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연의 "동물들의 생활사, 생존의 전략"

사는 게 왜 이런가? 자연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닮아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자연 원리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모든 동물이 살아가는 다양한 생활사에는 35억 년 누적된 진화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유전형 같아도 환경 따라 다른 생존전략 '표현형'

(4) 성장 환경과 생활사 전략의 유연성(가소성)


LifeH401.jpg » 두 마리의 물벼룩(Daphnia lumholtzi). 출처/ Agrawal 2001. 각주 (1) 참조


기 두 마리의 물벼룩 사진이 있다. 한 마리는 평범하게 생겼고, 다른 한 마리는 긴 꼬리에 머리에는 뿔까지 달렸다. 다른 종의 물벼룩인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두 마리는 같은 종인데다 나이까지 같다. 자웅동체의 생물이니 암수 차이일 리도 없다. 왜 이렇게 다르게 생겼을까?


눈치 빠른 독자는 그야 유전형이 다르니까 그렇겠지, 하고 생각할 것이다. 같은 종의 생물이더라도 개체 간에 생긴 모습이 다양한 가장 큰 이유는 각 개체가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제 각각의 유전정보를 이용하여 기능적 형질, 즉 ‘표현형’을 발현하기 때문이다. 멘델의 유전법칙에서 완두콩의 색깔과 모양의 표현형이 유전형에 의해 결정되듯이 말이다. 그런데, 두 마리의 물벼룩이 똑같은 유전형을 지닌다면 어떨까? 사진에 보이는 두 마리의 물벼룩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유전자가 동일한 클론이다!


생물학에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벌써 알아차릴지도 모르겠다. 바로, 표현형의 유연성(phenotypic plasticity, 표현형의 가소성 또는 적응성이라고도 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사진의 물벼룩이 서로 다르게 생긴 것은 유전자의 탓이 아니라 성장 환경의 차이 때문이다. 두 마리의 클론을 두 개의 동일한 수조에 나누어서 키우되, 한 수조에만 물고기의 화학성분을 넣어 주어서 마치 포식자한테 잡아먹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꾸몄던 것이다. 그 결과, 물고기 성분이 있는 환경에서 자란 물벼룩은 자신을 포식의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뾰족한 투구를 쓰고 꼬리의 날을 세우게 되었다. 클론인 다른 물벼룩도 물론 유전적으로는 이러한 표현형을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성장하는 동안 이러한 유전자를 발현시키도록 하는 환경의 자극이 없었던 것이다.1) 표현형의 유연성이란 이처럼 같은 유전자를 가진 생물이더라도 환경 조건에 따라서 다른 표현형을 발현시키는 생물의 능력을 가리킨다.2)


표현형의 유연성에 대한 생물학 이론은 이미 책으로도 여러 권 출판되었을 만큼 탄탄하게 구축된 편이지만(대표적으로 3),4)), 처한 환경에 따라 다른 표현형을 발현시키는 동물의 능력에 대한 실제 연구는 동물의 서로 다른 형태나 생리학적 특성을 살피는 연구로 제한된 편이다. 대표적인 예로 유럽의 한 나비 종(Araschnia levana)은 봄에 태어나는 개체들은 주황색의 화려한 무늬를 가지는 데 비해 여름에 태어나는 개체들은 검은 바탕에 흰 무늬를 가져 매우 다르게 생겼다. 생긴 것이 이렇게 다르니, 분류학자 린네(Linnaeus)가 처음에 이 나비의 두 표현형을 두 다른 종으로 분류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비교적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온도와 일조량의 차이 때문에 엑디손(ecdysone, 곤충의 전흉선호르몬의 본체)의 분비량이 달라져서 같은 부모가 낳았더라도 봄과 여름에 태어나는 나비의 표현형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한다.5)


LifeH402.jpg » 지도나비(Araschnia levana)의 봄형과 여름형. 출처/Wikimedia Commons.

