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연구자들의 "청춘 스케치"

연구의 맛과 멋을 배우는 젊은 연구자들이 실험실에서, 연구실에서, 그리고 사회와 만남에서 얻는 에피소드와 경험, 그리고 생활의 단상을 전합니다.

[연재] 비슷한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나무 아닌 숲을 보다'

한아름의 “실험실의 좌충우돌 일상 (3)

'어제'를 수확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학회







에 뿌린 씨앗은 싹을 틔우고 여름 동안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때로는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가을은 그 결실을 거두어 들이는 추수의 계절이다. 이 때가 되면 농부의 마음은 아마도 1년간 땀 흘려 기른 농작물을 만져보고 살펴보며 흐뭇해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도 하고 때로는 다른 농삿법으로 얻은 수확물을 보고, 아, 나도 내년에는 다른 방법으로 농사를 지어봐야겠다 하고 자극을 받기도 할 것이다. 과학 연구를 하다보면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는데 그 중 하나 바로 학회에 참가하는 일이다.

 

학회는 다양하게 열린다. 생화학 분야 중에서도 자기 연구실에서 다루는 주제(예를 들면, 단백질이나 더 작은 단위인 펩타이드, DNA나 RNA 같은 핵산, 탄수화물이나 지방, 세포신호에 따른 세포사멸이나 세포변이 같은 주제들)에 따라 세부 학회가 열린다. 또 화학회나 생물학회처럼 큰 규모의 학회가 열리고 거기에 다양한 세부 분과가 마련되기도 한다. 이런저런 학회에서 참가자들은 그동안 연구한 성과물을 보여주고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교류 활동을 하곤 한다.

 

나는 특히 1년 중 가을에 열리는 여러 학회에 참여할 때면 언제나 이런 농부의 마음을 잠시나마 간접 경험하곤 한다. 우리 연구실에서 참여하는 학회 중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 한국펩타이드-단백질학회, 한국핵산학회 등 대부분의 학회가 가을에 열리고, 1년에 두 번, 봄·가을에 열리는 대한화학회의 경우에는 가을 학회에만 참석했기 때문에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는 마음이 더욱 강하게 자리잡은 것 같다.

 

 

발표 당일까지 ‘허둥지둥’ ‘부리나케’


 

학원에 입학하고 처음 맞이하는 학회에 참가할 때에는 마냥 신기하고 설레는 마음 뿐이었다. 학회 날짜가 정해지면 참여할 사람들이 학회 참가 신청을 하는데, 우리 실험실 사람들은 각자의 실험 내용과 실험 진행과정 등을 포스터에 담아서 다른 참가자들한테 보여주고 설명해주는 ‘포스터 발표’ 신청을 학회 참가 신청과 함께 했다. 학회 참가 신청은 학회가 열리기 두 달 전쯤에 마쳐야 하기 때문에 가을 학회가 열리면 여름 즈음에 어떤 내용을 발표할 것인지 세부 분과를 결정해 연구 내용 초록을 제출해야 한다.

 

00poster » 학회 발표를 위해 저마다 땀흘려 준비한 포스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찰칵! 사진/ 한아름

하루 일과가 끝나고 여름의 선선한 늦은 밤, 언니들과 함께 실험실 자리에 앉아 학회 준비를 하곤 했다. 입학 뒤부터 날마다 작성한 실험 노트를 펼치고 연구실 컴퓨터의 실험결과 폴더를 열어 이래저래 뒤져 보았다. 연구실에서 실험을 시작한 이후에 나는 봄, 여름 동안 실험실이라는 곳에 적응하고 실험 주제를 정해 이제야 겨우 실험기구 다루는 법을 배웠는데, 도대체 무슨 내용을 포스터에 담아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할지 난감했다. 이것은 석사 1년차 학생들이 학회에 참가할 때 흔히 하는 고민으로, 실험을 제대로 할 준비를 하려면 6개월 정도의 기간(그래도 6개월은 지나야 연구 방향도 정해지고, 실험에 필요한 기자재나 기계들을 제법 다룰 수 있게 된다)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회에서 발표할 연구 내용이 충분치 않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배 언니들에게 물어보고 교수님께 여쭈어보며 광활한 포스터 한 면을 어떻게 채울지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한다.

