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자의 "미술관 옆 실험실"

과학과 예술은 흔히 창의성, 독창성 등에서 공통점을 지닌다고 합니다. 실제로 최근 융합의 시도도 많습니다. 생물학과 물리학 연구자인 필자들이 과학과 예술의 소통 가능성을 살피는 실험에 나섭니다.

예술가에겐 모든 곳이 작업실이다

[6] 노윤희·정현석 작가 ‘로와정’… 작업현장을 작품에 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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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산책, 빈 병풍, edited performance documentary, 2014]http://rohwajeong.com/post/102592908156


* * *



‘과학과 예술의 융합’은 요즘 뜨는 주제다. 올해 초 뇌과학과 예술을 주제로 한 <더 브레인> 전시가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열렸다. 또한 미술작가가 한국표준과학연구원 같은 과학연구 기관에 입주해 그곳의 과학자들과 협업하는 <아티언스> 프로젝트도 매년 진행되고 있다.


00R&J1.jpg » [로와정, Melting, 2G cellular phone, Soju, 2013] http://rohwajeong.com/image/114916396796‘미술관 옆 실험실’을 연재하는 우리 두 필자는 작년 여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서 진행된 아티언스 프로젝트를 취재했다. 당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팀 중에서 ‘로와정’과 ‘지하루’에 눈이 갔다. 로와정은 듀오이자 부부작가인 노윤희와 정현석이 만든 팀이고, 지하루는 작업 동료이자 남편인 그라함 웨이크필드(Graham Wakefield)와 함께 인공생태계를 주제로 뉴미디어 아트 작업을 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로와정의 작업을 얘기하고, 지하루의 작업은 다른 글에서 다룬다. 로와정의 인터뷰는 두 차례 진행되었다. 한 번은 아티언스 전시장에서, 다른 한 번은 서울에 있는 작업실에서 진행되었다.


로와정의 작업실에서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은 술병이었다. 오래된 핸드폰을 모아 술을 담근 작품 <Melting>. 매실주나 인삼주를 담는 유리병에 진짜 소주를 부어 술을 만들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2G 폰을 지인들한테서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삭제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전화번호, 문자메시지, 메모들이 이젠 알코올에 녹아 저장되었다. 기억은 신경세포의 시냅스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숙성된 술에도 기억이 저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연구소에 들어간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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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언스는 작가가 과학연구 현장에 직접 들어가 그곳에서 과학자와 협업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과학자와 예술가가 몇 번 만나서 작품을 만들어 보여주는 전시는 이미 여러 번 열렸다. 하지만 십 년 이상 자신의 분야에 몰입해온 사람들이 몇 번 만난다고 상대방의 분야를 알 수 있을까? 이런 전시는 프로젝트 지원금을 받은 단체나 개인이 작가와 과학자 몇 명을 모은 다음, 일하듯이 후다닥 해치우는 것이었다. 반면 아티언스는 작가와 과학자가 협업하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 그러기 위해 한국표준과학연구원에 작가를 위한 작업 공간을 마련해 그곳에서 몇 개월 간 과학자들과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했다. 몇 개월 정도의 시간은 여전히 짧지만, 연구소에 작가들이 직접 들어가는 형태는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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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6개 채널 - 외곽 장면, 2014]

 http://rohwajeong.com/post/102578275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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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6개 채널 - 상세 이미지, 2014]

 http://rohwajeong.com/post/102576394251


로와정은 감정이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에 주목했다. 그래서 뇌자도(magnetoencephalography, MEG)를 선택했다. 뇌자도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들이 뇌에서 처리될 때 발생하는 전기 신호를 측정하는 장비다. 로와정은 456개의 사진을 과학자에게 보여주면서 과학자의 뇌를 뇌자도로 촬영했다. 최종 전시에서는 컨테이너 박스 외부에 이 사진들을 빙 둘러 붙여놓고, 박스 내부에는 뇌자도 결과를 선보였다. 컨테이너를 뇌로 보고, 뇌의 외부에서 자극되는 감각 정보를 외벽에, 뇌의 내부에서 처리되는 전기 신호를 내벽에 전시했다.


작가들이 선택한 사진은 감정을 유도하는 자극적인 사진이 아니었다. 드라마틱한 상황에서 격한 감정은 조작된 것일 가능성이 커서 투명하지 않다. 무감각한 상황에서 감정은 투명하다. 작가들은 일상에서 찍은 사진을 선택했다. 그래서 뇌자도 결과에도 급격한 변화가 없다.

