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과 통제 -운명과 증명②
◐ 전편 '운명과 증명 ①'에서 이어집니다.
» 출처 / pixabay.com
제4화. 운명과 증명
②
“안정적인 과정이라면 예측하리라. 불안정한 과정이라면 통제하리라.”
-존 폰 노이만(헝가리 태생의 미국 수학자)
언니는 결코 단언하지 않았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이 아닌 단순한 가능성만으로도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했다. 내 추억이 깃든 타로 카페를 폭파하고, 재수생 시절 마음을 달래주었던 미 선생님을 죽이고, 잠깐 동안이나마 나혜 언니의 정신마저 산산이 조각냈던 범인이 어쩌면 이미 더 많은 희생자를 낸 뒤일지도 모른다는 가설에는 그만큼의 어두운 마력이 있었다. 연쇄살인범. 이 단어는 가볍게 입에 담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언니는 가능한 한 최소한의 확신, 그리고 최대한의 의심을 담으려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만약, 만약에 이게 연쇄살인이라면 모든 게 달라져. 범인의 의도와 정체도 전혀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봐야 할 거야…….”
“수사 방향도 달라져야 하겠죠. 만일 정말로 그 범인이 연쇄살인범이라면 경찰이 엉뚱한 데를 수사하는 동안 유유히 도망쳐버릴지도 몰라요.”
“그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언니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확실히 연쇄살인이라고 단정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면 이 역시도 범인에게 기회를 주는 셈이 될 터였다. 그렇기에 경찰에 제보하는 것도, 추리에 나서는 것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 범인의 정체를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되었고, 두 가설 중 어느 한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것조차 불안을 낳는 진퇴양난에 상황에서 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저기, 가설이 두 개고 사람도 둘이잖아요? 하나씩 맡아보는 건 어떨까요?”
-아주 단순한 발상이었다. 이 발상을 언니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박아 넣기 위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더 필요했지만.
“언니는 이게 연쇄살인이 아니라고 주장하세요. 저는 연쇄살인이라는 증거를 찾아볼 테니까. 우리 둘이 싸워서, 반박하지 못하는 사람이 지는 걸로 하죠.”
과학자 룸메이트는 잠시 생각하다가 한 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두 눈에는 또렷한 확신이 반짝이고 있어서 주눅이 들 정도였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필사적으로 싸우는 것이 곧 진실로 다가가는 길일 테니까.
먼저 논리를 세워 입을 연 쪽은 언니였다.
“연쇄살인은 일반 살인에 비해 훨씬 드물어. 증거를 가지고 확신할 수 없다면 연쇄살인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돼.”
모험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돌을 놓는 바둑 기사처럼, 언니의 첫 공격은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였다. 분명히 사실이었지만 대응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연쇄살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까 지금 이런 격론을 벌이게 된 거잖아?
“패턴이 있잖아요. 지난 1년이라는 기간 동안, 오늘 사건까지 포함해서 총 4명의 역술인이나 예언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납치 혹은 살해당했어요. 의심해볼 만 하지 않아요?”
“납치나 살해라는 단어는 너무 단정적인데. 정확히 말하자면 실종과 사망이야. 오늘 일을 제외한 다른 세 건에 의도적인 범행이 개입되었다는 증거는 없어”
내가 섣불리 열어버린 틈을 언니는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찔렀고, 그때서야 나는 언니가 찾은 기사들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볼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사건은 자신이 종말의 때를 안다면서 허황된 소리를 늘어놓던 교회 목사가 10개월 전에 실종되어서 가족들이 신고한 것. 명동에서 유명 사주팔자 노점을 하던 역술인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감춘 것이 그로부터 5개월 뒤였고, 다시 그 3개월 뒤 방송에 종종 나왔던 역술인이 화재로 사망, 그리고 오늘 일어난 폭탄테러까지. 이 중에서 범죄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오늘 사건뿐이었다.
“하지만 같은 직업의 사람들이 단기간에 이렇게 많이……,”
“충분히 우연일 수 있지. 기간을 더 길게 잡으면 지난 10년 동안 수십 명이 죽었다고도 할 수 있을 걸. 하지만 그게 10년 동안이나 연쇄살인범이 잡히지 않고 돌아다녔다는 뜻일까?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려면 명백한 패턴이 필요해.”
