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호의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

영국 대학의 첨단 실험실에서 기생충학을 공부하던 정준호님이 어느 날 의료봉사단을 따라 아프리카 스와질랜드로 날아갔습니다. 실험실을 벗어나 세상 속으로 뛰어든 그가 아프리카에서 겪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전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과학과 의학의 모습을 아프리카의 시선으로 낯설게 다시 바라봅니다.

[연재] "말라리아 방제 실패는 냉전시대 정치갈등의 산물"

말라리아 질병의 정치경제학 ③ -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 (15)

 

 

 

 

 

말라리아의 정치학

  

00London »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주혈흡충 실험실.

  

 

 

영국 런던 자연사박물관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규모와 소장품으로 유명하다. 고풍스런 외관에 현관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눈을 사로잡는 거대한 공룡 화석, 기둥 구석구석 섬세하게 조각된 생물 다양성, 그리고 지구과학에서 인류 진화까지 방대한 주제를 꼼꼼하게 다룬 솜씨를 보면, 왜 세계 최고의 자연사박물관으로 꼽히는지 이유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겉에 보이는 런던 자연사박물관은 사실 반쪽짜리일 뿐이다. 건물 지하, 옥상, 전시실 사이사이의 일반인 출입제한 구역에 숨겨진 연구시설들은 겉으로 보이는 전시실 규모에 필적할 정도다. 이 연구실에서는 갖가지 자연의 과학, 특히 열대 질환 연구의 메카라고 할 정도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말라리아, 그리고 매개 모기 분류에 관해서는 독보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이런 자연사박물관의 말라리아 연구실을 방문했을 때다. 해마다 전 세계를 돌며 말라리아 매개 모기 표본을 수집하는 모기 분류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의 발달은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이제 영국에서 모기를 외형으로 분류하는 고전적인 의미의 분류학자들은 영국 안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유전자나 염기서열을 바탕으로 모기를 분류하는 방법은 모기의 외형으로 분류하는 방법보다 훨씬 손쉽고 정확하다. 하지만 현재 말라리아가 유행하는 나라들은 이런 분자생물학적 방법을 도입할 수 없는 나라들이 대부분이다. 외형 분류학자들이 사라지면 이런 나라들에서 더 이상 값싸고 안정적인 방법으로 모기를 분류하고 연구할 기반이 사라지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

 

열대의학 및 기생충학 연구에서 분류학자만 사라지는 게 아니다. 얼핏 보기에 70년 전과 비교해 우리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방법의 발전, 즉 살충제나 약품 같은 발전을 이루어냈지만,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운신의 폭은 오히려 좁아졌다. 어찌보면 열대 질환에 대항하는 방법론에서는 70년 전보다 퇴보했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대체 지난 세기에 열대의학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단순히 열대의학을 생물학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으로는 이런 변화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잃어버린 더 넓은 관점, 즉 역사적·정치적·경제적인 맥락에서 변화를 살펴봐야 한다. 이제 19세기 후반, 열대의학의 황금기에서 20세기 중반, 냉전시대의 개막에 이르기까지 말라리아 박멸 프로그램이 겪었던 변화를 되짚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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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말라리아 유행은 정치·경제와 밀접"

 

때는 19세기 후반. 이 시기는 비단 열대의학 뿐만 아니라 의학의 패러다임이 극적으로 변화한 시기였다. 파스퇴르는 실험을 통해 자연발생설을 부정하는 데 성공했고, 코흐는 미생물(박테리아)이 질병의 원인임을 증명했다. 현미경 뿐 아니라 염색 시약을 써서 조직과 미생물을 염색해 더 명확히 보는 방법도 개발되었고, 염색 시약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특정 화학물질을 이용해 박테리아를 죽일 수 있다는 화학 요법도 태어나게 되었다.

