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과학의 윤리, 과학의 신뢰를 생각하며
과학의 윤리, 과학의 신뢰
(* 이 글은 10월7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의 컨퍼런스홀에서 열린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의 연구윤리 세션에서 발표한 원고입니다. 기존에 써온 여러 글들을 종합하고 새로운 생각을 더해 작성했습니다. 부족한 발표에 대해 여러 지적을 받았으며, 그 중에서 과학의 소통과 신뢰 문제에 관해 미디어의 책임도 크다는 지적을 깊게 받아들입니다. 미디어의 윤리, 미디어의 신뢰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과학의 연구윤리에 관한 관심은 우리나라에서 지난 2005년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 연구팀의 줄기세포 논문조작 사건을 계기로 해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높아져 왔습니다. 관심의 폭도 넓어져 직접적인 연구부정 행위 외에 올바른 논문 인용법, 연구실 문화, 이해 충돌의 문제,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옴부즈 제도 같은 다양한 주제들이 다뤄져 왔습니다. 연구윤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넓어진 데에는 대학과 연구기관 단위별로 만들어진 연구윤리위원회,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연구윤리정보센터 같은 연구자 집단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과학계 안과 밖에 비치는 연구윤리의 범위는 점차 일상적인 연구활동의 영역으로 넓어지는 흐름을 보이며, 또한 연구윤리의 문제가 큰 사건으로 비화하기 이전에 이것을 미리 예방하는 제도와 문화를 만들려는 여러 노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발표에서는 이처럼 연구윤리의 인식이 점차 확장하는 흐름에 맞추어, 과학 연구윤리가 과학자와 과학자사회에 대한 신뢰의 문제와도 가깝게 얽혀 있으며, 그래서 윤리의 문제도 이제는 신뢰의 문제로 바라볼 필요가 있음을 주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발표자인 제가 연구윤리의 주제를 학문으로 연구하는 전문가가 아니며 연구현장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언론사의 과학 담당 기자이기에, 이 발표는 한 명의 과학 취재기자가 바라보는 과학의 신뢰와 윤리에 대한 시선이며 연구윤리 전반의 깊은 쟁점을 다루는 것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과학 신뢰의 위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2010년 3월 8일 영국 정부 기업기술혁신부(BIS)의 지원을 받는 연구집단인 ‘과학과 신뢰 전문가 그룹(Science and Trust Expert Group)’이 『과학과 신뢰 전문가 집단 보고서』를 발표해 온라인에도 공개했습니다. 이 보고서의 주요 부분을 대략 훑어보면, 보고서는 과학기술이 사회적 신뢰를 쌓아나가는 데 무엇이 중요한 조건이 되는지, 과학과 사회의 긍정적 관계는 어떻게 발전해 나가야 할지, 정부 과학정책 결정과정에 과학자 집단은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 등에 관한 여러 고민과 나름의 대안을 담고 있습니다(아래에 보고서 ‘요약문’ 참조). ‘좋은 과학에 관한 전국 대화를 시작하며(Starting a National Conversation about Good Science)’라는 부제와 이 연구집단의 이름이 보여주듯이 ‘신뢰’ ‘대화’는 요즘 과학과 사회의 관계와 관련해 새로운 열쇳말이 되고 있습니다.
이 보고서가 아니더라도 ‘과학의 신뢰’에 대한 우려는 과학계 안에서도 종종 들려옵니다. 연구진실성이나 신뢰의 문제는 《네이처》, 《사이언스》 같은 대표적인 국제 과학저널들에서 드물지 않게 다루는 주제가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기초연구와 더불어 응용연구의 비중이 점차 더 늘어나고, 또한 과학기술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의 크기와 폭이 커짐에 따라, 과학기술을 둘러싼 이해관계 집단들도 다양화하면서, 과학 신뢰의 문제가 더 자주 거론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과학의 윤리와 신뢰에 관해 말씀을 드리면서, 먼저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한 몇몇 사례를 중심으로 과학 신뢰 문제의 특징을 짚어보겠습니다.
