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대의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박사우울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많은 대학원생이 흔히 겪는 우울한 증상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 ‘박사우울증’을 앓는 많은 이공계 대학원생의 삶을 소설 형식에 담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서로 이해하며 보듬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카이스트 박사과정 김창대 님이 씁니다.

‘현실은 남극 속 냉동창고일 뿐이다’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pic_s02e22.jpg » 삽화는 이도연 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지난 줄거리]

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연구실을 옮긴다. 나머지는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8월, 학회의 논문 마감이 있다. 길영, 준상 팀은 논문 제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정원, 보영팀은 실패한다. 9월, 개강을 한다. 정길은 새로 만난 애인, 예은에게 푹 빠져 결혼을 결심한다. 정원은 추석 연휴에 우연히 보영을 만나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게 되고, 보영의 졸업연구에도 함께 하게 된다. 10월, 길영의 논문이 붙는다. 준상은 디펜스 일정을 잡고, 정원은 프로포절을 하라는 교수님의 제의를 받는다.
  



#22.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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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지구가 얼마나 빠르게 회전하고 있는지 아나?”


예은의 아버지께서 물으셨다. 정길은 아직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여느 때처럼 예은의 집 앞에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통금 시간까지 있다가 헤어질 참이었다. 그런데 불쑥 문이 열렸다. 아버지였다. 들어오라 하셨다. 초면인데 거절할 수가 있나. 그래서 시작된 대화다. 나이, 직업 등, 예은에게 이미 들었을 법한 질문만 하시더니, 갑자기 지구의 자전 속도는 왜?


정길은 지구의 반지름이 궁금했다. 반지름만 알면 원주율을 사용해서 둘레를 계산할 수 있다. 24시간에 한 바퀴씩 돌 테니까 속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확히 24시간은 아니다. 그래도 어림값은 나올 수 있다. 정길은 정신을 차렸다. 질문을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다시 해석했다. 역시, 지금은 모른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잘 모르겠습니다.”

“시속 1700킬로미터 쯤 된다고 하네.[1] 웬만한 비행기보다도 훨씬 빠른 거야. 그렇지?”

“네.”

“그런데 우리는 지구가 자전한다는 걸 전혀 못 느껴. 왜 그런지 아나?”


정길은 다시 고민했다. 지구가 워낙 커서 등속 운동하는 것 같아서 그런 걸까? 각속도가 있는 것이지 가속도가 있는 건 아니니까? 아니면 우리 몸의 평형 기관 같은 데서 적응을 해버린 결과? 그러다 다시 정신을 차렸다.


“잘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속도로 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과 모든 물건들이 똑같은 속도로 운동하고 있기 때문이지.”

“네, 맞습니다.”

“우리가 노력하는 것도 똑같아. 남들과 똑같이 열심히 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티도 않나. 안 하는 거나 똑같아. 남들보다 더 열심히, 훨씬 더 많이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는 법이지.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정길은 ‘명심’이라는 단어를 언제 마지막으로 사용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박사 공부도 마찬가지야. 박사과정 밟고 있다고 해서 안주하면 안 돼.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으면, 늘 최선보다 더 많이 노력해서, 더 많은 성과를 내야지. 더 빨리 졸업하고, 더 빨리 성공해야, 한 가정을 책임질 수 있는 거야.”

“맞습니다.”

“가정을 책임진다는 거, 쉬운 일이 아니네. 자네가 아직 현실을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는데, 요즘 세상살이가 쉬운 게 아냐. 하지만 남자로 태어났으면 가장으로서 한 가정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 거야. 처, 자식, 부모님까지. 알았나?”

“네, 알겠습니다.”

“그래, 시간이 늦었네. 이만 가 봐.”

“네, 안녕히 주무십시오.”


정길은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애쓰면서 일어났다. 어머니께도 인사를 드리고 문밖으로 나왔다. 예은이 따라 나왔다. 문을 닫았다. 정길은 안도했다. 끝났구나.