그렇다면, 같은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의 살아가는 방식, 즉 생활사 전략도 생긴 모습처럼 환경 조건에 따라서 다르게 발달할 수 있을까? 어렸을 때의 환경 조건이 유전자의 발현에 영향을 주어서 동물이 살아가게 될 방식을 결정할 수 있을까? 포식자가 있는 환경에서 자란 물벼룩이 방어 무기를 발달시켜 자신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방식도 환경 조건에 맞춰서 변화시킬 수 있는 동물이 더 잘 적응해서 더 많은 자손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공수래공수거?


인생사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모두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삶을 시작하니 출발점은 모두한테 평등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오죽하면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다는 표현이 있겠는가? 인생의 출발점과 종착점 모두 만인에게 평등하지 않다. 하지만 시작이 좋다고 끝이 반드시 좋은 게 아니듯이, 출발점과 종착점이 정비례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인생의 출발점과 종착점 사이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기에 그런 것일까?


불평등한 출발점은 이 세상에 나서 삶을 시작하는 모든 동물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문제이다. 태어나고 보니 가물어서 먹을 것이 부족할 수도 있고, 풍년이라 태어나는 족족 잘 먹고 빠르게 성장할 수도 있다. 지난 몇 년 간 갈매기 연구를 위해 가던 살보라 섬(Isla Salvora)에는 귀여운 토끼도 수천 마리 서식한다. 비가 적당히 와서 풀이 많이 자란 해에는 젖을 먹이는 어미들도 잘 먹어서인지 엄청난 수의 새끼 토끼들이 성장해서 굴 밖으로 나온 것을 볼 수 있었다. 눈치 빠른 어미와 달리 조금 미련한 새끼 토끼들은 신나게 뛰어다니다가 가끔 우리가 기거하는 집 안으로 뛰어 들어오고는 했다. 등대지기 아저씨의 개, 수르도 종종 토끼를 사냥해서 우리 집 앞에 선물로 두고(사실은 버리고) 가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해에는 가물어서 풀이 모두 노랗게 말라버려서 새끼 토끼를 보기 힘들었다. 이런 해에는 새끼 토끼가 다행히 살아남더라도 성장 속도가 비교적 느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새끼 토끼를 힘들게 젖을 먹여 기르는 것은 어미이므로, 토끼가 태어난 시기뿐만 아니라 그 새끼 토끼를 낳은 어미가 번식기 전에 경험한 환경 조건까지도 나중에 태어날 새끼 토끼의 성장에 많은 영향(maternal effect)을 줄 수 있다.


좋지 않은 환경 조건에서 태어난 동물들은 일종의 확장된 성장기(compensatory growth)를 거쳐서 결국엔 시간이 걸리더라도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개체들만큼 크게 자랄 수 있다고 한다.6) 태어난 환경 때문에 천천히 성장한 동물은 번식에 필요한 신체 조건을 갖추는 데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에 좋은 환경에서 태어난 개체들보다 번식을 시작하는 나이도 늦어진다.7) 당장 자라는 데 필요한 자원이 부족해서 성장과 성숙이 늦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성장과 번식에 필요한 자원의 부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생활사 전략의 유연성이 나타나기도 한다.


형제가 많은 둥지에서 자란 금관조(Taeniopygia guttata) 새끼는 부모 새가 공급하는 먹이를 형제와 나눠 먹어야 하므로 성장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여러 둥지 간에 일부 형제들을 바꿔서 같은 부모의 형제들 중 일부는 형제 수가 많은 둥지에서, 나머지는 형제 수가 적은 둥지에서 성장기 초기를 보내게 했다. 이렇게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유전자를 절반이나 공유하는 형제들을 자원이 부족한 환경과 자원이 풍부한 환경에 나누어서 자라게 하면, 형제들의 생활사 전략에 어떤 변화가 생길까? 실험 연구에 따르면, 생의 초기에 자원의 부족을 경험한 금관조 암컷은 나중에 먹이가 풍부하게 공급되더라도 자원이 풍부한 환경에서 자란 자매보다 작은 알을 낳아서 몸 크기가 작은 새끼를 생산한다고 한다.8)


LifeH403.jpg » 금관조(Taeniopygia guttata). 원래 오스트레일리아의 야생 조류이나, 전세계에서 애완동물로 번식되고 있으며 행동, 생태, 진화 연구에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는 종이기도 하다. 출처/Wikimedia Commons.

