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대의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박사우울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많은 대학원생이 흔히 겪는 우울한 증상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 ‘박사우울증’을 앓는 많은 이공계 대학원생의 삶을 소설 형식에 담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서로 이해하며 보듬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카이스트 박사과정 김창대 님이 씁니다.

왜 괜히 중간에 끼어들었을까?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pic_s02e202.jpg » 삽화는 이도연 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그동안 좋은 그림 그려주시다 개인사정으로 손을 놓은 박종애 님께 감사 드립니다.)

[지난 줄거리]

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연구실을 옮긴다. 나머지는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8월, 학회의 논문 마감이 있다. 길영, 준상 팀은 논문 제출에 성공한다. 정원도 보영과 함께 논문을 내려고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발견된 에러 때문에 실패한다. 9월, 개강을 한다. 정길은 새로 만난 애인에게 푹 빠져 결혼을 결심한다.

정원은 추석 연휴에 우연히 보영을 만나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게 되고, 보영의 졸업연구에도 함께 하게 된다. 국현은 조교 일을 하다가 치팅을 한 학생을 적발한다.
  



#20. 중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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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김국현 조교님 연구실인가요?”


한 학생이 연구실 문을 빼꼼 열고 머뭇거린다.


“성기완 학생인가요? 여기 와서 앉으세요.”


국현은 옆에 갖다 둔 의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학생을 힐끗 봤다. 성기완. 다른 학생 세 명의 숙제를 조립해서 제출한 학생이다. 과목 담당 교수님께 알렸더니, 학생을 먼저 만나보라고 해서 불렀다.


김국현(박3): 메일은 읽어보셨죠? 그러면 숙제를 어떻게 하셨는지 먼저 얘기해보시죠.


프로그램을 만드는 숙제에서 치팅을 잡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같은 기능을 하는 프로그램을 수 십 명이 만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똑같은 강의를 듣고 똑같은 조교에게 힌트를 얻는다. 그러니 오히려 수업을 열심히 들은 사람들일수록 더 비슷해진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비슷하다고 해서 베꼈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래서 베낀 것처럼 보여도 그냥 넘기는 경우가 많다. 헌법에 규정된 무죄추정의 원칙[1]을 무시할 수도 없거니와, 영장도 없이 숙제하는 현장을 급습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2]


하지만 이번 경우는 확실했다. 함수[3] 단위로 아주 똑같이 베꼈다. 국현은 후딱 자백만 받고 학생을 보낼 생각이었다. 자기가 혼낸다고 귀담아 들을 것도 아닐 테고, 처벌 수준은 어차피 교수님이 정하실 테니까.


성기완(학부생): 저는 일단 왜 제가 치팅을 했다고 의심하시는 건지 그 이유부터 듣고 싶은 데요. 메일 받고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거든요.


학생이 세게 나왔다. 국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안타까웠다. 첫째, 연기가 과하다. 정말 안 베낀 학생들은 처음부터 세게 나오지 않는다. 둘째, 연기로 무마시킬 수준이 아니다. 베낀 것이 너무도, 너무도 확실하다. 이런 수준으로 베껴놓고 이렇게 나오다니.


김국현(박3): 김도형, 이찬규, 한세진. 이 세 학생 알죠?

성기완(학부생): 네? 누구요?


와. 연기라기엔 너무 자연스러웠다. 숙제를 베껴놓고 저렇게 모르는 척을 잘 하다니. 국현은 감탄했다.


김국현(박3): 김도형, 이찬규, 한세진. 이렇게 세 명이요.

성기완(학부생): 아, 세진이는 알긴 알아요. 나머지는 이름은 좀 들어본 것 같은데, 모르겠네요.


하긴, 같은 과 학생일 테니 이름은 들어봤겠지. 국현은 세밀한 연기에 탄복했다. 그리고 모든 취조가 귀찮아졌다. 본론으로 넘어갔다.


김국현(박3): 그래요, 성기완 학생의 숙제가, 이 세 명의 숙제를 베낀 것으로 보이는데, 그래도 모르겠다고요?

성기완(학부생): 아니, 숙제를 하다 보면 좀 비슷해질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이런 변명을 하려면, 변수명[4] 정도는 바꾸는 성의를 보였어야지. 정말 맷돌에 어이가 없고[5] 화장실에 휴지가 없고 카페에 와이파이가 없는 판국이다.


