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서 얻는 다채로운 배움, 아이디어, 인연…
양우석의 이야기: ‘한국에서 이공계 대학원생으로 살아가기’
한국 이공계 대학원생의 생활을 대학원생 양우석 님이 개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합니다. 비슷한 길을 걸었던, 걷고 있는, 걷게 될 사람들에게 조그만 공감과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씁니다.
[3] 미국재료학회(MRS) 참가기: 대학원생은 학회에 참석해 무엇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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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온’에 두 편의 글을 연재한 뒤, 여러 사람들에게 ‘글을 잘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중에 어떤 친구는 이런 감상평을 전해주었다. “글 잘 읽었어. 대학원에 가기 싫어지게 아주 잘 썼던데?”
대학원생들의 일상과 현실에 대해 글을 쓰다 보니, 조금은 무거운 이야기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처음 계획에는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소 가벼운 주제로 글을 써볼까 한다. 그 주제는 이공계 대학원생들의 해외학회 참석에 관한 것인데, 해외학회 참석은 대학원생들의 일상이라기보다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 중의 특별한 이벤트라고 할 수 있겠다.
대학원 생활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대학원생의 해외 학회 참석을 신기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많은 비용을 지원받아 외국에 나가서 발표를 하는 것인가? 사실 나도 가끔은 지구 반대편까지 와서 내 연구에 관해 발표한다는 사실과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내 연구에 관심을 갖고 들어준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많은 대학원생들이 국내 또는 해외 학회에 참석해 발표를 하지만, 이미 학계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활동을 한 교수님, 박사님들의 학회 활동과 대학원생들의 활동은 아무래도 다를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최근 미국재료학회에 참석했던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 연구원으로서 해외 학회에 참석하여 느끼고 경험한 점들을 나누어보고자 한다.
#. 준비
올해도 어김없이 미국재료학회 참석을 위한 준비를 한다. 미국재료학회(Materials Research Society, MRS)는 봄/가을에 학술대회를 개최하며, 지난 10년 동안 봄 학회(Spring meeting)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을 학회(Fall meeting)는 보스턴에서 개최했다. 이는 재료 분야에서 가장 큰 학술대회 중 하나로, 우리 연구실에서는 매년 몇 명의 학생들이 봄 또는 가을의 학술대회에 참석해왔다. 2016년 봄 학회에는 내가 참석해서 그동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로 하였는데, 올해부터는 봄 학회의 개최 도시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피닉스(Phoenix)라는 애리조나 주의 도시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피닉스, 생소한 도시 이름이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주로 사막과 선인장의 사진만 나온다. 물론 학회는 놀러가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러 가는 것이지만, 미국인이 가장 살고 싶어 한다는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금문교도 보고 가파른 언덕에서 보이는 바닷가도 구경하고 싶었는데 사막 도시에서 학회라니.
어쨌든 아쉬움은 뒤로하고 학회에 참석하기로 한 이상 준비를 해야 한다. 먼저 현재까지 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초록(abstract)을 써서 제출한다. 초록은 내가 어떤 주제로 발표를 할지, 발표에는 어떤 결과들이 포함될 것인지를 간략히 요약한 한 단락 정도의 글이다. 초록을 제출하면 학회측에서 검토 후 승인 여부를 알려준다.
간혹 구두발표(프레젠테이션 파일을 띄워놓고 15분 정도 발표하는 방식)로 신청을 해도, 발표 신청자가 많으면 포스터발표(정해진 시간에 연구 결과를 포스터 형태에 담아 전시하며 토론하는 방식)으로 배정을 해주기도 한다. 학회로부터 15분의 구두발표 시간을 배정받았다. 15분 동안 내가 진행해 온 연구에 대해 다른 연구자들에게 잘 설명해 주어야 한다. 나의 연구이지만 한편으로는 지도교수님의 이름을 내걸고 하는 발표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연구 결과의 수준이 높아야 하며, 발표는 논리적이어야 하고, 또 영어로 스크립트를 준비해야 한다.