 

말라리아도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1880년, 알제리에 파견된 프랑스 군의관 알폰스 레버란(Alponse Laveran)이 처음으로 혈액에 있는 말라리아 기생충을 목격해 학계에 보고하고, 1898년에는 영국 군의관 로널드 로스(Roanld Ross)가 말라리아가 모기를 통해 전파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말라리아의 생물학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본격적인 방제활동을 펼 수 있었다. 모기가 매개체가 된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습지를 말리고, 모기 서식처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또한 말라리아가 기생충이 원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치밀한 역학조사를 통해 이미 있던 키니네라는 말라리아 치료제를 이용한 조직적인 치료 활동도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말라리아의 생물학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이해가 이루어질 무렵에, 말라리아 학자들이 지닌 시야의 폭은 오히려 지금보다도 더 넓었다. 1900년 이탈리아의 저명한 말라리아 학자 안젤로 셀리(Angelo Celli)는 말라리아가 단순히 생물학적으로 접근할 주제가 아니라며 이렇게 말했다.

 

"말라리아는 유행 지역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Angelo Celli, Malaria: According to the New Researchs [New York: Longmans, Green, 1900])

 

셀리는 보건 정책가로서 키니네를 광범위하게 배포하면 효과적으로 말라리아 억제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그렇다고 키니네만으로 말라리아 박멸을 이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더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와 농업 개발을 통해 궁극적인 박멸이 가능하리라 보았다. 셀리 뿐만 아니라 20세기 초반 말라리아 학자들은 한결 같았다. 단순히 약물과 모기 서식처 파괴에만 집중해서는 말라리아를 몰아낼 수 없다. 말라리아는 사회적, 경제적인 질병이다. 결국 말라리아를 몰아내려면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이뤄내야 한다. 특히 말라리아 유행이 극심한 곳은 농업 지역인 경우가 많으므로, 더 나은 농업 기술과 관개수로, 생활환경 등에서 환경적 변화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견해를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1910년을 지나 말라리아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가 더 깊어지면서 이런 견해가 점차 양분했다. 여전히 학자들은 말라리아가 경제적, 사회적 질병이라는 데에는 같은 견해를 보였지만, 말라리아에 대항하는 방법에서는 갈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나타났다. 하나는 매개체인 모기를 공격하는 방법이었고, 다른 하나는 감염된 사람을 치료하는, 즉 기생충 자체를 공격하는 방법이었다. 양쪽 모두 장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매개체 박멸사업은 근본 해결책으로서 말라리아에 다가갈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막대한 사업비용이 있어야 하고 시간이 오래 린다는 단점이 있다. 약물을 통한 기생충 공격법은 배포와 투여가 간단하며 사업비용이 적다는 장점이 있지만, 사람들이 적극 협조해야 하고 약제 내성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대립은 단순한 비용효율성 논쟁이나 방법론 논쟁에서 벗어나게 된다. 로버트 코흐처럼 화학 요법이 태동하던 시기에 약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는 믿음을 지닌 사람과, 전통적인 매개체 박멸주의자들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일종의 패권 다툼으로 변질해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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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까지:

무솔리니의 말라리아 박멸 성공

 

그렇지만 세계 1차대전을 전후부터 1930년대까지 국가적 규모의 말라리아 박멸사업은 단순히 말라리아 박멸이 아닌 유행 지역 전체의 사회적, 경제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거대한 구상의 일부, 또는 그것의 바탕이 되는 사업으로 인식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테네시 계곡 개발사업과 무솔리니 치하 이탈리아의 폰타인 습지 개발사업이었다.

 

1922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가 이탈리아에서 집권했다. 지난 모든 왕과 제후, 정권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무솔리니도 이탈리아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말라리아를 정권 위협의 가장 큰 적 중 하나로 보았다. 말라리아를 뿌리뽑을 수 있다는 것은 당시 정권의 능력과 정당성을 증명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었다. 이 당시에 이탈리아는 세계에서 말라리아 유행이 가장 극심한 지역이었다. 심지어 로마의 바로 아래 지역까지 그랬다. 로마에서 남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폰타인 습지가 있었다. 1928년 말라리아 박멸과 지역 개발사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 곳의 인구 밀도는 1 km2당 7명이었으며, 그나마 농삿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 중 한 명에 불과했다. 극심한 말라리아 유행으로 지역의 사망률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으며 가장 빈곤했다. 이 지역의 개발이 이루어진다면 로마를 호시탐탐 위협하는 말라리아를 몰아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농업 및 산업 지역을 개발할 수 있고 무엇보다 집권당의 힘과 정당성을 증명하는 기회임이 분명했다. 1926년, 막대한 예산을 투자해 거대 규모의 토목사업이 시작되었다. 습지에 물을 공급하던 산자락에는 거대한 댐이 세워져 물의 흐름을 막았다. 습지 안을 흐르던 물들은 연장 길이 40km에 이르는 '무솔리니 운하'를 통해 티레니아해로 빠져나갔다.