우연이 아님을 증명하는 패턴- 하지만 고작 네 개의 데이터로 어떤 의미 있는 패턴을 찾아낼 수 있을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서 내가 떠올린 것은 고작해야 이런 것들이었다.
“사건들 사이의 간격이 점점 짧아지고 있어요. 범인이 점점 범죄에 익숙해지거나, 아니면 충동을 참기 힘들어진다는 의미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우연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
“처음에는 납치였다가 방화와 폭탄 테러로 바뀐 것도 범인이 자기 수법을 다듬고 있다는 증거일 가능성이 있고요.”
“납치와 방화는 크게 다른 성향의 범죄고, 동기나 목적도 다를 수밖에 없어. 납치범이 갑자기 방화범으로 돌변한 거라면 그 설명은 너무 빈약해.”
“으으…….”
논쟁으로 진실을 알아내자는 내 제안이 슬슬 후회되기 시작했지만, 그런 생각이 표정으로 나타난 것을 눈치 챘는지 내 사려 깊은 룸메이트는 날카로운 말투를 잠시 거두고 조언을 해 주었다. 데이터를 더 모아보라고. 각 사건의 세부사항을 찾아보면 혹시라도 다른 증거가 눈에 보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과연 언니의 말은 옳았다. 세 번째 사건, 그러니까 유명 역술인이 화재에 목숨을 잃은 사건이 결정적이었다. 정·재계 인사들의 점을 쳐 주고 대선 결과까지 예측한다는 업계의 스타였던 덕에 언론의 관심도 역시 크게 쏠렸던 것이다. 기사도 많았고, 사진도 아주 많았다. 현장에서 증거품을 죽 모아놓은 사진 구석에는 작지만 잊을 수 없는 물건이 놓여 있었다.
“모래시계! 칼 그림도 그려져 있고, 오늘 범인이 놓고 간 거랑 똑같이 생겼어요!”
깜짝 놀라며 외치는 소리에 룸메이트 언니는 작은 미소로 응답했다.
“내 1패네.”
물론 내 작은 승리가 모든 수수께끼를 단칼에 잘라낼 수는 없었고, 논쟁 역시도 아직 끝낼 때가 아니었다. 방화와 폭탄 테러가 동일인의 짓이라 하더라도, 나머지 두 사건과의 연관성은? 범인의 동기는 무엇일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걸까? 왜 하필 예언자들을 노리는 것일까?
“네메시스가 복수의 여신이라고 했으니까, 역시 복수하려는 게 아닐까요?”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추리였다. 그만큼이나 반박할 곳도 많았고, 언니는 그 중 하나를 정확하게 노려서 물었다.
“미래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사람들이야. 그 모든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해.”
“개인적인 원한은 아니겠죠. 역술인 중 하나에게 피해를 입었고, 그래서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 전부에게로 분노가 번졌을지도 몰라요. 자신이나 가족이 사기를 당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믿었던 예언이 빗나가서 큰 손해를 봤다거나.”
“일리는 있지만 아직 설명할 수 없는 게 있잖아. 범인이 한 말 기억해?”
기억나지 않을 리가 없다. 폭발의 충격- 그리고 그 이상의 정신적 요동으로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하면서도 언니가 택배기사를 범인으로 지목했을 때, 나를 그 해답까지 이끌어준 것이 그가 남긴 마지막 한 마디였으니까.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태도로,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는 타로 카페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네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던 것이다. 정말로 그의 동기가 분노라면 그는 왜 즉시 원한을 폭발시키고 떠나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해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었다. 그 말을 입 밖으로 내기 전 범인은 뭘 하고 있었지? 분명히 점성술에 잠깐 흥미를 보였다가……,
“그래, 점성술! 뭔가 알아낸 것 같아요!”
점성술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르는 순간 머릿속을 혜성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추측을 잔뜩 뒤엎어야 하지만, 그렇게만 한다면 많은 의문을 해결해 줄 생각이.
언니는 의수를 까딱이며 조용히 내 설명을 기다렸다. 아직 내 머릿속은 새로운 아이디어로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일단 입을 여니까 이야기에 이야기가 꼬리를 물며 그럭저럭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 시작은 과학자와의 대화 주제로 삼기로는 다소 어색한 화제였다.
