사 -주변 식탁에 놓인 걸 보아하니 아니나 다를까 육개장- 을 권하셨다. 하지만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무감각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아뇨, 둘이서 따로 먹고 올게요. 나가서.”


언니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갑자기 일어났고, 나는 자연스레 부모님 두 분의 눈치를 보았지만 딱히 반대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반기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두 분은 시원하게 나를 놓아주었다. 언니한테 신세 많이 지고 있다고, 언제 다시 뵙자고 빠른 인사를 드린 뒤 나는 어느 새 저만치 앞서가는 언니의 손을 붙잡으려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너무 불편해.”


옷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으면서 언니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발걸음을 간신히 따라잡으며 나는 옷이라든지, 아니면 우울하기 짝이 없는 장례식장의 분위기 같은 것에 대한 불평이 따라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언니는 그러는 대신 몸을 홱 틀더니 오른손으로 내 뺨을 쿡 찔렀다. 이건 내 기준에서도 꽤나 갑작스러운 스킨십인데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언니에게서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챘다. 검은색 소매 아래로 보이는 나혜 언니의 오른손은 금속 갈고리가 아니라 진짜 사람 손처럼 보였다. 뺨에 와 닿는 감촉은 그것이 플라스틱으로 된 가짜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전하고 있었지만.


“이걸 끼고 오라잖아.”


그 말과 함께 모든 게 이해가 됐다. 왜 언니가 그렇게 불편한 태도로 앉아 있었는지, 왜 나를 끌고 급하게 장례식장을 나왔는지. 평소에 편하게 쓰던 갈고리 대신에 불편한 미관용 의수를 써야 했고, 그렇다고 해서 가족 친지들의 눈길이 오른손에서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을 시키지도 않고, 전면에 나서게 하지도 않고 나름대로 ‘배려’하거나 애써 무시하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겠지. 그리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어야만 했던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내가 오자마자 도망치듯 장례식장을 나오려고 했던 것도 당연하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다시 마음이 무거워져 왔지만, 그렇다고 티를 내는 건 또 언니를 불편하게만 할 테니까……,


“뭐 먹으러 갈 거예요?”


00openclipart_pattern3.jpg 나는 가장 무난한 선택지를 골라 이렇게 물었고, 언니의 대답은 매우 간단했다.


“나중에. 일단은 따로 갈 데가 있어.”


“어, 어딘데요?”


“궁금한 게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과학자 룸메이트의 목소리야말로 내가 정말, 정말로 익숙한 바로 그 울림이었다. 그리고 그 울림이 내 기존의 가정 몇 개에 수정을 가했다. 이 언니는 물론 친척들과 어색한 옷과 의수 때문에 불편해하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결국 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궁금증이었던 것이다. 나는 장례식장 건물을 나오며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웃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정말로 한결같은 사람이구나, 싶어서.



께 버스를 타고,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에 내려서, 언니의 뒤를 졸졸 따라 아파트에 들어가면서 나는 이 수수께끼의 룸메이트가 도대체 무엇이 궁금해서 장례식장을 뛰쳐나온 건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장례식의 주인공, 언니의 돌아가신 친척분이 그 궁금증의 한가운데에 있는 모양이었다. 아파트 6층 어떤 집의 전자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면서 언니는 설명했다.


“작은엄마야. 작은아빠랑 같이 여기 사셨어. 우리 집 근처라서 어릴 때부터 종종 놀러왔고, 비밀번호도 알고.”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신 거예요?”


“유방암 말기셨거든.”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꺼내면서 언니가 활짝 열어젖힌 문으로, 나는 작게 ‘실례합니다’ 하며 들어갔지만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야 가족들은 전부 장례식장에 있을 테니까. 집 안을 둘러보는 동안 나혜 언니의 설명이 조용히 이어졌다.


“치료시기를 완전히 놓쳤어. 큰아빠는 아까 장례식장 있던 병원 의사에, 작은아빠도 사업 하시는 분이고 되게 현실적인 사람인데……, 뭐 집안이 그렇다고 해서 꼭 현실적인 사람하고 결혼하란 법은 없으니까.”


“어떤 분이셨기에 그래요?”


“보면 알아.”


00openclipart_life.jpg 부엌으로 내 등을 떠밀고, 그 곳의 광경을 보고 나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나도 짐작할 수 있었다. 사방에 놓인 건강식품, 과일과 채소, 유리병 속에서 설탕에 절여져가는 무언가,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알약들이 여러 개. TV 아침방송에 등장하는 ‘건강에 좋은’, 혹은 ‘성인병을 예방하는’ 것들이 이 부엌에 전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자연치유 전도사라고 인터넷에서 꽤 유명했어. 병원 안 가고 식이요법만으로 암 고치는 사람. 건강보조식품 추천하고, 음식 추천하고, 추종자들도 많았고, 정말로 효과 봤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결국 본인이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서 돌아가셨지만.”


