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대의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박사우울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많은 대학원생이 흔히 겪는 우울한 증상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 ‘박사우울증’을 앓는 많은 이공계 대학원생의 삶을 소설 형식에 담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서로 이해하며 보듬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카이스트 박사과정 김창대 님이 씁니다.

늪에 빠졌을 땐…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pic-s2e10.jpg » 삽화 / 박종애 님이 그려주셨습니다.


[지난 줄거리]

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연구실을 옮기기로 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어느 날, 교수님께서 길영과 정원에게 마이크로(MICRO) 학회에 논문을 제출하자고 제안한다. 길영은 준상과 팀을 이뤄 논문 제출에 성공했지만, 보영과 함께한 정원은 마지막 순간에 발견된 에러 때문에 제출에 실패한다. 그리고 3일 뒤….
  




#10. 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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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빠졌을 땐 빠져나오려 애쓰면 안 된다. 허우적대면 안 된다. 그러면 더 깊이 빨려 들어간다.[1] 그래서다. 정원이 슬럼프에 빠져 가만히 있는 것이. 이젠 슬럼프가 익숙하다. 지난주까지 했던 논문 작업이 아련하다. 일상으로 돌아온 느낌이다.


정원도 슬럼프를 극복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한 번은 큰 목표라도 하루 단위로 생각하고 계획해야 좋다는 말을 들었다.[2] 그래서 일 단위로 계획을 세우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불가능했다. 아이디어가 있어야 계획을 세울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아이디어를 생각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좀 이상했다. 어쩌다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마찬가지였다. 뭐부터 시작할지가 막막했다. 어떻게든 시작하고 보면 금세 말이 안 되는 아이디어인 게 드러났다. 접어야 했다. 제아무리 교수님이 준 아이디어라도 계획대로 되진 않았다. 소요 시간을 예상하는 건 늘 틀렸다. 일 단위 계획을 세우긴 개뿔, 매일 계획만 세워야 했다.


늦잠을 탈피하고 출근을 일찍 해보려 한 적도 있다. 어머니께선 늘 말씀하셨다. “아침을 챙겨 먹어야 머리가 잘 돌아간다.” 이것도 실험적으로 입증해보려 했다. 일찍부터 일하면 시간 박치기라도 될 것 같았다. 해보니, 효과는 나쁘지 않았다. 일단 기분이 좋았다. 아침 햇살은 기똥찼다. 그리고 뿌듯했다. 하지만 결정적 단점이 있었다.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과제 보고서 때문에 단 한 번 늦게 잤을 뿐인데, 한동안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 간간이 있는 회식도 같은 효과를 냈다. ‘질량 보존의 법칙’보다 무섭다는 ‘기상 시간 보존의 법칙’이었다. 슬럼프에 절망감이 더해졌다. 그럴 때면 누군가가 얘기해줬다. “자기 생체리듬에 맞춰서 해야 능률이 오르지.” 그 오른 능률이 문제인 게 함정이지만.


집중력을 높이고자 노력한 적도 많다. 문제는 게임과 예능이라 생각했다. 몇 분만 기다리면 실험 결과가 나올 때, 그 몇 분을 한 시간으로 늘려주는 게 게임과 예능이었다. 적어도 연구실에서는 끊어보고자 했다. 하지만 이내 다른 딴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연예계 소식에 박식해졌다. 맛집 정보를 줄줄 읊었다. 이게 뭔 짓인가 싶었다. 차라리 적당한 게임 하나 골라 성실하게 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연구 잘하는 친구들도 게임 한 두 가지는 하니까.


이벤트 풍선 바람이 빠지면 손님도 빠져버리는 빙수가게처럼, 정원도 자꾸 제 궤도로 돌아갔다. ‘나는 여기까지인가 보다’ 싶었다.



상도 영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실 그도 마이크로(MICRO)에 논문을 내고 싶었다. 구현도 다 끝났고 실험도 어느 정도 해놨던 터였다. 교수님께도 말씀도 드렸다. 하지만 마감 3주 전, 교수님께서 선택하신 건 길영과 정원이었다. 자신에겐 아무 말씀 없으셨다.


물론 그 둘이 급하긴 하다. 길영은 내년이면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그러면 지금 연구하는 주제를 이어서 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니 논문 쓰는 걸 더 늦출 수 없다. 그리고 정원은 아직 프로포잘[3] 못한 박사 4년차다. 더 신경 써주시는 게 맞다. 하지만 논문을 꼭 두 개만 내란 법도 없지 않은가. 가능성으로 치자면 자신의 것을 내는 게 맞는데.


