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대의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박사우울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많은 대학원생이 흔히 겪는 우울한 증상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 ‘박사우울증’을 앓는 많은 이공계 대학원생의 삶을 소설 형식에 담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서로 이해하며 보듬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카이스트 박사과정 김창대 님이 씁니다.

나쁜 일은 당연하게 다가온다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00pic-s2e08.jpg » 사진 / 김창대


[지난 줄거리]

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결국 연구실을 옮기기로 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어느 날, 교수님께서 정원과 길영에게 마이크로(MICRO) 학회에 논문을 제출하자고 제안한다. 김정원은 전보영과, 전길영은 강준상과 각기 팀을 이뤄 논문을 쓰기로 한다. 길영은 여유롭게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교수님이 자꾸 개선시키려고 해서 급해지고, 처음부터 급했던 정원은 유사한 논문이 나와서 비교군 추가하느라 더 급해진다. 드디어 마감 이틀 전, 보영이 끝났어야 할 실험들이 아직 안 끝났다는 걸 발견한다. 그리고 정원을 부른다. “오빠… 실험이 안 끝나는데요….”
  




#8. 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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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


정원이 석사 졸업을 한 학기 앞뒀을 때, 선배들이 자주 물었다. 무슨 주제로 졸업할 거냐고. 생각하던 주제를 말하면, 늘 물었다. 플랜 비(Plan B, 두 번째 계획)는 없냐고. 교수님이 “만약 안 되면 이거 해서 졸업하면 돼요” 하시던 게 있어 답해 줬다. 그러면 꼭 그랬다. 그걸로 졸업하게 될 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어쨌든 선배들이 맞았다.


나쁜 일은 당연하게 다가온다. 좋은 일은 운명이라 하지 않는다. 온 힘을 다해 성공을 성취하려다 옴짝달싹 못하고 실패를 받아들이는 게 인생이다. 보영이 힘없이 정원을 불렀을 때 정원은 직감했다. ‘역시나.’


운전을 오래 하면 엔진 소리만 듣고도 어디가 고장 났는지 안다고 했던가. 보영이가 컴퓨터에 띄워 놓은 창을 보자마자 정원의 머리엔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김정원(박4): 이거, 무한루프[1] 같은데….

전보영(석2): 어떻게 알아요?

김정원(박4): 그냥 느낌이 그래….

그제야, 다시 한 번 뭔가 떠올랐다.

김정원(박4): 보영아, 혹시 A랑 B랑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어?

전보영(석2): 네?

정원은 급히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소스코드를 열었다. 방금 떠올랐던 부분을 살폈다. ‘A 상황에서는 B 상황이 아닌 걸 확인한 뒤에 C를 하도록 했지… 그래, 그리고 B 상황에서는 A 상황이 아닌 걸 확인한 뒤에, C를 하도록 했고…, 만약 A와 B가 동시에 일어난다면? A를 확인한 다음에 B를 확인하러 가고, B가 맞으니까 다시 A를 확인하러 오고, 그러면 A가 또 맞으니까 다시 B를 확인하러 가고, 다시 A를 확인하러 오고…. 그래 이거지! 아니 근데, A와 B가 동시에 일어날 리가 없는데….’

전보영(석2): 오빠, 근데, 가능할 것 같아요.

김정원(박4): 응?

전보영(석2): 만약 두 프로그램에서 동시에 cache miss가 났는데요, 그게 같은 set에 속해 있는데다가, 하필 그때 그 set에 해당하는 데이터가 prefetch라도 되면...

김정원(박4): 우리 prefetch 꺼놓지 않았어?

전보영(석2): 네? 꺼놓기로 했어요? 기본 설정이 켜져 있는 거길래….

김정원(박4): 내가 그 말을 안 했구나.

그러니까 정원이 prefetch를 끄라는 말만 했다면, 아니면 정원이 구현은 조금만 대충해서 A일 때 B임을 확인하는 걸 빼먹었다면, 반대로 아주 철저히 해서 A, B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도 고려했다면, 혹은 보영이 이 문제를 미리 발견했다면…. 이 중 어느 하나만 일어났어도 문제는 없었을 거란 말이다. 1%의 확률[2], 거기에 기어코 걸려들었다.


포기다. 어차피 마감은 못 맞춘다. 실험엔 3일은 필요하니까. 쉽게 고쳐지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이걸 고친다고 완벽해진다는 보장도 없다. 그저 언젠가 일어날 일이 약간 늦게 일어났을 뿐이다. 정원은 그렇게 느꼈다.