“오빠, 많이 불편했지? 내가 미안해. 아빠는 왜 갑자기 나와 가지고. 아빠가 했던 말들 너무 신경 쓰지 마.”


불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더 정확하게는 불편을 느낄 새가 없었다.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만 집중했다. 예은의 아버지니까.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아버님께서 다 맞는 말씀 하신 건데. 간만에 자극도 받고 좋았어.”

“아니, 왜, 아빠는 벌써부터 가정을 책임지고 어쩌고 그래? 괜히 우리 오빠 부담만 되게.”


이 때다. 정길은 예은에게 결혼 이야기를 꺼낼 기회만 기다려왔다. 아버님께서 이런 좋은 기회를 주시다니. 멋진 멘트마저 떠올랐다. “너는 가정을 책임지고 싶지 않아?”라고 되묻는 것. 그럼 예은은 당황할 것이다. 대답도 하기 전에 몰아 부치는 거지. “나는 너와 함께하는 가정을, 책임지고 싶은데.” 목소리 진동수도 절반쯤으로 낮추면 좋겠다.[2] 완벽하다.


그런데 멈칫, 했다. 정말 ‘책임’질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대체 얼마를 벌어야 할까? 마당까진 아니지만 화단은 있는 단독주택에 사는, 유명하진 않아도 주가는 건실한 중소기업 사장을 아빠로 둔, 예은이를 ‘책임’지려면 말이다.


박사과정 월급으론 당연히 안 된다. 아버님 말씀도 빨리 졸업하고 아주 좋은 데 취직하라는 말이겠지. 연봉 높고 정년 보장되는 그런 데 말이다. 그런데 박사를 딸 수는 있을까? 정말 자전속도보다 빨리 달리면, 되긴 될까? 정길은 3년간 노력했다. 하지만 끝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자신이, 성적도 안 오르는 공무원시험에 몇 년째 매달리는 고시생들과 무엇이 다를까?[3]


차라리 그만 둘까? 서른 살 먹고 3년간의 공백란이 생긴, 서른셋의 석사 학위 소유자를 누가 받아줄까? 아니, ‘아주 좋은 데’서 받아주느냐가 문제이겠구나. ‘현실적으로’ 말이다.


“무슨 생각해?”


한참이나 답이 없자, 예은이 물었다.


“어? 아, 예은이는 밤에 봐도 예쁘네. 여기 가로등 진짜 좋다. 내가 넋놓고 있을 정도로.”


그래도 서른셋. 정길은 인생 사는 지혜는 있다.


“아이, 뭐야.”

“예은아, 여기서 오래 이야기하면 부모님 또 걱정하실라. 이미 10시 넘었잖아. 내일 또 만나자. 들어가서 또 연락할게. 알았지?”


정길은 서둘러 인사하고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었다. 양반다리를 오래해서인지, 다리가 조금 저렸다. 그래서겠지. 발걸음이 무거운 것은.




영은 오랜만에 대학시절 단짝들인 가영, 신영과 만났다. 다음 주면 가영이 결혼한다. 그래서 한 번 뭉쳤다. 밤을 꼴딱 새우자며 싸구려 호텔을 잡았다. 치킨도 시켰다.


박가영(예비신부): 신영아, 넌 어떻게 이런 자리에까지 일거리를 들고 오니?


신영은 구석에 쭈그려 앉아 노트북으로 작업 중이다.

 

이신영(디자이너): 알았어, 알았어. 조금만 수정해서 보내달라잖아. 이거 급한 거야.

박가영(예비신부): 아니, 애초에 이런 자리에 노트북을 가져오는 것부터가 노답[4] 아니냐?

전보영(대학원생): 맞아, 누군 안 바쁜 줄 알아? 나도 읽을 논문이 산더미라고!

이신영(디자이너): 미안, 미안. 5분만 기다려줘. 아직 치킨도 안 왔잖아.