[456개 채널 - 내부 광경, 2014]

http://rohwajeong.com/post/102579045401


로와정이 과학자와 한 협업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직접 만나본 과학자들에게서 맑게 멍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아티언스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무엇을 얻었나? 논문을 발표한 것도 아니고, 연구 보고서를 쓴 것도 아니다. 공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을 전혀 얻지 못했다. 이 부분이 아쉬웠던 로와정은 뇌자도 이미지를 액자로 만들어 함께 작업한 과학자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좋은 협업을 위해서는 예술가와 과학자 모두 가져가는 게 있어야 한다. 연구 논문에서는 참여한 사람들 모두 저자에 포함되어 결과와 노력을 인정받는다. 과학과 예술의 융합을 아젠다로 삼은 프로젝트에 참여한 예술가와 과학자 모두 공적으로 성과를 인정받을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풍경을 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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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이 주관하는 궁중문화축전의 프로그램 중에 궁궐과 현대미술을 접목하는 프로젝트가 있다. 작년 9월 예술 접목 프로젝트 <비밀의 소리> 전시가 세계문화유산인 창덕궁에서 열렸다. 이 전시에는 <미술관 옆 실험실>에서 이전에 인터뷰했던 박선민 작가가 참여해 <사라지고 이어지는 법칙들>을 선보였고, 로와정은 전통성악가인 박민희와 협업해 <( ) 산책>을 전시했다.

[ (  ) 산책, 빈 병풍, edited performance documentary, 2014]

http://rohwajeong.com/post/102592908156


로와정은 창덕궁의 풍경이 아름다워 현대적인 사각예술 작품을 설치하는 게 불필요한 첨가물 같았다고 한다. 21세기 천만 도시 한복판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창덕궁과 후원은 고요하다. 로와정은 이 풍광을 잠시 빌려오는 차경(借景) 기법을 적용해 빈 액자와 빈 병풍을 곳곳에 설치했다.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자연 풍경만으로도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한국의 전통성악가이면서 공연연출가인 박민희는 프레임만 있는 병풍 저편에서 서양음악의 소프라노, 한국 전통의 가곡, 그리고 새의 움직임에서 영감을 얻은 춘앵무를 엮어 새로운 형태의 공연을 연출했다.



현장에서 작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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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언스와 창덕궁 프로젝트 모두 미술관이 아닌 특정한 장소에서 작업이 진행되었다. 과학을 연구하는 현장인 한국표준과학연구소와 문화유산이자 아름다운 풍광이 있는 창덕궁은 각각 독특한 장소성이 있다. 이처럼 해당 장소에 맞는 시각예술 작업을 장소특정적(site-specific) 작품 또는 현장제작설치 작품이라고 한다. 그 장소에 맞게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작품을 다른 장소 또는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미술관에 옮겨 놓으면 작품의 의도가 줄어든다. 예를 들어, 창덕궁에 설치한 작품 <( ) 산책>을 미술관 벽에 건다고 상상해보자. 나무 프레임만 있고, 그 안으로 보이는 건 하얀 벽뿐이라면 작품에서 감동을 느끼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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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ubled distance, aluminum steel ladder used in Gallery Factory, 2014]

 http://rohwajeong.com/post/90429626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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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ubled distance, original shape before work, 2014]

 http://rohwajeong.com/post/9042953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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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ubled distance, 갤러리 팩토리 설치 광경, 2014]

 http://rohwajeong.com/post/90429295116


로와정은 작업 현장의 의미를 작품에 반영한다. 작년 4월 갤러리 팩토리에서 열린 전시 <그 정도의 거리>에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선보인 <Doubled distance> 작품은 갤러리 팩토리에서 10년 간 사용한 철제 사다리를 해체하고 재조립해서 만든 것이다. 10년의 역사를 함께 했고, 이제는 낡아 힘을 지탱할 수 없어 사용하지 않았던 사다리를 업사이클링 해서 작품으로 만들었다. 사다리로서의 기능은 없어졌지만, 미술 작품의 오브제가 되었다.


예술가들은 언제 어디에서 작업할까? 번쩍거리는 생각이 오는 순간에만 작업하거나, 자신의 작업실에서만 작업하는 건 아니다. 물론 그런 순간과 장소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21세기와 지구를 벗어나서 작업하는 건 아니다. 필립 로스가 <에브리맨>에서 얘기했듯이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작가는 아침에 일어나 일하러 간다.’


로와정은 작품이 설치되거나 작업이 이루어지는 현장을 자세히 살핀다. 과학 연구소에서, 창덕궁에서, 갤러리에서 장소의 역사와 의미를 고민한다. 그곳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 활동했던 사람들, 자연 풍경을 작업의 오브제로 삼는다. 그리고 해당 장소의 맥락을 자신들만의 시각언어로 다시 만들어 넣는다. 로와정에겐 영감을 얻고 작업하는 모든 장소가 작업실이고 현장이다.


미술 작업을 하기에 좋은 장소란 없다. 모든 곳에서 작업할 수 있다. 작품을 만들기 좋은 시간이란 없다. 언제라도 만들 수 있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언제라도 과학을 할 수 있다. 그러니 지금 당장 하자.


* 로와정의 작품은 rohwajeong.com에서 볼 수 있다.

* <아티언스> 프로젝트 취재에 도움을 주신 이다영 매니저 님께 감사드린다.


박상준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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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박사과정
물리학 실험실에서 예쁜꼬마선충을 연구하고 있으며, 집에서는 예쁜 푸들을 키우고 있다. 시각예술 월간지 <아티클>의 객원기자로 활동하면서 동시대 시각예술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쉴라 재서너프의 <법정에 선 과학>을 포함해 몇 권의 책을 번역했다.
이메일 : cygnus30@hanmail.net      
블로그 : blog.naver.com/cygnus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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