그 와중에 교수님의 메일이 왔다. 한국연구재단 과제 보고서를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원식이 형과 주성이가 하던 연구와 관련 있는 과제다. 원식이 형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주성인 연구실을 옮겼으니 다른 학생에게 시켜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자신인가. 졸업이 덜 급한 3년차들도 있는데. 게다가, 자신의 연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올해 졸업시킬 생각은 있으신 건지….


하라니 하긴 해야 한다. 하지만 정말 하기 싫었다. 잘 아는 분야도 아니다. 새로 공부해서 써야 한다. 잘못하면 실험도 몇 가지 해야 할지 모른다. ‘뭘 도와주냐. 내가 다 쓰면 제목이나 몇 개 고쳐서 낼 거면서.’ 볼멘소리가 혀끝까지 차올랐다.


준상은 옆을 쳐다봤다. 길영에게 떠넘길 건 없을까 생각하면서. 그런데 웬걸, 길영이 예능을 보고 있다. 길영은 예능도 계획 세워두고 봤다. 일과시간엔 절대 보지 않았다.

강준상(박4): 이야, 니가 웬일이야. 이 시간에 예능을 다 보고.

전길영(석2): 공부하기 싫어서요.

강준상(박4):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전길영(석2): 그런 건 아니에요.

강준상(박4): 그래, 논문 쓰느라 고생했는데. 좀 쉬기도 해야지.

준상은 잠시, 쓰지도 못한 자신의 논문을 생각했다.



문 제출 뒤 이틀 동안, 길영은 잠만 잤다. 배고픔에 깨서 밥을 먹고 오면 자기도 모르게 침대에 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배고플 때까지 잤다. 평소 15분이 넘는 낮잠은 잔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끊어진 고무줄이었다. 논문 쓴다고 너무 당겨댄 탓이다.


이틀이 지나니 겨우 깨어 있을 수 있었다. 논문을 쓰자는 메일을 받은 지 23일째였다. 23일치 계획이 미뤄져 있었다. 명절에도 영어단어장과 하루에 한 개씩 읽을 논문은 챙겨가던 그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연구를 중단하고 밀린 계획만 따라잡을 수도 없다. 전 여친 편지 버리듯 싹 포기하고 새로 시작할까 싶었다. 바로 그 때, 2주 남은 박사 입시 면접이 떠올랐다.


‘아… 제기랄.’ 이건 계획도 아직 안 세워둔 것이었다. 잠깐만 생각해봐도 공부할 게 엄청났다. 대학원 전공필수 과목들은 한 번씩 훑어봐야 할 테니까. 준상과 함께 썼던 논문들도 기억을 되살려 놔야 한다. 영어로 자기소개를 시킬지도 모른다. 스크립트 정도는 써 놓아야 한다.


불안함보다 막막함이 더 컸다. 3주만 무리하고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오려 했는데, 다시 2주를 무리해야 하는 것도 짜증난다. 그래서다. 온갖 밀린 계획들 중에 예능부터 챙기고 있는 것이.


그렇다면 보영인 어쩌고 있을까? 평소와 같았다. 슬럼프는, 내려온다는 것은, 한 번이라도 올라가 본 사람들의 전유물이니까.



잉!

한 방에 있는 준상과 길영과 정길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단체 메일이다.


올해도 연구실 엠티를 갑니다. 교수님께 물어봤는데 바빠서 참석을 못 하시겠다고 하시네요. 우리끼리 편한 시기에 가라고 하십니다. 아래 후보 날짜 중에 가능한 날짜를 모두 표시해주세요.

- 김국현 드림


그리고 잠시 뒤, 정원, 국현, 보영이 준상의 방으로 함께 들어왔다.

김정원(박4): 어차피 우리 6명밖에 안 되는데, 단체 메일로 얘기할 필요 없잖아? 어차피 다 있는데, 지금 정하자.

강준상(박4): 근데 정말 교수님 빼놓고 가도 괜찮은 거야?

김국현(박3): 본인이 안 가시겠다는데 우리가 어떻게 할 순 없잖아요.

강준상(박4): 매번 같이 가셨잖아. 우리가 일정을 좀 맞춰드리면 되지 않을까?

김국현(박3): 제가 이미 말씀드렸어요. 아무 때나 괜찮으니까 되시는 날짜만 말해달라고요. 근데 그냥 일이 많아서 안 되겠다고만 하시는 게, 뭔가 딱 자르는 느낌이었어요.