박가영(예비신부): 그러니까 치킨에 대한 기대감에 대해 이야기할 타이밍이잖아.

이신영(디자이너): 나만 빼고 다들 야근 중인데 이 정도도 안 해줄 순 없잖아. 이해 좀 해주라. 오늘 진짜 바쁜 시간 쪼개서 온 거라니까.

박가영(예비신부): 오늘이 제일 낫다며!

이신영(디자이너): 제일 나은 게 이 정도야. 잠시만! 자, 이것만 하면, 아이 참, 여기도 좀 손봐야겠네.

전보영(대학원생): 놔둬라. 쟤, 일 욕심 엄청 났잖아. 디자인과 애가 컴퓨터동아리를 한 것만 봐도 모르니.


셋은 컴퓨터동아리에서 만났다. 신영은 동아리 유일의 디자인과 학생이었다. 디자이너로서 개발자를 이해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며 동아리에 들어왔다. 동아리 활동을 위해 컴퓨터과 수업까지 들었다. 각종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박가영(예비신부): 그래, 동아리 창설 이래 최초랬잖아.

전보영(대학원생):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을까?


신영은 대꾸도 안 하고 일했다. 치킨이 와도 일했다. 가위바위보도 없이 보영과 가영이 닭다리를 뜯는다고 해도 꿈쩍하지 않았다. 닭날개 두 쪽까지 모두 사라진 뒤에야 노트북을 덮었다.


이신영(디자이너): 미안미안미안미안미안! 이제부터 신나게 놀자!

박가영(예비신부): 뭘, 신나게 놀아, 이미 치킨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김이 다 사라졌는데!

이신영(디자이너): 미아아아안! 이제 기분 풀어어! 우리 쓰리-제로(three-zero)가 오랜만에 뭉쳤잖아!


쓰리-제로는 동아리에서의 세 사람의 별명이었다. 이름 끝자가 ‘영’인 세 명이 단짝이라서.


이신영(디자이너): 아차차차, 내 정신 좀 봐. 내가 뭘 준비해왔는지 알아?


신영이 가방을 뒤적였다. 하나를 꺼낸다.


이신영(디자이너): 짜잔! 이거 고급 와인이야! 내가 특별히 준비했어. 오늘 밤에 싹 비우자!

전보영(대학원생): 우와, 이거 비싸 보이는데?

박가영(예비신부): 겨우 이런 걸로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이신영(디자이너): 야아아~ 왜 그래애애~


신영이 가영을 간지럽힌다. 가영이 막 웃으며 난리를 친다. 갑자기 보영이 근엄하게 외친다.


전보영(대학원생): 치킨 식는다!


보영의 외침에 일동 정지한다. 그리고 후다닥 가부좌를 튼다. 치킨을 든다.


박가영(예비신부): 잘못했습니다! 이제 치킨에 집중하겠습니다.

이신영(디자이너): 잘못했습니다! 치킨 만세!


그리고 동시에 한입 문다. 물자마자 웃음이 터진다. 백만 번쯤은 반복했을 대학시절 추억 팔이를 되풀이하며 치와와(치킨과 와인)를 즐겼다.




기운으로 볼터치가 완성됐을 무렵, 가영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박가영(예비신부): 근데, 신영이 너, 아직도 회사에서 잘 나가나보다?

이신영(디자이너): 잘 나가지. 새벽 같이 잘 나가고, 주말마다 잘 나가고.

박가영(예비신부): 좋겠다, 잘 나가서.


연결도 안 되는 말의 흐름이 왜 그리 무겁게만 느껴지는지. 보영은 가만히 있었다.


신영이 잠시 주저한다. 따라 놓은 와인을 소주 털어 넣듯 입에 쏟는다. 그리고 묻는다.


이신영(디자이너): 넌, 결혼하고 계속 일 할 거야?


가영은 계약직이다.