 

이후 무솔리니 운하를 중심으로 습지 전체에 빼곡한 수로들이 건설되었고, 습지 전체의 넘쳐나는 물은 모두 수로와 운하를 통해 빠져나가버렸다. 당시 폰티나 습지에 건설된 수로의 길이는 세계 최장 길이를 자랑할 정도의 거대한 토목 공사였다. 지역 곳곳에는 계획 도시들이 세워졌고, 각 마을에는 교회, 병원, 심지어 사교장까지 건설되었다. 집안에 모기들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집들마다 방충망이 달렸고, 지역 한가운데에는 주택 수준을 향상하기 위한 주택 설비 공장들이 세워졌다. 일부 지역에는 정부 직할 실험 농장들이 세워져 새로 개척된 땅에서 어떤 작물이 가장 잘 자라는지를 체계적으로 실험해 지역 농민들에게 교육을 실시했다. 또 주거 지역 근방에 의도적으로 가축 농장을 세워 말라리아 매개 모기들이 사람 대신 가축들을 물도록 유도하는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썼다. 각 마을에는 키니네 배포 센터가 생겨 지역 주민이 예방 목적으로든 치료 목적으로든 키니네를 필요하면 언제든 먹을 수 있게 했다. 사업 기간 중 연간 소비된 키니네는 무려 6000kg에 달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1939년, 폰타인 (구)습지의 인구는 6만명으로 불어났으며 20만 에이커에 달하는 새로운 농경지가 생겨났다. 이 지역은 이탈리아의 주요 농업 생산지대가 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말라리아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면서 고대 로마 시대부터 로마의 목젖에 닿아 있던 칼날을 드디어 치워버린 셈이 되었다. 무솔리니는 폰타인 습지 개발을 파시스트의 승리라 부를 정도로 자랑스러워 했다. 농경지 개발로 인한 경제적 효과와 사람들의 인기는 파시스트 정권을 안정시켜준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사업에는 2005년 미국 달러로 환산해 4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예산을 소모했다. 하지만 이 중 75%를 국가가 부담하고 나머지 25%는 지역 주지들에게 부담시키면서 일반 대중의 인기를 끌어낼 수 있는 또 하나의 발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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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미국 테네시강에서 말라리아의 패퇴

 

00TVA » 1940년대 미국 테네시 계곡 개발사업(TVA 프로젝트)의 작업 현장 모습. 출처/ Wikimedia Commons

미국 테네시 계곡 개발사업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흔히 'TVA(Tennessee Valley Authority) 프로젝트'라 불린 이 사업은 지역 발전사업으로는 전례 없는 야심찬 사업이었다. 당시 테네시 계곡에 살던 사람들은 끊임없이 말라리아에 시달려 이 곳은 미국에서도 말라리아 유행률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연간 소득은 전국 평균 대비 45%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지역 주민 대부분은 소작농이었는데 지나친 지력 소모로 생산량은 보잘 것 없었고,그나마 실업률도 굉장히 높았다.

 

