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 "실험실 갈등과 불합리 없어야죠" 첫 '옴부즈'등장

 

 생명공학연구원, 국내 처음으로 '연구기관 옴부즈' 시범운영 시작

 교수·연구자·학생의 갈등 중재, 연구윤리 실천 역할.. 미국·유럽에선 정착

"실험실의 문화 개선에 도움 줄까" 기대.. "옴부즈의 공정성·정의감이 중요"


    KRIBB32 » 실험실은 새로운 발견의 산실이면서 동시에 실험실 생활문화의 공간이다. 사진은 실험실의 한 장면. 사진 생명공학연구원 제공.

 

     

"교수님의 불공평 대우 부당해요! ㅠ ㅠ"

 

“연구중심 대학의 박사과정 학생입니다. 저는 새로 들어오는 후배들을 교육시키고, 방장으로서 실험실 중간 관리자의 역할도 하면서, 제 실험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이런 저의 활동에 대해 전혀 관심을 갖거나 보상해주실 생각을 않으십니다. 제가 많은 시간을 쏟아 열심히 가르친 후배의 연구 논문이 발표될 때에도 저를 저자로 넣어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수님 마음에 드는 학생은 연구에 별로 참여하지 않았어도 국제학회에도 자주 가고 연구실에서 발표하는 논문마다 매번 저자로 이름이 오릅니다. 인건비도 더 받고 있구요. 이렇게 불공평하게 대우받으면서 연구를 계속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육과학기술부 지정 연구윤리정보센터가 운영하는 ‘좋은 연구’ 사이트의 이야기마당 게시판에 최근에 오른 글이다. 실험실에서 비롯하는 선후배와 동료 간 갈등, 대학원생의 처우 불만 같은 고민들은 생물학 연구자들의 정보교류 사이트인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게시판에도 자주 오른다. 글을 쓰는 이들은 실험실에서 겪는 말못할 개인적 경험들을 들어줄 누군가를 찾아 도움말을 듣고 싶어 한다.


알고 지내던 어느 박사과정생한테 들은 좀더 심각한 갈등도 있다. “실험실에선 가설을 세우고 여러 실험들을 되풀이하며 그 가설을 입증하는 데이터를 찾는 일을 하죠. 그런데 종종 가설과는 다른 실험 데이터가 나오면 버리는 경우가 있어요. 가설과 잘 맞아떨어지는 데이터가 많을수록 가설의 신뢰도가 높아지니까요. 인문사회학에서 자기주장을 펼 때 필요한 부분을 골라 인용하듯이 말이에요. 지도교수는 가설에서 크게 벗어난 데이터는 쓰지 말라고 권했지만, 전 왠지 꺼림칙해서…. 좀 낮은 수준의 가설로 바꾸자고 했다가, 제 까탈스런 성격 때문인지 결국 갈등을 빚게 됐죠.” 그는 “상관의 말을 쉽게 거스르기 힘든 게 우리나라 조직 문화 아니냐”며 “사실 실험실도 다를 게 없다”고 말했다.  


정말 심각한 얘기는 논문조작 연구부정을 조사했던 어느 대학의 조사위원 교수한테 들은 말이다. “그 실험실에선 논문의 공저자로 참여한 학생들도 전체 연구과정을 잘 모르고 있었어요. 논문의 한 부분을 메우는 간단한 실험만을 수행했을 뿐이고 중요한 내용은 보스(책임자)인 교수와 중간보스들이 참여하는 3인회의’에서만 논의됐답니다. 실험실의 진행상황이 전체 구성원들이 공유되지 못했던 거죠. 물론 이런 경우는 일반 실험실에서 드문 일입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실험실의 어느 누군가 정당하지 못하거나 의심스런 연구 절차에 관해 문제제기를 할 수 있었다면 더 큰 부정은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KRIBB2 » '연구기관 옴부즈 제도'를 시범 운영하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건물 전경. 사진 생명공학연구원 제공  



국내서도 관심사 떠오른 '옴부즈 선생'


연구기관의 연구진실성위원회가 주로 뒤늦게 결과만을 문제 삼거나 아주 명백한 부정행위만을 따지는 한계를 드러내면서, 연구부정이 커지는 것을 예방하려면 실험실의 일상 생활에서 생기는 소소한 갈등이나 불합리를 미리 풀고 일상적 연구윤리 실천을 돕는 도우미가 있어야 한다는 지적들도 많아지고 있다. 그런 도우미로서 '옴부즈 제도'가 몇 해 전부터 국내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마침 국내에서도 “연구 수행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이나 분쟁을 상담하고 자문하는” 이른바 ‘연구기관 옴부즈’ 제도가 처음으로 시범 운영된다. 첫 시범 운영에 나선 곳은 한국생명공학연구원(생명연).  


