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대의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박사우울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많은 대학원생이 흔히 겪는 우울한 증상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 ‘박사우울증’을 앓는 많은 이공계 대학원생의 삶을 소설 형식에 담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서로 이해하며 보듬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카이스트 박사과정 김창대 님이 씁니다.

"속도가 빠르면, 뭐가 좋아지는데요?" -소설

김창대의 단편소설


pic-2G.jpg » 박종애 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작가의 한마디


안녕하세요,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2>를 연재 중인 김창대입니다. 제가 장가를 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죠. 그런데 아쉽게도, 소설 연재는 한동안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결혼 준비도 있고, 신혼여행도 다녀와야 하니까요. 그래서 연재를 쉬는 동안 제가 예전에 썼던 다른 소설들을 올리기로 했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시면서 다음 연재를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2>의 다음 이야기는 2월19일(금)에 올릴 예정입니다.

*  *  *

빠른 것은 좋은 것일까요? 더 빠른 기술은 과연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언제부터인가,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기업보다 필요를 만들어내는 기업이 더 각광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상합니다. 필요 없던 것이 필수품이 됩니다. 행복했던 시절이 “이것도 없이 어떻게 살았었지?”하는 시절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 속에서의 개인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좋은 기술을 개발해야만, 아니, 개발한 기술이 좋다고 알려져야만 하는 기업가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저 쏟아져 나오는 기술들을 맛보고 즐기는 소비자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특별히 둘 사이에 끼어있는 어떤 사람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고 있을까요?

※ 이 소설은 제20회 카이스트 문학상(2014)에서 ‘소설 부문 당선작’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2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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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호”


우리 회사 마지막 2G 가입자가 여기에 산다.


승진은 벨을 누르려다 말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처음 눌러보는 벨은 아니다. 하지만 열린 적이 없다. 저 문이 열리면, 지난 3개월간 승진을 괴롭혀 왔던 바로 그 사람이 나올 것이다.


3개월 전, 승진은 이동통신사에 인턴으로 들어갔다. 대학 졸업 후 2년여를 놀다가 겨우 들어간 인턴이었다. 승진을 포함한 10명의 인턴들에게 주어진 업무는 98명 남은 2G 가입자들을 3G 서비스로 전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회사는 2G 서비스를 종료시키고 그 주파수 대역을 이용하여 4G 서비스를 하고 싶어 했다.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정부의 허가까지는 받아냈지만, 무턱대고 서비스를 끊어버리면 기업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게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3G로 바꾸는 2G 가입자들에게 핸드폰도 공짜로 주고 1년간 기본료도 지원해 주는 등 많은 혜택을 주기로 했다. 그 결과 수만 명에 이르던 2G 가입자가 98명까지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 후 몇 달 동안 추가로 전환하거나 해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꿈쩍도 안 할 태세였다. 회사에서는 머리를 썼다. 인턴들에게 몇 명씩 할당을 하고, 서비스 전환만 다 시키면 정직원으로 채용하겠다고 한 것이다. 정직원만 될 수 있다면 부모님댁 담보라도 잡힐 사람들이 바로 인턴 아니던가.


승진의 처음은 좋았다. 다른 사람들은 10명씩 할당 받았는데, 제비뽑기에 뽑혀서 8명만 할당 받은 것이다. 또 아이디어도 냈다. 2G 가입자가 다른 통신사로 이동하더라도 자사에서 서비스를 전환할 때 받는 혜택과 비슷한 수준의 혜택을 주자는 것이었다. 다른 통신사 중에 2G 서비스를 유지하는 곳도 있었기 때문에 이 정책은 큰 호응을 얻었다. 2G 가입자는 2달 만에 15명으로 줄어들었다. 승진은 임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3명의 인턴이 정직원이 되었다.


동기들이 정직원이 되는 모습을 보자, 승진은 초조해졌다. 승진에게도 이제는 2명밖에 남지 않았다. 다시 아이디어를 냈다. 남은 사람들에게 비밀리에 각종 선물을 할 수 있도록 회사 자금을 지원해달라는 것이었다. 더 큰 혜택을 주는 것은 기존 전환자들과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회사에서도 어려워하던 터였다. 승진의 아이디어는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이제 인턴들은 발로 뛰기 시작했다. 꽃, 과일을 사들고 고객들의 집으로, 회사로 찾아다녔다. 최신형 태블릿을 선물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3G 데이터 통신이 지원되는 기종이었다. 자기 어머니 나이뻘이길래 자식 살려주는 셈치고 한 번만 봐달라고 눈물을 흘렸더니 서비스 전환을 해주더라는 무용담도 들려왔다. 고급 술집에 룸살롱에 2차까지 접대해드렸다는 인턴도 있었다. 술집에 드는 비용은 회사 돈으로 처리가 안 돼서 자신의 한 달 치 월급을 쏟아 부었다고 했다. 그렇게 승진을 제외한 모두가 정직원이 되었다. 승진도 최신형 스마트폰을 선물하는 것으로 한 명을 해치웠다. 그 사람은 단지 공짜로 준다는 폰 목록에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이 없어 전환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명. 그가 승진의 눈앞에 보이는 209호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박태민, 28세. 이 사람만 전환한다면 승진도 정직원이 될 수 있다. 이미 임원들의 주목을 받는 직원이 되었으니 정직원만 된다면 승진도 따 놓은 당상일 것이다. 이 사람만 바꿔준다면.