국현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말없이 모니터에 성기완, 김도현, 이찬규, 한세진 학생의 숙제를 띄웠다.


김국현(박3): 그렇죠. 똑같은 숙제를 하다 보면 비슷해질 수도 있죠. 직접 보세요. 이게 비슷한 수준이냐고요.


학생은 모니터를 대충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성기완(학부생): 좀 비슷하긴 하네요. 변수 이름도 똑같고. 그런데 그렇다고 베꼈다고 단정지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우연히 같아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국현은 방금 학생의 행동을 찍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찍어서 표창원 교수[6]에게 보내면 다음과 같이 인터뷰 해줄 것이다. “학생의 행동을 보면 지금, 모니터를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고 결론을 내리고 있거든요. 모니터에 뭐가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다른 학생의 코드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말이죠. 이것만으로도 이미 치팅입니다.”


김국현(박3): 이렇게 똑같은데 우연히 같아진다고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성기완(학부생): 정말 그렇게 베꼈다고 이미 단정 지었으면 왜 절 여기까지 부르셨어요? 전 이미 단정 짓고 시작하는 그게 기분 나쁘다고요.


사실 국현은 학생의 자백이 필요하다. 학생의 말마따나, 정말 만에 하나, 아니 수십억 분에 일의 확률로 똑같은 숙제가 나올 수도 있는 거니까. 숙제를 베끼는 현장을 적발하지 않는 이상 조교가 가진 것은 심증에 불과하다. 물증일 수 없다. 물론 교수님은 정황적 증거만으로도 판결을 내릴 수 있다. 판사의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조교는 그럴 수 없다.


국현은 자기가 화가 나고 있는 게 싫었다. 뭐하러 치팅을 적발해서 이 고생을 하고 있나. 그냥 이쯤에서 접을까 했다. 학생의 말을 그대로 교수님께 전달하면, 교수가 알아서 하겠지 뭐.



때, 정원이 다가왔다.


김정원(박4): 뭐가 어떻게 비슷하길래 그러는 거야? 저도 같이 좀 봐도 될까요?


정원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체했다.


성기완(학부생): 아니, 물론 제가 봐도 좀 비슷하긴 한데요, 그렇다고 베낀 걸로 단정 지어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영악한 척하지만 여지없이 순진한 성기완 학생. 정원이 자기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건가.


김정원(박4): 그렇죠, 그렇죠.


정원은 학생의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대답했다. 그리고 모니터를 봤다. 왼쪽엔 성기완 학생의 숙제가, 오른쪽엔 다른 세 학생의 숙제 중 성기완 학생의 숙제와 같은 부분들이 띄워져 있었다. 국현이가 완벽하게 세팅해 놓았다. 정원은 찬찬히 숙제를 비교했다. 여지없이 똑같다. 하지만 같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역시나. 찾았다. 정원은 미소를 지었다.


김정원(박4): 자, 여기 보실까요? 이 부분에서 보면, 조건문[7] 다음에 꼭 한 칸을 띄우고 괄호를 열어요. 괄호를 연 다음에는 바로 붙여서 다음 글자를 쓰고요. 여기 조건문들이 주우욱 나오죠, 그러다가 딱 여기 한 군데서만 조건문 다음에 바로 붙여서 괄호를 쓰고, 한 칸 띈 다음에 다음 글자를 쓰네요. 그런데 학생 것에도 똑같은 부분에서만 띄어쓰기가 똑같이 달라져요. 이게 일치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학생은 당황했고, 국현은 감탄했다.


김정원(박4): 국현아, 마우스 좀 줘볼래?


정원은 마우스를 가져다가 다른 학생들의 숙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김정원(박4): 원래 반복문[8]에 대한 변수명[4]을 짓는 데는 사람마다 습관이 있게 마련이에요. 그쵸?


정원은 따뜻한 미소와 함께 학생을 쳐다보았다. 학생은 당황한 티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김정원(박4): 제 말이 틀려요? 맞죠?

성기완(학부생): 아, 네, 네.

김정원(박4): 물론, i, j, k를 제일 많이 쓰죠. 하지만 누구는 x, y, z를 쓰고, 누구는 a, b, c를 쓰기도 해요. 그런데 학생은 i, j, k를 주로 쓰는 것 같은데, 조금 전에 봤던 그 부분에서만 x, y, z를 쓰네요? 그렇죠?