원과 보영은 교수님을 찾아갔다. 상황을 말씀드렸다.

권대성(교수): 그래프 포맷이랑 다 만들어 놓고 마지막에 숫자만 넣으면 되잖아.

김정원(박4): 그게, 실험을 하는데 최소한 3일은 필요해서요.

권대성(교수): 더 빨리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어디서 컴퓨터라도 더 구해온다든가.

김정원(박4): 그게… 길영이 것도 실험이 돌아가고 있어서요.

권대성(교수): 혹시 어디까지 가서 멈췄는지는 알아? 중간 결과라도 없어?

김정원(박4): 실험이 다 끝난 다음에만 결과를 찍도록 해놓아서….

교수님의 말을 전부 반박해낸 것도 오랜만이다. 정원은 왜 안 되는지 만큼은 확실히 알았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몰랐지만. 교수님은 잠시 침묵했다. 평소엔 그리도 두뇌회전이 빨랐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시간이 걸렸다.

권대성(교수): 그럼 방법이 없는 거네. 알았다. 일단 버그 고치고, 연구 계속 진행하도록 해. 다음 주쯤 다시 얘기해보지.

땅땅땅. 포기를 승인 받았다. 정원과 보영은 재판장을 나왔다.

전보영(석2): 미안해요. 제가 좀 더 잘 봤으면 괜찮았을 텐데.

김정원(박4): 아냐, 내 책임이야. 열심히 도와줬는데 내지도 못하고…. 내가 미안해.

전보영(석2): 오빠가 뭐가 미안해요.

정원은 정말 미안했다. 보영은 석사 1년차 때도 정원과 같이 연구하다가 접은 적이 있다.[3] 그 후로 늘 부채감이 있었다. 연구란 게 한 번은 뭔가 되는 맛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 맛에 중독돼서 계속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정원은 그 맛을 꼭 한 번 보여주고 싶었다. 맛을 못 본 사람과 맛을 본 사람의 차이는, 유니콘을 찾는 사람과 낙타를 찾는 사람의 차이쯤은 될 테니까.

김정원(박4): 이제 넌 졸업 준비에 집중해. 도와 줄 거 있으면 말만 하고. 그동안 고생 많았어.

전보영(석2): 오빠도 고생 많았어요.

둘은 연구실로 돌아갔다. 정원의 책상에 논문이 널브러져 있다. 관련 연구를 정리한답시고 잔뜩 뽑아놓은 논문들이다. 정리할까, 하다가. 대충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보영이 곧 갈 것 같기 때문이다. 눈치를 봤다. 보영이 짐을 챙기다 말고 자리에 앉아 뭔가를 한다. 정원도 스팸 메일함을 비우고, 다운로드 폴더를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뒤, 보영이 일어났다.

전보영(석2): 오빠, 안 들어가세요?

김정원(박4): 아, 들어가야지. 지금 가려고? 잠시만….

정원은 후딱 가방을 멨다.


조금만 걸어도 샤워는 필수고 짜증은 선택인 여름 밤. 에어컨 한기 덕에 닭살 돋은 팔도 금세 습기를 머금는다. 정원의 가슴도 습기를 머금는다. 울적하다. 옆에서 걷는 보영에게도 면목이 없다. 이럴 거면 왜 같이 나왔을까?

김정원(박4): 기분도 그런데, 소주나 한 잔 할까? 날도 더운데 맥주도 괜찮고.

전보영(석2): 저는 좀 피곤해서요. 오늘은 바로 들어갈래요.

오늘‘은’ 그냥 들어간다니 다음번에 같이 마시자는 건지, 완곡어법이지만 대놓고 거절한 건지…. 정원은 헷갈렸다. 온도가 높으니 소리는 빨리 전달될 텐데,[4] 마음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김정원(박4): 아, 그래? 그래, 들어가서 푹 쉬어. 졸업 준비도 하려면 빡셀 텐데….

정원은 보영을 기숙사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보영이 거기까지 거절하진 않았다.