이처럼, 성장기에 환경 조건에 따라 발현하고 형성된 생활사 특성은 그 동물이 어른이 되었을 때의 생활사 전략에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다.9) 성장기에 환경 조건에 따라 일단 유전자가 발현되어 표현형이 결정되면 미래에 환경이 바뀌더라도 그 패턴이 변형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태어나 자라는 동안 자원 부족을 경험한 금관조는 미래에도 좋지 않은 환경에서 짝짓기를 하고 새끼를 키워야 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성장기 동안 표현형의 프로그래밍(phenotypic programming)을 통해서 좋지 않은 환경에서 생존과 번식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생활사 전략이 결정된다. 즉, 작은 새끼를 낳는 생활사 전략의 프로그래밍을 통해서, 번식에 지나친 투자를 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표현형의 유연성은 진화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유연성의 발현은 동물이 환경에 적응한 결과인가? 환경 조건에 따른 생활사 전략의 유연성은 항상 동물의 이익을 극대화(생존과 번식에 적절하게 투자하여 다음 대로 최대한 많은 유전자를 남기는 것)할 수 있는가? “그렇다”라고,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명쾌하고도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는 결론을 내리고 싶으나, 사실 최근의 연구 결과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 예가 대다수이다.10) 진화는 수많은 우연의 산물을 만들어 놓았을 뿐, 최고의 생물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아니, 사실 생물의 세계에서 최고나 최선은 없다.


유연성은 같은 유전형이 환경에 따라 다른 표현형으로 발현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연성이 유전자와 아주 상관없이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으며 오히려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11) 이 말은 조금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나, 유전형이 환경에 따라 다르게 발현될 수 있는 능력도 유전자 때문일 수 있다는 말이다. 표현형질의 유연성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동물 종이나 개체군에서는 환경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유연성이 진화할 수 있다. 진화란 유전되는 형질에 자연선택이 작용했을 때 유전형(그리고 표현형)의 빈도가 변화해서 생기는 자연현상이기 때문이다. 환경에 따라 표현형을 달리하는 생물의 능력이 다음 대로 유전되지 않는다면 이 유연성은 자연의 선택을 받더라도(다시 말해, 유연성을 가진 개체가 더 많은 자손을 남기더라도) 환경에 적응해서 진화할 수 없다. 다음 대에도 유연성을 가진 개체의 빈도가 늘거나 줄지 않고 그대로 유지될 테니 말이다. 생활사 전략의 유연성이 항상 동물의 이익을 극대화하지 않는 것도 그렇기 때문일 수 있다.


그래서 최근에 표현형의 유연성이 다음 세대로 유전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연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환경 변화가 극심해질수록, 생물이 거기에 적응해서 진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그 종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LifeH404.jpg » 왼쪽: 위담 숲, 출처/옥스퍼드대학 출판사. 오른쪽: 인공둥지에서 새끼의 똥을 물고 나오는 박새(Parus major), 출처/ Wikimedia Commons.