‘지금 집에 있기는 할까?’


당연하게도, 박태민 고객님을 만나려고 한 게 처음은 아니다. 이전에도 만나려고 시도해봤다. 한 번은 사촌 결혼식이라 다른 지방에 있다며 거절했다. 한 번은 이모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이라고 했다. 세 번째엔 회사에 일이 많다고 했다. 승진은 몇 시에 끝나도 괜찮으니 기다리겠다며 회사 위치를 물었다. 고객님은 밤을 샐지도 모르겠다며 거절했다. 우연의 일치 치고는 빤한 레퍼토리였다. 하지만 고객님의 말투는 너무도 진실했다. 과장이나 꾸밈은 상상할 수 없었다. 승진이 고객님을 의심해볼 만한 신분도 아니었지만.


오늘도 집에 오는 걸 허락한 건 아니다. 거절하지 않았을 뿐이다. “전 할 말 없다니까요. 저는 계속 쓸 겁니다.”라는 말만 반복했다. “내일 3시쯤 집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괜찮으시죠?”라는 말에도 “전 정말 계속 쓸 겁니다.”라고만 반복했다. 승진은 무작정 온 것이다. 무례고 자시고, 승부수를 띄울 타이밍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지… 전화를 안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어…’


승진이 계속해서 같은 번호로 전화했으니 연락을 잘 안 받을 만도 했다. 2G 핸드폰에도 발신자 표시 기능은 들어있으니까. 이미 전환해주신 고객님들도 한 번 통화하려면 서너 번은 전화해야 했었다. 하지만 박태민 고객님은 어느 시간대에 전화를 하던지 안 받은 적이 없었다. 아무리 길게 설명을 해도 꼭 끝까지 들었다. 그리곤 정중하게 인사까지 하고 끊었다. 대체 어떤 사람일지, 승진은 호기심마저 발동해 버렸다. 벨을 눌렀다.




“띵동!”


처음 보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 박태민에 대한 호기심, 정직원에 대한 꿈, 아침밥을 차려주시던 어머니, 3G 전환 가입자용 계약서 등등이 머리를 스쳤다. 심장 박동이 또렷이 느껴졌지만, 횟수는 셀 수 없었다.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승진은 조용히 침만 삼켜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박태민 고객님 안녕하세요. LKT의 고승진입니다. 전화 드렸었는데요.”


문은 순순히 열렸다.


“목소리 들으니 알겠네요. 드릴 말씀은 없을 것 같지만, 일단 들어오시죠.”


둘의 첫 대면이었다. 박태민 고객님은 계란형 얼굴에 흰 피부, 건장한 체격을 가졌다. 눈 끝이 위로 뻗고, 코가 날렵했다. 전체적으로는 쾌활한 인상이었다.


“네, 고객님. 통화는 굉장히 자주 했죠, 확답은 안 주셨는데 제가 무례하게 찾아온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승진은 최대한 반가우면서도 정중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수십 번도 더 연습해 본 말이다. 고객님은 대꾸도 않는다. 그냥 들어오라는 듯 뒤로 물러섰다.


승진은 신발을 벗으면서 눈동자만 살짝 들어 재빨리 집을 관찰했다. 평범한 오피스텔이다. 현관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화장실이 있고 그 안쪽으로 길게 방이 있는 구조다. 화장실 맞은편에 싱크대와 식탁이 이어져 있다. 싱크대는 비어 있었고 식탁 위엔 수저가 몇 개 꽂힌 수저통만 하나 놓여있다. 안쪽에 소파와 책상이 보인다. 책상 위엔 24인치쯤 되는 모니터가 꺼진 채로 있고, 그 옆엔 무선공유기 하나가 깜빡인다. 모니터 위로 그림이 하나 걸려있다. 금강산쯤 되어 보이는 절경이었다.


“그림이 아주 아름다운 데요. 금강산인가요?”

“사진이에요. 유화처럼 보이게 효과를 좀 넣어서 그렇지.”


말투는 차가웠지만, 승진은 고객님의 입꼬리에 희미하게 자부심이 비치는 걸 볼 수 있었다. 고객님의 눈치를 보며 반대쪽을 살폈다. 옷장, TV, 침대가 있었다.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림, 아니 사진을 제외하곤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승진은 계속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서늘한 눈길을 느꼈다.


