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지의 "과학/기술, 소비자, 시민"

유전자변형, 줄기세포, 나노기술…. 어제의 기초과학, 기초연구 성과가 오늘날 소비자의 선택을 기다린다. 연구실에서 시장으로 나온, 또는 나오려는 과학/기술에는 소비자의 부푼 기대와 함께 까칠한 걱정도 인다. 김훈기 교수와 과학에 친숙한 시민 박문영, 이인옥 님이 글을 쓴다.

‘위험과 안전규제’ 문제에서 시민은 주체

시민의 눈으로 보는 과학/기술 :(2) 규제과학


현대 과학기술의 제품과 지식을 소비하는 생활인으로서 시민의 눈으로 일상생활의 관심 영역에 들어오는 오늘날의 과학과 기술을 이야기한다.

00regulatory3.jpg » 지난 5월7일 낮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 가습기살균제피해자모임, 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이 화학물질안전관리위한 법률인 화학물질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 제정안과 유해화학물질관리법 개정안을 누더기로 만든 경제계와 국회를 비판하는 거리행위극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김태형 기자)


떤 이야기나 소식을 듣고 가슴이 덜커덕 내려앉는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 가끔 그럽니다. 그 중 한 번은 가습기 살균제로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입니다. 문제를 일으킨 유해 제품 중에는 제가 썼던 제품도 있었습니다. 저 역시 다른 피해자들처럼 출산 뒤에 간난아이를 위해 그 제품을 사용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사고가 나기 두해 전 2009년에 사용했다는 정도일 것입니다. ‘인체 무해’, ‘유럽연합(EU) 승인 안전물질’이란 문구를 의심 없이 믿은 것이, 서로 책임을 다하며 신뢰하는 사회라면 당연하고 상식적인 행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조차 사치스러운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연구과학자의 책임, 규제과학자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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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승인 안전물질’이라면 규제 심사를 통과한 제품이란 말인데 어떻게 이런 참담한 일이 생겼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습기살균제는 일반 공산품으로 식품, 의약품, 화장품, 전기제품, 의약외품, 화약 총포류와는 달리 정부 관청의 허가를 받아 제조·판매할 필요가 없는 제품이었습니다.즉 규제받지 않은, 규제를 받을 필요가 없는 제품이었습니다. 지난 산모·영유아 사망사건을 계기로 보건복지부는 2011년 12월 30일 가습기살균제를 의약외품으로 지정했습니다.이제 가습기살균제를 판매하려면 흡입독성, 세포독성시험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럼 제가 광고 화면에서 보았던 ‘EU 살균물질 승인서’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회사가 광고한 ‘승인받은 물질’은 PGH(Oligo(2-(2-ethoxy)ethoxyethyl guanidinium chloride))로 국외에서는 세정살균제 용도로 씻거나 닦아내는 데 사용하던 것을 국내로 들여오면서 초음파 가습기 투입용으로 용도를 변경하여 판매한 경우였습니다. 유럽에서 일반적인 동물실험(피부실험, 음용실험 등)에서 안전검사를 받았을지 모르지만 흡입독성 시험은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1)


살균 성분이 들어 있는 제품이 규제 대상이 아니었다가, 사람이 죽고 나서야 규제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는 무기력한 느낌, 답답함과 함께 규제의 중요성이 그야말로 가슴에 팍팍 와 닿았습니다. 과학적인 규제를 위해 우리가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규제와 관련된 과학 분야가 있어 왔습니다. 이런 과학을 규제과학(Regulatory Science)으로 부릅니다.2) 안전규제 행정의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과학 정도로 알고 있는 과학입니다.

