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의식은 변화 모른다 하나 무의식은 알고 있더라"

시각 장면 변화 못보는 '변화맹'에 관해 마술 속임수 기법 응용 실험

"관심 바깥 대상의 변화도 쉽게 사라질 뿐 단기기억에 저장돼" 주장




리 눈 앞에서 어떤 시각적인 장면 변화가 일어나는 데도 우리 의식이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을 일러 인지심리학에서는 ‘변화맹(change blindness)’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관심 바깥에 있는 상황이나 사물이 변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예컨대 카드 마술을 지켜보는 동안에 청중은 마술사의 손놀림이나 얼굴에 관심을 쏟다보니, 마술사의 옷이 바뀌어도, 탁자를 감싼 보자기가 다른 색깔로 바뀌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아래 유투브, 3분짜리로 짧지만 흥미로운 영상이니 찬찬히 감상해보세요).


[변화맹에 관한 실험사례는 과학 블로거 아이추판다 님의 글들에서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동영상 정보는 이곳에서 얻었습니다.]


이처럼 눈 앞에서 일어나는 시각적 장면 변화를 의식하지 못하는 변화맹 현상은 흔히 우리 뇌가 눈 앞의 모든 시각 정보를 다 받아들일 수는 없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주목 대상의 변화만을 주로 인지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 덕분에 우리 뇌는 중요한 일에 더 관심을 쏟으면서 현재 활동과는 별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는 다른 것들은 무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변화맹이 어떤 과정을 거쳐 생겨나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우리 뇌가 어떤 장면의 세세한 시각 이미지를 아예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맹이 생기는지, 아니면 시각 이미지를 형성하되 연속적인 시각 정보의 전후(변화)를 비교하지 못해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지는 분명하게 규명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런데 이런 변화맹이 우리 의식이 연속적인 시각 정보의 전후를 비교하지 못해 비롯했을 것으로 보인다는 새로운 실험결과가 나왔다. 이 연구는 1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카드 마술 게임’의 속임수 기법을 과학적 실험에 응용했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끌었다. 스페인의 알리칸테 신경과학연구소 연구팀(책임연구 루이스 마르티네즈 Luis M. Martinez)은 신경과학계의 최대 학술단체인 신경과학회(Society for Neuroscience)가 11월12~16일 미국 워싱턴 디시에서 연 ‘2011 신경과학(Neuroscience 2011)’ 연례 학술대회에서 관심 바깥에 있는 시각적 변화도 일단은 뇌의 단기기억에 형성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이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무의식’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새로운 변화맹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신경과학회가 낸 보도자료와 미국 과학잡지 <사이언스 뉴스>의 보도를 보면, 연구팀은 1905년 헨리 하딘이라는 사람이 고안해 널리 퍼진 ‘프린세스 카드 속임수(Princess Card Trick, 맨아래 설명)’의 방식을 응용해 실험 참여자들한테 쉽게 변화맹을 일으키게 하는 두 개의 카드를 보여주고서 몇 초 뒤에 앞서 보여준 첫 번째 짝에 있었던 카드가 어느 것인지 물어 반응을 살피는 실험을 했다. 참여자들은 모두 다 어떤 카드가 첫 번째 짝에 들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으며 ‘나는 모른다’고 답했다. 그러나 하나를 골라야 한다며 선택을 요구했을 때 참여자 중에서 정답을 고른 이들은 80퍼센트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연구팀은 전했다.


연구팀의 마르티네즈 박사는 <사이언스 뉴스> 보도에서 “사람들은 모른다고 하면서도 사실 알고 있었다”며 “정보는 거기에 있었고, 굳이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그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고 풀이했다. 사람 얼굴이 그려진 그림들을 이용한 비슷한 실험에서도 결과는 비슷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단기기억 덕분에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음을 알지도 못했지만 실제로 보았던 것이 어떤 얼굴인지 고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이런 실험결과를 바탕으로 “이번 연구에서는 우리의 관심 초점 바깥에 있는 대상도 비록 '소극적인' 기억이기는 하지만 뇌의 시각단기기억(VSTM)에 형성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라는 해석을 제시했다. ‘나는 알고 있지 않다’고 인식하지만, 사실 무의식에서는 단기기억에 저장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얘기이다. 그런 기억은 ‘능동적으로’ 의식의 영역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일부러 불러내야 하는 어떤 선택의 상황에 처할 때 무의식에서 ‘소극적으로’ 불려져 나온다는 게 연구팀의 주장이다. 또한 이런 매우 소극적인 시각단기기억은 불안정해 쉽게 사라지는 특성을 지닌다고 연구팀은 전했다. 마르티네즈 박사는 “마술가들이 청중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흐트리기 위해 사용하는 가벼운 잡담이 이런 단기기억을 실제적으로 방해하거나 완전히 없애버리기도 한다”고 풀이했다.