약간 차갑게 쏘아붙이면서 언니는 식탁에 굴러다니는 약병을 하나 집어 들었다.


“고용량 비타민제. 비타민 C 과다요법이 온갖 병을 치료해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지. 작은엄마는 그런 걸 정말로 다 믿으시고, 주변 사람들한테도 보내주고 그러셨어. 성분이 뭔지도 모를 약, 효과가 입증되지 않은 요법, 전부 다. 어쩌면 그게 오히려 건강을 심각하게 해쳤을지도 몰라.”


“그럼 언니가 궁금한 건…….”


“이 중에 범인이 있다면, 가능한 한 빨리 찾아내고 싶어.”


룸메이트의 단호한 말을 들으며 나는 온갖 건강식품으로 가득한 부엌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나혜 언니의 작은어머니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독살하고 있었다면, 그래서 암으로 약해져가는 몸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면, 장례식이 끝나고 모든 증거가 묻혀버리기 전에 그 범인을 찾아내서 알릴 필요가 있었다. 다른 가족들, 친구들, 인터넷의 추종자들이 비슷한 피해를 입기 전에. 더 말할 것도 없이 나와 언니는 약병이며 상자 하나하나까지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염소금이란 게 있네. 난 저염소금이라는 말 자체가 싫어. 소금이 적은 소금이란 게 이상하잖아.”


“소금이 몸에 나쁘다고 한참 난리였으니까요. 이 설탕도 브라질에서 공수해온 천연 유기농 설탕이래요. 소금 다음엔 설탕이 악마 취급이었죠.”


“소금, 설탕, 지방, 온갖 필수적인 것들이 악마 취급을 받지. 중요한 건 얼마나 먹느냐인데- 하지만 저염소금이며 천연설탕이 몸에 나쁠 것 같지는 않아. 비싸고 효과는 별로 없겠지만, 아무튼 독이 든 건 아닐 테니까. 그 유리병에 담긴 건?”


“효소 아니에요? 우리 집에서도 담그고 그랬는데.”


“설탕에 과일 넣어놓고 그게 효소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지. 기본적으로는 설탕물이니까. 생물학에서 쓰는 효소라는 단어랑은 다르게, 그냥 있어 보이게 갖다 붙인 이름이야.”


“있어 보이는 이름 하니까, 여기 식탁 밑에 무슨 치료기가 있는데 이름이 되게 근사하네요. 헬시퀀텀 양자진동 치료기래요- 언니 방금 되게 무서운 표정 지었어!”


“양자물리는 학교 다닐 때 그렇게나 어려웠는데, 그걸 쉽게 아무데나 쓰는 사람들이 있어……. 그건 가져가자. 뜯어봐서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게 들어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


그런 것들 이외에도 아가베 시럽이니, 블루베리 추출물이니, 히말라야 석청이니 하는 각종 ‘건강에 좋은’ 것들이 냉장고와 찬장을 가득가득 채우고 있었다. 과학자 룸메이트는 독이 든 꽃의 꿀이 섞여서 종종 사고를 일으킨다는 히말라야 석청에 잠시 관심을 가졌지만, 그게 사람을 죽일 정도로 치명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옆 찬장을 열 때였다. 현관 쪽에서 도어락 버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오실 리가 없는데.”


위기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언니가 말했지만, 완전히 외부인이나 다름없는 나는 그렇게 편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집으로 들어온 것은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애였다. 장례식장에서 어렴풋하게 본 기억도 나는 그 녀석은 우리가 집안에 있는걸 보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누나가 왜 여기 있어요?”


그리고 나혜 언니의 대답은,


“상주가 왜 여기 왔어?”


아무래도 이 남자애가 죽은 작은엄마의 아들, 그러니까 나혜 언니의 사촌동생인 모양이었다. 사촌동생 녀석은 학교며 학원 여기저기에 연락을 돌려야 하는데 휴대폰 배터리가 다 나갔다면서 불분명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우리가 잔뜩 들쑤셔 놓은 부엌 꼴을 보고서 또 놀라며 한 마디 했다.


“이건 또 왜 뒤지고 있었어요?”


“궁금한 게 있어서.”


“누나가 궁금한 거 못 참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렇지 몰래 이렇게 들어와서……. 나가요, 나가. 저도 경황이 없는데 방해하지 말고.”


