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가위’ 등장 3년반, 생물·의학은 격동중
※ 이 글은 한겨레 7월20일치 ‘사이언스온’ 지면(22면)에 실렸습니다. 온라인 사이언스온에도 함께 싣습니다.
유전자 자르고 바꾸고
‘유전자 가위’ 등장 3년반
생물·의학은 격동중
지구촌의 수많은 연구물 중에서 언론매체에 알리고 싶은 성과들이 모이는 영문 보도자료 사이트가 있다. 이곳 ‘유레카 얼러트’(eurekalert.org)에서, 이미 ‘혁신적인 생물학 실험 기법’으로 알려진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아래 용어설명 참조)에 관한 글을 검색해봤다. 그 응용 분야는 하루가 다르게 다양화하고 있었다. “망가진 유전자 교정해 질병 치료하기”, “더 빠르고 효율적인 생쥐 유전자 편집 기법”, “유전자 편집으로 바꾼 나비 날개의 무늬 패턴”….
“관련 논문들이 날마다 쏟아집니다. 지난해 수백 편 나온 걸로 보이는데 올해엔 천 편을 훨씬 넘겠죠. 세계 각지에서 이뤄지고 있는 실험과 연구는 또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유전자 가위를 연구하는 국내 최대 연구그룹인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의 김진수 단장은 “생물학 기초연구에서, 임상시험, 질환 연구, 농작물 개발, 그리고 전에 없던 새로운 연구 주제까지, 놀라울 정도로 응용 분야의 폭이 빠르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2013년 1월 새로운 유전자 편집 기법의 탄생 이후, 불과 3년반 만에 달라진 풍경이다. 이젠 대중매체에서도 유전자 가위는 점차 중요한 관심사로 등장하고 있다.
크리스퍼 임상시험, 질병연구 활발해질듯
무엇보다 사람들의 관심은 난치병 치료에 적용할 유전자 가위 기법에 쏠렸다. 지난달 미국국립보건원(NIH) 자문위원회는 유전자 가위로 편집해 원하는 유전 형질을 갖춘 면역세포를 만든 뒤 이를 암 환자에게 투여해 치료 효과를 높이려는 미국 연구진의 임상시험을 승인했다. 시행된다면 ‘유전자 가위 임상시험 1호’다.
구상은 이렇다. 암 환자의 면역세포(T세포) 유전자를 체외에서 편집한다. 유전 형질이 바뀐 면역세포는 여러 환자들한테 면역거부 반응 없이 쓸 수 있는데다 암세포를 쉽게 찾아내 싸울 수 있어 면역치료 효과를 크게 높일 수 있다. 김 단장은 “본심인 식품의약국(FDA)의 심사도 통과하지 않았는데 큰 뉴스로 다뤄진 건 새 기법의 임상시험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는 걸 보여준다”고 풀이했다. 임상시험은 승인 절차를 밟아 올해 안에 시작될 것으로 전망된다.
임상시험은 앞으로 더 늘 것이다. 이미 여러 곳에서 임상 전 단계 연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김 단장은 “희귀 실명증이나 에이즈 같은 난치병에 ‘유전자 수술’을 적용하는 전임상 연구가 국내외에서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김 단장 연구진은 에이즈 치료에 관심을 쏟고 있다.