원은 혼자 남았다. 곱게 기숙사에 들어갈 순 없었다. 졸업은 고사하고 논문 제출마저 실패한, 박사 4년차이기 때문이다. 같이 고생한 보영과 한 잔 하면 딱 좋겠지만, 거절했으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불러낼 친구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옛날엔 몇 명 있었다. 하지만 졸업해서 학교에 없는 친구가 절반이고, 통 연락도 안 하는 ‘페친’[5]으로만 남은 친구가 절반이다. 그래도 이참에 연락해볼까 하다가 말았다. 졸업은 고사하고 논문 제출마저 실패한, 그런데 같이 술 한 잔 할 친구마저 없는, 박사 4년차가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 밤은 술 마시고 행패를 부려도 정상참작 될 것만 같다.


이런 우울함은 어떻게 즐겨야 좋을까? 정원은 술집에 혼자 갈 용기는 없었다. 대신 한 야식집에 들러 양념삼겹살을 샀다. 기름진 삼겹살을 숯불에 구운 다음 매콤짭짜름한 양념에 잰 것이다. 그야말로 소주의 절친이다. 성인 남자 둘이서 식사로도 먹을 양이다. 하지만 소주와 함께라면 문제없다.[6] 편의점에 들러 소주 두 병을 샀다. 한 병만 살까도 했지만, 날이 날이니 만큼.


기숙사 휴게실로 갔다. 마침 아무도 없다. 텔레비전을 틀었다. <냉장고를 부탁해>가 나온다. 속도감 있고 재미도 있고 승부욕과 식욕마저 자극해준다. 좋다. 양념삼겹살 한 조각을 입에 넣는다. 조근조근 씹는다. 입천장에 기름이 끈적하게 붙는다. 소주로 씻어달라고 난리다. 매콤한 맛에 한 방, 짠맛에 두 방 맞은 혓바닥도 소주로 어루만져 달라고 난리다. 소주를 입에 털어 넣는다. 양념삼겹살과 한 몸으로 엉켜 식도를 매끈하게 쓸어내린다. 키야. 식도에도 미각세포가 있었던가.


또 한 입, 그리고 또 한 입. 정원은 열심히도 먹었다. 혼자 먹으면 빨리 먹게 돼서 안 좋다고 했던가.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으면 빨리 먹게 돼서 안 좋다고 했던가. 이따금씩 그만 먹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먹었다. 지금 생각이란 걸 하다간 논문 생각마저 날 테니까.


다 넣었다. 소주도, 양념삼겹살도. 정원은 신물이 올라올 것 같았다. 침을 계속 삼키며 눌렀다. 거울은 없지만 얼굴이 벌개진 게 느껴졌다. 방으로 갔다. 룸메이트가 없다. 씻으려다가 귀찮아서 말았다. 옷만 대충 벗어던지고 에어컨을 틀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래, 진탕 마셨으니, 이제 잊자.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데 뭐.’

박사 4년차의 하루가 결론 없이 끝나간다.




D-13:00


아침 8시. 권대성 교수는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학생들은 아직 안 왔다. 늦게 들어갔을 테니까.


논문 마감일. 이쯤 되면 교수의 역할이 제일 중요하다. 논문에 들어갈 재료를 만드는 과정엔 학생의 역할이 크다. 아이디어를 내고 구현을 하고 실험을 하는 모든 과정이 그렇다. 하지만 재료를 요리하고 조미료를 첨가해서 좋은 논문을 만드는 과정엔 교수의 역할이 크다. 논지를 매끄럽게 만들고 문장을 유려하게 만드는 일은 짧은 시간 내에 가르치기 어렵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면 학생에게 해보라고 시키고 첨삭을 해주겠지만, 벌써 마감일이니까.


마감까진 13시간이 남았다. 날짜로 치면 어제까지였다. 하지만 기준 시간대가 AOE(Anytime On Earth, 지구상 아무데나)다. 서울 시간대가 +9:00이고, -12:00까지 있을 테니까, 한국시각으로 오늘 밤 9시까지다. 논문을 낼 때마다 해야 하는 시간 계산, 지구의 자전을 가장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다.




D-7:00


길영은 갑자기 척추가 시렸다. 머리에 시원한 피가 돌았다. 직감이 좋지 않다. 침대에 누워 있음이 느껴졌다. 극도의 안락함. 침대, 육체, 이불이 삼위일체를 이루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긴 기숙사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극도의 불안감. 심장이 진동한다. 시간을 봐야겠다. 머리맡을 더듬었다. 핸드폰이 안 느껴진다. 문득 등 밑에서 진짜 진동이 느껴진다. 어렴풋이 알람 소리도 들린다. 등 밑을 더듬는다. 뜨거운 것이 느껴졌다. 핸드폰이다. 눈을 질끈 감은 뒤, 한쪽 눈만 겨우 떠서 핸드폰 빛을 견딘다.


