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함 잃지 않고 선택한 연구의 길을 갈 수 있기를"
신동화의 “유럽에서 포닥으로 살기 -이탈리아”
[3] 학위를 받고보니
» 사진 1: 학위 수여식 때 아내와 함께 연구실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부품이며 공구가 어지럽지만, 저와 아내의 표정이 밝은 것이 마음에 듭니다.^^
안녕하세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신동화입니다. 여기에서 지내면서 글을 쓰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제가 글을 쓰는 순간에 떠올리는 제 글의 독자는 사실 제 아내가 아닐까 하는 점입니다. 따지고 보니 제가 이곳에 쓰는 글은 제 아내에게 보내는 글이기도 합니다. 결혼하고서 두 달 만에 외국에 나와 손편지 한 번 보내지 않는 ‘쿨’한 남편입니다만, 전공 이야기를 하면 이내 잠드는 제 아내가 이 글은 꽤나 심각하게 읽고 있다니 조금 재미있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아내에게 보내는 글을 써야 하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여태껏 자신을 돌아보는 데 인색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나누는 것을 거북해 했던 제가 품을 들여가며 이런 일을 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무엇보다도 제가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와 앞으로 어떻게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지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나씩 쌓여갈 제 글이 저와 아내가 공감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면,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이 글이 실릴 때쯤 태어날 예정입니다!)가 이맘 때의 아빠를 이해할 수 있는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가 졸업에 즈음해 겪었고 생각했던 일들을 중심으로 여러분과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스스로 어떤 진로를 설계했고, 어떻게 살고 싶었는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되짚어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릴 적 꿈은 과학자
저도 초등학생 때 장래 희망을 적는 칸에 큰 고민 없이 “과학자”라고 적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1981년생이니까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쯤엔 장래 희망 칸에 과학자라고 써내는 학생들이 의사, 변호사라고 적는 학생보다는 월등히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친구들과 반쯤은 장난으로 우리가 크면서 본 만화나 영화 속 과학자들의 전공은 무얼까 하며 이야기해 본 적이 있습니다. 대체로 남자 아이들이 보고 자란 만화나 영화에 커다란 로봇이 나오는 걸 보면, 아마도 김 박사님, 남 박사님의 전공은 일단은 기계공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제가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게 된 데에는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서울 용산 전자상가 근처인 것이 큰 요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용산구 보광동에서 다녔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동네인데 이태원동과 한남동, 서빙고동 사이에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피시(PC) 게임을 좋아했고, 중고등학교 때는 회로 키트 같은 걸 사다가 집에서 조립하고 노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사운드 카드며 모뎀 램(RAM) 같은 부품을 사다가 피시를 이리저리 바꿔보며 함께 놀았습니다.
좀 애늙은이 같습니다만, 중학교, 고등학교 때에는 주말에 도서관이나 전자상가에 가는 것이 낙이었습니다. 전자상가가 멀지 않았던 탓에, 전자상가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용돈을 모아 뭔가 사는 것이 큰 재미였습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방송반 활동을 했는데, 이것 역시 전자상가를 자주 드나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영향인지 저는 코딩도 싫어하진 않았지만, 회로나 하드웨어에 부쩍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막연했던 ‘하고 싶은 일’이란 것을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고민한 것은 아무래도 대학 입시 때였습니다. 전공을 정해서 원서를 내야 하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능을 마친 제 눈에는 ‘컴퓨터공학과’라는 이름이 그렇게 멋져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학부에 입학하고 나서는 정말로 좌충우돌하며 지냈습니다. 저는 사춘기를 대학에 와서 겪은 것이 아닌가 할 정도입니다. 학부 2학년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제 방황은 더 깊어졌습니다. 전공 공부에도 흥미를 잃었고, 경제적 어려움도 겹쳤습니다. 사실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병역이나 취업 등 직면했던 문제들에 관한 결정을 미루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습니다.