기후게이트(Climategate)와 과학 지식의 신뢰
유엔 기후변화정부간위원회(IPCC)의 코펜하겐 총회가 열리기 직전인 지난 2009년 11월 영국 이스트앵글리아대학교 기후연구소(CRU)에 있던 많은 전자우편과 문서 파일이 해킹을 당해 인터넷에 공개된 사건이 있었고 이후에 크나큰 사회적 파문이 이어졌습니다.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을 중심으로 ‘공개된 문서 자료를 볼 때 지구온난화가 인간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과장됐음이 드러났다’는 주장이 제기돼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히말라야 빙하가 빠른 속도로 녹고 있어 2035년이나 그 이전에 사라져버릴 수 있다고 경고한 IPCC 보고서가 과학 논문이 아닌 어떤 잡지 기사를 인용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은 더욱 커졌습니다. 기후게이트는 지구온난화가 인간의 온실기체 대량 방출 때문이냐, 지구의 자연스런 현상이냐를 둘러싼 논란뿐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보면 과학의 신뢰 문제를 다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이어서 기후게이트 논란이 한창 뜨거웠던 시점인 지난 5월 7일에 미국 과학자 250여명이 과학저널 《사이언스》 독자투고 면에 “기후변화와 과학연구 진실성”이라는 제목의 성명 편지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과학아카데미 소속 회원으로 중견급 연구자들인 이들은 성명 편지에서 “기후 과학자들한테 쏟아지는 정치적 비난”이 지나치다는 강한 우려를 표명하며, 그렇다고 해서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이 결코 외면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인간이 기후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유력하고도 포괄적이며 일관된 객관적 증가”는 여전히 존재하며 지구온난화의 “과학적 결론”은 변하지 않는다는 게 주장의 뼈대였습니다.
그런데 예상할 수 있는 기후과학자들의 이런 주장들보다 더 눈에 띈 점은 성명 편지의 앞부분에 길게 다루었던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기후과학자들은 “기후과학이 절대적 확실성을 지닌 연구결과”가 아님을 설명하고서 그렇더라도 연구자들은 현실 과학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을 이끌어내고자 한다며 온난화의 증거와 과학적 결론에 대한 신뢰를 과학계 안팎에 요청했습니다. 과학계 안팎의 독자를 설득하고자 쓴 글에서 기후과학에 대한 이런 자성 어린 성찰은 오히려 이어지는 주장에 더 큰 신뢰를 주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의 성명 편지가 왜 이런 구성을 선택했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사실 기후게이트가 일으킨 사회적 파문과 기후과학 회의론의 ‘크기’를 생각하면 그것은 특정 연구집단 자료의 해킹이라는 단일 사건만으로 다 설명될 수 없습니다. 크나큰 사회적 파문은 지구온난화에 대한 기존의 믿음이 맹목적이었기에 그에 대한 반작용도 더 컸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믿음이 단순화하며 크고 광범위했기에 믿음에 약간의 상처가 생겼는데도 반작용은 예상 밖으로 컸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구온난화에 대한 믿음은 기후과학자들의 연구 영역을 넘어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으로 퍼지면서 종종 그것은 신념이나 정치와 경제 이해관계들과 결합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지구온난화에 담긴 복잡한 기후역학의 방법론은 소홀히 다뤄지고 전지구적 기온 상승과 인간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의 직접적 영향이라는 이미지만이 강조되었습니다. 소수이지만 기후과학계 안의 다른 문제제기, 기후과학이 불확실성을 다루는 고유한 연구방법의 특성 같은 문제는 외면되었으며 연구결과의 의미와 한계는 작아지고 결론의 일부만이 단순화되어 확대되는 과정을 거듭했습니다. 물론 미디어의 역할에도 크나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기후게이트는 허약한 대중적 믿음만으로 확산한 과학 지식이 특정한 윤리 논란의 사건에 의해 이토록 쉽게 휘청거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미디어가 과학 지식을 단순화하고 그것을 확대 재생산한 데 대한 책임을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의 이해관계자들의 활동에도 문제는 없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기후과학 지식의 원천인 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기후게이트는 과학자들이 지구온난화와 관련한 지배 담론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기후과학의 현재적 결론이 지니는 의미와 한계를 모두 다 사회와 소통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느냐, 사건 하나의 충격으로 기후과학 지식 전체가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과학과 사회는 지속적인, 안정적인 신뢰의 관계를 유지해왔느냐 하는 여러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연구 부정행위와 과학자사회의 신뢰
과학자 개인의 연구부정 행위는 과학 활동에서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 연구 부정행위들은 과학계 바깥의 일반 시민이 흔히 믿는 것처럼 과학 지식이 과학 활동에서는 어느 연구자에 의해서건 언제나 믿을만한 결론으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을 각성시킵니다. 과학 활동이 인간 활동임을 보여줍니다. 게다가 간혹 경우에는 그것이 과학 지식과 과학자에 대한 신뢰를 크게 뒤흔드는 결과를 초래하곤 합니다.
