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파리방의 분투: '첫 유전자 배열'의 전설을 이루다
파리의 사생활 (3)
연속성과 단절의 사이
"나는 쿤주의자(Kuhnian)가 아니다!" -토마스 쿤
1953년 왓슨과 크릭에 의해 유전자의 물리적 구조가 밝혀지기 전에도 유전자라는 개념은 존재하고 있었다. 심지어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 1887-1961)는 저 유명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에서, 학문적 경계를 뛰어넘어 유전자의 물리적 실체를 밝히는 위대한 모험을 강행하지 않았던가. 이 유명한 강연에서 그는 유전자를 일종의 '비주기성 고체'로 상상하는 이론물리학자의 오만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물론 유전자의 본질을 '정보'로 보는 그의 생각이 당시 많은 젊은 생물학자들에게 감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유전자 정보 개념이 마치 분자생물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과장이다 .
슈뢰딩거의 역할에 대한 오해
분자생물학의 발달과정에서 물리학자들의 역할이 중요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기여한 분야는 연구방법론에 집중되어 있었을 뿐, 원리적인 면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슈뢰딩거는 분자생물학의 도약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의 '정보' 개념이라는 것도 정작 분자생물학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아마도 슈뢰딩거에 대한 국내외의 오해를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분자생물학의 가장 좋은 입문서임에도 불구하고 잘 팔리지 않는 책, 미쉘 모랑쥬(Michel Morange)의 <분자생물학: 실험과 사유의 역사>를 읽는 일일 것이다. 슈뢰딩거의 기여가 있다면 그것은 모랑쥬의 말처럼 "젊은 생물학자들에게 생명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길모퉁이에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켰다는 데 있을지 모른다.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이러한 오해를 더욱 일목요연하게 풀어준다. 굴드의 얘기를 옮기면, 슈뢰딩거 강연은 파동방정식의 성공에서 축배를 들이킨 뒤 심심했던 슈뢰딩거가 '과학통일운동'이라는 목표 아래에서 벌인 사회적 활동이었다는 것이다. 즉 이 강연은 당시 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이동하던 과학자들의 관심사 및 세계상을 반영하는 일종의 사회적 문헌인 셈이다. 물론 굴드는 '유전자의 물리적 실체를 알게 되면 생명의 본질을 알게 된다'는 무차별적인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과 함께, 결국은 철저하게 고전역학적 관점에서 사고한 슈뢰딩거의 상상을 조롱하고 있지만 그러한 측면 또한 당대의 시대적 잔상일지 모른다.
쿤의 단절과 마이어의 연속
실은 생물학은 분자생물학이라는 이름으로 배를 갈아탔을 뿐이다. 파지그룹을 만들고 분자생물학의 혁명적 발견들을 이끈 막스 델브뤽(Max Delbrück, 1906-1981)이 모건의 실험실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도망쳤다는 일화를 굳이 꺼내지 않더라도, 생물학엔 생물학 고유의 전통과 생물학자들을 이끄는 지침서의 연속성이 발견된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베스트셀러를 통해 물리학의 역사에서 보이는 단절을 묘사했다. 쿤은 국내에서 과학을 좀 안다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으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괜찮을 듯 하다. 중요한 것은 쿤을 교주처럼 떠받드는 많은 과학사학자들과 과학철학자들의 말과는 달리, 과학의 역사가 쿤의 일반화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 데 있다. 그래서 에른스트 마이어는 <이것이 생물학이다>를 비롯한 여러 저작을 통해 쿤의 과학사관을 비판했던 것인지 모른다. 마이어가 꺼내든 카드는 생물학사에서 보이는 이론들의 연속성이었고, 그 연속성의 개념은 쿤이 과학사에서 (실은 물리학사의 일부일 뿐이지만) 발견했다고 주장한 '통약불가능성' 에 대한 반박으로 사용된다.