TVA에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복합적인 접근법을 택하기로 했다. 테네시 강 유역 전반을 완전히 재개발하는 거대한 사업에, 사업 영향권에 놓이는 인구만 해도 300만명이 넘었으니 단선적인 접근법으로는 가당치 않을 일이었다. TVA에서는 지역 사회를 향상시키기 위해 농민에게 새로운 농경법과 비료 사용법을 교육시켰으며 수림을 재조성할 수 있도록 권장했다. 생활 개선과 더불어 가장 큰 변화는 바로 TVA 댐의 건설이었다. 수많은 관개수로와 댐이 건설되면서 테네시 강 유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수로 시설과 수력발전 시설을 갖춘 지역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물론 수력발전으로 전기가 생산되면서 더 근본적인 변화도 생겨났다. 집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의 생활이 크게 개선되었고, 전력선을 따라 여러 산업체들이 들어오며서 일자리도 크게 늘어났다. 이제 반대로 테네시 유역에서는 실업난이 아니라 인력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물론 문제는 남아 있었다. 테네시 강을 따라 세워진 댐들로 인해 생겨난 호수의 둘레 길이는 총 1만1000 마일에 이르렀다. 가장 큰 위협은 이런 호수변에서 모기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말라리아가 활개치는 상황이었다. 말라리아가 다시금 자리 잡으면 어마어마한 비용을 투자해 벌인 지역 개발사업은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 말이다. 이에 TVA 말라리아 전담팀은 해당 지역의 말라리아 매개 모기 생태를 면밀히 연구했다.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해마다 TVA 말라리아팀은 호수변에 있는 물풀을 제거하는 작업을 벌이고, 정기적인 방류를 통해 호수의 수위를 조절해 모기 서식처를 말려버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테네시의 경제는 활력을 찾았고, 말라리아는 1940년대에 TVA 관리 지역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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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되살아난 말라리아, DDT의 성공신화

 

이제 말라리아가 단순히 생물학적, 질병학적으로만 접근할 문제가 아님이 말라리아 학자들에게나, 생물학자들에게나, 정책연구가에게나 분명하게 드러났다. 1930년대 후반에는 매개체냐 기생충이냐 하는 헤게모니 싸움을 접어두고 말라리아에 대해 경제·사회적 개발의 일환으로 더욱 복합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기 시작하는 듯했다. TVA 사업과 폰타인 습지 사업, 그리고 이를 전례로 파생된 수 많은 말라리아 박멸 사업들이 이런 입장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변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40년대에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린 대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세계 2차대전은 말라리아 연구와 박멸 사업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2차대전 당시에 연합군과 추축군이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지역들 중 대다수는 말라리아가 극심했던 지역이었거나, 전쟁으로 인해 말라리아가 폭증하던 지역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일본이 전략적으로 일찌감치 자바섬을 점령함으로서 연합군은 말라리아 치료제의 수급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자바섬은 키니네의 원료이던 기나나무의 플랜테이션이 있던 세계 키니네 생산의 중심이었다. 일본이 이를 점령하자 연합은 추축군 뿐만 아니라 말라리아와도 힘든 싸움을 벌여야 했다. 이에 따라 말라리아에 대항하는 전혀 새로운 방법을 사용할 필요성이 절실히 대두되었다.

 

00DDT » DDT가 든 약병. 출처/ Wikimedia Commons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전쟁이 참전하면서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곤충학자들과 화학자, 말라리아 학자들을 모아 말라리아에 대항하는 방법을 구상하게 한 것이었다. 1943년에는 아타브린(atabrine)이라는 합성 항말라리아 화학요법제가 탄생했고, 같은 해에 강력한 살충제인 디디티(DDT)가 실제 현장에서도 쓰이기 시작했다. 2차대전이 마무리될 즈음에 DDT의 강력한 효과와 지속성은 이미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클로로퀸 같은 더욱 안전하고 효과적인 항말라리아제도 개발되었다. 2차대전을 지나며 말라리아와 인간의 전쟁은 생물학전에서 화학전으로 변모하게 된 셈이다.

 