정원은 다시 한 번 따뜻한 눈빛으로 대답을 재촉했다.


성기완(학부생): 네, 네….

김정원(박4): 그런데 x, y, z는 띄어쓰기가 완벽히 일치했던 바로 이 학생이 주로 쓰는 변수명이네요. 이 학생의 다른 함수들을 보세요. 제 말이 맞죠?

성기완(학부생): 네….

김정원(박4): 이게 이런 식으로 일치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요?


학생은 정말 확률을 계산해보고 있기라도 하듯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입을 뗐다.


성기완(학부생): 솔직히 제가 세진이 꺼 베낀 건 인정할게요. 그렇지만 다른 건 아니에요.


이건 또 뭔가? 감형이라도 받겠다는 건가? 국현은 상상 외의 반응에 기가 막혀서 고혈압이 올 지경이었다. 국현이 흥분해서 말도 안 나오는 사이, 정원이 다시 말을 이었다.


김정원(박4): 저기요, 잘 모르시나본데, 저희가 적당히 비슷해 보인다고 이렇게 학생 불러다가 물어보고 이렇게 안 해요. 학생은요, 정말 글자 하나, 띄어쓰기 하나 안 다르고 다 똑같은 거 확인했어요. 이미 프로그램 만들어서 다 돌려봤다고요. 적당히 합시다.


학생은 여기가 화장실이라면 당장 바지부터 내리고 변기로 달려갈 것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성기완(학부생): 아니, 저기요, 제가 사실 지지난 주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셔서요, 장례식을 치르느라 수업도 다 빠지고 숙제도 할 수가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좀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시 한 번 반전. 정원이 머뭇거리는 사이, 국현이 다시 끼어들었다.


김국현(박3): 그런 일이 있었으면 교수님께 연락을 드려서 숙제를 좀 늦게 내도되겠냐고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치팅을 하냐구요?

성기완(학부생): 그럼, 그럼 전 어떻게 되는 거예요?

김국현(박3): 원칙상으로는 숙제 보여준 사람과 베낀 사람 양쪽 다 F 받아야죠. 최종 판단은 교수님이 하시겠지만.

성기완(학부생): 아니, 저기 정말, 다 제가 베낀 거거든요. 그 애들은 잘못이 없어요. 네? 그러니까 저만 처벌 받는 걸로 해주세요.

김국현(박3): 뻔히 증거가 다 있는데 뭐가 학생만의 잘못이에요? 어차피 판단은 교수님께서 하실 겁니다. 누가 어떤 벌을 받을지는 교수님과 얘기해보세요. 이만 가보시죠.

성기완(학부생): 아니, 조교님, 교수님께 잘 좀 봐달라고 부탁 한 번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정말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 게요. 제발요.


학생은 거의 울먹거릴 태세였다.


아직도 남은 반전이 있었다니. 국현과 정원은 혀를 내둘렀다. 너무 많은 반전이 계속되다 못해 세계평화라도 찾아와버린 듯 했다. 국현과 정원은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애걸복걸하는 학생을 바라만 보았다.


학생의 소리가 약간 지겨워질 찰나, 아까부터 조용히 자기 할 일만 하는 줄 알았던 보영이 다가왔다.


전보영(석2): 아니 지금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아까 그렇게 아니라고 우겼으면서 선처는 무슨 선처에요. 사람이 양심이 없을 거면 염치라도 있어야지. 여기 연구실이에요. 연구하는 데 방해되니까 빨리 나가세요!


보영의 소리는 컸다. 학생은 흠칫 놀란 듯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며 슬금슬금 나갔다.


놀란 건 국현과 정원도 마찬가지였다. 보영이 큰 소리 내는 건 처음 들어봤다. 잠시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김국현(박3): 보영아, 고맙다. 네 덕에 얘가 갔네.

전보영(석2): 야, 진짜 어떻게 이런 학생이 다 있어요?

김정원(박4): 조교 하다 보면 진짜 별 애들 다 있어. 물론, 요번 애는 좀 센 편이긴 했지만.

김국현(박3): 근데 형, 아까 진짜 멋졌어요. 그렇게 따박따박 설명하는 그 모습 진짜.