학회가 다가올수록 지도교수님과의 미팅 횟수가 잦아진다. 발표 내용을 점검하고, 논리적으로 자료를 배치한다. 영어로 스크립트를 준비해 실제 발표 연습을 한다. 13분 정도로 발표를 마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질의응답 시간에 받게 될 질문들에 대한 예상 답변도 준비한다. 어설픈 데이터로 학회장에서 망신당하지 않도록, 지도교수님께서는 데이터부터 영어 발음의 전달력까지 꼼꼼히 조언을 해주신다. 그래서 학회 날짜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지쳐가지만, 비행기만 타면 그때부터 쉬리라 다짐하며 학회 준비에 매진한다.
#. 학회장에서
우여곡절 끝에 학회가 시작되었다. 내가 학회에서 관심을 둔 분야의 발표는 월요일 아침 8시에 미국 에너지부(DOE, Department of Energy, 에너지/환경/핵안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미국 정부 행정기관) 소속 박사의 초청강연으로 시작된다. 월요일 오전에는 대부분 대가들의 초청강연으로 구성되었는데, 논문과 책에서만 보던 사람들을 직접 보니 신기하기도 하다. 첫 강연을 맡은 에너지부 소속 박사는 마치 헐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악당 박사 같은 느낌이 든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스파이더맨을 만들어내거나, 미국중앙정보국(CIA) 요원을 위한 특수 약물을 제작할 것 같은 인상이다. 정부 부처 관계자이다 보니, 개개의 연구 결과보다는 정책과 예산 등의 큰 그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한다. 앞으로 미국 정부는 현재의 기조를 유지하여 수소 에너지 관련 연구에 많은 지원을 하겠다는 말이다. 이후 대가로 여겨지는 몇몇 교수님들의 발표가 이어서 있다. 각 교수님들은 특정 소주제 내에서 현재까지의 연구 동향과 향후 기대되는 연구 방향 등을 제시한다.
내가 만일 논문을 쓰고 학술지에 투고를 하면, 지금 발표하는 교수님들의 평가를 받게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이들의 발표를 잘 들어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 중에 특별히 나의 연구 분야와 깊은 연관이 있는 교수님에게 수요일에 있을 내 발표를 들으러 오라고 초청하려고 한다. 학회 발표에서 좋은 인상을 준다면, 나중에 혹시나 평가를 받게 될 때 긍정적인 평가를 이끌어 낼 수 있고, 또한 지적을 받는다면 미리 지적을 받아 보완하여 논문으로 제출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모든 교육과정을 이수한 평범한 사람으로서(?), 외국인에게, 그것도 한낱 대학원생이 대가인 교수님에게 영어로 말을 걸려니 상당히 긴장이 된다. 내 말을 못 알아 들으면 어떡하지? 학생이라고 무시 당하면 어떡하지? 어쨌든 가져온 명함에 수요일에 있는 내 발표 시간과 장소를 적고, 어떤 말을 건낼지 마음속으로 연습을 해본다.
세션이 끝나고, 잽싸게 그 교수님을 찾아간다. 이런, 역시 대가는 대가인지 이미 내 앞에 몇 사람이 줄을 서 있다. 앞에 줄을 서서 열심히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인도 사람인 듯하고, 이미 박사학위를 받고 박사후연구원 자리를 구하고 있는 듯하다. 한 손에는 자신의 연구 분야와 연구 업적들이 적힌 이력서(CV)를 들고, 박사후연구원 자리를 줄 수 있냐고 물으며 열심히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학회장에서는 박사학위 예정자 또는 박사학위를 받은 지 얼마 안 된 연구자들이 이후의 연구직 자리를 구하기 위해 열심히 자신을 소개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기회에 안면을 익히지 않으면, 단순한 이메일 지원서 만으로는 대가들의 눈에 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드디어 내 차례이다. 떨리는 마음을 애써 잠재우며 태연한 척 인사를 한다. 생각보다 반갑게 답인사를 해준다. 나는 어디에서 온 박사과정 학생 누구이고, 어떤 연구를 하고 있다. 교수님의 발표를 재미있게 들었고, 그동안 교수님이 발표한 논문들도 흥미롭게 읽어 보았다. 내가 수요일에 어느 세션에서 발표를 하는데, 시간이 있으면 와서 들어주시면 감사하겠다. 이것은 내 명함이고, 여기에 발표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다. 준비해온 멘트를 조심스레 전달한다.