그렇게 말하면서 녀석은 찬장을 정리해 놓고, 문을 닫고, 투덜거리면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는데, 순간 언니의 왼손이 그 손목을 낚아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나는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과학자 룸메이트의 눈에는 내가 못 본 것이 보인 모양이었다. 황급히 손을 비틀어 빼려는 녀석이었지만 언니는 재빠르게 그 손에 들린 것을 확보한 뒤였다. 언니의 사촌동생은 찬장을 닫는 척 하면서, 약이 든 작은 종이상자를 슬쩍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상자에 쓰인 글자를 나혜 언니는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살구씨 추출 천연 비타민 B17. 이걸 왜 가져가려고 했어?”


사촌동생 녀석은 말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언니의 말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고,


00openclipart_medicine.jpg “비타민 B17. 이건 진짜 비타민이 아니야. 다른 이름은 레트릴, 진짜 이름은 아미그달린. 그럴듯하게 들리게 하려고 사이비들이 근사한 이름을 붙였을 뿐이지. 살구씨나 쓴 아몬드에 함유된 물질인데, 암에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있지만 전부 거짓으로 밝혀졌어. 어머니가 쓰셨던 약이지? 이걸 숨기려고 한 이유가 있을 거야.”


감정의 변화라고는 하나도 없는 추궁 앞에서 녀석은 그저 눈물만을 뚝뚝 떨어뜨리다가, 이내 울먹이며 주저앉을 뿐이었다. 이럴 때 진정시키는 건 내 몫이었고, 한참을 토닥이고 나서야 마침내 그 입술 사이에서 말 같은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아, 아빠가 엄마랑 사이 안 좋았던 거 알죠?”


아마도 나혜 언니의 작은아버지, 그러니까 돌아가신 작은어머니의 남편을 말하는 거겠지. 사이가 안 좋았을 이유라면 어쩐지 짐작이 갔다. 병원에 가지 않고 스스로 병을 고치겠다면서 사들인 수많은 약이며 의료기기들. 냉장고 안에도 천연재료며 건강식품이 가득. 처음에는 그저 안타깝게만 생각했던 남편도 나중에는 치료를 거부하는 아내가 답답하고, 효과 없는 건강식품에 드는 돈이 아까워질지도 모른다. 사소했던 갈등도 투병생활이 지속되며 더욱 커져간다면 얼마든지 파국을 부를 수 있다.


“저 봐, 봤어요. 전날 밤에 그 약이 달랐어요. 아빠랑 엄마랑 맨날 싸웠는데, 약이 달라지고 나서, 그 날 밤에 돌아가셔서…….”


나는 그 애를 다시 진정시켜야 했고, 그러는 동안 룸메이트의 차가운 손은 상자 안의 내용물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작고 납작한 알약들이 들어 있는 은색 포장지 여러 개. 그리고 과연 그 중 단 하나만이 달랐다. 반쯤 비어 있는 그 포장지에 든 알약들은 다른 것보다 조금 더 컸고, 색깔도 다른 것보다 더 진한 색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이 약을 드셨다고? 너는 너희 아빠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해서 증거를 없애려고 한 거고?”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이는 사촌동생을 언니는 조금의 떨림도 없는 눈빛으로 내려다보았지만, 나는 나혜 언니와는 달라서 그럴 수가 없었다. 남의 집안 문제에 끼어드는 건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고, 더군다나 원한에 의한 살인이라면 내가 관여되기에는- 하지만 그런 생각 가운데서도 고개를 드는 마음이 하나 있었다.



00openclipart_lock.jpg가 끼어들든 말든, 이 곤란한 룸메이트는 이번에도 궁금증이 풀릴 때까지 사건에 뛰어들 것이다. 위험해지더라도,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궁금한 게 있으면 잠을 못 자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결국에는 또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그렇다면 나도 그 발견의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 풀이 과정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다른 모든 잡음을 압도했을 때 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입을 열어, 과학자 룸메이트에게 이렇게 물었다.


“뭐부터 알아보면 될까요?”

<제5화 ②에서 계속>  


박상민 광주과학기술원 대학원생(화학전공)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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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민 광주과학기술원 석사과정 대학원생, 화학 전공
화학 전공 대학원생 겸 초보 작가. 과학이 좋은지 글쓰기가 좋은지 계속 갈팡질팡했지만, 지금은 죽을 때까지 갈팡질팡하기로 결심했다. 제대로 갈팡질팡하는 것도 어렵다는 사실을 매일 느끼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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