 

요즘은 24시간 일하는 인쇄소가 많기 때문에 밤늦게 포스터 수정 작업을 하고서 학회 당일의 새벽에 교수님께 겨우 ‘통과’를 받고서야 부리나케 출력한 뒤 따끈한 포스터를 게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현상은 1년이 지난 다음해 가을에도 변함없이 되풀이 되었다. 전 해의 나처럼, 어쩔 줄 몰라 컴퓨터 앞에서 넋을 놓고 있는 후배들을 도와주고 박사과정 언니를 도우면서 새롭게 참여한 프로젝트의 포스터도 함께 준비하다 보면 또 새벽 동틀 무렵에서야 겨우 포스터를 완성해 부리나케 출력하게 된다.

 

00conference » 강연을 준비 중인 연사(위), 그리고 쉬는 시간에 한자리에 모인 실험실 식구.

첫 해에 참가한 학회에서는 내 실험의 의의나 원리 등을 주로 설명하고, 여태까지 수행한 실험의 경과와 앞으로 진행할 실험 과정을 소개하는 내용을 포스터에 담고자 했다. 이 글을 쓰면서 대학원 생활 첫 해의 학회 포스터를 다시 찾아서 보았다. 화려한 그림과 디자인을 보고서는 혼자서 소리 내어 웃었다. ‘멋진 포스터’를 꾸미려다 보니 보는 이의 판단력을 흐리게 할 수도 있는 귀여운 꼼수가 포스터 이곳저곳에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 언니들이 실험실을 떠나며 남겨둔 지난 발표 자료들을 보며 태어날 때부터 일을 척척 처리했을 것 같던 박사과정 언니도 이런 어설펐던 석사 초년생의 시기가 있었다는 걸 알고서 안도했다.

 

하지만 진짜 심각한 문제는 내 연구 내용을 살펴보았을 때 느끼는 허탈감이다. 전 해보다 실험노트도 더 두꺼워지고 컴퓨터에 실험결과도 많이 모여 있지만 막상 남들한테 발표할 내용은 갖춰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여태까지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열심히 실험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왜 이리 해 놓은 게 없는 걸까?’, ‘이 연구를 좀 더 잘 하기 위해 필요한 실험은 무엇일까?’ 같은 자문에서 시작해, 나중에는 ‘그렇다면 내가 지금 이 실험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이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알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이르기도 했다.

 

실제로 학회에 참가했을 때, ‘제가 이런저런 실험을 이렇게 저렇게 힘들게 해 보았고…’ 하며 설명하면 여러 교수님들께서 가장 많이 던지시는 질문들은 ‘그래서 이 연구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연구가 어디에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가?’ 하는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들이었다. 어쩌면 나는 하루하루 주어진 일에 매달려 그것을 겨우 처리하느라 눈 앞의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 것이리라. 종종걸음으로 부지런히 걸어가는 발끝만 쳐다보았지, 정작 내가 걸어가고 있는 큰 길은 고개 들어 제대로 한 번 살펴보지도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학회에서 만날 수많은 동료들, 연구자들, 교수님들을 생각하니 내 실험과 관련되는 논문들을 더 열심히 찾아보며 파고들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내 연구주제에 대해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실험에 관련한 아주 기본적인 개념이나 실험기기의 원리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학회 준비 과정을 거치며 깨닫게 된 것이다. 학회 포스터 발표 초록 접수를 마치고 학회가 시작하는 날까지 연구실 전체에는 평소와 다른 긴장감이 흘렀다. 다들 학회 준비를 하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리라.

 

 

내 작은 연구가 다른이들에게 ‘의미’가 되고


 

회는 다양한 도시, 다양한 장소에서 열린다. 넓다란 학회장에 들어서면 한쪽에는 실험기기 회사나 시약 회사가 펼쳐놓은 물품 전시·판매 부스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전국 연구자들이 각자 준비해 가져온 포스터들이 전시되는 공간이 있다. 우리 연구실 사람들의 포스터도 그 중의 하나로 자리를 차지했다. 포스터 발표 시간이 되니 나와 비슷한 연구를 하는 분들이 찾아와 관심을 기울이며 여러 가지 질문을 했는데, 내 연구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질문에 답하며 함께 고민하다 보니 내 실험에 대해 더욱 더 애착이 생겼다.