한편, 최근 들어 마술은 주의력, 인식, 기억 등을 연구하는 분야에서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 2008년 <네이처 리뷰 뉴로사이언스>에는 ‘무대 마술에 나타난 주의력과 인지: 속임수를 연구에 이용하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인지심리학 연구자들은 "시각연구자가 시각 시스템의 작동을 밝히기 위해 시각 예술과 착시를 연구하듯이 인지과학자는 인식의 토대를 규명하기 위해 인지적 착각을 연구할 수 있다"며 “마술가와 그 테크닉을 연구함으로써 신경과학자는 주의력과 인지을 다루는 유력한 실험방법을 배울 수 있으며 뇌영상이나 다른 신경 기록기술을 써서 그런 방법을 의식 자체의 행동적 기초, 신경적 기초를 직접 연구하는 데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술의 테크닉이 신경과학의 한 분야에서 학문적으로 참조할 만한 흥미로운 연구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 연구발표 초록


 

“시각언어에 관해서는 우리 의식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적게 인식하고 있다. 예컨데 영화에서는 ‘옥에 티’가 일반적으로 나타나지만 이런 실수는 종종 관객들한테 인식되지 못한 채 지나간다. 연속적인 시각 장면에 나타나는 변화를 찾아내는 우리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변화맹이라고 알려진 현상이다. 원칙적으로, 변화맹은 (우리 뇌에서) 어떤 장면의 대상물을 생생하게 재현하지 못하거나 그런 (시각적) 재현을 유지하지 못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아니면 이미 있는 재현과, 변화 이후의 이미지를 비교하지 못해 생길 수 있다. 그러므로 변화맹 연구는 주의력, 의식, 시각단기기억(VSTM)와 인지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동안 변화맹 연구에는 대체로 두 가지의 대안적인 방법이사용되었다. …… 이번 연구에서 우리는 주의력과 시각단기기억 간의 상호작용 연구를 위해 1905년 헨리 하딘이 고안한 ‘프린세스 카드 속임수’를 현대적으로 개조한 새로운 변화 탐지 방법을 도입했다. 우리의 연구결과는 카드나 사람 얼굴이라는 대상이 주의력의 초점에서 벗어나 있더라도 시각단기억에는 일단 저장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더욱이 이런 시각 장면이 (뇌에서 이뤄지는) 소극적인 재현은 어느 정도 선명한 것이며, 의식적인 인식을 불러일으키지 않더라도 강제적인 선택의 상황에서는 그것이...효과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불려나와 사용될 수 있다. 그러므로 변화맹은 어떤 장면에서 두 개의 연속적인 (시각적) 재현을 서로 의식적으로 비교하지 못해 생겨나는 것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소극적 시각단기억은 불안정하며, 그래서 우리는 마술사가 청중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흐트러뜨리고자 이용하는 가벼운 잡담이 시각단기기억의 내용을 효과적으로 방해하며 심지어 완전히 제거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결과는 우리 능력에서 시각 장면을 역동적으로 재현하는 데 ‘병목’ 구실을 하는 시각단기기억의 중심요소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온라인에 공개된 초록에는 자세한 실험 방식과 결과에 관한 설명은 없다.)



프린세스 카드 속임수


(* 실험에서 응용했다는 프린세스 카드 속임수를 소개하는 여러 웹사이트가 있다. 아래는 그 하나를 재구성한 것.)



자, 시작합니다.



아래 여섯 장의 카드가 있습니다.


00cardtrick1


그 중 하나를 마음속으로 고르세요.


고르셨나요? 고른 카드를 다시 잘 보시고요


기억해두세요. 잊지 마시고요.


그러면, 당신이 마음속으로 고른 그 카드만을 빼서 없애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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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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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cardtrick2


제가 맞췄나요?

다섯 장만 남고 당신이 고른 카드만 사라졌지요?


마술입니다!

아니, 사실은 속임수입니다. 자기가 고른 카드에만 관심을 쏟게 해, 정작 눈 앞에서 뭐가 바뀌었는지 제대로 살피지 못하게 하는 속임수입니다 (저도 처음엔 속아넘어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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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온 운영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을 거쳤으며 주로 과학담당 기자로 일했다. <과학의 수사학>, <과학의 언어>, <온도계의 철학> 등을 번역했으며,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를 썼다.
이메일 :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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