강준상(박4): 그래도 어떻게 빼놓고 가. 내가 한 번 더 말씀드려볼게.

김정원(박3): 근데, 이 상황에 교수님이 우리랑 엠티를 가고 싶을까? 나 같아도 민망해서 못 갈 것 같은데.

권대성 교수의 생각도 그랬다. 학교 옮기는 건 개인 사정으로 인한 거긴 하다. 하지만 학생들을 버리는 모양새인 걸 부정할 순 없다. 연구야 일이니까 계속 함께해야 하겠지만, 엠티까지는 좀 민망했다.

강준상(박4): 아니, 그럼 엠티를 아예 안 가야 되는 거 아냐?

심정길(박3): 야, 그냥 좀 가면 안 돼? 요즘 연구도 잘 안 되는데. 어차피 이번이 마지막이야. 올해 너 나갈 거고, 길영이랑 보영이도 졸업하면, 내년엔 뭐야, 세 명 남네.

준상은 반박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슬픈 소식 밑에 달린 ‘좋아요’를 바라보는 듯한 상태였다.

전보영(석2): 근데…, 원식 오빠는요?

슬픈 소식이 하나 더 올라왔다. 젠장. 이럴 때를 대비해 ‘보고 싶지 않습니다’ 메뉴가 있는 건가.

심정길(박3): 아, 맞다. 원식이 형. 아 몰라. 휴학하고 연락도 안 받는 사람을 뭘 어떡해.

김국현(박3): 아까 그거, 단체 메일이니까 원식이 형에게도 갔어. 오고 싶으면 연락을 하겠지 뭐.

김정원(박4): (잠시 생각한다.) 그러면, 지금 날짜랑 장소 정한 거, 단체 메일로 다시 보내놓자. 혹시 원하면 오실 수 있게. 그럼 됐지? (보영이를 바라본다.)

전보영(석2): 네….

보영이라고 어쩔 건가. 연락해도 답도 없는 사람에게.

김정원(박4): 자, 그럼 드디어 날짜를 정해 봅시다!

강준상(박4): 교수님도 같이 안 가시는데, 주말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아, 저, 범생이. 교수님 엄청 신경 쓰네. 아까만 해도 섭섭해 했으면서.

심정길(박3): 난 주말은 안 돼.

김국현(박3): 왜요?

심정길(박3): 나 요즘 교회 다니거든.

전길영(석2): 아 진짜요? 어느 교회요?

심정길(박3): 학교 옆에 빛과 소금 교회라고….

김국현(박3): 거기 그 건물 큰 데요? 거기 지나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 치읓에 점이 잘 안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빚과 소금 교회로 보이던데. 교회에 빚만 엄청 많아서 소금처럼 짜게 돈 쓰는 거 같고 막, 크큭.

전길영(석2): 왜 그래요, 정길이 형이 다닌다는데.

김국현(박3): 에이, 왜 그래. 웃자고 한 소리지. 근데 난 교회 다니는 사람들 전도하는 거 진짜 싫더라. 그걸 왜 강요하는 거예요?

정길은 고민했다. 그는 이제 교회 경력 4주차다.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강준상(박4): 너도 아이폰이 안드로이드보다 좋다고 맨날 아이폰 사라고 하잖아. 그거랑 똑같은 거지.[4]

김국현(박3): 헐… 아… 저 방금 진짜 깨달음 왔어요. 전도하는 거 이해해줘야겠다.


두 한바탕 웃었다. 정길도 깨달음을 얻었다.

심정길(박3): 근데 국현이 너, 곧 훈련소 가지 않냐? [5]

김국현(박3): 네, 2주 뒤면 가요.

심정길(박3): 훈련소 가면 종교 활동 가잖아. 거기서 교회 한 번 가봐.

김국현(박3): 이해해준다고 벌써 전도 들어오는 거예요?

강준상(박4): 근데, 정말 교회로 가봐. 교회 가야 여자구경 한다.

심정길(박3): 내가 백마부대 나왔는데, 거기 훈련소 교회 별칭이 ‘백마나이트’였어. 여자들이 나와서 춤추거든.

김국현(박3): 오케이. 이런 전도, 인정할 게요.

전길영(석2): 아, 근데 전 2주 뒤에 박사 면접 보러 가야 해서요…. 그 후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김국현(박3): 박사 면접? 그거 면접장에서 똥만 안 싸면 합격이야.