기후 변화에 대처하는 동물: 박새와 개구리의 운명


영국 옥스퍼드대학은 생태학과 진화학의 오랜 전통을 지닌 곳으로, 중요한 생태·진화학자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 전통이 가능했던 이유 중의 하나가 여러 동물 개체군을 오랫동안 꾸준히 연구하여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특히, 옥스퍼드의 위담 숲(Wytham Woods)은 대표적인 자연 생태 실험실로 195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숲에 서식하는 박새의 번식을 위한 인공 둥지를 달고 모든 박새에 개체 인식을 위한 가락지 표시를 해서, 성장과 번식 등 모든 개체의 일생 동안 벌어지는 일을 기록해 왔다. 내가 현재 몸담고 있는 스페인의 대학 연구팀도 학교 근처의 자연림에 박새 인공 둥지를 달기 시작했는데, 겨우 이번 한 해의 작업을 도우면서 위담 숲의 오랜 연구가 얼마나 힘든 것이었을까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기후 변화에 의해 지구의 평균기온은 해마다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기후 변화를 겪으면서 지난 반세기 동안 위담 숲의 박새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이른 봄의 기온이 높아지면서 박새 새끼가 먹기 좋은 통통한 애벌레가 발생하는 시기도 빨라지고 있다. 애벌레는 금방 자라서 박새가 잡기 힘든 나비나 나방으로 변화한다. 박새 부모도 거기 맞추어 번식을 서두르지 않으면 나중에 막상 새끼들이 알에서 깨어났을 때 배를 곯게 될지도 모른다. 위담 숲의 박새를 연구한 결과를 보면, 다행히 높아지는 기온 변화에 대응해서 번식 시기가 빨라지는 생활사 전략 표현형의 유연성이 나타난 것을 알 수 있다.12)


LifeH405.jpg » 왼쪽부터, 1961-2007 연도별 위담 숲의 봄 기온, 애벌레가 최대량로 발생하는 날짜, 박새의 평균 산란날짜 (날짜는 4월 1일=1로 계산). 출처/ Charmantier et al. 2008.

하지만, 이 연구 결과를 보고 위담 숲에 사는 박새의 생활사 전략 자체가 진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박새의 생활사 전략이 환경 조건에 반응해서 변화하는 유연성이 박새의 적응도(fitness)를 높이더라도, 이러한 유연성이 지난 반세기 동안 진화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 한 형질이 유전적 변화를 거쳐 진화하는 것과 환경에 따른 표현형의 유연성은 전혀 다른 현상이다. 위담 숲의 박새 데이터를 양적 유전학 모델에 적용한 다른 연구에 의하면, 이 번식 시기 전략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기후 변화에 따른 생활사 전략의 변화(표현형의 변화)와 함께 변동하지 않고, 그와 상관없이 일정하게 유지된 것으로 나타났다.13)


이렇게 위담 숲의 박새 개체군에서 표현형의 유연성이 유전적으로는 변하지 않는 상황에서, 또 다른 기후 변화가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그럴 리는 없어 보이지만, 다행히 기후 변화가 멈추어서 서늘한 이른 봄 기후를 되찾으면 새로 태어나는 박새는 잃지 않고 보존된 표현형의 유연성 덕분에 어른이 되었을 때 다시 그 환경에 적응하여 번식 시기를 늦출 것이다. 그러나 봄 기온이 낮았다 높았다 진동하는 식으로 변화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기온이 높을 때 태어난 박새의 생활사 전략이 성장기의 표현형 프로그래밍을 통해 번식을 앞당기도록 정해진 이후에 막상 다 자라서 번식할 때 봄 기온이 낮아지면, 불쌍한 박새는 얼마나 큰 낭패를 보겠는가?