‘오 그렇구나? 나도 그 분야에 상당한 관심이 있어. 가만…, 수요일 오전이면, 그때는 나도 다른 스케쥴이 없어 참석이 가능할 것 같네! 관심 가져줘서 고맙고, 수요일에 발표 들으러 갈게!’
발표하는 모습은 꽤나 딱딱해 보였는데, 개인적으로 말을 거니 생각보다 매우 호의적으로 대답해준다. 어쨌든 대가로 여겨지는 교수님이 내 연구 분야에 관심이 있다고 했고, 내 발표를 들으러 온다고 했다. 기대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이 된다. 갑자기 발표 자료를 좀 더 보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재료학회 봄철 학술대회가 개최 도시를 피닉스로 옮기면서 참석자가 많이 줄었다더니, 우리 세션에서 월요일에는 오전 발표밖에 없다. 그래서 오전 세션이 끝난 뒤에는 점심식사를 하고 시내구경을 하러 나왔다. 그런데 이 도시는 길거리의 수많은 선인장들을 빼고는 특별히 구경할 만한 것들이 없다. 선인장은 정말 크고 다채로운 것들이 많다. 간단히 시내 구경을 한 뒤에 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왔다. 발표 자료를 살펴보니 아무래도 부족한 점이 보인다. 급하게 일부 내용을 수정하고, 발표 스크립트도 다시 한번 외워본다.
» 미국재료학회 봄철 학술대회가 열린 도시 피닉스에는 다양한 종류의 선인장이 있다.
둘째 날, 오늘은 함께 온 연구실 동료의 발표가 있는 날이다. 발표 연습을 좀 도와주고 학회에 참석해서 발표했다는 증빙을 해야하기 때문에 발표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둔다. 긴장하던 동료가 무사히 발표를 마치고 잠시 한숨 돌리려고 하는데, 예정된 발표자 한 명이 불참했단다. 일명 ‘노쇼(no show)’이다.
발표자의 불참으로 15분의 공백이 생겼는데, 좌장이 잠시 자유토론 시간을 갖자고 제안한다. 잉? 웬 자유토론? 잠시 분위기 파악을 하고 있는데, 어제 봤던 대가들끼리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며 이야기를 한다. 미국 에너지부의 박사님, 매사추세츠공대(MIT)의 교수님, 스위스 로잔공대 교수님, 독일의 연구소 박사님 등등…. 저분들이 아마도 전 세계 이 분야의 주류 연구자들이라 (물론 피닉스가 멀어서 안 오신 교수님들도 계시지만), 어디나 주류 연구자들은 이미 네트워크를 많이 형성하고 있고, 서로 매우 잘 아는 사이인 것으로 보인다.
나도 언젠가 저들의 리그에 진입할 수 있으려나? 언젠가는 나도 저들의 네트워크에 들어가고 싶지만, 아직은 그저 박사과정 학생일 뿐이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나 내 이름을 걸고 연구자의 경력을 쌓아갈 것이고, 아직은 데뷔도 하지 않은 연습생과 같은 처지이다. 우수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학위를 받고, 나도 어제 보았던 포닥들처럼 자기경력 소개서(CV)를 들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자리를 구하고 계속해서 좋은 연구 성과를 낸다면 언젠가 학계에서도 나를 기억해 주겠지만, 학위를 받고 취직을 한다면 아마 학계에서는 잠시 스쳐갔던 학생으로만 기록이 남을 것이다.
#. 발표
드디어 발표날. 아침 일찍부터 다른 사람들의 발표를 들으며 틈틈이 발표 자료를 검토하고 연습을 한다. 일반적으로 세부 주제별로 발표 순서를 정하기 때문에, 내 발표 순서가 다가올수록 내 연구와 직접 관련된 발표가 많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내 발표 연습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발표 내용도 놓칠 수 없어 꼼꼼히 챙겨 듣는다. 내가 제작한 소자와 유사한 소자에서, 측정 조건을 변경하였더니 성능이 매우 개선되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저런 것은 한국에 돌아가 내 소자에도 적용해보면 좋을 것 같다. 열처리 온도가 너무 높을 때 발생하는 문제를 흥미롭게 분석한 발표도 있었는데, 내 소자에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니 저 분석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 같다.