졸업과 선택의 순간
저는 2012년 5월 박사학위 논문 초심을 받고, 8월 최종 심사에 합격했습니다. 그날의 감회는 참 남달랐습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처럼 기쁘지만은 않았던 것이, 워낙 오래 끌어온 일이었고 어서 끝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20대를 고스란히 보낸 연구실을 떠난다는 점이 서운한 동시에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에 대한 기대반 불안반인 심정이었습니다. 또 저는 8월에 결혼했는데, 학위 초심과 종심 사이에는 결혼 준비로 바빴습니다. 학위를 받은 뒤로는 박사후 과정으로 온 이탈리아 생활을 준비하며 비자며 각종 서류를 처리해야 했고, 사실 스스로 미래나 연구 방향 같은 것을 작정하고 곰곰히 생각해볼 겨를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학위를 받은 뒤에 일단 살펴본 것은 같은 전공으로 학위를 받은 선배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였습니다. 기업 연구소나 국책 연구소, 대학 정도가 보통 선택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할 때, 최근 국책 연구소들이 채용을 잘 하지 않아, 기업 연구부서로 가는 경우가 가장 많았습니다. 대학에서 자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박사후과정이 대체로 필수적이지만, 이 기간에 경제적인 문제가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병역을 마쳤다면 대체로 30대 초반으로 결혼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나이입니다.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취업한 친구들이 4~5년 차의 직장인으로 주거 같은 문제를 대체로 해결하고 결혼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같은 나이에도 계속 대학원에 있었다면 저축은 언감생심이고 학비 문제 등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저도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에 어머니의 은퇴도 다가오고 있어, 기업으로 가는 진로를 꽤나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몇몇 회사에서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이 있기도 했습니다. 기업에 갈지 박사후과정 연구의 길로 나아갈지 고민하던 차에 정말 우연찮게도 지금 제 호스트 교수인 엔리코 마치(Enrico Macii) 교수와 서울에서 저녁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고, 이 자리에서 마치 교수가 박사후과정 자리를 제안하여 승낙하게 되었습니다. 뭐가 뭔지 잘 모르고 얼떨떨했지만, 일단 졸업과 동시에 옮길 수 있다는 점과 평소 존경했던 마치 교수에게 제안을 받았다는 점이 기뻤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계속 행복하게 연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고백하건대, 제가 보고 들은 국내 기업의 연구원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제 결정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인공위성을 만들다가 지금은 통닭을 만든다는 이야기, 코피 쏟고 보약 먹어가며 일한다는 이야기 등등…. 이공계 위기에 관한 이야기가 신문 지상을 오르내리게 된 뒤로, 여러분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회사를 다녀보지도 않았으면서 괴담 수준의 이야기를 들먹이는 듯하여 조심스럽습니다만, 체력도 좋지 않은 편인 제가 주눅이 들 법한 이야기들이 참 많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은 기사에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삼성전자 만드는 2%…정예 연구위원들의 세계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4/17/2013041702102.html?news_HeadBiz)
위 기사는 최근 국내의 한 일간지에 나온 한 국내 전자회사 소속 연구원들의 생활에 관한 것입니다. 다소 극적인 과장이 섞였다고는 해도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어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생각했던 과학자는 만능의 천재들이었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매체들이 미화하는 과학기술인의 모습은 각고의 자기희생적 노력을 바탕으로 경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사진2: 반도체 설계 자동화 분야의 대가 가운데 한 사람인 대니얼 가이스키(Daniel Gajski) 교수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논문 발표 때 진행자(Session chair)로 들어오셔서 제가 발표를 마친 뒤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습니다만, 돌아서자마자 제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ㅜㅜ). 여하간에 저도 나이 들더라도 저런 모습으로 연구 현장에 남고 싶습니다.
물론 저도 학위 과정에 시스템을 개발하거나 논문 작성을 위해 실험하면서 연구실에서 지새운 날이 많이 있습니다. 일이 잘 되어 즐거운 때도 있었고, 들인 노력에 비해 초라한 결과만을 손에 쥔 적도 있었습니다. 힘이 들기도 했지만 결국은 제가 성숙하는 데 도움이 된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하는 연구를 좋아하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오래도록 관련된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정상에 오르고 커다란 경제적 보상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저는 직업적으로 성공하고자 제 일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여건이 허락하는 한에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결과 제 분야를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뜻하지 않았던 우연들과, 위와 같은 고민 끝에 저는 가족과 떨어져 이탈리아에 박사후연구원으로 오는 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홀로 우리나라에서 출산을 앞두고 있는 아내, 편찮으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이곳에서 혼자 지내고 있는 처지가 참 죄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아직 이곳에 온 지도 오래지 않았고, 제 진로에 관해서도 확실하게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뜻한 바대로 이루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성실함만은 잃지 않고 제가 선택한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