“본론부터 얘기하시죠.”


고객이 차갑게 말하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승진의 예상보다 세게 나왔다. 하지만 질 수 없다. 정직원이 걸린, 인생이 걸린 일이니까. 저렇게 나온다면 에둘러 이야기해서 될 게 아니다. 짜증만 부르기 십상이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다.


“어떻게 하면 바꿔주실 수 있겠습니까? 원하시는 대로 해드릴 수 있습니다.”

“몇 번을 더 얘기해야 되나요? 바꾸기 싫습니다. 저는 2G를 쓰겠습니다.”


“고객님,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정부도 2G 서비스 종료를 허가한 상황입니다. 어차피 3달 뒤면 더 이상 2G 서비스를 쓰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더 이상 보상 혜택도 받기 힘드실 겁니다. 아마도 3G 서비스로 무료로 전환해드리는 정도는 해드릴 수 있겠지만요. 지금은 제가 고객님께 이런 저런 것들을 해드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다양한 혜택을 드릴 수가 있는 겁니다. 이 기회를 잡으시는 게 낫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건 몇 번이나 말해주셨잖아요. 그런데 바꾸기가 싫다니까요.”


“그 때 제가 보내드렸던 무료 스마트폰 목록 있죠? 그거 말고 최신 스마트폰으로 바꿔드릴 수 있어요. 무엇이든 기종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갤럭시 노트4를 원하세요, 아니면 아이폰6 플러스를 원하세요?”

“좋은 휴대폰 얻으려고 이러는 거 아닙니다.”


“제가 태블릿도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대체가 아니라 추가에요. 어느 고객님도 이렇게 모신 적은 없습니다. 갤럭시 노트 10.1, 아이패드 에어2, 뭐든 가능합니다. 요즘 7인치 사이즈가 유행이던데, 그것도 가능합니다.”


이쯤 되면, 회사에서 허락해준 금액보다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정직원 한 달 월급만 얹어도 충분한 것이다. 승진은 충분히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고객의 표정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안 되면 스마트워치도 이야기해 봐야겠다, 라고 생각하던 찰나, 고객이 입을 열었다.



“커피 한 잔 하시겠어요?”

“네?”


승진이 당황하거나 말거나 고객님은 차분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찬장에서 원두가 담긴 통을 하나 꺼내왔다. 몇 가지 기구들도 꺼내 식탁 위에 펼쳐 놓았다. 먼저 분쇄기에 원두를 넣고 갈았다.


“코피 루왁이라고, 아세요?”

"아, 아니요…"


"말레이사향고양이라고 고양이의 한 종류가 있는데, 그 고양이가 먹어서 배설물로 나온 원두로 만든 커피에요. 가격도 비싸지만 생산량 자체가 적어서 맛보기도 힘들거든요. 그래도 제덕에 고생 많이 하신 분이니 특별히 대접해 드릴게요."

"네?"


고객님은 한참이나 원두를 갈았다. 그리고 갈린 원두를 드리퍼 위에 놓은 여과지 위에 옮기고, 그 위로 천천히 물을 따르기 시작했다. 느리고 일정한 속도였다.


"요즘에는 말레이사향고양이에게 직접 커피원두를 먹여서 사육하기도 하는데요, 이건 야생에서 구한 진짜 코피 루왁이에요. 삼으로 치자면 산삼 같은 거죠."


승진은 혼란스러워졌다. 정확히 들은 게 맞는다면 지금 저건 고양이 똥 속에 들어있던 원두라는 것이다. 그걸 우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똥물 아닌가. 그게 비싼 거라니, 일부러 만든 거라니. 구역질마저 나려했다. 분명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고객님이 베푸시는 호의다. 감정노동이 절실한 순간이다. 하지만 승진은 이미 똥을 입안에 넣은 느낌이었다.


"왜요? 배설물이라니까 거부감 들어요?"

"아니, 그게…"


고객님은 커피를 잔에 따르고, 냄새를 음미하더니 한 모금을 입에 넣고 천천히 넘겼다. 고객님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라면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승진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입가가 굽어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3G도 그렇게 좋은 거라면서요. 하지만 저는 거부감 든다고요. 이제 이해가 되세요?"


고객님은 순식간에 강펀치를 날렸다. ‘역전 됐다’라는 생각만 승진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이겨야만 했다. 절박한 순간에 머리는 회전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건 다르죠. 배설물이라는 것은 원래 쓰고 남은 찌꺼기를 의미하는 것이잖아요. 또, 우리는 어려서부터 배설물을 더러운 것으로 인식하도록 교육받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통신망은 다릅니다. 이미 2G 서비스를 이용하고 계시잖아요. 거기서 단지 속도만 빨라질 뿐입니다. 거부감 느끼실 것이 전혀 없어요."