우리 사회도 그런 경험을 충격적으로 겪었습니다. 황우석 박사 연구팀의 논문조작 사건은 우리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견고하게 이어져오던 과학자에 대한 신뢰, 과학 활동에 대한 신뢰를 크게 흔들어놓았습니다. 다시 돌아보면 이 사건은 앞에서 기후게이트와 관련해 말씀드린 것처럼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잠재력과 더불어 그 한계와 논란에 관해 우리 과학계가 충분하게 일상적으로 발언하지 못했고, 또한 우리 사회가 그 줄기세포 연구의 제한적 의미를 충분히 가려서 이해하지 못한 채, 완벽한 과학기술에 대한 맹신이 퍼져 있는 사회 분위기에서 터졌기에, 그 상처와 반작용도 그만큼 더 컸습니다.
그렇지만 이후에 우리 과학계와 사회는 성숙하며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우리는 국내외 소식을 통해서 여러 연구자들의 연구부정 사례들을 보아왔으며, 이제 현재진행형의 과학은 인간 과학자의 활동에 의해, 또한 신뢰를 지키려는 과학 활동에 의해 쌓이는 것임을 압니다. 그래서 현실의 눈으로 과학의 연구성과와 연구부정을 바라보는 눈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해외 매체들을 통해 실험 재현 불가능 확인과 논문 철회 발표 사례들을 자주 접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카이스트, 연세대, 서울대를 비롯해 여러 연구기관들에서 연구부정 행위들이 끊임없이 적발되고 있지만, 그 충격과 반향은 예전만큼 크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여전히 미흡하기는 하지만, 연구부정 행위에 대처하는 과학자사회의 자정 체계가 그동안 그나마 체계를 갖춰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과학자사회에 연구부정 행위를 자정하려는, 일탈을 관리하려는 의지와 노력에 대해 우리 사회가 신뢰를 느낀다면, 일개의 연구부정 행위가 실제의 파장 이상으로 크게 받아들여져 과학 전체의 신뢰 문제로 번지는 일은 줄어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지나간 몇몇 사례들에서 우리는 과학자사회가 먼저 나서서 제기된 의혹을 철저하게 규명하려는 능동적인 노력을 보여줄 때에 과학자사회에 대한 신뢰, 과학 활동에 대한 신뢰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음을 경험해왔습니다. 물론 여전히 연구부정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반대의 경우들이 더 많기에, 우리 과학자사회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겠지요.
그러므로 과학자사회 안에 정치, 경제, 사회 등 분야의 갖가지 이해관계들에서 벗어난 자율적인, 또한 의사결정이 합리적으로 이뤄지는 체계를 얼마나 잘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사회적 사건’으로 비화하기 이전에 먼저 이런 부조리를 미리 막으려는 세심한 체계를 얼마나 잘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서, 과학계의 연구부정 사례가 불필요하게 확대 해석되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달리 생각하면, 과학자사회의 자율적 자정 체계가 우리 사회에 여러 부정과 갈등을 해결하는 합리적 모델을 대안으로서 제시해주는 역할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봅니다.