그렇다면, 유연성의 정도는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항상 일정한 것일까? 기후 변화에 대처하는 동물들의 전략은 표현형의 유연성 밖에 없는 것인가? 유연성이 아니라, 생활사 전략 자체를 결정하는 유전자가 변화하면 어떻게 될까? 여기 기후 변화가 다양한 속도로 진행되는 수많은 다른 개체군에서 생활사 전략의 변화를 살펴본 개구리(Rana temporaria)의 예가 있다. 영국에는 야생동물을 관찰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지 영국 전역에서 개구리의 산란을 관찰해서 보고하는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1998년부터 수집한 개구리의 산란 날짜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후 변화에 따른 개구리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될지 시뮬레이션을 통해 예측한 연구가 발표되었다.14)


LifeH406.jpg » 사진: 개구리(Rana temporaria). 제공/ⓒ David Alvarez. 그림: 영국의 개체군별 1월 평균기온과 개구리의 평균산란날짜 간의 관계. 한 개의 선은 한 개체군의 패턴을 나타내며, 녹색, 파란색, 빨간색은 각각 북부, 중부, 남부 지방의 개체군들이다. 출처/Phillimore et al. 2010.

영국 전역의 개구리 산란 날짜의 전체적인 패턴을 보면, 대체적으로 1월 평균기온이 높은 해일수록 산란 날짜가 앞당겨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개체군마다 기온과 산란 날짜의 상관관계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이다(위 그림 참조). 상관관계의 경사가 급할수록 그 개체군이 기온 변화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여 산란 날짜가 더 많이 변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개구리의 생활사 전략이 환경 변화에 따라 변하는 정도가 개체군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이 결과는, 모든 개체군이 일정한 표현형의 유연성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개체군에서는 다른 메커니즘에 의한 생활사 전략의 변화도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 개구리 데이터의 경우에는, 개체 인식을 할 수 없어서 양적 유전학 모델을 이용한 연구는 불가능하므로, 생활사 전략을 결정하는 유전자의 다양성이 지금까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연구는 앞으로 계속 진행될 기후 변화(지속적인 온도 상승)에 따라 영국에 서식하는 개구리의 산란 날짜가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한 시뮬레이션 결과를 보여준다.15) 이 생활사 전략을 결정하는 유전형의 빈도가 변화해서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소진화(microevolution)’가 일어나는 경우와 단순히 표현형의 유연성에 의지한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의 두 가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시뮬레이션 결과는 아래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매우 다르다. 생활사 전략이 진화하여 개체군의 유전자 자체가 변화하는 경우에는 향후 50년 간 개구리의 산란 날짜가 21~39일 정도 앞당겨질 것으로 나타났으나, 유연성에만 의지한 경우에는 5~9일 정도만 앞당겨질 것으로 예측되었다.


LifeH407.jpg » 기후 변화에 따른 향후 50년간 영국 개구리 개체군의 산란날짜 변화를 예측한 시물레이션 결과. A: 표현형의 유연성에 의한 변화. B: 유전적 적응(adaptation), 즉 소진화(microevolution)에 의한 변화. 출처/Phillimore et al. 2010.

물론, 진화는 많은 우연이 개입하는 현상이므로 앞으로 50년 간 개구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직접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정말로 기후 변화에 적응해서 유전적으로 빨리 산란하는 개구리들의 비율이 커진다 해도 다행이라고 볼 일은 아니다. 적응 과정에서 유전적 다양성은 줄어들고 결국 대를 거듭할수록 개구리의 수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돌연변이의 축적에 의해 유전적 다양성이 증가하는 속도에 비해 지나치게 빠른 자연선택에 의해 급속하게 유전적 다양성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단기적인 환경 변화에 유전적 다양성의 손실 없이도 표현형을 적절히 변화시켜서 이득을 볼 수 있는 유연성이 탁월한 생물의 전략인 이유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빠르게 진행 중인 기후 변화는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환경 변화는 유연성이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단기적인 현상이 아니므로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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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연 스페인 비고대학 생물학과 연구교수
동물 생활사의 진화를 연구하는 생태학자. 스페인 비고대학에서 생물학과 학생들에게 동물행동생태학을 가르치며 가시고기와 갈매기를 연구하고 있다. 새와 물고기의 살아가는 방식이 어떻게 진화했는지에 관심이 많다.
이메일 : yeonkim@uvigo.es       트위터 : @kimsin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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