“헉.” 오후 2시다. 5시간만 자려고 했는데, 9시간이나 자 버렸다. 원래는 밤을 새려고 했다. 마감일이니까. 하지만 피곤에 쩔어 있는 길영을 보다 못한 교수님이 잠 좀 푹 자고 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5시간은 자려고 했던 것이다. 9시간이라니, 이건 논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귀신을 만난 꿈, 논문 4번 그래프, 아이유 노래가 뒤엉킨다. 홍대 클럽처럼 어지럽다. 덕분에 몸도 파업이다. 평소 같았으면 잘 달랬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다. 캡사이신라도 발포해야 하는 걸까.


길영은 옆으로 굴러 침대 밑으로 떨어지다시피 해서 일어났다. 겨우 샤워 바구니를 챙겨 샤워실로 향한다. 물을 맞으면 정신이 들겠지. 9시간이나 잤으니까.




D-6:30


길영이 연구실 문을 연다. 준상이 반긴다.

강준상(박4): 오! 왔네. 오늘은 잠 좀 잤냐?”

전길영(석2): 형, 제가 너무 늦었죠. 늦어도 11시까진 나오려고 했는데 벌써 시간이… 어? 정원이 형도 와 있었네요?

김정원(박4): 교수님이 네 논문 오타나 이상한 거 있나 좀 봐달라고 하셔서. 마침 잘 됐다. 이거 좀 물어볼게.

전길영(석2): 아, 그래요? 뭔데요?

길영은 정원의 질문에 대답했다. 분명 대답을 잘한 것 같지 않은데, 정원은 빨리도 이해한다. 길영은 정원이 머리가 좋다고 느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논문이 없지? 모르겠다.

김정원(박4): 내가 오타 다 잡아줄 테니까, 너 논문 꼭 붙어야 한다.

전길영(석2): 그게 제 맘대로 되나요.

강준상(박4): 너 논문 붙을 확률이 얼만지 알아?

전길영(석2): 음, 작년엔 이 학회 논문 통과율[7]이 18%쯤 되지 않았어요?

강준상(박4): 50%야. 붙는다, 안 붙는다.

김정원(박4): 얘 또 아저씨 개그 하네. 어쨌든, 내 논문 포기한 거 알지? 니가 우리 연구실 마지막 희망이야. 그럼 수고해.

길영은 자리에 앉아 그래프를 다듬었다. 글자가 너무 작은 걸 좀 키웠다. 막대가 너무 얇은 걸 좀 굵게 했다. 훑어만 봐도 명쾌한 논문을 만들고 싶었다.




D-3:00


“길영, 좀 와봐”

교수님이 메시지를 보냈다. 길영은 반사적으로 뛰어서 교수님 방으로 갔다.

권대성(교수): 여기 이거, Onur[8]가 쓴 논문이랑 차이점이 뭐지?

전길영(석2): 네? 음… 적용하려는 환경이 다르죠. 그 논문은 CPU와 GPU가 섞여있는 상황에 특화된 것이고 저희 것은 좀 더 일반적인 상황을 가정했습니다.

권대성(교수): 그럼 직접적인 비교를 하는 건 좀 불공평하겠네? 그렇다고 빼기는 좀 그렇지? 그럼 직접적인 비교가 불공평한 면이 있다는 걸 언급하도록 하자. 2장은 내가 고칠 테니까, 넌 5장을 고쳐. (시계를 본다.) 그럼 난 30분 정도 더 2장을 고치고, 그 다음에 3장, 4장을 쭉 보도록 할게. 지금 뭐하고 있지?

전길영(석2): 5장 보고 있는데요.

권대성(교수): 그래, 다 보고 나면 2장부터 다시 보도록 해. 6장은 준상이한테 맡기자. 내가 볼 시간이 없을 것 같아. 그럼 가봐.

말 참 빠르다. 길영도 급히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5장을 열었다.




D-2:00


똑똑똑. 길영이 급히 교수님 방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들리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전길영(석2): 교수님, 3장에 여기 이거 잘못된 것 같은데요. 이 논문에서 제시한 건 GPU를 위한 prefetcher가 아니거든요.

권대성(교수): 오케이. 그럼 니가 고쳐.

전길영(석2): 그리고 저, 결론 부분을 아직 안 보신 것 같은데….