DDT가 말라리아 매개체 박멸사업, 그리고 곤충학에 끼친 영향은 엄청나게 컸다. DDT라는 살충제의 발견으로 곤충학, 그리고 매개체 박멸사업의 초점은 생물학적 방제나 환경 개선과 변화라는 방법보다는 살충제라는 값싸고 간단한 방법으로 옮아가게 되었다. 미국 검역원에서는 DDT 살포 방법을 개선하고 새로운 살충제를 개발하는 데 막대한 예산을 지원했다.  2차대전 말엽에는 포탄을 써서 DDT를 살포하는 방법이나 비행기로 살포하는 방법까지 개발되었다. 그리고 1945년에서 1953년까지 무려 23종의 새로운 살충제가 시장에 소개되었다. 이제 곤충학에서 해충 박멸의 방법은 곧 살충제 사용이라는 생각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생물학적 방제나 환경 개선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아예 바보 취급을 받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물론 이런 상황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는 사려 깊은 학자들도 있었다. 미국 응용곤충학회장이었던 퍼시 아난드(Percy Annand)는 1940년대 학회 연설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현재 응용 곤충학의 발전은 제살 깎아먹기 식의 발전을 하고 있다. 해충이나 매개체들의 생물학을 살펴보는 근본적인 연구보다는 살충제의 효과와 지속성을 살펴보는 연구들이 많다. 단기적이고 빠른 해법을 찾는 군대에 의해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응용 곤충학 관련 저널에 실린 논문을 살펴보면 곤충의 생물학이나 생물학적 방제 방법에 대한 논문은 1937년 33%에서 1947년 17%로 곤두박질친 데 반해, 살충제의 효과를 살펴본 실험은 58%에서 76%로 급증했다."(John Perkins, Reshaping Technology in Wartime: The Effect of Military Goals on Entomology Research and Insect Control Practice" Technology and Culture 19, 2(1978): 175.)

 

이런 통찰력에도 불구하고 대세는 거스를 수가 없었다. 특히나 말라리아가 이제 정치적인 선전의 도구로 활용되기 시작한다는 데에서 말라리아 연구는 극심한 타격을 입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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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

보수 우파의 집권, 공산주의로 몰린 '근본방제 대책'

 

2차대전 후 냉전체제에 접어들면서 생긴 정치 판도의 급격한 변화에서 말라리아 연구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보수 우파가 집권했고, 결과적으로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발전보다는 살충제나 치료제를 이용한 방법이 선호되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말라리아 연구와 방제 정책 결정을 맡고 있는 사람들도 보수 우파 인물로 물갈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사회 경제적 발전을 통한 말라리아 박멸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보건기구의 총장이었던 루드윅 락쉬만(Ludwig Rajchman) 같은 인물은 '사회주의적 급진주의자'로 몰려 사임 당하기도 했다. 특히나 사회·경제적 발전으로서 말라리아를 방제한다는 견해가 박해에 가까운 시련을 겪게 된 것은 폰타인 습지와 TVA 사업의 커다란 성공 때문이다.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폰타인 습지 사업의 성공은 무솔리니 치하 파시스트가 일궈낸 업적이었다.

 

또한 TVA 사업은 거대한 국가 예산을 소모한 국가 주도 사업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접근 방식은 공산주의적 통제 정책이나 국가 통제주의자적 발상으로 비칠 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파시스트의 성공을 거울 삼아 정책을 진행하자는 제안은 냉전시대에 극심한 갈등 속에서 색깔론으로 불거질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결국 근본적인 접근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몰려 정책 결정의 일선에서 대거 물러나게 되고, 말라리아를 정치적 선전 도구로 활용할 줄 아는 기회주의자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DDT는 서방 자유주의 세계가 공산주의의 팽창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였다. DDT는 말라리아 억제 효과 뿐만 아니라, 당장 눈에 보이던 집 안의 해충들까지 모조리 없애주는 눈에 띄는 홍보 효과도 있었다. 미국인은 받아들이지 않는 지역의 사람들이라도 DDT 살포팀만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마을에 받아들여 주었다. 실제로 미국이 베트남,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 파견한 기술지원 특별팀은 DDT 살포사업을 '임팩트 프로그램'이라 부를 정도였다. 1950~1972년 기간에 미국이 국외 말라리아 방제 프로그램에 사용한 돈은 12억 달러에 달했다. 이 돈의 대부분은 DDT나 다른 살충제를 이용한 방제법에 사용되었고, 미국의 이타성을 강조하기 위한 홍보 효과를 노린 경향이 다분했다. 뿐만 아니라 DDT를 활용한 홍보 효과는 가장 외진 지역까지 미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인도의 저명한 말라리아 학자 비스와나탄(A.K.Viswanathan)이 말했다시피 "국가 내의 모든 가정을 빼놓지 않고 매년 두번씩 꼬박꼬박 방문하는 서비스는 징세원을 제외하면 DDT 스프레이팀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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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 도구가 된 말라리아 방제사업

그것이 남긴 나쁜 영향들

 