“그, 원래 천문학이라는 건 점성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잖아요?”
“별을 보고 운명을 점치려고 했던 사람들이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했고, 그게 천문학이 발전하는 주춧돌 중 하나가 되었으니까.”
“그래서 아직까지도 현대 천문학에는 점성술의 흔적이 남아 있죠. 별자리의 이름들, 각종 천체의 이름……. 수성은 전령의 신 머큐리, 목성은 하늘의 신 주피터, 같은 것들이요. 그리고 네메시스도 그리스 신화의 신 이름이죠.”
이 말에 나혜 언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네메시스라는 행성은 없어.”
예상한 반박이었다. 그렇기에 여기에 재반박할 말 역시 준비되어 있었다.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어요.”
네메시스 가설.
그 시작은 천문학자들이 아닌 고생물학자들이었다. 지구상의 생물종들을 쓸어버린 대멸종 사건이 지금까지 여러 번 있었는데, 지질학적 기록을 검토해본 결과 그 사건들이 특정한 주기를 가지고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약 2600만 년에 한 번씩 재앙이 지구를 덮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다음 재앙이 언제 일어날지도 역시 예측해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원인을 알아내지 않고서는 완벽한 예측은 불가능하다. 그 때 등장한 것이 천문학자들의 추측이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태양에게는 그림자 속에 숨은 사악한 쌍둥이 자매가 있다. 쌍둥이별로서 둘은 서로의 주위를 돌지만, 태양의 쌍둥이는 왜소하고 어두워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데다가 머나먼 궤도를 공전한다. 그 공전의 주기가 2600만 년이고,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자매를 위해 쌍둥이별은 우주 저편에서 선물을 잔뜩 가져온다. 얼음조각들이 모인 오르트 구름을 지나며 자신의 중력으로 혜성을 붙잡아, 태양계를 가로지르며 사방으로 뿌려대는 것이다. 그렇게 쏟아지는 혜성이 지구의 생명체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대재앙이 된다. 그리고 점성술의 시대로부터 이어진 오랜 관습에 따라 천문학자들은 이 가설 속의 자매에게 신화에서 따온 이름을 붙였다. 마땅한 운명을 분배하는 여신 ‘네메시스’, 그것이 이 죽음의 별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이 얘기를 과학 카페에 누가 올렸던 기억이 나요. 그땐 무서웠지만, 나중에 더 찾아보니까 멸종에 주기성이 있다는 가설 자체가 신빙성을 잃었더라고요. 적외선 관측으로 온 하늘을 샅샅이 뒤져도 태양의 쌍둥이별을 발견하지 못하기도 했고.”
“하지만 분명히 아직 믿는 사람이 있겠지. 점성술이나 타로카드를 믿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여울이 네 말은, 범인이 네메시스 가설을 믿고 있다는 거야?”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가정하고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나가 볼 수는 있었다. 우리가 찾고 있는 범인이 언젠가 종말이 올 거라 생각해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하고 싶을까? 그가 가장 원하는 게 뭘까?
“심판의 날이 정확히 언제일지를 알고 싶겠지. 미래를 알면 대비할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알 방법이 없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려고 점성술이며 각종 비과학적인 방법에 몰두해도 도저히 정확한 시기를 알아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전문가를 찾아야지.”
미래를 읽어내는 일의 전문가-역술인, 점쟁이, 종말론자, 자칭 초능력자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명확한 종말의 날을 알려주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미 선생님의 점은 언제나 애매한 말뿐이었다. 반박하고 싶어도 반박하기 힘든, 어떤 상황에서도 적절하게 맞아 들어가는 말들. 운명의 순간이 언제일지를 단언했다가 틀리는 위험을 감수하고 싶은 점쟁이가 어디에 있을까? 범인은 결코 그들에게서 답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저들은 미래를 알면서도 나에게 일부러 알려주지 않는다’라고.
“그래서 종말론을 설파하던 목사, 그리고 인기 좋은 점쟁이를 납치했겠죠. 예언을 듣기 위해서.”