권대성(교수): 잘 써놓지 않았어? 거기까지 살펴볼 시간 없을 것 같은데….

전길영(석2): 써두긴 했는데요...

권대성(교수): 그거 심사할 때 잘 안 읽어. 니가 고쳐.

길영은 자기가 쓴 영어 문장을 그대로 심사 받는 게 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D-1:00


교수님이 길영의 방으로 왔다.

권대성(교수): 지금 학회홈페이지 들어가서 하나 제출해놓아. 막판이 되면 사람들이 몰려서 느려질 수 있으니까, 일단 제출해놓고 계속 고치자. 내가 1장을 중심으로 고칠 테니까, 너희들이 나머지 부분 보고 오타 없나 찾아봐.

길영은 떨렸다. 꼼꼼히 확인하고 논문 파일을 업로드 했다. 이제, 어쨌거나 심사는 받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마이크로(MICRO)[9]에!


하지만 감격에 젖기엔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다시 뚫어져라 2~5장을 훑었다. 보고, 또 봐도 오타가 나오고 어색한 문장이 나온다. 단수, 복수가 틀린 것도 발견된다. 오타란 청소부들의 쉼터와 같다. 그냥 볼 땐 안 보인다. 상상할 수 없는 곳에 숨어 있다.[10]




D+0:00:05


전길영(석2): 아이, 닫혔네.

강준상(박4): 벌써? 너무 칼 같다.[11]
전길영(석2): 마지막에 오타 몇 개 고친 거 못 올렸어요.

강준상(박4): 어쩔 수 없지 뭐.

둘은 교수님 방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그때까지 열심히 수정 중이던 교수님이 고개를 든다.

권대성(교수): 그래? 아직 고칠 게 남았는데. 어쩔 수 없지 뭐. 수고했어. 그럼 들어들 가.

길영은 정원에게도 찾아갔다.

전길영(석2): 형,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요.

김정원(박4): 잘 냈어?

전길영(석2): 내긴 냈어요. 근데 오타 몇 개 발견했는데 닫혀서 못 냈어요..

김정원(박4): 에이, 오타야 니가 완벽하다고 생각했어도 남아 있는 거고. 어쨌든, 부럽다. 논문도 내고.

전길영(석2): 내면 뭐해요. 붙어야죠.

길영은 나름 정원을 배려한 것이다. 논문을 내지도 못한 정원에게 위세를 떨 순 없지 않은가.

김정원(박4): 에이, 낸 게 어디야. 제출을 해야 붙을 수도 있는 거지. 고생 많았어.

전길영(석2): 네, 형, 고마워요.

김정원(박4): 그래, 논문 냈다고 술 마실 성격은 아니니, 들어가서 쉬어라.

전길영(석2): 내일 봐요.

하지만 정원은 길영이 진심으로 부러웠다. 논문을 제출하는 건 로또를 사는 것과 같다. 안 될 가능성은 높지만,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만큼은 행복하다.




D+2:00


“여보, 나 왔어.”

권대성 교수는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불 켜진 거실엔 아무도 없다. 안방 문을 열었다. 불이 꺼져 있다. 침대 위로 두 점이 반짝인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당신, 지금 몇 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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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한루프(infinite loop): 프로그램의 특정 부분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 선생님이 학생에게 벌을 주려고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계속 운동장 돌고 있어”라고 했다고 하자. 학생은 운동장을 돌고 있는데 선생님이 깜빡하고 퇴근해버린다면, 학생은 끊임없이 운동장을 돌아야 한다. 비슷한 실수를 프로그래머가 하면 무한루프가 생긴다.

[2] 다음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조건과 해당 사건이 일어날 확률의 추정치다.

 1. 정원이 prefetch를 꺼놓으라고 보영에게 말했다. => 70%. 석사 2년차에게 실험을 시킨다면 세세한 설정을 모두 알려주는 게 당연하다. 정원도 그래왔고.

 2. 보영이 알아서 prefetch를 껐다. => 10%, 기본 설정을 바꾸기엔 보영은 석사 2년차다. 하나 하나 의심해보고 물어보기엔 정원이 너무 바빠 보였다.

 3. 정원이 구현을 대충했다. A 상황일 때 B 상황인지 점검조차 하지 않는다. => 80%. 어차피 안 그럴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왜 그런 쓸 데 없는 짓을….

 4. 정원이 구현할 때 A와 B가 동시에 성립하는 상황도 예외처리 했다. => 30%, 이왕 쓸 데 없는 짓을 하려면 끝까지 했어야지….