박가영(예비신부): 이미 그만 뒀어.

이신영(디자이너): 뭐? 야, 그래도 2년은 꼬박 채우고 나와야 할 거 아냐. 그래도 경력 2년입니다, 하려면 무슨 험한 꼴을 봐도 2년을 채워야 한다고 그랬잖아.

전보영(대학원생): 가영아….


보영은 겨우 입을 뗐지만, 할 말은 없었다.


박가영(예비신부): 그게 그렇게 쉽니? 어차피 몇 달 있으면 짤릴 거, 눈치 드럽게 봐가며 결혼준비 하기 드러워서 그만 뒀어.

전보영(대학원생): 재계약은 잘 안 되는 거야?


보영은 왠지 물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물었다.


박가영(예비신부): 멀쩡히 다니던 사람도 결혼하면 속속 그만두는 판국에, 나 같은 계약직이 결혼한다는데 가만 놔두겠니?


이 대화를 남자들이 했다면 ‘사람’은 ‘여자’로 치환됐을 것이다.


전보영(대학원생): 어떡하니….

이신영(디자이너): 그래… 그래서 내가 결혼은 생각도 안 하는 거야. 허구한 날 밤 새는데 애는 언제 키우고, 주말마다 특근인데 시댁은 언제 가보니? 일을 계속 하려면 결혼을 하면 안 돼. 그게 내 결론이야.

전보영(대학원생): 그래도….


보영은 애써 입은 뗐지만 말줄임표 밖에 나올 것이 없었다.


이신영(디자이너): 진짜 웃긴 게 뭔지 알아? 결혼하고 애라도 낳고 다시 일할라치면, 사람들 시선이 바뀌는 거 있지? 내가 보기엔 괜찮은데도, 다들 올드해 보인다느니, 감각이 좀 떨어진 거 같다느니…. 진짜 무서운 건, 그게 너무 자연스럽다는 거야.

박가영(예비신부): 근데, 결혼 안 한다고 뭐 달라지니? 결혼 안 하고 늙어봐, 노처녀 소리밖에 안 듣잖아. 뭐 좀 따질라치면 히스테리고 한 번 웃어주면 남자 꼬시는 거고.

전보영(대학원생): 그럼 다시 취직은, 안 해볼 거야?

박가영(예비신부): 해야지, 돈은 필요하니까. 근데, 별 기대는 안 해. 돈 벌 수 있으면 아무 거나 할 거야.


가영은 와인잔을 잠시 응시하더니, 가만히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잔을 털썩 내려놓는다. 몸도, 한숨도, 털썩.


박가영(예비신부): 크, 와인 죽이네. 고맙다, 신영아.

이신영(디자이너): 그래, 내가 노처녀 소리를 골백번 듣더라도 결혼 안 하고 끝까지 버틸게! 그래서, 돈 많이 벌어서, 평생 와인 사줄게! 너 유부녀 됐다고 막 못 나간다 그러고, 그러면 안 된다아!

박가영(예비신부): 니가 부르는데 내가 못 나가겠냐. 오빠한테도 백만 번은 강조해놨어, 너네가 진짜 좋은 애들이고 평생 갈 친구라고.

이신영(디자이너): 그래! 우리 가영, 신영, 보영! 우리 쓰리-제로는 평생 가는 거다! 알았지?


보영은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석사과정이 힘들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니었다. 학교 밖이 야생 정글이라면, 학교 안은 최첨단 동물원이었다.


보영이 조용한 걸 신영이 눈치 챘다.


이신영(디자이너): 보영아, 근데, 넌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졸업하면?

전보영(대학원생): 나? 응, 나….

박가영(예비신부): 어? 너 혹시 나처럼 시집가고 막 그러는 거 아니지? 그치?

전보영(대학원생): 나, 박사과정 지원했었는데, 떨어졌어.


잠시 정적.