김정원(박4): 내가 면접 볼 때도, 그냥 석사 논문 뭐 쓰는지만 대충 물어보고 넘어갔어. 너 성적도 좋잖아? 성적 나빠 봐야 한소리 듣고 불안해 하다가 합격하느냐, 기분 좋게 합격하느냐, 그 정도 차이지만.

전길영(석2): 근데…. 저는 다른 연구실로 가야 하는 거라서요….

일동 묵념. 자꾸 안 좋은 소식만 올라오는 게, 페이스북이 아니라 신문인가 보다.

김국현(박3): 그래도 여기서 석사한 건데, 성적만 좋으면 면접 때 별 말 없을 거야. 가서 모르는 거 있으면 교수님이 잘 못 가르쳐줘서 그렇다고 해버려.

심정길(박3): 내가 여기 박사부터 시작했잖아. 나도 입시 엄청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별 거 안 물어보더라고. 그보단 진학할 연구실에 미리 얘기되어 있느냐가 중요한 거 같아.

강준상(박4): 맞아, 연구실 안 정해져 있으면 아무리 좋아도 떨어뜨린다던데. 연구실 컨택은 해놨어?

전길영(석2): 네, 동기 중에 박사 안 가는 애가 있어서, 그쪽 교수님께 말씀은 드렸거든요.

김정원(박4): 그럼 됐지 뭐.

전보영(석2): 아, 얘기 해놓아야 되는 거예요?

김정원(박4): 너도 박사 가려고?

전보영(석2): 네, 그러려고 했는데….

김정원(박4): 아, 진짜?

전보영(석2): 저 박사 가면 안돼요?

김정원(박4): 아, 아니.

평소 박사과정 진학만 한다고 하면 뜯어말려왔던 정원이다. “박사 가지 말라고 백 번쯤 말해줄 테니 그래도 갈 거면 가라”는 게 정원의 주된 레퍼토리다.[6] 하지만, 보영에게는 그 말을 하지 못했다.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7]


사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영이는 아직 연구를 제대로 맛보지 못했다. 자신과 했던 두 번의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니까. 대체 무슨 매력을 느껴서 박사까지 간다는 걸까. 정말 잘 모르고 가는 건 아닐까? 말려야 하는 거 아닐까?


그래도 말을 꺼내진 않았다. 술이라도 들어가면 모를까,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심정길(박3): 근데 우리 왜 엠티 얘기를 이제야 하는 거냐? 더 일찍 안 가고.

김국현(박3): 길영이랑 정원이 형이 마이크로(MICRO) 논문 썼잖아요.

김정원(박4): 정확히 얘기하자. 난 쓰진 않았어.

정원은 우울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꺼내곤 한다. 맷집이라도 키우려는 건지.

김국현(박3): 근데 정말 어떡하죠? 보영이 너 아직 연구실 안 알아본 거지?

전보영(석2): 네.

김국현(박3): 그럼 면접 준비 좀 해야 할 텐데….

전보영(석2): 전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김정원(박4): 그래도 한 명 뿐인 여학생을 어떻게 놓고 가냐?

전보영(석2): 저 가면 괜히 숙박비만 더 들잖아요.

그렇긴 하다. 남자 6명이면 큰 방 하나면 뒹굴기 충분하다. 하지만 그 중 한 명이 여자면 방을 2개 잡아야 한다.

김정원(박4): 에이, 그건 오빠들이 다 엔(N)빵[8]해줄게. (다들 남학생들을 둘러보며) 그치?

한 명쯤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을지 모르지만, 겉으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국현(박3): 그럼 지금, 절 버리든지 보영이를 버리든지 해야 하는 거예요?

전길영(석2): 저랑 보영이를 버리는 거죠. 저도 박사 면접 본다니까요.

김국현(박3): 넌 얘기 끝났다면서, 진짜 괜찮다니까. 설사 안 하게 식이섬유나 많이 먹어.

강준상(박4): 그래, 걱정 안 해도 돼.

길영이는 이미 계획대로 되지 않고 있는 삶에 짜증나 있다. 이렇게 또 바뀌어 가는 것이 더 힘들었다. 준상마저 저리 말하는 걸 보니 면접 걱정은 덜 해도 되나 보다 싶다. 그래도 이건 아닌데….

전보영(석2): 저…, 그냥 다음 주쯤 엠티 가는 걸로 해요.

김정원(박4): 숙박비는 진짜 괜찮다니까 그러네.