터키에서 온 어떤 여자 연구자가 발표를 한다. 대학원생인가? 미인이다. 복장에도 꽤나 신경을 쓴 듯 하다. 그런데 스크립트를 못 외워 왔는지 핸드폰을 보며 대본을 읽는다. 영어를 잘 못하나? 검색해보니 터키에서는 터키어를 쓴다고 한다.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와는 상관이 없이 최소한 스크립트는 외워서 발표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마저 보고 읽기도 잘 못한다. 연신 “오, 아임 소리(Oh, I’m sorry)”를 연발한다.
그런데 학회장의 분위기는 꽤나 호의적이고 관대하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천천히 하세요.’ 따뜻한 미소로 응원해주는 분위기이다. 여담이지만 학회장에는 여자보다 남자가 훨씬 많다. 얼마 전 <네이처> 저널에 소개된 바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여성 연구자는 전체 연구자의 17%밖에 안 된다고 하고, 여성 연구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포르투갈에서도 45.5% 정도라고 한다.[1]
또한 생각보다 몇 안 되는 나라의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데, 한국, 중국, 일본, 인도, 미국, 독일, 스위스 등을 합치면 아마 95% 이상은 될 것으로 생각되며, 출신 지역으로는 중국 사람과 인도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 같다. 아시아계 연구자들은 많은데, 흑인 연구자들은 거의 본 적이 없다. 미국에 와 보면 정말 뚱뚱한 사람들이 많은데, 학회장 안에서는 그렇게 뚱뚱한 사람은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정확한 통계는 조사를 많이 해봐야겠지만, 세계 각지에서 모인 이 연구자들은 생각보다 좁은 스펙트럼을 갖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발표 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내 발표를 들으러 온다던 대가 교수님은 보이질 않는다. 마지막 쉬는 시간을 활용해 미리 노트북과 프로젝터의 연결 상태를 점검해 보았는데, 내 노트북과 프로젝터가 연결이 되지 않는다. 설정을 이것저것 바꿔보아도 잘 되지 않는다. 막막해 하는 와중에 다행이도 내 직전 발표가 한국 사람이다. 가서 노트북컴퓨터 좀 빌려 써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한 뒤, 기꺼이 써도 된다고 해주셔서 빌린 노트북에 미리 발표 자료를 넣어 놓는다.
어느덧 발표 시간. 결국 초대한 대가 교수님은 오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친절하다고 믿으면 안 되나 보다. 마치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외워 온 스크립트를 거의 그대로 읽고 있다. 준비해온 발표를 마치니 대략 2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적당한 분량으로 마친 것 같다. 이제 질의응답 시간. 질문이 아예 없으면 좀 민망하겠고,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하면 좀 난감할 것이다. 다행히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몇 개의 질문만 있었다. 이렇게 지난 몇 개월간 준비해온 발표가 끝났다. 초대한 교수님이 오지 않은 것만 빼면 나쁘지 않은 발표였던 것 같다.
» 발표 중인 필자의 사진. 대가들의 발표에는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지만, 학생 연구자의 발표에는 빈 자리가 많다.
저녁에는 포스터 세션이 있다. 포스터 세션은 연구 결과들을 한 장의 포스터에 요약해 벽에 걸어놓고 포스터에 관심을 갖고 찾아온 사람들과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미국재료학회에서는 늘 포스터 세션이 저녁시간 이후에 있고, 간단한 식사와 음료가 제공된다. 지난 번에 참석했을 때는 맥주만 있었는데, 이번에는 맥주와 와인, 칵테일 등도 제공된다. 먹을 것과 술이 있으니 포스터세션은 때로 한껏 술기운의 도움을 받은 연구자들을 만날 수 있다.