과학에서 이론과 실험을 분리해서 바라볼 수는 없지만, 과학의 분과마다 둘 중 어디에 무게를 두고 있는지를 가늠해 볼 수는 있다. 물론 이론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물리학에서도, 쿤처럼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미시사를 들여다보면 개념의 연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생물학에도 자연사 연구에서 시작해 박물학을 거쳐 진화학에 이르는 전통에는 이론의 불연속적인 측면이 존재하기도 한다. 하지만 멀게는 라마르크부터 가깝게는 김빛내리 교수에 이르는 실험생물학의 전통엔 개념의 연속적인 발전 양상이 뚜렷이 나타난다.
유전자라는 개념을 둘러싼 연속성 (잠시 숨을 멈추고)
이미 현미경을 무기로 과학자들이 활동하던 17세기에, 로버트 후크(Robert Hooke, 1635–1702)나 말피기(Marcello Malpighi, 1628–1694), 뢰벤후크(Antony van Leeuwenhoek, 1632–1723) 등이 세밀한 '관찰'의 전통을 세웠다. 18세기로 넘어오면 브라운(Robert Brown, 1773–1858)에 의해 세포핵이 발견되고, 독일의 전통 속에서 슐라이덴(Matthais Schleiden, 1804–1881)과 슈반(Theodor Schwann, 1810–1882),이 '세포이론'을 확립한다. 당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슈반에 의해 당대에 이름을 알리지 못했던 퍼킨제(Czech Jan Purkyňe, 1787–1869)의 이름도 기억해 두도록 하자.
과학에서도 권력투쟁은 흔한 일인데, 레마크(Robert Remak, 1852–1865)가 슐라이덴과 슈반의 세포분열 이론을 반박하고 세포가 둘로 갈라지면서 분열한다는 관찰결과를 내놓았지만, 이 발견은 비르효(Rudolf Virchow, 1821–1902)에 의해 강탈당했다. 몸을 이루는 장기와 조직에서 세포로, 세포에서 세포핵으로 옮아가던 관심은 이 무렵이 되어 자연스럽게 유전이라는 현상과 맞물리게 된다. 결국 1879년 플레밍(Walther Flemming, 1843-1905)이 발견한 체세포 분열 시 염색체의 분리 현상은 염색체가 유전의 중요한 요소일 것이라는 라욱스(Wilhelm Roux, 1850-1924)의 제안으로 나아가고, 1904년 보바리(Theodor Boveri, 1862–1915)가 이를 실험적으로 검증하는 데 성공한다.
관찰과 실험의 전통 속에서 조직을 세포로, 세포를 세포질과 세포핵으로, 세포핵을 염색체로 쪼개나간 일련의 발견들은 대부분 독일이라는 공간에서 이뤄졌다. 물리학의 뉴턴과 아인슈타인에 대한 대항마로 다윈과 왓슨, 크릭을 강조했던 생물학사는 단절의 역사인 것처럼 왜곡되었다. 과학사가들은 진화학과 유전학의 근대적 종합, 유전학과 생화학의 종합으로 탄생한 분자생물학만을 기억하고 있지만, 실제로 세포학과 발생학의 전통에서 멘델의 발견을 세포핵과 염색체라는 물리적 실체에 연결시킨 독일의 학자들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
멘델의 재발견과 실험생물학 전통에서의 발견은 이론가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유전자의 실체와 유전의 기제를 두고 벌어진 베이트슨(William Bateson), 요한슨(Wilhelm Johannsen), 골드슈미트(Richard Goldschmidt) 등의 논쟁이 독일이 아닌 영국이라는 공간에서 펼쳐졌다는 것도 마냥 우연은 아니다. 나아가 쟁쟁하던 모든 이론가들을 제치고 아예 처음부터 멘델의 이론을 의심했던 발생학자였으며 실험가였던 모건에게서 유전자라는 수수께끼의 실마리가 풀리게 된다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유전자의 실체가 발견된 과정에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부러 독자들의 호흡을 조금 가쁘게 만들었다. 연속성이란 그렇게 쉼 없는 호흡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17~19세기 독일에서의 생물학의 발전은 정말 눈부신 것인데, 이에 관해서는 매우 좋은 책이지만 또한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기도 한 <세포의 발견>이 제격일 것이다. |
진주 목걸이 위의 유전자
'유전자'라는 개념이 형성되는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 핵산이라는 물질의 발견, DNA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과 더불어 유전자 발현이라는 현상이 발견되는 일련의 모든 과정들은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그리고 있는 과학사의 풍경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쿤의 과학사관은 절벽으로 갈라진 가파른 산이지만, 실험생물학의 역사는 한편의 완만한 능선을 떠올리게 한다.