말라리아 방제가 홍보 작전으로 변질되면서 몇가지 파멸적인 결과를 낳았다. 첫째는 빈곤 지역의 인구 폭발이었다. 1920-30년대 말라리아 방제와 지역 개발을 연계한 사업에서는 이런 문제가 크게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인구가 늘더라도 지역 개발을 통한 충분한 일자리가 있었으며, 교육이나 삶의 질 향상과 출산율 증가로 인한 인구 폭발도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말라리아 박멸이 홍보를 위한 단기 사업이 되고, 지역사회 개발보다는 단지 말라리아 박멸에서 초점을 맞춘 사업으로 변모하면서 말라리아를 통한 영아 사망률은 낮아져 인구는 급증하는데, 지역 개발은 이루어지지 않아 빈곤의 수준은 심화되는 역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구 증가는 더욱 무차별적, 무계획적인 개발로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말라리아 유행는 장기적으로는 더욱 심해졌다.

 

둘째는 내성의 등장이었다. 생물학적 방제법이나 환경 개선은 모기와 기생충이 발붙일 자리를 없애는 근본 해결법이다. 따라서 내성이 생겨날 여지가 적다. 그에 반해 살충제나 치료제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방식은 십수 년, 심지어는 수 년 안에도 모기와 기생충이 내성을 기르게 된다. 따라서 모기와 기생충, 그리고 인간은 끊임 없는 달리기의 틀에 놓이게 된다. 인간은 새로운 살충제와 치료제를 개발하고, 모기와 기생충은 새로운 약품에 내성을 기른다. 결국에 이 싸움에는 끝이 없다. 오히려 근래에는 인간이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세번째 문제는 사람들이 환상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나 세계 보건 관계자들이 그러하다. 몇 년에 걸쳐 지역 사회를 발전시키고 토목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예산도 어마어마할 뿐만 아니라 복잡한 계획을 거쳐야만 한다. 그에 반해 새로운 치료제나 백신은 이미 있는 보건 시스템을 이용해 손쉽게 적용시킬 수 있다. 게다가 당장의 예산도 토목사업에 견줘 훨씬 적게 들어간다. 1950-60년대 냉전시대에, 미국이 DDT를 살포하며 홍보한 내용은 이제 DDT 살포로 곧 말라리아를 박멸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여전히 보건 관계자들은 이 말을 믿고 있다. DDT는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선가 놀라운 마법의 총알이 개발되어 말라리아를 한 방에 죽여주리라는 믿음. 즉 DDT의 가장 큰 해악은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에서 밝힌 것처럼 환경적인 잔류 영향이 아니었다. 바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정책 결정자들이 DDT 같은 마법의 총알이라는 단물을 맛보게 해주고, 그 힘에 취하게 만들어 버려 다른 방법을 강구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말라리아 방제를 복합적인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연구가 실종하고, 살충제나 치료제에 의존하는 방식보다는 생물학적 방제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들이 실종했다는 점이다. 치료제나 살충제 내성의 심각성에 연구자들이 다시금 눈을 뜨고 다른 방향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가 지나서였다. 결국에 30년이 넘는 세월, 즉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에 살충제나 치료제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방향의 말라리아 박멸 연구는 맥이 끊겨버리고 말았다. 퍼시 아난드의 말 처럼 우리는 제살 깎아먹기 식 발전만을 거듭해온 셈이다.

 

 

00malaria 

"말라리아 방제 실패는

냉전시대 정치갈등의 희생양"

 

그러니 이렇게 보면 현재 말라리아 방제의 실패는 냉전시대 정치적 갈등의 희생양이라 볼 수도 있다. 여전히 수억 명이 말라리아에 걸리고, 수백만 명이 말라리아로 죽는다. 70년 전과 비교해 말라리아에 대한 생물학적 이해, 말라리아와 모기에 대항하는 화학적 무기들은 놀랄만큼 발전했다. 그런데도 지금의 말라리아 유행은 70년 전보다 더욱 심해졌다. 지난 세기 말에, 학자들이 말라리아를 단순히 질병학적 방법론으로 접근하는 방식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했지만, 여전히 말라리아 방제에 대해서는 치료제와 살충제를 이용한 접근 방식부터 떠올린다.