"아니요. 가격도 올라가잖아요.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요금제로는 한 달에 3만 원 정도밖에 안 나와요. 그런데 3G는 3만 4천원부터 시작하잖아요. 그 데이터통신인가 뭔가, 저는 쓰지도 않을 게 들어가면서요. 속도가 빨라지거나 말거나 제가 느낄 서비스는 똑같은데, 은근슬쩍 가격만 올리려는 거 아니에요, 지금."


고객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승진은 오히려 안도했다. 이제야 협상 테이블로 나오는 구나 싶었다. 고객의 한 달 휴대폰 요금이 이미 평균 3만 4천 원 정도인 것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고객님, 요금이 걱정이셨습니까? 그럼 진작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지금 쓰시는 요금 수준 그대로 맞춰서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해드릴 수 있거든요. 저희가 스마트폰을 새로 구매하시는 고객님들을 대상으로 2년만 약정하시면 요금을 30% 할인해드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고객님께서는 스마트폰 구매 비용은 부담하실 필요가 없고요. 제가 챙겨드리는 거니까요. 공짜폰 2년 편하게 쓰신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할인 서비스를 적용하면 3만 4천원짜리 요금제가 2만 3천 8백원이 되거든요. 오히려 지금보다 저렴하게 쓰실 수 있는 거죠."


2만 3천 8백원, 수십 번도 더 외운 액수였다. 승진은 다시 눈치를 살폈다. 약간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고객님은 다시 코피루왁, 승진에겐 똥물, 을 천천히 한 모금 삼켰다. 그새 적응된 건지 승진은 미소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제가 지금 돈이 없는 게 아니고요, 왜 과소비를 만들어 내느냐는 겁니다. 저에게는 할인을 해 주신다 쳐도, 그래서 제가 부담할 돈은 좀 더 저렴해진다고 쳐도, 사회 전체적으로 통신비를 올리시겠다는 거 아니에요. 예전에는 필요도 없던 핸드폰을 필수품처럼 만들어버리더니, 어느덧 모든 사람에게 세금 걷듯이 통신비를 걷어가 버리고, 이제는 그 세금을 인상하겠다는 거잖아요. 핸드폰요금이 무슨 주민세도 아니고, 안 그래요?"


커피 한 모금에 가라앉았던 고객의 목소리는 이내 격앙을 되찾았다.


사실 승진도 느끼고 있던 바였다. 승진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전화요금 고지서엔 몇 천원의 요금이 찍혀있었다. 그것도 엄마가 종종 친구들과 한 시간씩 통화한 결과였다. 그러던 것이 승진의 중학생 시절 PC통신이란 것이 나오고 인터넷이란 것이 나오더니 몇 만원 수준으로 올랐다. 승진의 부모님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학원비 정도로 생각하시는 듯 했다. 핸드폰이 나오면서는 한 가족 당 몇 만 원이 한 명당 몇 만 원 수준으로 뛰었다. 처음엔 회사에서 외부 영업을 자주 뛰는 아버지만 핸드폰을 마련했다. 하지만 종종 등산을 다니시던 어머니도 곧 핸드폰을 구입했다. 한 두 해쯤 지나니 승진의 친구들도 대부분 핸드폰을 가지게 되었다. 사춘기였던 승진이 핸드폰을 쟁취했음은 물론이다. 그 때부터였다. 엄마의 가계부에서 통신비가 '세금/공과금'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항목으로 기재되기 시작한 것이.


승진이 고민에 휩싸이는 사이, 고객님은 한층 누그러졌다.


"제가 말단 직원 분에게 이런 말씀까지는 안 드리려고 했는데, 그래서 그냥 안 바꾸겠다고만 한 거 아니에요."


승진의 고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통신비'를 버느라 오늘도 공장에 나가신 엄마가 생각났다. 직원들 월급만 겨우 줄 뿐 집으로는 한 푼도 못 가져오는 아버지도 생각났다. 연금은 물론이고 보험 하나 못 들어 놓으신 부모님이다. "우리 승진이가 우리의 보험이자 연금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그마저도 대학교 졸업반이 되자 왜인지 말씀하신 적이 없으신 부모님이다. 말은 맞다. 연금 부을 돈, 보험들 돈, 전부 다 승진의 학원비와 등록금으로 들어갔다. 승진은 지금 펀드매니저다. 그 빌어먹을 돈으로 수익을 올리지 못하면, 세상에서 잘릴 수도 있다. 부모님과 함께.



진은 물러설 수 없었다. 어차피 지금은 회사 직원일 뿐, 고승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허투룬 생각 따위 지워도 된다. 맡겨진 임무만 다 하면 된다. 승진은 조금 더 차분하게 한 글자 한 글자 혀의 위치에 조금 더 신경 써서 말하기 시작했다.