“하지만 실제로 들은 건 예언이 아니었겠지. 납치 피해자들은 자기가 진짜 예언자가 아니라, 콜드 리딩과 같은 수법으로 사기를 치고 있을 뿐이라는 걸 고백했을 거야. 속았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아마도 피해자들을 살해했을 거고-”
빙글빙글 움직이던 언니의 의수가 딱 멈췄다.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듯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가, 이내 모든 긴장을 빠른 목소리에 실어 토해냈다.
“-종말의 날은 다가오고 가짜 예언가에게 낭비할 시간은 없어. 어떻게든 진짜를 찾아내서 정확한 날짜를 들어야만 해. 마음은 점점 급해지고, 그래, 진짜를 골라낼 방법이 필요해진 거야. 그 녀석은 복수를 하고 있는 게 아냐. 증명하고 있는 거지!”
‘증명’이라는 단어가 나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 나는 살짝 말을 잃었지만, 어차피 지금은 언니가 이야기할 때였다. 범인이 어떻게, 무엇을 증명하려 하고 있는지.
“진짜 예언자를 어떻게 골라낼 수 있을까?”
“예언이 맞는지를 확인하면 되죠.”
“하지만 핑계는 얼마든지 댈 수 있어. 컨디션이 나빴다, 그런 사소한 사건은 예지할 수 없다, 이런 것들. 그래서 범인은 가장 확실한 방법을 쓰려고 한 거야. 정말로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알게 될, 그리고 어떻게든 피하려 할 상황을 계획하는 식으로. 그러니까 죽이려고 불을 지르거나 폭탄을 설치한 게 아냐.”
“-재앙을 예지할 수 있는지 실험해보려고 한 거였군요.”
그래서 그는 폭탄을 배달하고도 한참 동안이나 카페에 앉아서 기다렸다. 예언자가 다가올 재앙을 예측해낼 순간만을 기다리면서.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점성술로 미래를 물어볼 “필요가 없다”는 말과 함께 떠나버린 것이다. 실험은 실패였다. 예언자로 유명했던 미 선생님은 결국 폭발을 피하지 못했으니까. 잿더미가 되어버린 현장에 남겨진 것은 오직 회피할 수 없는 재앙- 네메시스의 표식뿐.
“잠깐만요. 범인은 재앙의 정확한 날짜를 알아내는 데 집착하고 있고, 계속 실패하면서도 끊임없이 진짜 예언자를 찾으려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이걸로 끝이 아니겠지.”
조급한 마음은 범행 사이의 간격을 점점 줄여나갔다. 종말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그를 움직이고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진짜 예언자를 찾아내는 그 순간까지 범인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범인의 생각 중 하나는 옳다. 실험과 증명 없이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가설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가설이 실험 결과를 얼마나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와 나혜 언니가 며칠 동안이나 버스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단독주택 단지 앞 카페에 앉아 창밖을 노려보게 된 이유였다. 긍정적인 실험 결과를 얻지 못해 초조해진 범인은 조만간 다시 ‘예언자’ 중 하나를 덮쳐올 것이다. 그리고 이 카페 건너편 집에 사는 사람은 인터넷에서 유명한 자칭 재야 천문학자로, 별의 중력이 지구에 영향을 미치니 천문학으로 전쟁과 자연재해 등을 예측할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쳐 신문에도 두어 번 나온 인물이다. 검색을 조금만 해 봐도 집 주소가 나올 정도니 터무니없는 음모론 분야의 스타라고 해도 좋겠지.
“몇 번 신고를 넣었지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려면 우리 가설이 맞았다는 걸 보여줘야 해. 그리고 범인이 네메시스 가설을 믿고 있다면, 천문학으로 재난을 예지한다는 이 사람을 반드시 알고 있을 거야.”
“지금까지는 역술인을 주로 목표로 삼았지만 유명한 역술인은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요. 여러 번 헛발질을 했으니 시선을 돌려서 조금 더 천문학에 가까운 사람을 찾아본다면 분명 이 사람이겠죠.”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 이 질문에는 언니도 명확히 답을 내려줄 수 없었다. 단지 이렇게 말할 뿐. ‘실험할 때는 때때로 아무리 기다려도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게 실험을 잘못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시간이 더 필요할 뿐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실험을 처음부터 다시 설계해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밀어붙여야 할지 항상 고민했어. 실험이란 게 그래. 항상 뭔가 놓치고 있단 기분이 들지만, 이게 그냥 불안인지 근거가 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고.”