 5. 정원이 구현을 더럽게 했다. A 상황일 때 B 상황인지 점검하는 것을, B 상황인지 점검하는 코드를 사용하지 않고, 따로 구현했다. => 70%. 평소 정원이 구현에 깔끔떨지는 않는다.

 6. 보영이 코드 리뷰를 하면서 A와 B가 동시에 성립하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걸 발견했다. => 10%. 보영은 이제 석사 2년차니까.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을 확률은 30% X 90% X 20% X 70% X 30% X 90% = 1.0206%이다.

[3]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1) 새벽 세 시 - http://scienceon.hani.co.kr/153375

[4] 소리의 전달 속도는 온도에 비례한다. 정확하게는 절대 온도(섭씨 온도 + 273.15)의 제곱근에 비례한다. Hugh D. Young, Roger A. Freedman. “University Physics with Modern Physics 11th Edition” 601쪽. http://en.m.wikipedia.org/wiki/Speed_of_sound

[5] 페친: ‘페이스북 친구’의 준말.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좋은 근황들과 정치적 의견들만을 전해 듣고, 정신적 소통 없이 이따금씩 클릭만 주고받는 관계.

[6] 2013년 4월 25일 XTM에서 방영된 <남자의 기술>에서, 의사 박상준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술만 먹으면 이상하게 많이들 드시죠? 초인적인 위를 가지고 막 먹기 시작해요. 왜 그러냐 하면, 술은 전체적으로 모든 걸 억제해요. 포만감도 마찬가지에요. 원래는 포만감을 느껴야 되는데 그 느낌을 억제하는 거예요. 술이. 그러니까 계속 들어가는 거예요.”

[7] 논문 통과율(accept ratio): 제출된 논문 대비 선정된 논문의 비율. 논문 통과율이 낮은 학회에 논문이 선정되었다면, 상대적으로 심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셈이 된다. 따라서 논문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를 보여주는 지표로 쓰이기도 한다. 또, 학회의 저명도를 나타내는 지표로도 활용된다. 저명한 학회일수록 연구결과를 제출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논문 통과율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명한 학회일수록 어느 정도 급이 되는 연구결과만 제출하기 때문에 논문 통과율이 심하게 낮아지는 일은 드물다.

[8] Onur Mutlu: 카네기 멜론 대학 교수. 컴퓨터 구조 분야에서 논문을 많이 쓰기로 유명하다. http://users.ece.cmu.edu/~omutlu/

[9] 마이크로(MICRO): 컴퓨터구조 분야에서 최고로 인정받는 학회들 중 하나. 정식명칭은 “International Symposium on Microarchitecture”이며, 보통 줄여서 마이크로(MICRO)라 부른다.

[10] 2015년 5월 12일 PD수첩 1037회 “근로자 점심시간과 휴게공간”에서 청소부들의 휴게실 실태를 고발한 바 있다.

[11] 논문 제출 시스템이란 것이, 되게 철저하고 기계적일 것 같지만 사실은 되게 인간적이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마자 닫히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20~30분에서 몇 시간까지 더 열려 있는 경우도 많다.


   ■ 작가의 말

1.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는 한겨레 사이언스온의 방침에 따라 모든 단어는 되도록 한글로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소설의 특성상 자주 등장하는 전문용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독자들이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전문용어’는 영어 표기를 하고 있습니다. 영어로 써놓으면 안 읽고 넘어가버릴 것 같아서요. 그러니 영어 단어가 나오면 ‘뭔가 전문용어인가 보다’라는 느낌만 받고 넘어가시면 충분합니다. ‘이걸 나보고 찾아보란 얘기야?’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읽지 말고 넘어가란 얘기구나’하시면 됩니다.


2. 며칠 전에 감자탕을 먹으러 갔습니다.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메르스가 이번엔 없어져도, 다음에 또 들어올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럴 거면 차라리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걸리는 게 낫지 않아? 나아서 면역력 생기게.”

 참 설득력 있게 들렸습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말인데도요.


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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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20대를 공대에서 보내고 30대도 공대에서 맞이한 전산학도. 그리고 소설 쓰는 사람. 무언가를 고찰하여 글로 표현해내는 것을 좋아한다. <용감한 작가들> 회원이며 페이스북 페이지 <글 쓰는 김창대>를 운영 중이다. https://www.facebook.com/holypsychowri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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