 

연구에 대한 칭찬을 받을 때엔 뿌듯한 느낌도 들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내가 히스톤 단백질에 대한 연구 발표를 했을 때였다. 우리 몸에는 유전 물질인 DNA 가닥이 감겨 있는 히스톤이라는 단백질(DNA 가닥을 실이라고 비유한다면 히스톤 단백질은 실패로 비유할 수 있다)이 있는데, 이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일부에 변형이 생기면서 세포에 여러 가지 신호가 전달되어 질병이 유발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연구실에는 히스톤 단백질 변형의 몇 가지 조합을 직접 합성해 만든 펩타이드 집단(Peptide Library)을 갖추고 있었는데 포스터 발표를 들은 어떤 대학원생이 그 펩타이드들을 자신의 연구에 도입해보고 싶다고 제안했다.

 

00staff » 학회의 숨은 일꾼인 진행요원들.

이렇게 내 연구가 다른 연구자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눈앞에서 서로 다른 두 연구간의 접목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경험이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내가 하고 있는 이 작고 미미한 실험이 과연 과학이나 의학의 발전에 어떤 도움이 될까 하는 의구심이 항상 있었는데, 학회 현장에서 이런 작은 경험을 하다보나 여유와 자신감도 생겨났다.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길을, 때로는 뒷걸음질 치기도 하고 나처럼 의심도 하면서, 그러나 어찌됐건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면서, 또 이렇게 도와가면서 수많은 연구자들이 지금과 같은 과학의 진보를 이루어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학회에서 다른 연구자들의 실험을 살펴보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유명 연사의 강연을 들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과학에 열정을 지니고 실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나도 더 열심히 실험실 생활을 해야 하겠다고 다짐을 했다. 아마도 이런 작지만 뭉클한 경험이야말로 비슷한 일을 하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학회 공간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경험이 아닐까.

 

학회에서는 이렇게 학구적인 활동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학회 행사가 원활하게 진행되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숨은 일꾼들이 있기 마련이다. 석사 2년차 때 제주에서 열린 국제 펩타이드학회에서 진행요원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 이 때에는 내 연구를 여러 사람들에게 발표하는 개인적인 활동뿐 아니라 다른 연구자들이 불편함 없이 학회에 참여하여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도록 학회 프로그램의 진행을 돕고 안내하는 일을 했다. 특히 이 학회가 국제 학회였기 때문에 학회 개최일보다 일찍 이곳에 와서 각국에서 온 연사들이 제주에 도착한 뒤 학회장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돕는 일도 해야 했다. 아무리 좋은 연구 내용도 혼자만 알고 있으면 무용지물이다. 과학자들끼리 잘 소통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서로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공간을 관리하는 일도 보람 있는 경험이었다.

 

 

결실을 정리하고 내일을 내다보는 농부의 마음…


 

미 있는 일도 날마다 되풀이하는 일상이 되면 그 의미를 잊어버리기 십상이다. ‘학회’는 과학과 학문의 연장이지만 평소와 다른 공간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정보를 공유하며 지금보다 더 확장된 시야를 지니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해 준다. 평생을 한 분야의 연구에 몰두한 권위있는 교수님들로부터 기대하지 못했던 조언을 듣고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발견하기도 하고, 더 이상 진전이 없을 것 같던 실험에 돌파구를 찾기도 한다. 국제학회의 경우, 세계 곳곳에서 같은 주제로 이렇게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내 프로젝트와 새롭게 접목할 기회를 얻기도 한다. 이런 지적인 발전뿐만 아니라, 학회는 일상에 익숙해져 다소 흐트러진 초심을 되찾고 연구자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실험의 목표를 다시 한번 상기하여 그동안 해 왔던 실험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농부도 추수기를 통해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세워볼 수 있듯이 말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학회 준비로 바쁠 많은 대학원생들과 연구자들이 학회에서의 뿌듯함과 신선한 자극에 대한 기대와 함께 조금만 더 힘을 내시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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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름 경북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대학원생
서울대학교 화학교육과에서 생화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장래 희망은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할 수 있도록 돕는 따뜻한 과학인이 되는 것.
이메일 : areumhan24@gmail.com       트위터 : @areumhan24      
블로그 : http://plug.hani.co.kr/areumhan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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