전보영(석2): 맞아요. 차마 뒤돌아보진 못했지만, 진짜 좀 대단했어요.

김정원(박4): 화룡점정은 보영이 너지. 너의 그 화려한 마무리가 아니었으면 아직까지 상황 종료가 안 됐을 걸?

김국현(박3): 진짜, 우리 한 팀 같지 않았어요?

전보영(석2): 맞아요. 와, 진짜.

 

감독이 나와 “컷!”을 외치면 딱 좋을 타이밍이다. 모든 제작진이 함께 박수치고 다음 장면을 찍으러 가면 좋을 바로 이 순간. 이 순간이 현실에서는 가장 민망한 순간이다. 이야기를 이어 가기엔 좀 민망하고, 다음 주제는 아직 나오지 않은 이 순간. 다시 한 번 보영이 상황을 해결했다.



보영(석2): 근데 정원 오빠, 교수님 메일이 왔는데요.

김정원(박4): 아, 그래? 뭐라셔?


국현은 조용히 자리로 돌아갔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전보영(석2): 그게… 교수님이….

김정원(박4): 뭔데? 말해봐.

전보영(석2): 구현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말씀드렸었거든요, 그랬더니 구현을 왜 그렇게 하냐면서, 일단 알고리즘을 빨리 만들라고...

김정원(박4): 그래? 음, 메일을 보여줘.


혹시나, 보영이 교수님 메일의 뉘앙스를 잘못 읽은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직접 보겠다고 한 것이다. 정원은 보영의 자리로 같이 갔다. 보영이 보낸 메일부터 봤다. 구구절절했다. 아마 대충 읽어 넘겼을 것 같은 길이였다. 답장도 봤다.


구현 방식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왜 그렇게 하는 거지?

알고리즘[9]부터 만들어야 할 듯. 기계학습(Machine Learning)[10]을 적용해도 좋고.

 

권대성


역시. 웬만하면 두 줄을 넘지 않는 교수님의 메일.


김정원(박4): 음… 이게 무슨 뜻일까….


정원은 군 시절이 생각났다. 가끔 사단장이 들러 몇 마디를 하고 갈 때가 있었다. 사단장이 가고나면 대대장, 중대장, 행정관이 회의를 시작했다. 그 몇 마디의 배경과 진의를 알아내려고 머리를 맞댔다. 그냥 쫓아가서 무슨 뜻인지 물어보면 될 것을, 꼭 자기들끼리 쩔쩔맸다. 회의를 하고 나면 형식적인 인사말이 군 기강에 대한 엄중한 지적으로 바뀌고, 날씨에 대한 회고가 철저한 제설 작업 강조로 바뀌었다. 사단장이 무슨 의도로 말했는지는 영원히 아무도 몰랐다. 병사들만 영원히 고통 받았다.


정원은 자기도 그럴까봐 겁났다. 구현을 왜 그렇게 하냐는 건, 다른 방식을 찾아보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다른 방식이라면 운영체제를 고치는 것일 테고, 그러면 일이 너무 커진다. 물론 확대해석일 수도 있다. 단순한 물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축소해석 해도 문제다. 교수님이 시키는 건 다 해야 졸업이 가능할 테니까. 잘못 해석하고 다른 일을 하다간 졸업이 늦어지는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보영이 정원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교수님은 두 줄짜리 메일만 보낸다. 하지만 정원과는 두 시간 동안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다.


다행히도 정원에게 제 3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김정원(박4): 그래, 교수님은 연구할 때 주로 시뮬레이터(simulator)[11]를 사용하셔서 그러실 수도 있어. 네가 지금 한 걸 시뮬레이터에서 구현하자면 괜히 복잡하고 이상한 것이 되니까 말이야. 그런데 또 스케줄러에 대한 연구를 하려면 아무래도 시뮬레이터보다는 컴퓨터로 직접 돌리는 게 나아. 시뮬레이터로는 아주 짧은 시간에 대한 실험 밖에 못 하니까. 일단 나중에 교수님과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고,


자신의 말을 보영이 잘 알아들었을까? 정원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계속 말했다.


김정원(박4): 교수님 말씀대로 알고리즘 먼저 생각해봐. 순서도를 그려도 좋은데, 교수님 말씀처럼 기계학습 기법도 생각해봐. 그게 좀 있어 보이긴 하거든. 근데, 너 기계학습 수업은 들었니?