 

2005년 게이츠 재단은 2억6800 달러를 말라리아 박멸에 투자하겠다 밝혔는데 이 돈의 대부분은 백신 개발에 투자되었다. 세계보건기구(WHO)나 비정부단체(NGO), 자국 내 보건 시스템에서 이루어지는 말라리아 박멸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프로그램은 단순히 치료제와 살충제를 나눠주는 데 급급하고,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개선과 연관지을 여지는 보이지 않고 있다. 물론 막대한 예산이 투자돼야 하는 사회·경제 발전보다는 치료제나 살충제를 나눠주는 방법이 비용 효율면에서 나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치료제나 살충제가 과연 훨씬 싼 방법일까? 현재 말라리아에 대한 최후의 보루처럼 선전되는 백신을 일례로 들어보자. 백신을 연구하고 개발해 임상시험을 거치는 데에만 수천만 달러가 들어간다. 물론 이는 백신 후보 '1개'의 이야기다. 연구자들은 이런 돈을 '미래'를 위한 일에 쓴다며 연구계획서 몇 장을 써내고 타낼 수 있다. 그런 반면에 제3세계에서 말라리아 방제와 '현재'의 사회·경제적 개선을 위한 지원금으로 수천만 달러를 지원받으려면 수만 장의 계획서를 써내고, 또 사정사정을 해도 비용 효율면에서 맞지 않는다며 거절당하기 일쑤다.

 

 

00malaria 

2010년 지금,

우리는 이기고 있는가? 

 

19세기 미생물학의 발전과 더불어 말라리아도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하지만 혁신과 기술 진보는 과학계 내부의 패권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이후 잠깐의 성공기를 지나 세상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말라리아도 큰 변혁의 시기를 맞았다. 살충제와 치료제라는 놀라운 무기들이 개발되었지만, 장기적인 공중보건 진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는 축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저주에 가까웠다. 그리고 60년 전 냉전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말라리아는 홍보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홍보 도구로 전락하면서 말라리아 박멸의 희망은 사그러들고 말았다.

 

60년이 흘러 세기도 바뀐 21세기, 그리고 2010년 지금에 서서, 과연 우리는 60년 전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전히 말라리아 박멸은 홍보의 도구에 불과하다. 지원해 봐야 별로 홍보 효과도 나지 않는 사회·경제적 개선 사업보다는, 언론매체에 대서특필 될 수 있는 백신 개발에 투자해 자국의 과학 산업에 눈 먼 돈을 쥐어주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재의 말라리아 연구다.

 

이런 얘기는 말라리아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열대의학 및 기생충학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말라리아 정책의 변화는 다른 기생충 박멸사업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다양한 기생충 약의 개발은 역시 기생충 박멸사업을 치료제 위주로 몰고 가게 되었고, 역시나 근본적으로 사회·경제적 개선에 의한 접근법보다는 쉽고 빠른 길만을 찾게 되었다. 하지만 '쉽고 빠른 길'을 찾던 지난 세월에, 우리는 실패를 거듭해왔다는 역사적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과학자와 정책 입안자들이 쉽고 빠른 길을 찾는 동안에 사람들은 현실 속에서 멀고 힘든 길 위에서 수 없이 죽어갔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과학이 약속하는 '즉효약'이 과연 '즉효'인지, 기술의 발전은 꼭 더 나은 방법을 제공하는지, 더 나은 세상을 약속하는지, '한 방'만을 바라보는 요즘 한 번쯤은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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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호 기생충 애호가,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 저자
영국 런던대학 위생열대의학대학원에서 기생충학 석사학위를 받았다(2008). 아프리카 스와질랜드에서 자원봉사자로 1년간 기생충 관리 사업과 의료봉사 활동에 참여했으며(2010-2011), 다시 1년 간 굿네이버스 탄자니아에서 주혈흡충 관리사업 책임자로 있었다(2013-2014). 지은 책으로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2011)가 있으며, 우리말로 옮긴 책으로 <말라리아의 씨앗>(2014), <바이러스 사냥꾼>(2015)이 있다. 2016년 현재는 소속 없이 독립 연구자로 활동 중이다.
이메일 : byontae@gmail.com       트위터 : @byont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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