"고객님, 비용이 높아진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속도도 빨라지지 않았습니까. 지금 쓰시고 계신 핸드폰에서 최대 전송속도는 64Kbps에 불과합니다. 쉽게 생각해서, 예전에 모뎀 쓰시던 거랑 같습니다. 그런데 3G 통신망을 사용하게 되면 속도가 2.4Mbps까지 올라가거든요. 40배가량 빨라지는 거예요. 저기 보니까 이 집에도 인터넷 광통신망이 깔려 있는 것 같은데, 예전에 모뎀 쓰시던 때에 비하면 얼마나 편리해지셨습니까. 바로 그게 3G 서비스입니다. 거부감을 가지실 필요가 없으세요."


이제껏 그래왔듯 고객은 승진의 말을 차분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이제껏 그래왔듯 승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반박했다.


"속도가 빠르면, 뭐가 좋아지는 데요? 속도 좀 그만 빨라지면 안 되나요? 어차피 지금도 전화되고 문자되잖아요. 급한 연락도 다 할 수 있단 말입니다. 실컷 잡담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대체 그 놈의 속도 더 빨라져서 어따 쓰느냐, 이겁니다."


고객은 약간 거칠어진 숨을 다시금 골랐다. 그리고 승진의 가슴팍에 있는 명찰을 힐끗 보더니 이어서 말했다.


"고승진씨. 그런 생각해 본 적 없나요? 이 세상이 너무 빨라지기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요. 왜 빨라져야 하는 지도 모른 채로, 더 이상 빨라질 필요가 있는 건지 고민도 안 해보고, 모두가 더 빠르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날마다 신문에서는 뭐가 몇 배가 빨라졌다고, 좋아졌다고 말하는데, 그게 정말 좋아진 거예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 지는 건 맞는 거예요?"


정말 물어보려고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할 말이 떨어진 것인지, 고객은 말을 멈추었다. 승진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이 사람의 정체는 무얼까? <느리게 산다는 것은>이라도 읽은 걸까? (회사 내에서 누군가 도서 구입 신청을 했는데 임원진에 의해 잘렸다는 소문이 도는 책이다.) 제기랄. 이런 걸 왜 고민하는 거야. 하필 내 고객이! 철학과라도 나온 대단한 사람일까? 그냥 인터넷에 떠도는 온갖 개똥철학을 섭렵한 사람 아냐? 아니면, 혹시, NGO 단체 간사?


그렇다고 더 이상 생각만 할 수도 없었다. 승진은 아직 인턴이었으니까.


"고객님,"


승진은 고객님을 차분히 부른 뒤에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속도가 빨라지면 좋아지는 게 뭐냐고 물으신 거죠? 지금이야 일반화된 거지만 3G가 처음 나왔을 때 영상통화가 가능하다고 한창 광고하던 거 기억나실 겁니다. 요즘은 가족들도 서로 멀리 떨어져 사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서로 목소리만 들으며 살기엔 아쉽잖아요. 얼굴보고 통화하면 좋지 않을까요? 고객님께서도 부모님과 함께 사시는 것 같지는 않은데, 부모님 얼굴 자주 뵈면 좋지 않으시겠어요?"


승진은 문득 고객님의 부모님께서 이미 돌아가셨으면 어쩌지 싶었다. 이 상황에서 더 자극하면 안 되는데….


"애초에 같이 살지 않는 게 문제 아닌가요? 왜 이 사회는 문제를 잔뜩 만들어 놓고 그걸 다른 방식으로 풀라고 강요하는 거예요? 그것도 죄다 돈 받고 팔아넘길 것으로요."


고객님이 부모님 이야기에 불쾌해하진 않았다. 승진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네, 같이 살면 되는 문제죠. 하지만 현실적으로, 정말 현실적으로 힘들잖아요. 각자 있어야 할 자리와 해야 할 일이 있는 거니까요."
 승진에게 다시 쓸 데 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런데, 정말 왜 힘든 걸까? 어차피 취업도 이딴 식으로 어려운데, 부모님과 같이 살기나 하는 게 더 낫지 않나? 나가 살려면 월세만 해도…. 다시 한 번, 승진은 인턴의 신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내가 함께 하고 싶은 모든 사람과 같은 곳에 사는 것도 어려운 것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3G 통신망의 빠른 속도와 스마트폰의 뛰어난 기능이 맞물린 SNS 서비스도 정말 강력하다고 볼 수 있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내가 함께 하고 싶은 사람과 함께 하는 느낌을 주잖아요.”


이 정도면 이동통신회사 직원으로써 꽤 훌륭한 언변이 아닌가. 승진은 스스로가 대견했다. 나중에 사내 광고문구 공모전에 내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고객의 눈빛은 되레 날카로워졌다.


“함께하는 거 맞아요? 정말 그렇게 느끼세요? 페이스북으로 많은 사람들 소식은 볼 수 있죠. 댓글도 달면서 가끔씩 말도 나눌 수 있어요. 하지만 정작 만나면 어색하잖아요. 재밌는 이야기는 페이스북에서 다 해버려서 할 얘기도 없잖아요. 때로는 페이스북에서 다 읽은 얘기인데도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반응해줘야 할 때도 있고. 그런 적 없어요?”