전보영(석2): 작년에 들어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어쨌든 고민해볼게요.


정원의 고민도 시작됐다. 어디까지 도와줘도 되는 걸까? 분명 보영의 졸업이다. 보영이 스스로 해내야 하는 게 맞다. 그렇지만 보영은 연구란 걸 접한 지 이제 2년째이지 않은가. 석사과정이란 게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정원도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하지만 정원이 돕는 게 능사는 아니다. 잘못된 방향, 그러니까 교수님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도와줬다간 보영만 곤란해질 수 있다. 그래도 정원이 아는 것도 많고 경험도 많으니, 도움이 되긴 되지 않을까?


김정원(박4): 알고리즘, 지금 같이 고민해볼래? 같이 브레인스토밍 좀 하면 뭐가 좀 나오지 않을까?


정원이 이 바닥에서 구른 지도 벌써 6년. 석사 졸업에 필요한 수준의 알고리즘은 대충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틀 뒤, 국현이 갑자기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 IC)를 찾았다.


김국현(박3): 아이씨!

김정원(박4): 왜 그래?

김국현(박3): 며칠 전에 왔던 치팅한 학생 있잖아요.

김정원(박4): 응,

김국현(박3): 교수님이 그냥 이번 숙제만 0점 주고 넘어가래요. 이러면 베낄 순 없어서 아예 안 낸 애들이랑 똑같잖아요. 그럼 다들 베껴서라도 내보지, 뭐하러 양심을 지켜요.

김정원(박4): 헐. 진짜? 그럼 그 보여준 애들은?

김국현(박3): 얘가, 자기가 친구들 소스코드 훔쳤다고 했나 봐요. 직접 보여준 게 아니라고 그냥 놔두래요.

김정원(박4): 그 애 말을 다 믿으시는 거야? 교수님은?

김국현(박3): 제 말이요! 애써서 치팅을 잡아내면 뭐해요. 학생들이 무슨 재벌들도 아니고. 이렇게 다 봐주고 그러니까 애들이 계속 베끼기나 하는 거라구요.


그렇다고 불만을 가지면 뭐하나. 국현은 조교다. 학생들의 귀찮은 질문과 교수의 귀찮은 일거리만이 조교의 몫이다. 모든 권한은 교수에게 있다.


왜 괜히 중간에 끼어들었을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갈 것을. 국현은 이번엔 교류전류(AC: an Alternating Current)를 찾았다.



때, 보영이 들어왔다. 교수님을 만나고 온 것이다.


전보영(석2): 정원 오빠, 교수님이 시뮬레이터 쓰는 게 좋겠다고 하시는데요….

김정원(박4): 뭐? 스케줄러 연구하는데 시뮬레이터를 쓴다고?

전보영(석2): 시간도 많지 않으니까, 운영체제 고쳐서 시간 걸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고….

김정원(박4): 지난 번에 내가 얘기했던 건, 말씀드려봤어?

전보영(석2): 오빠가 실제 하드웨어에서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래도 시간 없으니까 시뮬레이터로 먼저 하자고….

김정원(박4): 이제 와서 시뮬레이터 설치하고 설정하면 그게 더 시간 걸릴 수도 있는데.

전보영(석2): 그러니까 오빠한테 예전에 설정해 놓은 것 좀 받아서 하라고….


과연 보영이는 교수님께 잘 말씀드린 걸까? 정원은 직접 교수님을 설득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보영이의 졸업연구다. 정원이 직접 나서기도 좀 그랬다.

 

김정원(박4): 그럼 알고리즘은? 그거 가지고는 별 말 없으셔?

전보영(석2): 그것도, 기계학습(Machine Learning) 버전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김정원(박4): 결국 마음에 안 드신다는 거네.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정원 나름대로 도와준 것이 쓸모없어지는 상황이다. 보영의 이틀만 날렸다. 어차피 교수님이 지도하는 대로 논문이 만들어질 테니까.


왜 괜히 중간에 끼어들었을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갈 것을.