전보영(대학원생): 교수님이 학교를 옮기신 것도 있고, 다른 연구실도 남는 자리가 없대서. 그래서 이제 취업 준비를 해야 하나, 다른 대학원이라도 지원해봐야 하나, 고민 중이야.


또 잠시 정적. 가영이 뭔가 결심한 듯 정적을 깼다.


박가영(예비신부): 와우! 보영인 나랑 같은 백수가 되는 거네! 축하해! 이 길이 외롭진 않겠어!


신영과 보영도 가영의 진심을 읽었다.


이신영(디자이너): 야이씨, 너네 나 출근한 사이에 맨날 단 둘이 만나서 놀고 그럴 거야?

전보영(대학원생): 그러엄! 난 가영이랑 놀아야지. 백수끼리!

박가영(예비신부): 넌 돈이나 많이 벌어서 밤에 와인이나 사와!

이신영(디자이너): 아, 이 직장인의 설움이여!

박가영(예비신부): 보영아, 그러지 말고 너도 결혼해라! 이왕 같이 백수 되는 김에 유부녀 백수되자.

전보영(대학원생): 결혼은 혼자 하니? 남자친구도 없는데 무슨.

이신영(디자이너): 야, 너 연구실에 그 오빠 있잖아. 전에 천문대 같이 갔던![5]

박가영(예비신부): 그래, 그 오빠 착해보이더만. 하는 짓도 좀 귀여운 것 같고. 잘 해봐.

전보영(대학원생):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냥 연구실 선배야.

이신영(디자이너): 그 오빠가 너한테 먼저 밥 먹자고 했다며, 천문대도 먼저 같이 가자고 하고. 너한테 호감 있는 거 아냐? 남자들은 허툰 데 시간 안 써.

박가영(예비신부): 맞아, 나 기억났어. 그 때 헤어지려니까 노래방도 가자고 했다가 술 한 잔 하자고 했다가 그랬다며, 그건 백프로지!

전보영(대학원생): 그냥 우연히 만나서, 심심하니까 같이 논 거야. 그게 다야. 그 다음에 아무 일도 없었어.

박가영(예비신부): 에이, 너도 그 오빠한테 호감 있잖아. 그치?

이신영(디자이너): 그래, 너 그 때 천문대 갔다 온 거 되게 신나서 얘기했잖아.

 

보영이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호감이라니. 정원 오빠는 착한 오빠다. 거기까지다. 그냥 거기까지.


전보영(대학원생): 아니야아, 그냥 선배라니까.

박가영(예비신부): 야, 내가 그 분을 잘 모르긴 하지만, 너한테 들은 걸로 생각해보면 진짜 착한 사람이야. 너 그 사람 놓치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어.

이신영(디자이너): 그래, 연구실 선배니까, 연구 좀 도와달라고 하면 되겠네. 연구하다가 모르는 건 무조건 그 오빠한테 물어보란 말이야.


사실 이미 그러고 있다.[6] 연구 분야가 겹쳐서이긴 하지만. 연구 분야가 겹친 것도 사실은 정원 덕분이다. 보영이 석사과정에 처음 입학했을 때 보영을 챙겨준 유일한 사람이 정원이었다. 그래서 비슷한 논문을 읽었고, 그러다보니 비슷한 분야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보영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정원은 착한 오빠니까. 다른 사람들도 곧잘 도와주니까. 아마 다른 여학생이 있었다면 그 학생도 잘 챙겨줬을 거니까.


전보영(대학원생): 에이, 됐어. 이제 다른 얘기하자. 무슨 얘기할까? 가영이 첫 날밤 대책 같은 거?

박가영(예비신부): 우와, 보영아. 너 이렇게 구식이었니? 요즘 시대에 첫 날밤 대책이라니.

이신영(디자이너): 너야말로 뭘 모르네. 요즘 시대니까 더더욱 대책이 필요한 거야. 더 특별해야 할 거 아냐.