과학기술 사회논쟁과 전문성의 신뢰
과학기술이 관련된 여러 사회적 논쟁들에서, 우리는 과학기술 분야 전문가들이 서로 다른 또는 같은 근거를 제시하며 상반된 주장을 펼치는 일을 자주 봅니다. 유전자변형(GM) 작물의 안전성 논란, 미국산 수입쇠고기의 광우병 안전성 논란 등은 최근의 대표적 사례들입니다. 이런 논쟁의 무대에서 전문가들은 전문가적 지식의 권위를 내세워 특정 과학기술의 위험성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데, 서로 맞서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일반 시민의 눈에는 ‘과학적 진실은 누가 말하건 같다’는 과학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을 흔드는 것으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또한 정부, 기업, 시민단체 같은 이해관계 집단과 연계되어 이런 주장들이 제기되기 때문에, 논쟁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전문가적 권위를 내세우지만 그 권위는 쉽게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자 집단이 특정 이해관계에 직접 얽혀 있는 모습을 보여줄 때에는 전문가 권위를 주장하지만 도리어 그런 전문가 권위는 더욱 더 추락하게 마련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과학기술 지식의 권위를 다른 영역의 문제로 지나치게 확장하거나, 현실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얽힌 다층적 성격의 논쟁을 과학기술의 논쟁으로 환원하고 축소해 자기 논증을 전개함으로써, 도리어 과학의 가치중립성에 대한 신뢰에 해를 끼치는 경우도 빚어집니다.
전문가 영역에서 논쟁이 벌어질 때에, 대체로 언론매체들은 비교적 중립 태도를 취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기계적 중립성’을 유지하는 것이 사회 갈등을 푸는 데에 어떤 구실을 할지 회의적일 뿐 아니라 사실상 이상적인 중립성이란 것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민감한 쟁점에 대해 언론매체가 충분한 자기 구실을 찾지 못하고 다하지 못하는 일도 잦습니다. 그러므로 제 경험으로 볼 때에는 전문가 지식 영역의 사회 갈등을 풀기 위해서는 여러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전문가사회 안에서 자율적이고, 공개적이며, 폭넓은 공론의 장이 능동적으로 마련될 필요는 더욱 커진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전문가와 시민의 쌍방향 소통도 당연히 필수적이며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와 별개로 전문가사회 안에서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자율적인 공론의 장이 마련되어, 전문가집단의 공개적이고 경쟁적인 검증을 충분히 거치고 사회적 쟁점에 대해 진지한 책임을 보여주는 일은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과학과 사회의 소통과 신뢰의 요소들
과학 신뢰의 위기에 대한 우려를 자아내는 몇 가지 예들을 보았습니다. 이미 앞에서 조금씩 얘기가 되었지만 과학과 사회의 쌍방향 관계에서 과학의 신뢰를 굳건하게 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요소들을 다시 정리해 생각해보았습니다.
과학자사회의 자정에 능동적인 과학자
실험의 설계, 데이터 산출과 분석, 논문의 작성들처럼 전문적 연구 방법과 과정과 관련한 연구윤리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에, 우리 사회는 대체로 과학자사회 내부의 자율적 판단과 결정을 존중합니다. 여기에서 과학자사회의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자정 노력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신뢰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신뢰의 잣대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05년 줄기세포 논문조작 사건 때 생물연구정보센터(BRIC) 게시판에 등장한 여러 익명 연구자들이 벌인 자정 노력은 이런 과학자들의 자정 실천이 과학자사회와 과학 전반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형성하는 새로운 기제가 되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2008년 김태국 카이스트 교수 연구팀의 논문조작 조사결과 발표 때에는, 대학 기관이 먼저 나서 자정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 사회적 파문이 확대될 수도 있는 과학 신뢰의 위기 문제를 과학자가 스스로 능동적으로 푸는 해법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연구부정에 대해 능동적인 자정 능력을 갖춘 과학자사회는, 즉 연구윤리의 문제에 경종을 울리며 자정을 실천하려는 과학자들이 있는 과학자사회는 우리 사회 안에 안정적인 과학 신뢰의 토대가 될 것입니다. 여러 과학 선진국들에서 연구윤리는 과학자사회의 중요한 전통으로 뿌리내려 왔듯이, 한국에서도 연구윤리는 이제 규범적인 의무가 아니라 일상적인 전통으로 뿌리내려야 할 것입니다.