생명연은 25일 보도자료를 내어 “선진국의 ‘연구기관 옴부즈 제도’를 분석하고 시범운영을 하면서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한국형 연구기관 옴부즈 모델을 확립하고 확산하기 위해 교육과학기술부 지원을 받아 연구를 수행 중”이라며 “이를 위해 연구원 안에서 신망이 높고 연구경험이 풍부한 3명의 옴부즈를 선정했으며 본격 활동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정식으로 국내 '옴부즈 1호' 격인 연구자 3명을 선임했다. 김정석 정책팀장은 "미국과 독일의 운영 모델을 참조해 지난 2월 말부터 3월 초까지 선거관리위원회를 정식으로 꾸리고 옴부즈 후보를 추천받았으며 연구부서장급 40명이 참여하는 투표 과정을 거쳐 2명의 옴부즈를 선출했다"며 "생명과학 분야에는 여성 연구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아 반드시 1명을 여성 옴부즈로 선출하자고 했고 그래서 남녀 옴부즈 2명이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보직을 맡지 않은 책임연구원인 정준기 박사와 김남순 박사가 선출됐다. 여기에 이번 시범운영의 과제 책임자인 이상철 책임연구원(현재 연구재단에 생명공학단장[PM]으로 파견)이 당연직 옴부즈로 참여해, 첫 옴부즈는 모두 3명이 됐다.

kribb6 » 시범 운영되는 연구기관 옴부즈 제도의 첫 주인공들. 사진 왼쪽부터 당연직 옴부즈인 이상철 박사와, 투표 과정을 거쳐 선출된 옴부즈 정준기 박사와 김남순 박사. 사진 생명공학연구원 제공  

김정석 팀장한테 옴부즈 제도가 어떤 것인지 물어봤다. 아래는 옴부즈에 관한 그의 설명과 생명연 보도자료, 그리고 오래 전부터 옴부즈 제도에 관심을 기울여온 황은성 서울시립대 교수의 설명을 듣고 정리한 것이다.  


 

옴부즈라는 말은 애초엔 북유럽국가에서 국가 기관이나 공무원에 대한 일반 시민의 고충·민원을 처리하는 행정 감찰관을 뜻하는 말로 쓰였고 최근엔 언론매체 비평의 뜻으로도 쓰이고 있지만, 최근 들어선 미국·유럽에서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상당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1960년대 학생들의 시위와 인권운동이 확산하면서 대학운영상의 문제들이 드러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대학 옴부즈맨 제도가 도입됐으며, 이후 1990년대 들어서는 과학계와 연구소들에서도 많이 도입되고 있다. 애초 '옴부즈맨'으로 널리 호칭됐으나, 요즘에는 여성 옴부즈들도 많아져 '옴부즈맨'이라는 말과 함께 '옴부즈 퍼슨', 또는 그냥 '옴부즈'로도 불린다.  

“연구기관 옴부즈 제도는 대학이나 연구소 등에서 행정부서나 구성원 각각의 개별 이익을 떠나 중립적인 위치에서 갈등이나 분쟁을 중재하는 기구로서 미국, 독일 등 선진국은 1990년대부터 기관 자체적으로 옴부즈 사무실을 설치하거나 옴부즈를 선임해 연구부정 행위를 미연에 방지하고 연구문화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생명연 보도자료에서)  

미국에선 주로 의생명과학 대학과 기관에서 옴부즈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 “비교적 규모가 큰 의생물학 연구집단 안에서 구성원들의 목표 성취 의욕과 경쟁심리가 워낙 높고, 실험실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특성이 있으며, 연구의 결과가 쉽게 경제적 이익과 연계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황은성 교수)

 

 

이번에 옴부즈로 선출된 정준기 박사는 "오는 5월에 유럽 지역을 돌며 여러 옴부즈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따로 전문 옴부즈 교육도 받으면서 옴부즈가 해야 할 일이 뭔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계획"이라며 "지금으로는 연구기관의 상급자-하급자의 갈등, 실험실의 부조리 등에 관해 소소한 고민과 문제를 상담해주고 연구기관장한테서도 독립된 중립적이고 공정한 역할을 수행해나가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시범 운영 과제 책임자인 이상철 박사는 "오는 6월 말까지 각국의 옴부즈 제도 현황을 파악하고 전문적인 옴부즈 교유을 받고, 우리나라 연구소에서 할 수 있는 옴부즈 제도의 방안을 마련해 교과부에 제출할 예정"이라며 "연구부정 문제가 터지고나서 사후에 대응책을 얘기하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실험실 조직문화를 좋은 방향으로 풀어나가는 데 옴부즈 제도가 기여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성 갖춰 신뢰받는 옴부즈의 자질이 가장 중요"

