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법과 과학의 '긴밀하고도 불편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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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 선 과학
쉴라 재서너프 지음, 박상준 옮김 | 동아시아


법과 과학이라는 딱딱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이 책이 주목받아온 이유는, 근대사회의 두 축을 이루는 ‘자존심 강한’ 제도인 법과 과학의 관계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며, 둘의 관계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미묘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법정은 더 큰 사회적 논쟁의 축소판이기에, 우리 사회에서도 제기되는 여러 과학기술 논쟁의 전개과정을 돌아보며 갈등의 해법을 모색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대 법정에선 과학기술과 관련한 증거나 증언이 자주 다뤄진다. 어떤 증거와 증언이 채택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과학기술 논쟁도 벌어진다. 새로운 화학물질이나 전자파 같은 잠재적 위험이 정말 위해를 끼치는지를 두고 원고와 피고 당사자 간의 치열한 공방도 벌어진다. 전문가 증언이 중요해지면서, 법의학자를 비롯해 디엔에이 감식, 병리학, 심리학, 독성학, 컴퓨터공학 같은 더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증언대에 선다. 그래도 원고와 피고 쪽이 내세우는 ‘과학적’ 증거와 증언을 둘러싸고 공방은 계속된다. 과연 전문 지식에 익숙하지 않은 재판부와 배심원들은 어느 쪽의 전문가한테서 결정적 증언을 얻어야 할까? 경쟁하는 과학적 증거들이 제시된다면 무엇을 증거로 삼아야 하는가?


미국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의 쉴라 재서너프 교수(Sheila Jasanoff, 과학기술학)가 쓴 <법정에 선 과학>은 영미법 체계를 따르는 미국 법원의 수많은 소송 사례들을 풍부하게 분석하면서 법과 과학기술 사이에 놓인 ‘불편하고도 긴밀한’ 관계를 보여준다. 책이 다루는 과학기술은, 과학자사회에서 평가되는 연구·실험실 안의 과학기술이 아니라 법정이라는 또다른 세상의 무대에 나선 과학기술이다.


법과 과학이라는 딱딱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이 책이 주목받아온 이유는, 근대사회의 두 축을 이루는 ‘자존심 강한’ 제도인 법과 과학의 관계를 아주 세밀하게 들여다보며, 둘의 관계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미묘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법정은 낯설게 등장한 과학기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더 큰 사회적 논쟁의 축소판이기에, 우리 사회에서도 제기되는 여러 과학기술 논쟁의 전개과정을 돌아보며 갈등의 해법을 모색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책이 보여주듯이, 과학은 아주 오래 전부터 사법 체계에서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16세기부터는 서구에서 과학기술 분야 전문가의 증언이 판결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 부각되었다. 그러면서도 근대사회에서 법은 당사자, 증인, 증거를 ‘엄정한 눈’으로 다루는 소송 절차를 정교화하고 과학은 학술발표와 동료평가 등을 통해 지식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저마다 다른 체계적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이 책은 두 체제에 관한 몇 가지 통념을 깨는 데 도움을 준다. 지은이는 무엇보다 과학기술이 늘 진실과 허위의 경계선을 저절로 드러내어 소송을 끝내는 종결자가 되지는 못한다는 점을 부각하고 있다. 예컨대 특정 화학물질이 유해한지 판가름하는 소송에서 과학기술만으로 그 인과관계가 즉시 드러나진 못한다.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한 병리학 연구는 종종 조사 규모가 작아 불충분하다. 화학 구조 분석이나 동물 실험이 이뤄졌더라도 실험실의 제한된 조건에서 나온 결과는 진행 중인 소송의 특별한 사례에 적용하기 어렵다. 더 많은 증거가 있더라도 ‘해석’과 ‘판단’은 불가피해진다.


그렇기에 결정적 증거나 증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좋은 과학’과 그렇지 않은 ‘나쁜 과학’의 경계선은 법정의 과정에서 ‘구성되어’ 그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법원의 잣대와 과학의 잣대가 충돌하기도 하며, 법원은 과학을 잘못 해석해 엉뚱한 판결을 내놓기도 한다. 거꾸로 법원은 과학이 발전해갈 길의 토대를 닦는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유독성 화학물질의 위험에 대한 법원의 판결 태도와 생명공학과 원자력 발전에 대한 판결 태도가 ‘우려’와 ‘낙관’이라는 상반된 경솔함을 보였다고 지적한다.


법원은 ‘주류 과학’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또 어떠한가? 이 책의 여러 사례들은 소송 당시 주류 과학의 견해가 소송 이후에 다른 연구결과에 의해 뒤집히기도 하며, 오랜 동안 의심없이 증거의 근거로 받아들여진 디엔에이 감식에서도 오류 가능성이 있다는 전문가 의견이 제출되기도 했다며 ‘주류 과학의 신화’를 지적한다.


그렇다면 과학기술은 법정에서 어떻게 다뤄져야 하는가? 지은이는 과학기술에서 참과 거짓의 경계선을 찾으려 매달리기보다는 민주적 의사결정을 구현하는 “적절한 절차를 구성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또한 법원은 이런 과학기술을 이해하려는 태도와 기본 안목을 갖추어야 하며, 동시에 법정 바깥의 사회에서 과학기술과 관련한 논쟁과 갈등을 푸는 충분한 공론장의 대안 체제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제시한다.