공익을 생각하는 책임감 있는 과학자
현대 과학의 여러 연구 주제들은 우리 사회에 안전성 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신기술들은 인간 사회에 여러 혜택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와 더불어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자아내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신기술의 기대와 우려에 관한 사회적 논쟁은 자주 벌어집니다. 신기술을 어떻게 올바르게 사용하느냐, 부작용을 어떻게 회피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주요 쟁점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 사회적 논쟁들을 보면, 논쟁의 대상이 되는 연구 주제의 연구개발자는 으레 ‘과학기술의 신뢰성’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과학에 대한 신뢰는 그 과학 지식에 대한 가르침과 이해만으로는 충분히 형성될 수 없습니다. 유전자변형 작물 논쟁에서 나타났듯이, 그 쟁점들은 ‘실험실에서 정해진 프로토콜에 따라 확인할 수 있는 안전성 여부’만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위험도 다루게 되며, 다 공개되지 않은 또는 아직 생산되지 않은 정보의 문제도 다루게 됩니다. 게다가 다국적 종자기업과 농민의 관계, 소비자의 선택권 문제 같은 다층적인 논쟁들이 함께 뒤섞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과학의 신뢰는 과학적 사실의 확인 문제만으로 화원되지 않고 여러 연관된 쟁점들을 함께 다룸으로써 더 나은 상태로 향상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경우에, 과학에 대한 신뢰는 연구개발자 집단의 태도에 따라 좌우되기도 합니다. 시민사회에서 제기되는 안전성에 대한 우려를 시민의 처지에서 진지하게 접근하며 그런 우려를 줄이는 현실적인 대책들을 마련하고자 할 때에, 시민사회는 연구개발자의 그런 태도에 신뢰를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종종 특정 과학기술을 둘러싸고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제기되는 경우가 있으며, 그런 엄연한 현실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기대만으로 우려를 잠재우려 하기보다는 우려의 목소리와 소통하려는 자세는 필요할 것입니다. 연구개발자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과학기술의 현실적 한계를 인정하면서 책임 있는 태도로 사회와 소통하려는 노력을 보일 때에, 그런 연구개발자들이 속한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신뢰도 높아질 것입니다.
성과와 한계를 모두 다 소통하는 과학자
취재현장에서 여러 보도자료를 접하다보면 이름난 학술지에 실리는 논문의 발표 내용과 언론매체에 배포되는 자료의 내용이 사뭇 다른 경우가 종종 나타납니다. 앞엣것은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보는 연구보고서이며 뒤엣것은 그 분야를 잘 모르는 과학기자와 일반인들이 보는 보도자료입니다. 같은 것을 다루면서도 실제로 내용에서 큰 차이를 나타내는 경우가 생기는 이유는 대체로 이렇습니다. 과학 연구자에서 홍보 전문가를 거쳐 보도자료가 작성되면서 연구성과에는 여러 사회적, 경제적 의미가 덧붙여지기도 하고 지나치게 확장된 의미가 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논문을 쓴 연구자는 이런 ‘지나친 번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도 있으며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지고보면 별 의미 없는 “최초의 연구성과”라는 수식어는 언론매체에 제공되는 보도자료에 흔하게 나타나며, 미래의 잠재적 경제효과나 사회 편익 효과들도 부풀려 해석되기도 합니다. 독자의 호기심을 끌기 위해서 논문 한 편의 의미에다 무리하게 큰 비유를 적용해 사용되기도 합니다.