전보영(석2): 아뇨, 저도 갈게요.

김정원(박4): 진짜?

전보영(석2): 컨택하는 게 더 중요하다면서요. 지금부터 연구실을 더 알아볼게요. 그리고, 저, 박사는 한겨레 대학교로 갈 생각도 하고 있었어요.

김정원(박4): 교수님 따라서?

전보영(석2): 네.

심정길(박3): 보영아, 그건 잘 생각해봐라. 한겨레 대학교 박사 따는 게 별 이득이 안 될 수도 있어. 어차피 4~5년 이상은 걸릴 텐데, 알잖아, 우리 학교 정도가 아니면 국내 박사들 별 대접 못 받는 거. 우리 학교 다른 교수님들부터 잘 알아봐봐.

김정원(박4): 그래, 정길이 형 말이 맞아. 일단 컨택을 열심히 해봐.

전보영(석2): 컨택은 해볼게요. 어쨌든 엠티는 다음 주에 가는 걸로 해요.


제 와서 국현이 훈련소에 가는 일정을 바꾸긴 힘들다. 훈련소에서 나오면 이미 개강 후다. 학기 중에 엠티를 갈 수도 없다. 처음부터 길영과 보영이 희생해야 하는 문제였다.


정원은, 여전히 보영에게 미안했지만, 그래도 보영과 친한 자신이 총대를 메기로 했다.

김정원(박4): 그러면, 다음 주에 가는 걸로 하자. 그래도 박사 면접 코앞에 앞두고 가긴 그러니까, 수, 목 정도로 가면 좋지 않을까?

심정길(박3): 난 괜찮은데.

강준상(박4): 나도 괜찮아.

길영은 여전히 불만이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보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김국현(박3): 당장 다음 주 수요일이면, 좀 급박하긴 한데…. 숙소가 약간 비싸도 이해해주세요.

김정원(박4): 그래, 우리끼리 가는데 서로서로 이해해야지 뭐.

김국현(박3): 음, 그럼 밥은 뭘 먹죠?

김정원(박4): 점심은 가는 길에 사먹고, 저녁은 고기 굽고, 아침엔 라면 먹고 그러면 되는 거 아냐?

강준상(박4): 그래, 오후엔 물놀이하는 거고. 밤엔 술 마시겠지 뭐. 안주나 충분히 싸가고.

김정원(박4): 벌써 다 나왔네. 아무 데나 바닷가로 숙소만 알아봐.

늪에 빠졌을 땐 빠져나오려 애쓰면 안 된다. 하늘을 봐야 한다. 늪에 자신을 맡기고 드러누워야 한다. 그리고 천천히, 배영을 하듯 자신을 밀어내면 된다. 늪 밖으로.[1] 이들의 엠티가 하늘을 보는 과정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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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3년 8월 16일에 방영된 SBS “궁금한 이야기 Y” 182회에서 김호중 교수는 늪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개펄도 마찬가지로 계속 우리가 빼내려고 하면 할수록 깊숙이 들어가고, 장화 자체가 아예 그냥 고정돼 있고 맨발만 나오는 경우를 보셨을 것 같아요.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딱 한 가지가 있죠, 바로 드러눕는 거죠. 드러누워서 배영을 하듯이 발을 앞으로 차고 나오는, 그런 상황으로 해서 빠져나오는 방법이 아직은 유일한 방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 Lewis, Neil A., and Daphna Oyserman. “When does the future begin? Time metrics matter, connecting present and future selves.” Psychological science (2015): 0956797615572231. 다음 인터넷 기사에서 핵심 내용을 다룹니다. 유하늘, “미루는 습관을 버릴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 한국경제 2015년 5월 14일. 

http://realestate.daum.net/news/detail/all/MD20150515100712016.daum

[3] 프로포잘(Proposal):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보통 다섯 명의 박사(주로 대학 교수들)에게 구두 발표 심사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심사를 받기 전에(몇 개월에서 2~3년 전) 같은 심사위원들에게 박사학위 내용에 대해 예비 심사(역시 구두 발표로 진행됨)를 받으면서 조언도 듣게 되는데 이것을 프로포잘이라고 한다.