그리고, 왜 괜히 박사과정에 끼어들었을까? 가만히 있으면 평범한 계약직은 됐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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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 헌법 제27조 4항.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2] 대한민국 헌법 제16조. 모든 국민은 주거의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 주거에 대한 압수나 수색을 할 때에는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

[3] 함수: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한 단위. 수학에서의 함수 f(x)처럼, 어떤 값을 넘겨주면 그걸 처리해서 결과 값을 돌려준다. 소설로 치면 문단 혹은 단락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4] 변수명: 프로그램을 만들 때 어떤 의미의 값을 저장하기 위해, 그 값에 지어주는 별명. 별명만 유지한 채로 별명에 해당하는 값을 변화시켜 가며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변할 수 있는 수’라는 의미로 ‘변수’라고 한다. 소설로 치면 등장인물 이름과 같다.

[5] 어이가 없다: 영화 <베테랑>에서 유아인이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 걸로 유명하다. “맷돌 손잡이가 뭔지 알아요? 그걸 어이라고 해요. 맷돌을 돌리다가 손잡이가 빠지면…. 근데 지금 내 기분이 그래. 어이가 없네.” 하지만 실제로 ‘어이’가 맷돌 손잡이라는 것은 별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다’의 ‘어처구니’가 맷돌 손잡이라는 설이 있지만 이 또한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한다. 어이가 없다. 영화는 역시 허구다.

- 김주동 기자. “베테랑 유아인 "어이가 없네"의 몇가지 설”. 머니투데이. 2015년 9월 29일.

  http://news.mt.co.kr/mtview.php?no=2015092511175655116

- 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 “어이/어처구니” 2015년 11월 3일.

   http://www.korean.go.kr/front/onlineQna/onlineQnaView.do?mn_id=61&qna_seq=88571 

[6] 표창원 교수: 범죄심리학자. 경찰대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등에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하는 역할로 많이 나왔다.

[7] 조건문: 프로그램을 만들 때 사용하는 문법의 하나. “어떤 조건을 만족하면 아래 내용을 수행하시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면, if (a > 10) { do something } 과 같이 쓴다. 이때 ‘if’라는 단어와 다음의 괄호(조건을 기술한) 사이에는 띄어쓰기를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8] 반복문: 프로그램을 만들 때 사용하는 문법의 하나. “특정 조건이 만족하는 동안 기술한 내용을 반복해서 수행하시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면, while (i < 10) { do something } 과 같이 쓴다. 이 때 ‘몇 번 반복할 것인지’에 해당하는 변수명은 i, j, k 같은 것을 많이 쓴다.

[9] 알고리즘(algorithm):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순서대로 기술해 놓은 것. 가장 유명한 알고리즘으로는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이 있다. 1. 냉장고 문을 연다. 2.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다. 3. 냉장고 문을 닫는다.

[10] 기계학습(Machine Learning): 기계를 학습시켜서 더 좋은 결과를 뽑아내는 방법론을 의미한다. 특히 쇼핑몰, 영화 사이트 등에서 사용자에게 구매할 것을 추천할 때 많이 쓰인다. 사용자가 어떤 물건들을 사는지 구매패턴을 기계학습을 통해 파악한 뒤, 비슷한 구매패턴을 가지는 다른 사용자들이 구매한 물건을 추천해주는 식이다. 요즘 유행하는 ‘빅데이터(Big Data)’도 큰 규모의 데이터에 기계학습을 적용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11] 시뮬레이터(simulator): 실제 동작을 흉내 내는 프로그램 혹은 기계. 중앙처리장치(CPU)는 실제로 반도체로 만들어서 테스트하기엔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따라서 중앙처리장치(CPU)의 동작을 흉내 내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새로운 기능 혹은 구조를 추가해 테스트해보며 연구하기도 한다.


  ■ 작가의 말

정말 오랜만에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를 썼습니다. 그동안 결혼준비와 결혼, 신혼여행 때문에 쉬었습니다. 이제 유부남이 된 상태로 소설을 써나갑니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의 연재는 5~6번 정도 남았습니다. 새로운 시작도 잘 했으니, 마무리도 잘 해야겠지요. 독자님들께서도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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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20대를 공대에서 보내고 30대도 공대에서 맞이한 전산학도. 그리고 소설 쓰는 사람. 무언가를 고찰하여 글로 표현해내는 것을 좋아한다. <용감한 작가들> 회원이며 페이스북 페이지 <글 쓰는 김창대>를 운영 중이다. https://www.facebook.com/holypsychowr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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