문제는 왜 전문가사회 안에서 쓰는 언어와 전문 지식이 부족한 일반 시민을 향해 말하는 언어가 다른가 하는 점이다. 세부 전문 분야의 언어는 다른 분야 전문가나 일반인이 관심을 갖기에는 너무 좁은 관심사를 다루거나 또는 이해하기에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세부 전문 분야의 연구성과를 널리 알리는 데에는 전문 분야의 언어와는 다른 일상의 언어가 사용됩니다. 당연히 두 언어 사이에 일종의 ‘번역’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그러나 간혹 ‘두 언어’의 차이는 내용과 의미 자체의 차이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취재현장에서 단순한 지식 확산을 넘어서서 기업의 마케팅을 방불하는 치밀한 홍보 전략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연구성과의 홍보는 필요하고 유익한 일이겠습니다만, 어떤 때에는 과학과 사회의 소통을 명목으로 내세면서도, 거기에는 향후 연구예산의 배정 문제나 연구개발 벤처기업의 펀딩과 주가 같은 직접적인 이해관계에서 생겨나는 무리한 홍보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연구성과의 홍보가 어떤 중요한 이해관계와 직접 연관되어 있을 때에는, 연구성과의 홍보전략에 따라 언론매체의 연구성과 평가는 적절히 이뤄지기 어려워지고 심지어 왜곡되기도 합니다.
과학자사회에서 통용되는 비교적 엄격한 동료심사나 절제된 언어사용, 방법론의 한계와 연구성과의 제한된 의미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시민사회에 전해질 때에는 전문가 언어를 순화하고 소통을 위해 적절한 언어로 풀어쓰는 ‘번역’의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연구성과의 의미 자체가 본질적으로 바뀌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문가사회에서 통용되는 의미와 대중사회에서 통용되는 의미가 다른 잣대로 이중적으로 쓰일 때에 과학기술에 대해 실제와 동떨어진 지나친 열광이나 지나친 냉소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뉴미디어 매체를 활용하는 아마추어 전문가들이 기존 매체 못잖게 영향력 있는 활동을 하는 요즘 시대에는 ‘책임 있는 소통’이 더욱 더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궁극적으로 자율적이고 책임감 있는 연구자들의 과학자사회가 한 사회에 전통으로 뿌리를 내릴 수 있을 때에, 과학에 대한 지나친 열광과 냉소는 줄어들고 과학과 사회의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신뢰는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과학의 신뢰는 잘 모르는 대중한테 과학 지식을 쉬운 말로 깨우쳐야만 생기는 게 아니라 실험실의 무대에서, 또한 과학과 사회의 무대에서 현실의 과학자들이 행하는 과학 활동들이 신뢰받을 때에야 생겨날 수 있으며, 그렇게 쌓인 신뢰야말로 가장 지속가능하며 안정적인 신뢰가 될 것입니다.
적극적인, 능동적인 윤리
좁은 의미로 바라볼 때에 연구윤리는 연구자가 해서는 안 되는, 피해야 하는 것들의 덕목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좁은 의미의 연구윤리는 연구자가 무엇을 조심해야 하며 무엇을 피해야 할지에 관해 강조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네거티브 방식의 윤리인데, 몇 년 전만 해도 연구윤리라는 말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체로 이와 비슷했다고 여겨집니다. 어찌 보면 연구윤리에 관한 인식이 깊어지고 넓어져온 그동안의 과정은 이런 좁은 의미의 연구윤리가 더 넓은 의미의 윤리로 확장해온 과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연구윤리가 실험실의 특정한 연구 부정행위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연구자의 문화와 일상에도 관련된 것이라는 인식이 확장하면서 실험실 문화의 재조명, 옴부즈제도의 시도 같은 일들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은 연구윤리가 이제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 게 좋은가’의 적극적, 능동적인 것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흐름의 밑바탕에는 결국에 과학자사회 안의 신뢰는 물론이고 과학과 사회의 신뢰를 높이려는 노력들이 있습니다.