[4] 이 비유는 연구실 선배인 ‘김환주’ 형의 것을 빌린 것이다. 컴퓨터 분야 대학원생에게 ‘종교’ 같은 것은 이것 말고도 많다. 리눅스 유저들은 ‘우분투’, ‘센트오에스(Cent OS)’ 등의 어떤 버전이 더 좋으냐를 두고 논쟁하기도 한다. 텍스트편집기를 놓고도 ‘vim’, ‘emacs’, ‘nano’ 등 선호하는 프로그램을 전도하려고도 한다. 프로그래밍언어 분야가 제일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종교다”라는 격언은 유명하다. 결국엔 모두 0, 1, 0, 1일진대….

[5] 박사학위 과정 동안에 연구하는 것으로 병역 의무를 대체하는 ‘전문연구요원’ 제도라는 것이 있다. ‘산업기능요원’으로서 병역특례업체에서 근무하는 것과 비슷한데, 근무지가 학교라고 보면 된다. ‘산업기능요원’과 마찬가지로 병영생활은 하지 않지만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은 받는다. 이를 간단히 ‘훈련소 간다.’라고 표현한다.

[6]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II (3) 독기  http://scienceon.hani.co.kr/249663

[7]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II (4) 여자  http://scienceon.hani.co.kr/253126

[8] 엔(N)빵: x가 ‘미지수’의 의미로 많이 쓰이듯, n은 ‘정해진 어떤 숫자’를 나타낸다. 아마도 ‘number’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추측된다. 사람이 n명일 때 n명이 돈을 똑같이 나누어 내는 것을 엔(N)빵이라고 부르는 건 알겠는데 왜 ‘빵’이 붙는 건지는 도저히 모르겠어요. 아는 분 계시면 알려주세요. ㅠㅠ


   작가의 말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만화를 하나 보게 되었습니다. <OK툰 - 개드립 만화> 중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입니다.

https://www.facebook.com/OKToon123/posts/469256756573353


커피집에서 한 알바생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자 받으러 온 손님이 “나오셨습니다”라고 해야 예의 있는 것 아니냐고 따집니다. 알바생은 물건이 사람보다 낮기 때문에 “나왔습니다”가 맞는다고 설명합니다. 손님은 수긍하고 돌아섭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알바생이 “두유딸기크림프라푸치노 나오셨습니다”라고 외칩니다. 손님이 지금 장난하는 거냐고 다시 따집니다. 그러자 알바생이 말합니다. 자기가 아메리카노보다는 높지만, 두유딸기크림프라푸치노보다는 낮다고. 아메리카노는 4,100원, 알바 시급은 5,580원, 두유딸기크림프라푸치노는 6,600원이었습니다.


이 만화, 내년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됐습니다. 내년 최저시급이 450원 오른 6,030원으로 결정됐거든요. 노동계위원 여러분, 욕봤습니다.


알바 월급을 올려줘야 하는 소상공인은 내년에 참 힘들 겁니다. 왜냐하면 소비가 거의 늘어나지 않을 예정이거든요.


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사이언스온의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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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20대를 공대에서 보내고 30대도 공대에서 맞이한 전산학도. 그리고 소설 쓰는 사람. 무언가를 고찰하여 글로 표현해내는 것을 좋아한다. <용감한 작가들> 회원이며 페이스북 페이지 <글 쓰는 김창대>를 운영 중이다. https://www.facebook.com/holypsychowrites
이메일 : holypsych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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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김창대 | 2016. 06. 10

      …에필로그…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에필로그. 감사의 글 깊은 밤. 정원은 박사학위논문 감사의 글을 쓰려고 키보드를 잡았다.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까요? 제가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요...

  • 마지막이다마지막이다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김창대 | 2016. 05. 27

      마지막회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지난 줄거리]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연구실을 옮긴다. 나머지는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8월, 학회의 ...

  • 한 시간 만에 끝내버리는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한 시간 만에 끝내버리는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김창대 | 2016. 05. 13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지난 줄거리]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연구실을 옮긴다. 나머지는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8월, 학회의 논문 마감이 있다. 길...

  • ‘현실은 남극 속 냉동창고일 뿐이다’‘현실은 남극 속 냉동창고일 뿐이다’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김창대 | 2016. 04. 15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지난 줄거리]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연구실을 옮긴다. 나머지는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8월, 학회의 논문 마감이 있다. 길영, ...

  • 소설: ‘케이-알파맨’소설: ‘케이-알파맨’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김창대 | 2016. 03. 18

    김창대의 단편소설알파고 쇼크 또는 열풍이 한국사회에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아니 여전히 많은 담론과 화제를 낳고 있습니다. 사이언스온의 연재소설 작가이자 카이스트 전산학과 박사과정 대학원생인 김창대 님이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2'의 연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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