승진은 버티고 싶어졌다.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괜히 고객님 감정만 건드리는 건 아닌가도 싶었지만, 물러설 데도 없었다.


“그렇지만, 멀리 사는 사람들과도 계속 연락할 수 있잖아요. 저도 유학 간 친구들이 있는데요, 제가 올려놓은 글을 보고 멀리서도 소통할 수 있다고 좋아하던데요.”

“멀리 사는 사람이 정말 친하다면, 진짜 연락을 하면 되죠. 그걸 왜 SNS에 올리는 거예요? 그건 일일이 연락하기 귀찮은 거 아니에요? 친구를 사귀는 게 아니라, 인맥 관리를 하고 있는 거 아니냐고요. 어차피 사람 몸뚱아린 하난데, 얼마나 많은 사람과 친해져보겠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카페에서 친구 만나서도 같이 페이스북이나 보고 있는 거 아니에요. 눈앞에 있는 사람은 놔두고 왜 멀리 있는 사람을 관리하는 거예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요?”


사실 승진은 2~3일이 멀다하고 날아오는 페이스북 친구 생일 알림이 귀찮았다. 도대체 무슨 축하메시지를 적어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똑같은 메시지를 다시 쓰기엔 모든 친구들이 다 같이 보는 것이라 곤란했다. 게다가 만난 지 오래 된 친구이거나 별로 친하지 않았던 친구들일 경우엔 더 심했다. 진짜 만날 사람들만 남겨놓고 페이스북 친구를 모두 끊어볼까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몇 백 명이나 되는 친구들을 정리한다는 것부터가 너무 큰일이라 포기했다. 맞다. 이렇게 친구가 많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 이제 무슨 수로 고객님을 설득한단 말인가. 승진은 포기하고 싶어졌다. 그 순간, 고객이 말했다.


“제가 좀 흥분했네요. 죄송합니다. 5분만 쉬었다 하시죠.”


고객은 소파로 가서 팔짱을 끼고 앉았다. 승진을 힐끗 쳐다봤다가 다시 시계가 달려있는 벽면 쪽을 바라보았다. 약간 초조해보였다. 다리를 떨거나 하진 않았지만, 팔짱 낀 손의 손가락으로 팔뚝을 일정한 속도로 두드렸다.


승진은 떨고 싶은 다리를 애써 가라앉혔다. 이런 타이밍에 휴전이라니, 고객님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핸드폰을 꺼내보니 알림이 몇 개 떠있다. 단체방에서 온 카톡 두 개, 그리고 페이스북 알림 두 개. 별 내용은 아니다. 무슨 대책이라도 세우고 싶다. 무슨 대책을 세울까? 다시 핸드폰을 본다. 신문앱을 켰다. 기사 하나를 선택하려다가 뭐하는 거지 싶어 다시 홈버튼을 누른다. 좌로 우로 애꿎게 화면만 넘긴다. 다시 잠금버튼을 누르고 생각을 한다. 서비스 전환 동의서에 사인만 하면 끝난다. 그러면 집에 가서 정직원이 되었노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잠시, 그러면 3G가 왜 좋은 지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다시 잠금버튼을 누른다. 좌로 우로 화면을 넘긴다. 자신이 3G를 어디에 쓰는지 살핀다. ‘게임… 이것도 게임… 페이스북, 트위터, 이메일, 카카오톡…’ 그 때 고객이 갑자기 일어나서 다가온다.


“지금 3분 지났거든요. 핸드폰 3번 쳐다보신 거 알아요?”

“네?”


승진은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그랬던가.


“지금 저를 어떻게 하면 설득할 수 있을지 골똘히 생각하셔야 했던 것 아닌가요? 1분이 멀다하고 핸드폰만 쳐다보는데 뭐가 되겠어요? 그거 다 스마트폰 쓰면서 발생한 현상 아닌가요? 그리고 요즘 그런 광고하죠? 4G 쓰면 1초에 책 몇 권을 다운로드받을 수 있다고요. 그러면 뭐하나요? 1초에 책 한 권을 읽을 수도 없잖아요. 아니, 책 한 권 읽는 데 걸리는 시간도 늘어나겠죠. 1분에 한 번씩 집중력을 뺏길 테니까.”


고객은 3분 동안 열심히 준비했다는 듯 거침없이 말했다. 승진은 멍해졌다. 처음부터 고객님이 틀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1분이 멀다하고 핸드폰을 쳐다본 것도, 골똘히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패배했다, 는 생각만이 승진을 사로잡았다. 속이 좋지 않았다. 이런 고객이 승진에게 걸린 것이 짜증이 났다. 짜증이 나다가 갑자기 서글퍼졌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엄마 얼굴이 떠오르고 비전이 없다며 떠나간 여자친구도 생각났다. 울컥했다.