신뢰의 문제는 ‘누가 누구를 믿음직하게 여기나’의 문제, 즉 누가 누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쌍방 주체들 간에 존재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뢰의 문제는 쌍방향 소통의 문제이며, 모두의 공익에 대해 느끼는 책임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해관계에서 벗어난 솔직함과 공평무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서 연구윤리는 책임, 신뢰, 소통의 문제와 직접 잇닿아 있으며 동일한 문제의 다른 측면들일 뿐이라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사회의 공익에 대해 책임감을 지니는 과학자는 신뢰를 받으며 진정성 있는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과학자들이 많아질 때에 과학자사회의 신뢰는 굳건해질 수 있습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이미 현대 과학이 더욱 더 세분화하여 어떤 경우에는 서로 이질적일 정도로 과학은 하나의 개념으로 정의하기가 더 어려워졌습니다. ‘과학’보다는 ‘과학들’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렇더라도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과학’이라는 말은 객관성과 신뢰를 대표하는 언어로 통해왔습니다. 신뢰의 측면에서 보자면, 일반인의 눈에 비친 과학은 이런 것일 수 있습니다. 즉 “과학이란 과학자들이 연구실과 사회에서 행하는 그것이다.” 과학이 인류와 사회에 책임 있는 활동으로 비치려면 과학자가 그렇게 행해야 하며, 과학의 신뢰를 높이려면 과학자들이 먼저 신뢰받는 전문직업인으로 행해야 합니다. 과학자사회가 자율적이고 독립적일 때에 그 과학자들이 다루는 과학은 당연히 그렇게 보일 것이며 신망을 받을 것입니다. 과학을 저 멀리 어딘가에 모셔져 있는 어떤 이상적인 존재로 관념화하기보다는 현실의 과학을 실천하는 사람들, 그 과학자들이 만들어나가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과학자들의 인간적 품성과 소통, 윤리, 신뢰에 이제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참고자료]
Science and Trust Expert Group Report: Starting a National Conversation about Good Science, UK Department for Business, Innovation and Skills (BIS), 8 Mar., 2010: 3-4.
(http://interactive.bis.gov.uk/scienceandsociety/site/trust/files/2010/03/BIS-R9201-URN10-699-WEB.pdf)
“본 연구그룹의 활동 기간 내내, 우리는 여러 과학 분과들에 대한 공공(대중)의 신뢰가 위기에 처해 있는지에 관해 일련의 증거와 견해들을 살펴왔다. 또한 우리는 과학과 사회의 드넓은 영역을 가로지르는 관계의 네트워크를 어떻게 구축해 발전시킬지, 그래서 과학적 증거의 내용과 그 응용(사용)을 튼튼하게 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는 과학(science)에 대한 “신뢰 위기”라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는 과학의 응용과 전문가 권고의 가치 문제와 관련해 대중이 식견 있는 견해를 지닐 수 있도록 어떻게 지원할지에 관심의 초점을 맞췄다.
우리 그룹의 첫번째 모임에서는 우리 그룹이 개별 과학들(sciences)에 대해 맹목적이고 아무 의문을 품지 않는 믿음을 갖도록 독려하고자 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느 정도의 건강한 회의주의(healthy scepticism)가 더 바람직하며 그것이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라고 본다는 데에 강력한 합의가 이뤄졌다.
[. . .]
우리는 위험, 불확실성, 그리고 지식 생산 과정에 관해 더 큰 규모의 토론이 있어야 한다고 요청하며 과학의 거버넌스와 관련한 여러 권고문과 실행계획을 제시한다. 사실, 많은 권고들은 정부의 과학 사용에 관한 것들이다. [. . .] 우리가 제안하는 실천계획이 완수된다면 다음과 같은 변화들이 나타날 것으로 우리는 기대한다.
- 대중은 과학의 위험, 불확실성, 그리고 과학, 지식 생산, 의사결정에 관여하는 절차에 관해 더 많은 정보를 제공받는다.
- 정부에 전달되는 과학적 권고의 시스템(system of scientific advice)을 강화한다.
- 정부 소속 과학자들의 네트워크는 정책 분야의 동료들이나 대중과 관계를 맺고 공개적으로 과학을 토론할 수 있다.
- 학문 분과를 넘어서는 관계를 강화하려는 지속적이고 점증적인 노력이 이뤄진다. 그리고 새로운 파트너들이 정책 결정 과정에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기꺼이 노력한다.
- 정부, 기업(비즈니스), 학계 등에서, 과학 활동의 윤리적 측면에 대한 인식을 높이려는 노력이 이뤄진다.
- 다음 세대의 과학자들을 육성하기 위해서, 그리고 기업와 산업의 과정들을 공개한다는 차원에서, 지역 공동체와 더 큰 공동체와 함께하려는 기업과 산업계의 점증적 노력이 이뤄진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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