유전자에 관한 고전적인 개념은 모건이 시작한 파리방에서 이루어졌다. 모건은 멘델의 유전학을 재정립하고, 염색체 위에 멘델의 입자들을 가지런히 재배열했다. 모건이 혼자서 이 엄청난 작업을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건의 실험실에서 실험 용기들을 씻으며 과학자의 여정을 시작했던 스터티번트(Alfred Henry Sturtvant), 브리지스(Calvin Blackman Bridges), 그리고 헤르만 조셉 뮬러(Hermann Joseph Muller)가 좁은 파리방의 한 켠에서 조금씩 유전자의 비밀을 벗겨나갔다.
파리방의 전설은 염색체 위에 유전자를 배열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흰 눈을 가진 초파리의 발견이 이야기의 시작이어야 할 테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하얀 눈의 초파리가 파리방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 이후에서 시작될 것이다.
돌연변이가 일어나면 초파리의 눈색깔을 하얗게 만드는 '화이트' 유전자가 발견되고, 스터티번트가 화이트와 옐로우 등의 유전자 6개를 X염색체 위에 배열한 이야기는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다. 멘델이 그랬듯이, 스터티번트도 초파리 돌연변이들을 끝없이 교배하고 자손의 수를 세며 몇 년을 보냈다.
그렇게 멘델의 발견이 있은 뒤 60여 년 쯤 뒤에야, 여전히 실체가 모호한 유전자들을 염색체 위에 일직선상으로 배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멘델은 이 작업을 상상하지 못했다. 모건의 제자들에게도 추상적인 실체였던 유전자라는 개념이 멘델에게는 더욱 추상적인 존재였기 때문이다.
멘델의 논문을 유심히 읽어보면 그가 유전자를 일종의 입자로 추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멘델에게 유전자란 일종의 당구공 같은 것이었고, 형질이 섞이는 것은 주머니 속에서 공들을 섞는 과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스터티번트와 모건에게 유전자란 염색체 위에 존재한다는 명백한 실험적 증거가 있었다. 따라서 멘델의 당구공은 염색체라는 긴 목걸이 위에 엮인 진주가 되었다. 물론 교배를 통해 어떻게 서로 다른 진주목걸이들이 섞이는 것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염색체들이 교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1911년 경 화이트가 성염색체인 X염색체에 존재하고, 이를 토대로 멘델의 법칙을 확인한 뒤에 신이 난 모건에게서 시작되었다. 염색체들이 생식세포 분열 직전에 서로의 몸을 꼬며 한바탕 춤을 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모건은 스터티번트에게 X염색체에서 발견된 돌연변이들을 모조리 테스트해보라고 주문했다. 방년 19세였던 그는 자손의 수와 표현형이 빼곡히 적힌 종이들을 들고 학과 수업은 내팽개친 채로 염색체 위에 유전자들을 배열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실제로 염색체 상에서의 교차가 차례로 발견되기 시작한다. 멘델이 생각했던 것처럼 당구공을 뒤섞는 과정은 아니었지만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지는 생식세포에서 염색체들은 서로의 몸을 탐하며 뒤섞이곤 했다. 뒤섞이는 방식도 결손(deletion), 중복(duplication), 역위(inversion), 전좌(translocation) 등으로 다양했다. 양성생식을 하는 생물들의 생식세포에서 벌어지는 이 과정은 '염색체 재배열(chromosome rearrangement)'이라고 불린다. 유전자의 관점에서는 '유전자 재조합(genetic recombination)'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바로 여기에 파리방 사람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고자 하는 두 번째 엔트로피의 비밀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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