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친 전화번호부의 마찰력’ 비밀은 뭘까 -수학모형 개발
잡아당길 때 접촉면의 기하에서 생겨나는 마찰력의 엄청난 증폭
낱장의 개수, 두께, 길이에 따라 달라지는 마찰력 수학모형 개발
» 전화번호부로 연결한 자동차를 들어올리고 있다. 출처/ http://www.france5.fr (화면을 누르면 동영상이 있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마찰력을 설명할 때 자주 하는 낯익은 실험이 하나 있습니다. 책 두 권의 낱장을 일일이 겹쳐서 잡아당기는 것이죠. 한번쯤은 그런 실험을 직접 해보셨거나 남의 실험을 보셨을 겁니다. 약한 종이책도 수십, 수백 개의 낱장들이 맞닿았을 때에, 힘센 어른이 잡아당겨도 떼어내기는 힘듭니다. 작은 마찰력들이 모여 크나큰 힘이 되는 것이죠. 여러 사람들이 잡아당기거나 자동차를 매달아도 책 두 권이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시연은 흥미로운 볼거리가 되곤 합니다. 위 사진에 연결된 동영상의 뒷부분에선 자동차를 매달고도 전화번호부 두 권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동영상 http://dai.ly/x1rwdgo]]
다른 동영상에서는 전차까지 동원됐습니다. 전화번호부는 일부 낱장들이 뜯겨져 나가면서야 가까스로 분리되었습니다.
[ 동영상 출처: https://youtu.be/QMW_uYWwHWQ ]
낱장들이 맞물린 전화번호부에서는 어떻게 이처럼 엄청난 마찰력이 생겨나는 걸까요? 널리 알려진 수수께끼를 설명하기 위해서 물리학자들이 나섰습니다. 프랑스와 캐나다 대학의 물리학자들은 최근 책 두 권을 겹칠 때에 생기는 마찰력을 어떻게 수학적 모형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를 연구해 그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결과는 공개형 물리학술 데이터베이스인 아카이브(arXiv.org)에 “겹친 두 권 전화번호부의 수수께끼"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공개되었습니다.
연구진은 이 논문의 서두에서 ‘전화번호부 마찰력’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고 흥미롭게 요약했습니다.
“우리는 마찰력의 세기를 보여주는 고전적인 설명에 익숙하다. 전화번호부 두 권의 낱장들을 엇갈리게 끼우고서 책의 등(spine)을 잡아당겨 두 권을 분리해보자. 이런 시연은 여러 볼거리로 행혀져 왔다. 사람들이나 트럭들이 잡아당기고, 맞물린 전화번호부로 연결해 자동차를 들어올리는 시연도 이뤄졌으며, 심지어 전차들이 잡아당기는 시연도 행해졌으나, 모두 책 두 권을 분리하는 데에는 실패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시연들은 각 낱장 사이의 내부 마찰이 매우 강함을 보여준다. 자주 들을 수 있는 간단한 설명은 중력이 수직항력(normal force)을 만들고 그것이 접촉면에 마찰력을 생성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가설은 수직 방향이나 수평 방향으로 수행되는 실험들 간에 눈에 띄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볼 때 그릇된 설명인 것으로 드러났다.”
» 전화번호부 마찰력. (a)는 맞물린 2권의 전호번호부로 연결된 자동차를 들어올리는 모습. (b) 논문의 연구진이 전화번호부 마찰력을 실험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 (c) 두 권의 전화번호부가 겹쳐 맞물린 구조를 단순화한 모형. 출처/ http://arxiv.org/abs/1508.03290
연구진은 이 논문에서 책 두 권을 분리하는 데 들어가는 힘을 “낱장의 개수, 낱장의 두께, 그리고 맞물린 길이의 함수로 다루어” 연구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이들은 책의 낱장 개수와 크기, 맞물린 길이를 달리하면서 실험을 수행했으며 거기에서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수학적 모형을 개발했습니다.
실험과 수학적 분석을 통해, 연구진은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우선 겹쳐지는 책 낱장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책 두 권을 분리하는 데 드는 힘도 커진다는 상식적인 발견인데, 흥미로운 점은 책 낱장의 수가 늘어나면 잡아당기는 힘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엄청난 규모로 커진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낱장의 수를 10배 늘리면 책을 분리하는 데 들어가는 당기는 힘은 네 자리 수 규모로 커진다"고 말했습니다.
연구진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이렇게 마찰력이 증폭하는 데에는 ‘잡아당기는 힘’, 그리고 낱장이 겹칠 때 생기는 작은 각도(옆 그림 c에서 θn)가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잡아당기는 힘은 ‘수직항력’으로 바뀌어 낱장들을 압착하는 힘이 되고, 그러면서 마찰력의 ‘증폭’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거꾸로 낱장들이 겹쳐질 때 조금씩 벌어져 생기는 이런 틈새 각도가 없다면 오히려 마찰력은 줄어든다고 합니다. 연구진은 전화번호부 책에서 한 장씩 걸러 낱장을 제거하면 겹쳐지는 낱장이 들어갈 공간이 생겨, 벌어지는 틈새 각도 없이 두 책의 낱장들이 서로 맞물려 겹쳐질 수 있는데, 이때에는 잡아당기는 힘이 수직항력으로 전환하지 않고 그래서 마찰력 증폭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책의 분리는 상대적으로 수월하다고 설명합니다.
결국에 잡아당기는 힘이 더 커지면 틈새 각도를 지닌 낱장들에 더 큰 수직항력이 작용하고 마찰력은 증폭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책을 분리하는 데 필요한 힘이 낱장 개수가 늘면서 지수함수보다 더 큰 규모로 증가함을 보여주었다. 이 시스템의 세기는 잡아당기는 힘에 기인하는 것이다. 사람, 차, 트럭, 탱크는 겹쳐진 낱장들의 경계면에 작용하는 수직항력(normal force)에서 나오는 작은 마찰을 증폭한다.”
연구진은 이런 현상을 두고서 “마찰의 기하학적 증폭(geometrical amplification of friction)”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연구진은 대형 선박을 정박할 때 닻의 밧줄을 둘둘 말아두는 기둥(capstan)이나 잡아당길수록 더욱 조여지는 ‘중국 손가락 올가미(Chinese finger trap)’가 기하학적 구조로 인해 생기는 마찰력 증폭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제시했습니다. 논문에서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박테리오파지 바이러스의 껍질(capsid)과 그 안에 든 디엔에이(DNA)의 상호작용도 또한 이런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군요.
» 중국 손가락 올가미(chinese finger trap). 잡아당길수록 더욱 조여진다. 출처/ http://www.thechicagoschool.edu/News/2013/Race_Relations_and_the_Wisdom_of_the_Chinese_Finger_Trap
이번 연구는 오래되고 낯익은 ‘전화번호부 마찰력’의 수수께기를 푸는 수학적 모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연구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연구진은 “이런 모형 시스템은 고전적인 마찰력 문제와 관련된 오래되고 친숙한 수수께끼를 푸는 데 기여하고 또한 작은 하중에서 마찰력과 상관계수를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기본틀을 제공한다”고 기대했습니다. 또한 이런 마찰력의 기하학적 증폭은 바이러스나 나노물질의 미시계에서도 설명될 수 있다고 보아, “거시계에서 나노계에 이르는 복합체들(complex assemblies) 내의 마찰을 테크놀로지와 연관된 공학으로 다루는 길을 열어준다”고 말했습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사이언스온의 길목]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scienceon
트위터 https://twitter.com/SciON_hani
한겨레 스페셜 http://specia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