이전 방식에 비해 ‘더 값싸고, 빠르고, 정확하게’ 유전자를 편집할 수 있기에, 새 기법은 여러 질병 연구에도 빠르게 사용되고 있다. 연구 주제인 질병에 맞춘 실험용 모델동물은 이전보다 쉽게 만들어질 수 있다. 김 단장은 “예전엔 유전자 한두 개 기능을 탐색하는 연구조차 엄두를 내기 어려웠는데 이젠 많은 유전자를 동시에 바꿔 살피고, 더욱이 인간 유전체(게놈) 전체를 대상으로 한 유전자 연구도 가능해져, 의료나 질병 연구의 속도가 빨라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유전자 기초연구 활기…유전자 편집 동식물들
유전자 가위는 유전자를 연구하는 실험실에서 연구자들이 이전에 좀체 하기 어려웠던 연구 주제로 나아가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 모델생물인 예쁜꼬마선충을 이용해 유전자를 연구하는 김준 서울대 대학원생(생명과학부)은 “유전자 하나를 다루는 일도 이전엔 매우 어려운 일이었는데 크리스퍼 등장 이후에 유전자를 켜고 끄거나 변형하는 조작 기법이 손쉬워져 전세계 연구실에선 이를 활용하려는 여러 경쟁적인 노력이 활발하다”고 말했다. 마우스, 초파리, 선충 같은 전통적인 모델생물을 중심으로 이뤄진 연구에서 더 나아가 개별 생물종의 유전자를 다양한 주제로 다루는 연구물도 자주 등장한다. 최근만 해도, 유전자 가위 기법으로 알려지지 않은 나비 유전자들을 조작해, 유전자가 바뀔 때 나타나는 나비 형태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나비 날개의 무늬 패턴을 좌우하는 특정 유전자를 발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유전자 편집 동식물의 출현도 잦아지고 있다. 지난 1년여 동안, 애완용으로 기를 만한 작은 돼지가 만들어졌고 얼룩무늬를 한 양이 개발됐으며 근육량이 두 배나 되는 슈퍼 돼지, 뿔을 없앤 소가 발표됐다. 이런 낯선 동물의 출현을 일러 ‘크리스퍼 동물원’이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유전자 편집 농작물은 또다른 유전자 변형 농작물, 지엠오(GMO)일까? 연구자들은 다른 종의 외래 유전자를 집어넣어 만드는 지엠오와 달리 유전자 가위는 유전자 이식 없이 편집만을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김 단장은 “유전자 가위는 특정 유전자 염기서열을 자르고서 사라지는 복합체를 사용하며, 내부 유전자에는 육종법과 구별되지 않는 변이를 만들기에 지엠오와는 원리가 다르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현재 미국에선 농작물 세포 내 유전자에 외래 디엔에이가 삽입되지 않는다면 유전자 가위 기법으로 만들어진 동식물을 기존 지엠오 규제 대상에 포함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안전성에 민감한 소비자들의 반응과 논란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유전자 드라이브, 생물무기 ‘우려’도
기초연구와 의학 분야에서 기대를 모으지만, 당장에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분야도 있다. 새로운 유행어가 된 ‘유전자 드라이브’는 논란의 한복판에 있다. 말라리아나 지카 같은 질병의 병원체를 옮기는 모기 같은 생물종 전체의 유전자를 유전자 편집으로 바꾼다면 인류를 위협하는 질병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 유전자 드라이브의 기본 구상이다. 표적이 되는 생물종에다 스스로 유전되어 작동하도록 ‘유전자 가위 유전자’를 넣어 후세대로 이어지게 하면, 세대를 거듭하며 생물종 전체의 유전자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구상은 생태계에 끼칠 영향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또한 되돌리기 힘든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와 반론을 일으키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미국 과학아카데미(NAS) 산하 위원회는 유전자 드라이브를 감염병 퇴치에 사용하는 것이 시기상조이며 엄격하고 제한된 야외시험과 환경영향 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유전자 가위를 악용한 ‘생물무기’의 출현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최근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린 한 칼럼은 유전자 가위가 생물무기에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하며 국제 생물무기협약 논의에서 안건으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가 생명과학과 의학계에 일으키는 혁신의 속도는 연구실 바깥에서 나타나는 관심과 논의의 속도를 한참 앞지르고 있다.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제기된다. 생명윤리학회장을 지낸 전방욱 강릉원주대 교수(생물학)는 “유전자 가위의 등장 이후에 전에 없던 새로운 이슈들이 빠르고 폭넓게 등장하지만 이와 관련한 논의나 입법화는 뒤처진 형편”이라며 “특히 인간 생식세포 대상 연구, 유전자 드라이브, 유전자 편집 작물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다른 한편에선 세계의 연구 흐름에 맞춰 국내에서도 다양한 연구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크리스퍼 의학을 연구하는 김형범 연세대 의대 교수는 “국내에서도 많은 연구실이 다양하고 폭넓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연구 지원 정책이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용어해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바이러스 공격에 대항하는 박테리아의 면역체계를 따와 만든 유전공학 기법입니다. 박테리아를 공격하는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일은 박테리아의 생존에 중대한 문제이고, 그래서 박테리아는 잘 짜인 면역체계를 진화 과정에서 발전시켜왔습니다. 전에 침입한 적 있는 바이러스의 염기서열 정보 일부를 자신의 디엔에이 염기서열에다 기록해두는 거죠. 마침 그 바이러스가 침투하면 이미 갖고 있는 염기서열 정보를 바탕으로 바이러스를 곧바로 식별합니다. 뒤이어 박테리아 안에선 이렇게 식별된 외부 침입자의 염기서열을 절단하는 공격이 이뤄집니다. 이처럼 표적을 정확히 식별하고 그 디엔에이 염기서열을 절단하는 것이 바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기본 구성이지요. 박테리아의 이런 독특한 면역 시스템을 ‘크리스퍼/카스9’(CRISPR/Cas9)이라 부릅니다.