 

황은성 서울시립대 교수는 몇 해 전부터 생명과학 분야에서 옴브즈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해온 사람이다 (그의 제안은 사이언스 온에 게재된 "국내 생명과학 실험실의 갈등의 해소와 바른 과학연구 지도를 위한 제안"이라는 글에서 볼 수 있다). 그는 국내 첫 옴부즈 시범 운영에 대해 "그동안 많은 사람들한테서 실험실의 옴브즈 제도가 우리나라에서도 시행돼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왔는데, 큰 연구기관이 옴부즈 제도를 처음 시범 운영한다고 하니 아주 반가운 소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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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반가움과 함께 걱정도 있다. 그는 “무엇보다 이 제도의 중심이 되는 옴부즈의 활동이 매우 중요한데, 국내에선 연구진실성위원회의 활동도 유명무실한 터라 옴부즈 제도가 얼마나 제대로 운영될 수 있을지 걱정도 앞선다"며 "옴부즈의 교육, 훈련 체제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옴브즈의 재량권은 매우 폭넓기 때문에 옴부즈가 할 수 있는 일은 '옴부즈 하기 나름'일 정도이다. 유명무실하게 운영된다면, 실험실의 불합리나 갈등이 실험실과 연구기관 밖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무마하는 일에 만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생명연의 첫번째 옴부즈들도 이런 점들을 경계하고 있다. 이상철 박사는 "부당함으로 호소하는 연구자들한테서 작게는 이런저런 얘기들을 들어주면서 해법을 함께 찾아나가는 상담역이 옴부즈가 할 일이고, 연구자들 사이의 갈등과 오해를 풀어주는 일도 옴부즈가 할 일이고, 심각하게는 연구윤리 문제가 생겼을 때 정식으로 제소하는 일도 옴부즈가 할 일"이라며 "갖가지 사례들을 접하며 공정하고 중립적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옴부즈의 역할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옴부즈가 지녀야 할 가장 큰 미덕을 꼽으라면 뭐가 될까? 상당한 경험을 갖춘 선임급 연구자들인 옴부즈는 때로는 어머니나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때로는 형이나 언니처럼 친근하게 피해와 부당함을 호소하는 연구자나 학생들을 맞아야 한다. 실험실의 생활문화에 관해 늘 세심한 관심도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서 올곧은 목소리를 잊지 않아야 한다. 황은성 교수는 옴브즈가 갖춰야 할 미덕으로 “공정성과 정의감”을 꼽았다.  


“무엇보다 '의지'가 가장 중요하겠지요. 그리고 공정성과 정의감이 필요합니다. 미국 옴부즈 제도의 경험을 들어보면, 피해의식을 지닌 연구자나 학생이 옴부즈를 찾아와 고민을 털어놓을 때에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얘기를 솔직하게 주고받는 과정에서 문제가 저절로 풀린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어떤 문제는 옴브즈가 나서서 풀어주어야 할 문제들도 있습니다. 예일대 의과대학 부학장이 옴부즈이다보니, 여러 교수들한테 학생들의 고충을 쉽게 전달하고 시정하게 하기도 하지요. 더 심각한 상황에서는 연구부정을 밝히는 일에 나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옴부즈가 갈등의 씨앗을 남겨둔 채 문제를 무마하거나 중립적이지 못한 태도를 보일 때에는 부작용도 생길 수 있겠지요. 그래서 공정성과 정의감은 옴부즈한테 가장 중요한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황 교수는 “이 때문에 외국에서는 의지와 사명감도 지니면서 널리 존경 받는 인격을 갖춘 분들이 옴부즈로 활용하는 사례가 많고 그래서 옴부즈는 통상적으로 명예로운 자리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옴부즈 제도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라들에서는 옴부즈의 자질을 높이기 위한 전문적 교육훈련 워크숍들도 쳬계적으로 열리고 있다고 한다.  


국내에서 처음 시범 운영되는 옴부즈 제도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대학과 연구기관에 널리 확산돼, 투명한 소통과 합리가 실험실 문화에서 더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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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온 운영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을 거쳤으며 주로 과학담당 기자로 일했다. <과학의 수사학>, <과학의 언어>, <온도계의 철학> 등을 번역했으며,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를 썼다.
이메일 :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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