[책갈피]


머리말 중에서



[…]


법·과학·기술 분야의 논평가들은 법관과 배심원이 ‘좋은 과학’이나 ‘합법적인 전문지식’을 인식하는 데 부딪히는 어려움에만 관심을 집중해왔다. 하지만 그것들은 법의 일상적인 작용과 무관하게 아무 문제없이 존재하는 것이라고들 생각한다. 이들 논평가의 글에서 과학자는 외부의 영향에 흔들림 없이 사실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고 합법적인 주장과 그렇지 않은 주장을 구별할 줄 아는 존재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 그 자체의 권위는 문제가 없다. 만약 문제가 있다면 과학이 전달코자 하는 메시지를 놓친 법체계의 무능에서 비롯된 일일 것이다. 과학이 자율적이고 대체로 자동조절이 잘 되는 분야라는 관점은, 과학적 증거를 정의 구현의 전제 조건으로 여기는 법의 관점과 맞물려 있다. 이렇게 본다면 과학과 관련한 법의 의무라는 건 다음과 같은 두 단계 해결방안을 찾는 일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즉, 법원 등의 사법기관에서 주류 과학의 결과물을 찾아내고, 그 다음으로는 그에 바탕해 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00Jasanoff » 쉴라 재서너프 교수. 사진 출처/ 하버드 케네디 스쿨 http://www.hks.harvard.edu

이와는 반대로, 나는 여기서 법적 다툼 중에 있는 과학적 주장들이 아주 논쟁적이고 국지적 특색이 강하면서 폐쇄적인 추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가정 아래 논의를 펼친다. 법의 제도적 환경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법적으로 관련성이 있는 과학적 주장을 대변해 주며, 무엇이 타당한 과학으로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어찌 보면 진리와 정의라는 개념은 소송 과정에서 동반자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좋은 과학’을 어떻게 찾아내느냐를 놓고서 벌어지는 법적 논쟁은 내 연구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내가 이 연구로 바라는 건, 법적 소송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지적 충돌과 다양한 가치, 상호경합하는 전문지식들을 어떻게 조정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이다.


법은 과학적 결과물, 그리고 이것이 나오게 된 사회적 배경이 서로 접합하는 지점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전통적으로 ‘기술적’이라고 명명된 분야에서 어떤 진전이 이루어지면 인간의 행동과 관련 기구, 그리고 이들 간의 관계를 재조정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뤄진다. 이 진전에 따라 새로운 행위가 낡은 행위를 대체하게 되고, 법적 대리인, 인과관계, 권리, 의무, 책임 같이 근본적으로 중요한 개념들을 법에게 묻게 된다. 이 책의 핵심 주제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법적 개념들의 재정립, 재판기술과 추론의 성패에 관해서다.


내가 지난 10년 동안 과학과 기술 분야의 연구에 매진한 결과 과학기술과 법의 상호작용에 관해 나름의 이론을 정립할 수 있게 됐다. 우리가 평소 고착화돼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은 대상들, 예컨대 사실, 사법기관, 사회적 역할, 무생물 등의 사이에 그어진 경계선은 협상가능한 것임을 또한 알게 됐다. 과학기술 연구 작업의 핵심은 사회나 물질세계, 자연계에 구획된 경계선은 언제라도 허물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그래서 과학지식과 이를 활용한 기술은 대부분 수사적 기예와 실행이라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시스템을 통해 생산되고 견고함을 보장받는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과학은 자연계의 진실을 생산하는 데 독립적, 자기조정적이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는 과학이 현대사회에서 사회적, 인식론적 질서를 생산하는 다른 메커니즘과 사회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게 된 셈이다. 이러한 분석틀 내에서 법과 과학의 상호작용은 주목할만하다. 사회적 규범을 정하는 법의 힘은 물질세계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불변의 진리를 밝히는 과학의 노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학적 ‘사실’을 둘러싼 법적 분쟁은 무엇이 합법적인 지식을 구성하는지, 누가 과학계를 대변할 자격이 있는지, 그리고 과학은 다른 형태의 지식을 얼마나 존중하는지에 관한 사회적 통념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본문에서 내가 고민하는 문제는 법, 과학, 정치, 공공정책이 가로지르는 지점에 자리해 있다. 이 책에서 전문가 증인, 위헌법률 심사, 유독물질로 인한 불법행위, 새로운 기술규제와 같이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장들을 개념적으로 연결해주는 ‘사회적 구성’ 작업은 과학기술 연구에서 한복판을 이루는 학술활동이라고 하겠다. 법적 소송은 사회에서 과학기술의 독특한 질서를 구성하고 안정화하는 매개자로 기능한다. 법률적 분석 단계에서 내 관심은 법정에서 구사하는 여러 공식, 비공식적 기예에 쏠려 있다. 나는 법학과 과학 연구를 통해 사건과 논쟁의 특이성으로부터 일반적 주장과 원칙이 어떻게 도출되는지 알게 됐다. 법체계 내에서 과학기술을 해석하는 일은 언제나 권력과 권위의 영역들을 재조정하게 되는데, 이는 정치적 차원의 이야기다. 이것은 비전문적인 일반인이 검토하고 조절하는 기술적 의사결정 영역을 법이 새롭게 열어줄 때와 비슷하다. 이 책에서 내린 주된 결론 중 하나는 혼합된 교육적 관점에서 나온다. 즉, 법체계는 과학기술 논쟁을 해결하고자 ‘과학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대중의 이해를 돕고 지속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송에서 과학기술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미국의 정치에서 그 위치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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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온 운영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을 거쳤으며 주로 과학담당 기자로 일했다. <과학의 수사학>, <과학의 언어>, <온도계의 철학> 등을 번역했으며,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를 썼다.
이메일 :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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