2013년 과학자들은 이런 기본 모형을 이용해 박테리아 안이 아니라 다른 생물 세포에서도 작동하는 크리스퍼/카스9을 개발했습니다. 당시 한국 연구진도 이런 발견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표적으로 삼은 유전자의 염기서열 정보를 기록해둔 ‘안내자 아르엔에이(RNA)’라는 분자와 △찾아낸 표적 염기서열을 절단하는 분해효소 ‘카스9’ 분자, 이렇게 둘을 결합한 ‘유전자 가위’ 복합체를 만든 거죠. 이제 안내자 아르엔에이를 잘 설계해 카스9에다 붙이면 이 복합체는 세포핵 안에서 절단하려는 유전자 염기서열을 찾아 결합하고 이어 그곳을 절단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유전자의 기능을 없애거나 증강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잘라낸 유전자 염기서열 부분을 미리 준비해둔 다른 염기서열로 교체해 유전자 기능을 수정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유전자 편집 기법을 써서 지식과 응용 분야를 넓히려는 여러 연구가 세계 각지의 연구실에서 분주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철우 기자]
[이런 연구 저런 발견]
‘박테리아 호기심’에서 시작된 크리스퍼 발견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라는 유전자 편집 기법이 널리 쓰기 시작한 것은 2013년 이후이지만, 본래 자연계에 있던 유전자 가위의 ‘자연 현상’이 발견된 건 20여년 전이었다. 첫 발견은 박테리아에 대한 일상적인 연구에서 비롯했다.
미국 생물학자 에릭 랜더(브로드연구소)가 정리해 생물학저널 <셀>에 발표한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연구의 초기 역사를 보면, 이야기는 스페인 동부의 한적한 블랑카 해안에서 시작한다. 1980년대 말, 그 지역 대학교의 박사과정 학생이던 프란시스코 모히카는 강한 염분에 잘 견디는 해안가 박테리아 종의 유전체(게놈)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우연히 이 미생물의 디엔에이(DNA)에서 독특하게 반복되는 염기서열 구조를 발견했다. 교수가 되어 모교로 돌아온 모히카는 연구를 계속해 이런 구조가 다른 박테리아 종에도 있다는 걸 발견했지만 그 기능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이런 구조엔 ‘크리스퍼’(CRISPR,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염기서열의 무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크리스퍼 구조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가 중요한 물음이 되었으나 한동안 가설과 추측만 제시될 뿐 밝혀지진 못했다. 모히카는 다른 생물종의 방대한 디엔에이 데이터베이스에서, 박테리아의 반복 염기서열이 다름 아니라 박테리아를 공격하는 바이러스의 염기서열과 일치함을 찾아냈다. 그는 크리스퍼가 박테리아의 면역체계와 관련돼 있으리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를 논문으로 써서 발표하고자 했다. 그러나 수난의 연속이었다. 논문은 2003년 11월 <네이처>에서 퇴짜를 맞고 다른 세 곳에서 거절되고서 2005년 1월에야 다른 생물학술지에 실릴 수 있었다.
다른 초기 연구는 프랑스 국방부 산하 연구기관에서 이뤄졌다. 사담 후세인이 생물무기를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당시의 우려에 대응해, 탄저균 등을 정밀 식별하는 기법을 연구하던 질 베르뇨도 모히카와 비슷한 결론을 얻었으나 그의 논문도 4차례 퇴짜를 맞고 2005년 4월에야 발표됐다.
주목받는 다른 주인공은 요구르트의 젖산균을 연구하던 프랑스 미생물학자 필리프 호르바트였다. 그는 박테리아의 독특한 반복 염기서열 구조가 바이러스의 공격에 대응하는 면역체계로 기능을 한다는 것을 실험으로 입증했다. 면역 과정에서 디엔에이를 자르는 분해효소인 ‘카스9’의 정체도 드러났다. 이어 여러 연구자의 노력이 모여, 박테리아의 크리스퍼가 카스9이라는 효소와 더불어 바이러스 침입에 대항하는 면역체계로 작동한다는 사실이 규명됐다. 자연계의 독특한 면역체계는 다시 여러 연구를 거치며 2013년 초, 박테리아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종의 유전자도 조절할 수 있는 유전공학 기법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크리스퍼의 초기 역사를 정리한 에릭 랜더는 “박테리아의 독특한 염기서열 구조에 대한 개인의 호기심, 생물무기에 대항하려는 군사적 대응, 요구르트 제품을 개량하려는 산업적인 요구라는 여러 연구 동기들”이 예기치 않은 큰 발견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했다. [오철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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