셋은 더 이상 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포근한 필터가 적용된 과거 이야기나 밝음 필터가 적용된 미래 이야기만 했다. 직업을 포기하고 결혼을 잡은 여자와, 결혼을 포기하고 직업에 매달리는 여자와, 아직은 순진한 학생일 뿐인 여자에게, 현실은 남극 속 냉동창고일 뿐이다. 지금도 죽을 만큼 차갑다. 하지만 애써 탈출해봐야, 더 차갑다.


지구는 돈다. 매우 빨리 돈다. 우리는 모두 그 위에 올라 타 있다. 내려갈 수 없다. 거스를 수 없다. 이것이 현실이다. 혹자는 얘기한다. 노력해서 현실을 이겨내라고. 지구의 자전만큼이나 빨리 돌아가는 세상을, 더 빨리 돌아서 이겨내라고 한다. 인간의 최고 시속은 37.6km다.[7] 혹자는 얘기한다. 아예 새로운 길을 찾으라고. 남들 다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새로운 길로 가라고. 그러면 현실을 뛰어넘어 성공할 수 있다고. 자전에서 탈출하면, 우주미아밖에 안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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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산백과에 따르면(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44007&cid=40942&categoryId=32287 ), 지구의 반지름은 6400km 정도다. 따라서 지구의 둘레는 40192km 정도다. 어림잡아 24시간에 한 번씩 자전한다고 하면, 40192km / 24 hours = 1674km/h이다.

[2] 음악에서 한 옥타브 차이(낮은 도와 높은 도의 차이)는 물리학적으로는 음파의 진동수가 2배 차이나는 것이다. 즉, 진동수를 절반으로 낮춘다는 것은 한 옥타브 낮춘 음으로, 낮게 이야기 한다는 의미다.

[3] 지난 이야기에서 비슷한 고민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박사를 받기까지 최소한 3년 정도 더 걸리는 것으로 추산했었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16) 참이슬 - http://scienceon.hani.co.kr/334267

[4] 노답: 영어 단어 No와 한자어 답(答)의 합성어. ‘답이 없다’는 의미다. 국적을 뛰어넘는 합성어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간의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기에 사용했다. 그런데, 순(純)우리말도 순우리말은 아니라는…. (페이스북 ‘소피스트봇’ 페이지에서 인용 - https://www.facebook.com/sophistbot/posts/271792946496739)

[5]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18) 힐링 - http://scienceon.hani.co.kr/347008

[6]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19) 샛길 - http://scienceon.hani.co.kr/350763
[1][7] 국제육상경기연맹에 따르면, 100미터 달리기 세계 기록은 우사인 볼트(Usain Bolt)가 2009년에 세운 9.58초이다. 이를 환산하면 시속 37.6킬로미터이다. - http://www.iaaf.org/records/toplists/sprints/100-metres/outdoor/men/senior


  ■ 작가의 말

소설을 쓰고 나면 늘 아쉬움이 남습니다. 더 잘 쓰고 싶습니다. 뭔가 훨씬 좋은 글이 있을 것 같은데, 제게서 나오는 건 이 정도입니다. 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올립니다. 이게 한계인가 싶기도 하고요.

이번 총선에서 투표하신 유권자들도 이런 마음이었겠죠.


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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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20대를 공대에서 보내고 30대도 공대에서 맞이한 전산학도. 그리고 소설 쓰는 사람. 무언가를 고찰하여 글로 표현해내는 것을 좋아한다. <용감한 작가들> 회원이며 페이스북 페이지 <글 쓰는 김창대>를 운영 중이다. https://www.facebook.com/holypsychowrites
이메일 : holypsych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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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과 불행의 사이클이 완성되었다행복과 불행의 사이클이 완성되었다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김창대 | 2016. 03. 04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지난 줄거리]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연구실을 옮긴다. 나머지는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8월, 학회의 논문 마감이 있다. 길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