“저, 죄송하고요, 이 세상을 대신해서 제가 사과드리고요, 필요도 없는 걸 발전이랍시고 빠르게 만들어 버린 것도 죄송하고요, 계속 뭘 팔아먹으려고만 한 것도 죄송한데요, 그냥, 좀,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저, 정직원 좀 만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고객님만 마음 바꿔주시면, 저, 정직원 될 수 있어요. 요즘 취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시잖아요. 저 지방대 나왔어요. 정말 어렵게 인턴이라도 하고 있는 거예요. 마음만 바꿔주세요. 제가 핸드폰 요금 그냥 다 내드릴 게요. 평생 내드릴 게요. 어머니도 저만 바라보고 계세요. 네? 부탁 좀 드릴게요, 고객님…”


말을 하는 승진의 가슴 속에 수류탄이 던져졌다. 승진은 수류탄을 깔고 엎드렸다. 폭탄은 승진을 터뜨리고 찢어놓았다. 그래도 깔고 엎드린 덕에, 거기까지였다. 바깥으로 피해가 가지 않았다. 승진은 이미 다 타버렸다. 눈도 메말랐다. 자칫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 뻔했다. 생각을 치웠다. 생각은 나쁜 것이다.


고객의 눈이 잠시 흔들리는 가도 싶었다. 이제껏 바른 소리를 해댄 잘난 사람이니, 최소한의 공감 능력은 가졌을 것이다. 그도 이 험한 세상을 헤쳐 왔으니 승진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닐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조금만 더 몰입하면 눈물도 날 수 있을 것 같은데, 눈물이 나는 게 좋을까, 생각하던 찰나, 고객이 말을 이었다.


“저도 죄송한데요, 그쪽 사정이네요. 정직원이 되고 싶으면 그만한 능력을 키워야 되는 것 아닌가요? 지금 저를 설득할 능력을 키우시면 되는 거 아니냐고요. 지금 그렇게 감성에 호소하는 거, 제가 제일 싫어하는 거예요. 핸드폰 요금을 내주시겠다고요? 제가 거지에요?”

“아니, 고객님, 그게 아니라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승진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어떠한 가치판단도 불가능했다. 그저 그런 못된 제안을 한 스스로가 미웠다. 꿇어앉아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야 하나 생각했다.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개 흉내를 내야한다면 어떻게 짖어야 할지 고민했다.


고객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는 가도 싶었다. 그리고 운을 뗀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의자에서 벗어나려던 승진이 다시 고쳐 앉았다. 고객님을 똑바로 쳐다보려다 눈을 마주치는 건 결례일까 싶어 인중께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네, 고객님. 말씀만 해주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전 2G가 좋고요, 빠른 세상에 휩쓸리기도 싫고 타협조차 하기 싫습니다. 하지만 뭐 당신네 회사 사정도 있고, 고승진씨 사정도 있으실 테니, 딱 오천만 부를 게요. 오천만 해주시면 깔끔하게 3G로 옮겨 타겠습니다. 그냥 소송을 걸 수도 있는데, 괜히 변호사 비용까지 들여가면서 일하지 말자구요.”


우주에서 실종되면 이런 느낌일까? 승진은 여기가 어딘지 부터가 궁금해졌다. 십여 분 만에 수많은 요동을 거친 승진의 마음은 이제 차분해지려고까지 했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굴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었던 사람이었는데, 순식간에 닿기조차 싫어졌다. 끔찍하다.


그 와중에 얼마 전에 있었던 회의 장면이 생각난 건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수 없다. 2G 고객이 20명쯤 남았을 때였다, 지방 법대 출신의 한 인턴 직원이 부장님이 참석한 회의 때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얼마간의 보상금으로 타협해볼 여지는 없을까요? 어차피 손해배상 소송이라도 걸면, 얼마간의 보상금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부장님의 표정은 순간 굳었다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렇게 할까요? 그럼 당장 당신부터 잘라야겠네요. 당신 자르고 그 인건비로 협상을 해봅시다.” 인턴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부장님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러면 이미 3G로 옮겨간 사람들은 어쩔 건데? 그 사람들과의 형평성은 생각 안 해? 머리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야, 차 팀장. 애들 교육 똑바로 안 시켜?” 그리고 부장님은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우리 인턴들이 들어오면서 팀장을 달게 되었다는 차 팀장님은 똥마려운 개 마냥 부장님의 나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당신들, 그렇게 능력이 없어? 당신들 믿고 고용한 회사는 뭐가 돼? 능력 없으면 알아서 나가. 짤리기 전에. 헛소리하지 말고 다른 좋은 방안을 내보란 말이야!”


