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도 ‘나의 과학’을 낙관하며

  새해를 맞는 글 ③-끝  


스위스 로잔공대에서 양자물성을 연구하는 물리학자 정민기 연구원이 새롭게 발견하는 과학 하는 재미, ‘나의 과학’의 즐거움을 나눕니다.

00newyear_mySci.jpg » 박사후연구원인 피터(오른쪽)와 박사과정 학생인 이반(왼쪽 위)과 함께 실험을 준비하는 모습. 극저온 냉동기에다 학생이 만든 마이크로파 회로를 장착하는 중이다. 사진/ 정민기


해에도 과학을 한다. 실험실 가득히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기계장치 앞에서 새해를 시작한다. 예민한 이 녀석이 강짜라도 부리면 지난 몇 주간의 노력이 도로아미타불인지라, 실험실에서는 나도 모르게 자세부터 겸손해진다. 손에 쥐여주는 데이터를 그저 불평 없이 조심스레 받아 모아야 한다. 우리끼리는 가끔 장난삼아 기계장치 앞에선 말조심 하라고도 한다.


그렇게 몇날 며칠 정성스레 모은 데이터를 고르게 거르고 엄격한 논리와 수식에 따라 변환하고 압축하고 나면 하나의 도표를 얻는다. 도표 위에는 작은 점들이 이런저런 유형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론적 예상을 구현한 곡선이 유형을 따라 분포된 점들을 뚫고 지나가는 걸 처음 보는 게 보상의 순간이다.



손발이 잘 맞는 동료를 만나는 건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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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과학을 한다는 것이, 그 일상이, 이렇게 단순하거나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실험 장치는 툭 하면 고장이 나고, 한 번 고장이 나면 수리하는 데 몇 달씩 걸리기도 한다. 예상 곡선이 데이터를 멀찌감치 두고 돌아가는 경우는 해결의 여지라도 있으니까 그나마 낫다. 기껏 얻은 데이터에서 아무런 유형도 찾을 수 없거나, 애초에 실험을 잘못 구성해서 의미 없는 결과를 손에 쥐는 맥빠지는 경우도 역시 과학자의 일상이다. 물론 이들 또한 결국은 경험 자산으로 남겠지만.


직하게 감히 말하건대, 올해 나의 과학은 지난해보다 재밌을 거라 기대한다. 그냥 자기암시가 아니라, 실제로 지금껏 그랬다. 사실 이건 어릴 적엔 짐작하지 못했던 반가운 발견인데, 주변 환경의 영향도 분명 크다. 유럽의 대표적인 연구기관에서 일하게 되면서 점차 더 많은 나라의 과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다양한 주제를 다룰 수 있게 되었으며, 손발이 잘 맞는 동료들을 만날 수 있었던 건 대단한 행운이다.


함께 연구하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대학원생 이반(Ivan)은 매사에 열정적인 친구다. 뭐 하나 이거다 싶으면 속사포처럼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내뱉는데, 나로서는 그 말하는 속도를 머리로 따라가기도 힘들다. 종종 나와 동료연구원인 피터(Peter)를 자신의 사무실에 불러 앉혀놓고는, 혼자 질문하고 혼자 답하기도 하며, 생각의 이쪽저쪽을 정신없이 휘젓는다. 그러다가 일순 멈칫하며 ‘오 마이 갓’을 내뱉고 상기된 표정으로 방금 자신의 놀라운 발견을 우리에게 설명해댄다. 열에 아홉은 틀리거나 별것 아닌 것으로 판명 나긴 하지만, 가끔 무릎을 탁 칠 만한 아이디어를 실제로 찾아내는지라 나와 피터는 기꺼이 자리를 지킨다.


옥스퍼드대학 출신인 피터는 태도와 말투가 영락없는 영국 신사다. 이반과는 다르게 문장 사이사이 한 박자씩 쉬어가며 말을 잇는다.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따져보고 신중하게 말을 꺼낸다. 가볍게 아이디어 수준으로 주고받았던 이야기도 챙겨 두었다가, 며칠 동안 혼자 조용히 프로그램을 짜고 계산을 해서 구체적인 자료와 근거를 마련해 온다. 연구하는 과정마다 엄밀함을 추구하는 학자다운 모습의 친구다. 피터와 이반, 이들 덕분에 게으름에 발목 잡힐 뻔한 계획들은 추진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뜬구름 잡는 생각들 역시 눈에 보이게 모양새를 잡아갈 수 있었다. 죽이 잘 맞고 배울 점 많은 친구들과 일하는 게 올해도 즐거운 과학 일상을 기대하는 이유 중 하나일 테다.


이들 외에도 함께 연구하는 다른 대학원생들과 연구원들이 여럿 있다. 다시 말해, 다루고 있는 연구 주제가 여럿이다. 학위를 받고 유럽에 와서 처음 두 해 동안은 ‘이차원 양자스핀계(two-dimensional quantum spin systems)’라는 하나의 주제만을 연구했다. 그러다가 다음 두 해에 걸쳐 ‘일차원 양자스핀계’를 포함해 두세 개의 인접한 주제들을 더했고, 지난해에 이르러서는 부쩍 욕심을 부려 희토류 자성(rare-earth magnetism)과 초전도(superconductivity) 등 새로운 분야를 포함해 다루는 주제가 십여 가지에 달하게 되었다. 넓게 보면 모두 양자물성(quantum materials)이라는 테두리 안에 속하고 그간 관심 있던 주제들이지만, 실제 연구에 들어서면서 새로 공부해야 할 게 무척 많다. 그저 관심으로 공부하는 것과 연구하는 것은 수학 문제를 눈으로 푸는 것과 손으로 푸는 것 이상으로 차이가 크다.