흥미 있는 내용이 있나 하고 여러 포스터들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별로 관심 없었던 포스터 앞에서 어떤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 결과를 나에게 열심히 설명해준다. 별로 궁금하지 않았는데 너무 열정적으로 설명해 차마 뿌리치고 갈 수가 없다. 자신의 연구를 설명해줄 뿐 아니라 내 연구에 대해서도 물어본다. 아마도 오른손에 들고 있는 레드 와인에 취해 기분이 많이 좋은 것 같다. 포스터 세션은 보통 2~3시간 동안 진행되기 때문에, 흥미 있는 내용이 있으면 충분히 질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번 포스터 세션에서는 크게 얻은 정보가 없지만, 맛있는 음식에 만족하고 숙소로 돌아가 쉬어야겠다.
이렇게 목요일까지 학회를 마치고, 금요일만 보내면 토요일에는 출국해야 한다. 그래야 일요일 오후에는 도착해 월요일에 연구실에 출근할 수 있으니까. 미리 살펴본 프로그램에는 금요일은 오전 세션밖에 들을 것이 없어서, 금요일 오후부터 대략 하루 정도의 시간은 자유시간으로 보낼 수 있다. 어쨌든 학회 참석차 해외에 나오면 한국에 있을 때보다는 훨씬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공식 일정을 마치고 남는 이 짧은 자유시간이 사실 학회를 기다리는 큰 이유이기는 하지만, 비공식 일정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생략한다.
#. 학회 이후
학회는 끝났지만 연구는 끝나지 않았다. 학회를 마친 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중에 메일을 한 통 받았다.
“Dear Woo Seok,
This is Dr. XX, chair of the MRS spring meeting symposium. ……”
학회장에서 내 발표가 있었던 세션의 좌장이 보낸 메일이다. 요약하자면 내 발표를 흥미롭게 잘 들었고, 혹시 발표했던 내용이 이미 논문으로 출간되었는지, 아니라면 발표 자료를 공유해 줄 수 있는지 문의한다는 것이다. 발표 자료 등 연구와 관련된 내용은 내가 임의로 공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도교수님께 전달해 드리며 의견을 묻는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지만, 아직 논문으로 출간되기 전이고, 현재 논문 투고를 준비 중이기 때문에, 논문이 나오는 대로 공유하겠다고 전하렴.’ 연구자들에게 결국 중요한 것은 논문을 써서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논문 형태로 발표되지 않은 ‘미발표 연구결과’(unpublished results) 는 공유하기가 조심스럽다. 지도교수님의 조언에 따라 좌장에게 답변을 보낸다. 논문으로 나오는 대로 공유해주겠다고.
어느날 학과에서 세미나가 열린다는 공지가 있었다. 연사를 살펴보니, 매사추세츠공대(MIT)에 있는 박사과정 한국 학생인데, 이번 학회장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다. 분야도 내 연구 분야와 비슷하다. 세미나에 참석해서 발표를 듣고, 발표 뒤에 인사를 나눈다. ‘학회장에서 뵈었는데 여기서 또 뵙네요.’ 반갑게 인사를 하고 명함을 받아왔다. 자신은 미국에서 학위과정 중에 있어서 미국재료학회는 보통 매번 참석하니, 또 학회에 참석하게 되면 연락을 달라고.
학회장에서 배웠던 조건을 내 실험에 적용해본다. ‘오, 이럴수가!’ 생각보다 성능이 크게 향상되는 것을 관찰하였다. 덕분에 내 논문의 수준도 조금은 더 향상됐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학회장에서 배운 것들과 만난 사람들이 이후의 연구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단순히 내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그에 대한 코멘트를 듣는 것 이외에도, 다른 사람의 연구 결과를 듣고, 또 새로운 연구자들을 만나는 일들이 모두 연구자로서 귀중한 경험인 것 같다. 그들은 나를 잘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번 학회를 통해서 나보다 앞서가는 많은 선배 연구자들을 만나고, 인사를 나누고, 일부와는 메일을 주고 받으며 교류할 수 있었던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아직은 학계에서 이름 없는 한 명의 박사 후보생일 뿐이지만, 열심히 내공을 쌓는다면 언젠가 학회에서 만난 많은 교수님들과 박사님들처럼 부끄럽지 않은 연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
주
[1] Mark Zastrow, Nature, 2016, 534, 20
양우석 연세대학교 신소재공학과 석박사통합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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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온의 길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