그런 불안과 불확실 속에서 기다린 지 일주일째. 24시간 내내 감시한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의 집에는 방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는 거의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그 누구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마침내 그 대문이 열린 것은 그 날 늦은 오후였지만, 재앙을 등에 진 사신의 방문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큼지막한 등산 가방을 짊어진 중년 남자가 집에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을 뿐.
“지금으로서는 우리도 실패한 것 같아요, 언니. 범인은커녕 아무도…….”
“당장 경찰에 신고해. 폭탄테러 용의자를 찾았다고.”
내 말을 자르며 언니가 갑작스럽게 말했다. 정말로 너무 갑작스러워서 하마터면 커피를 떨어뜨릴 뻔 했지만, 이어지는 언니의 차가운 한탄은 힘이 풀려가는 손에 다시 긴장을 불어넣고도 남았다. 의수로 집은 컵을 입으로 가져가 마른 입술을 축이며, 과학자 룸메이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역시 놓치고 있던 가능성이 있었어. 실험이 정말 항상 이렇다니까. 처음 세운 가설이 맞는 법이 없어.”
“무슨 얘기 하시는 거예요?”
“다음 피해자를 예측할 생각만 했지, 범인을 직접 찾을 생각을 못 했어. 네메시스 가설을 가장 신봉하고 재앙을 누구보다 예측하려 하는 사람은 가장 유력한 희생자일 수도 있지만, 가장 유력한 용의자일 수도 있는데도.”
그때서야 나도 상황을 파악했다. 집안에 며칠이나 틀어박혀 있던 종말론 신봉자가 갑자기 큰 가방을 짊어지고 어딘가로 향했는데, 차림새를 봐서는 여행을 가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면 가방 안에는 도대체 뭐가 든 것일까? 지금이야말로 그 안을 관측해서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내 손이 아니라 공권력의 손으로.
신고한 지 몇 분 만에 도착한 경찰들은 우리에게서 용의자의 인상착의를 들었고,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문제의 용의자가 잡혀 왔다. 가방에서는 폭발물과 휘발유 등이 발견되었고, 그의 집 지하실에 두 실종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는 뉴스가 뒤를 이어서 수수께끼를 완전히 해결했다. 멸망의 날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더라도, 적어도 더 작은 재난 하나만큼은 예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미래를 알려고 하다니, 존재한다는 증거조차 없는 별이 도대체 얼마나 무서웠던 걸까요.”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뉴스 보도를 들으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곁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응시하던 룸메이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하늘에서 재앙이 떨어지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니까. 그래서 점을 보고 예언을 듣는 거야. 무슨 수를 쓰더라도 미래는 통제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언니의 얼굴은 정말로, 굉장히 불안하게 보였다. 사건이 종결된 순간부터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 불안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자 호기심 뒤편으로 밀어두었던 폭발의 충격이 다시 정신의 수면 위로 떠오르고 만 것일까? 그 불안과 충격이 내게로 번져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언니 쪽으로 조금 더 가깝게 붙어 앉았고, 그런 내 어깨에 언니는 머리를 가볍게 기댔다. 차가운 의수가 내 무릎 위에 탁 놓였다.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어. 정말로 미래는 통제할 수 없는 거야.”
“저도 몰랐어요.”
“지난번 사건 얘기가 아니야. 더, 더 오래 전 얘기야.”
나혜 언니의 말은 거기서 끝났고 나도 더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폭발에 휘말렸을 때의 반응이, 그리고 무릎 위에서 떨리는 이 의수만이 희미하게나마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속삭이고 있었으니까. 아마 폭발과 관련된, 잘려나간 손과 관련된, 그리고 과학자 룸메이트가 지금은 과학자의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사실과 관계된 일이리라- 이 수수께끼의 룸메이트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을 억누르며, 언젠가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리라고 통제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대책 없는 낙관을 품으면서 나는 한참 동안이나 언니의 떨리는 몸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지금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제4화 끝>
박상민 광주과학기술원 대학원생(화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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