조금씩 '나의 과학'에 눈을 뜨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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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 분야가 넓어지면서 다양한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더불어 시야가 넓어지는 걸 느끼며 스스로 대견해 하기도 한다. 하나를 깊게 파는 것은 연구의 기본 덕목이겠으나, 다양한 분야를 오가면서 지치지 않고 호기심을 유지하는 것도 역시 좋은 연구를 위한 하나의 방도이지 않을까. 


루는 주제가 다양해지려면 다른 나라 연구기관이나 과학자들과 협업하는 일을 빼놓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하나의 물질을 탐구하더라도 자기공명, 중성자회절, 엑스선 회절 등 여러 방법으로 상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혼자서 또는 한 연구그룹 내에서 십수 가지 다른 방법을 모두 제대로 다룰 수는 없다. 또한, 하나의 물질은 전기적, 광학적, 자기적 성질 등 여러 면모를 가지는데, 역시 혼자서 또는 한 연구그룹 내에서 그 모든 전문지식을 소화하기는 어렵다.


그 덕분에 해외 출장이 많다. 올해 역시 네덜란드에서 고자기장을 이용한 실험, 프랑스에선 자기공명과 중성자 회절 실험, 스위스 또는 영국에선 뮤온 입자를 이용한 실험 등을 계획 중이다. 가는 곳마다 각기 다른 분야 전문가들과 서로 부족한 지식과 경험을 채워주며 한 발짝 전진하는 재미가 있다. 실험이나 회의가 끝나고 나면 이삼일 정도 부담 없이 휴가를 내고 여행을 즐기는 건 덤이다.


어찌 보면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궁금했던 곳을 여행하는 즐거움으로 과학 일상을 치환해가는 것도 같다. 과학도 사람이 하는 거라고, 이를 통해 과학 일상이 풍요해지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더불어 이런 환경이 과학을 하는 어디에서나 주어지는 것은 아닌, 감사할 만한 행운이다.


러면서도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든 간에, 올해 나의 과학을 낙관하는 더 본질적 요소가 또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예전에는 ‘남의 과학’을 하다가 점차 ‘나의 과학’을 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다른 이들의 논문을 열심히 읽고 아이디어를 얻어 연구하려 했다면, 점차 그간의 내 연구를 바탕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어나가고 있다. 물론 아직 어디서 명함을 내밀 수준이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에 작더라도 처음으로 길을 내는 것이야말로 과학하며 얻는 가장 큰 기쁨 중 하나 아닐까.


흔히들 아이디어를 창의성과 연계한다. 과학의 내용보다 천재들의 이야기에 익숙한 일반인이라면 더욱 그렇게 여기기 쉽다. 반면 내 학위 지도교수님은 과학자로서 덕목에 창의성보다 끈기와 꾸준함을 앞에 두셨다. 처음에는 그 말씀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학위를 시작할 무렵만 해도 창의적 생각을 끈기와 꾸준함이 밀고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끈기와 꾸준함에서 피어오르는 것이 창의라는 생각이 더 크다.



▨  끈기와 꾸준함에서 피어오르는 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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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대학원생 시절부터 자신의 과학을 하는 뛰어난 이들도 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한참 더디게 눈을 뜬 셈이다. 반면 남의 과학만 하며 평생 연구자로 살아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렇게 보면 난 아직 행운아다. 내년이나 그 이후를 예단할 수는 없지만, 끈기와 꾸준함을 다잡는다면 적어도 올 한해는 지난해보다 더욱 더 ‘나의 과학’을 할 수 있을 테다. 이렇게 올해 나의 과학을 낙관해 본다.


해 첫 날, 한 해 중 어느 때보다 더 한가한 로잔 시내를 천천히 걸어 언덕 위 성당까지 올랐다. 시내가 한 눈에 들여다보이는 곳으로, 꼭 일 년 전 처음 올라 낯선 곳에서의 시작을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맞이했다. 그 때 기분과 마음가짐을 다시 떠올려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역시 지난해처럼 학교(로잔공대) 도서관에 들러 공부하는 학생들을 구경했다. 도서관은 꽉 들어차지도, 휑하지도 않았다. 다들 수식과 도표로 가득한 전공 서적과 공책을 붙잡고 씨름 중이었다. 영어 수험서나 취업 준비서는 찾아볼 수 없다. 마음이 괜히 복잡하다.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이들은 자신들이 행운아라는 걸 알까? 새해, 한국 과학과 과학자들, 과학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는 한해가 되기를 바라고 다짐한다.


정민기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학(EPFL) 양자자성연구실(LQM) 펠로연구원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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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학(EPFL) 양자자성연구실(LQM) 펠로연구원
낮은 차원 세상에서 불확정성 원리가 물질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고 있다. 일상과 동떨어진 내 연구가 사회에 어떤 의미인지 고민이다. 전 프랑스 국립고자기장연구소 연구원 [2014년 이전 글들은 필자가 프랑스 국립고자기장연구소에서 일할 때 쓴 글입니다]
이메일 : we.all.stardus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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