00regulatory.jpg » 2011년 11월 보건과 환경 관련 전문가와 단체들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문제에 대한 해결을 촉구하며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가습 살균제 20개 상품의 명단과 상품별 피해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이정아, 2011)

미국 하버드대학교 존에프케네디 공공정책대학원의 과학기술학 석좌교수인 실라 재서너프(Sheila Jasanoff)는 ‘규제과학’과 ‘연구과학(Research Science)’을 구별하여 규제과학의 특징을 정리했습니다.3)


규제과학은 위험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새로운 연구와 실험보다는 기존 지식을 종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하는 과학자들의 소속은 대학이 아니라 정부 기관이나 기업체에 속한 경우가 많습니다. 연구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가 틀렸을 경우 주로 동료 과학자들에 책임을 지는데 비해 규제과학자들은 의회, 법정, 언론, 일반 대중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규제 과학자들의 연구는 정책을 결정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야 하므로 시간의 압박과 함께 정치적 압박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험과 안전규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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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규제과학의 ‘과학’이 우리가 ‘과학’에 기대하듯 확실하고 합리적이며 논리적이고 정확하길 바랐습니다. 어떤 물질은 안전하다고 과학이 한 마디만 해준다면 절대적으로 그 말을 신봉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규제 여부, 안전성 여부가 결정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과학의 본질은 역시나 결과보다는 객관적인 데이터를 가지고 충분한 논쟁을 거쳐 논리적으로 합당한 결론을 내리는 과정 속에 있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됩니다.


규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해석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데이터 해석 속에는 필연적으로 가설이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가설의 충돌은 일하는 분야가 다른 과학자들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습니다.4)  또한 미국처럼 숫자로 표시되는 것을 신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위험 정도를 확실하게 계산할 수 있는 가설을 주로 채택합니다. 이에 반해 유럽처럼 전문가들의 합의를 신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더욱 다양한 가설들이 충돌하기도 합니다. 규제과정에서 절대 빼먹을 수 없는 다른 한 가지는 언뜻 과학적으로 보이는 설명도 온전히 과학적이지 않고 정치·경제적 의도가 은연중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규제를 많이 하는 산업 분야일수록 새로운 신규 사업자가 끼어들기 힘들어 규제가 기득권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나, 그와 반대인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과학에 대한 환상을 깨 버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기는 하지만 과학적으로 ‘안전하다’라는 말 속에는 수많은 가정과 불확실성, 이익 관계, 듣는 이마다 다르게 추측하는 ‘안전의 기준’에 대한 오해가 숨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완벽한 안전규제를 만들려는 노력에는 절대 포기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안전 규제의 문제는 다른 대체품을 선택하거나 제품 사용을 거부할 수 있는 생필품 안전문제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대재앙이었던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의 사고도 안전규제 문제의 한 축입니다. 시민의 입장에서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 운영 문제를 두고 완벽하게 무사고를 보증해줄 수 없다면 위험이 크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쪽은 사고 발생 여부를 확률로 이야기하며 안심하라며 당장의 에너지문제나 산업·경제 문제가 급하다고 합니다. 사고 뒤에 발생하는 돌이킬 수 없는 환경 오염이 천문학적인 비용의 영구손실을 가져온다는 우려는 계속됩니다.


과학기술 관련 위험은 더 이상 시민이 빠진 채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위험에 대한 피해자가 그들만이 아닌 까닭입니다. 위험에 대한 문제에서 시민은 주체라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잊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일반 국민과 전문가, 정책입안자가 함께 참여하는 시민참여형 위험소통 모형을 구축하기 위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모형이 정착된다면 피해자가 생겼을 때 모두가 나서 도와줄 수 있는 분위기가 쉽게 만들어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해 봅니다. 이런 시도들이 좋은 결실을 이루어, 위험의 피해자가 된 누군가가 사회를 상대로 외롭게 싸우는 일만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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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영 시민, 과학콘텐츠창작모임 참사이(CharmSci) 회원
아줌마에게 과학은 참 멀고 어렵다. 그러나 과학이 좋다. 과학의 주체에 과학자가 아닌 다양한 일반인이 들어갈 때 사람냄새 나는 과학으로 완성될 것이라 믿기에 용기를 내본다.
이메일 : vipmyjw@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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