이제 승진은 정직원 연봉이 생각났다. 삼천 사 백쯤 된다고 했었나. 별 말 없었으니 세전일 것이다. 천 오 백쯤 있는 학자금 대출도 생각났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도 아직 대출금을 갚고 있는 와중이다. 다음 달부터 원금도 함께 상환해야 한다고 했는데. 취직했다고 3개월 할부로 산 정장은 이번 달까지만 갚으면 된다.


오천, 오천이라. 회사에서는 한 푼도 내주지 않을 오천 만원, 정직원이 되기 위해 오천이라…. 승진은 자신이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무엇 때문에 취직을 했고 무엇 때문에 이 짓을 하고 있는 걸까.


“참나. 여기까지 오면서 협상 카드 하나 안 가져 왔어요? 아깐 원하는 대로 다 해준다면서요? 회사에서 권한을 위임받았다면서요. 아니, 뭐 회사랑 더 이야기를 해봐야 되면, 다음에 다시 얘기하시든지. 내가 말단 사원처지 모르는 거 아니니까.”


그 때 그 회의에서 무거운 분위기를 깬 것이 바로 승진이었다. 인턴들이 재량껏 선물을 할 수 있도록 ‘약간의’ 자금만 지원해달라고 이야기했던 그 회의였다. 차 팀장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래? 그런 거라면 내 윗선하고 이야기해 보지. 더 이상 없으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구.”하고는 나갔다. 인턴 동료들은 시샘보다 안도감이 앞섰다. 승진은 인턴들 사이에서 영웅이 되었다. 그 회의 때처럼, 승진은 다시 용감하게 입을 뗐다. 하지만 달리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고객님, 회사에서는 이미 서비스를 전환한 다른 고객님들과의 형평성 때문에 보상금 지급은 어려워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고객님은 쉼표만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뭐요? 지금 고객을 뭘로 보는 거예요? 이미 바꾼 고객들이요? 그 사람들 내가 한 사람 한 사람 찾아내서 집단 소송 걸면 되는 거죠? 이 사람들이 지들 맘대로 멀쩡하게 제공하던 서비스 끊어놓고서 이딴 식으로 처리해도 되는 거예요?”


살수(薩水)에서 쏟아 내리는 물더미를 바라보던 수나라 군사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승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집단 소송이라니. 집단 소송에 들어가서 회사가 얼마를 물어주게 되느냐, 그로인해 회사 이미지는 얼마나 깎일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고객이 패소하게 되더라도 상관없다. 소송이 걸리는 순간 승진은 잘릴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와 상관없어지기 때문이다. 승진을 자르고 변호사를 선임하겠지. 그러면 천 오 백의 학자금 대출과 집값 대출 원금 상환과 정장을 구입한 신용 카드 대금이….



‘띵’


그 순간 울린 그 소리. 그것은 분명 아이폰 문자메시지 알림 소리였다. 승진은 당연히 자기 것인 줄 알았다. 분명 매너모드를 해놨는데 왜 이런 중요한 순간에 울리지 싶어서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그런데 아무 알림도 떠있지 않았다. 그런데 고객의 표정이 변해있었다. 분명히 애써 평정을 유지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승진이 생각해보니 방 안쪽에서 울려온 소리 같기도 했다. 애써 정리해보았다. 고객이 이야기한 속도만능주의에 대한 비판과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그리움과 오천 만원과 아이폰 문자메시지 알림 소리.


“어차피 말단 직원과 계속 이야기해봤자 될 것도 없을 것 같으니, 일단 가보세요. 다음에 얘기해요, 다음에.”


고객은 갑자기 승진을 떠밀기 시작했다. 승진은 상황 파악이 안 돼서 머뭇거렸다.


“아니, 이만 나가보시라고요. 주택침입으로 신고당하고 싶지 않으면.”


승진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문이 닫혔다. 서비스 전환 동의서가 들어있는 가방도 계속 닫혀있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어린 학생들이 무거운 가방을 메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한 사람도 주택 건물로 들어가지 않았다. 어른들은 하나같이 걸음이 빨랐다. 그리고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있는 한 사람만이 가만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늘은 참 파랗다. 그러더니 그 사람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사진을 SNS에 올리는 것이겠지.


승진은 혼란스러웠다. 속도만능주의와 아날로그 시대의 추억과 오천 만원과 아이폰 알림 소리, 그리고 학자금 대출과 주택 대출과 카드 값. 모든 것이 뒤섞였다.


단 하나 분명한 것은 다음 달 월급을 받기는 힘들 거라는 것이었다.

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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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20대를 공대에서 보내고 30대도 공대에서 맞이한 전산학도. 그리고 소설 쓰는 사람. 무언가를 고찰하여 글로 표현해내는 것을 좋아한다. <용감한 작가들> 회원이며 페이스북 페이지 <글 쓰는 김창대>를 운영 중이다. https://www.facebook.com/holypsychowr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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