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연구자들의 "청춘 스케치"

연구의 맛과 멋을 배우는 젊은 연구자들이 실험실에서, 연구실에서, 그리고 사회와 만남에서 얻는 에피소드와 경험, 그리고 생활의 단상을 전합니다.

느닷없는 산불·봄비에 일제히 싹틔우는 사막식물 생명력

김상규의 ‘사막 위의 식물학자’
[2] 사막에 들어가기

00desert13.jpg » 이름 모를 꽃으로 덮힌 야외 연구소 근처의 풍경. 2010년, 그곳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봄비가 두 번 정도 내렸다. 굉장히 드문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곳에 오래 있었던 동료도 보지 못했던 풍경을 보게 되었다. 행운이었다. 눈이 닿는 주변의 모든 곳이 다 핑크로 덮혀 있었는데 이름을 알지 못하는 한 식물의 꽃이 만들어내는 색깔이었다. 사진/Danny Kessler


연재의 주인공인 야생담배 ‘니코티아나 아테뉴아타 (Nicotiana attenuata, 이하 야생담배)’는 봄에 싹을 틔워 사막의 여름이 본격 시작되기 전에 수많은 씨앗을 남기고 사라진다. 미국 그레이트 베이신 사막에 있는 야외실험장에서 진행되는 연구도 그 기간에 맞추어 이루어지는데 독일에서 발아시킨 씨앗을 항공우편으로 보내면 그곳에 미리 도착한 선발대가 받아 정성스럽게 키우는 것으로 한 해의 필드 시즌(야외실험 시기)을 시작한다.


지난 2010년, 필드 시즌에 선발대로 자원해 처음 사막에 들어가게 되었다. 보통 선발대로는 3~4명 정도의 테크니션이 나가는데 연구소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해 특별히 할 일이 없던 터라, 나는 그렇게라도 그곳에 빨리 들어가고 싶었다. 2010년 3월 말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12시간 정도 비행기를 타고 미국 라스베이거스 공항에 도착했다. 야외 연구소와 더 가까운 공항이 따로 있지만, 경유하는 노선인 데다 직항보다 더 비싸 보통은 라스베이거스 공항을 이용한다. 직항이 더 싼 이유는 쉽게 짐작하겠지만 카지노 때문이다.

 

00desert1.jpg 영화에서만 보던 화려한 도시와 카지노를 본다는 생각에 살짝 들떠서 공항을 나왔지만 태양 아래 얼굴을 드러낸 라스베이거스는 조금 과장해서 국적 불명의 플라스틱 도시였다. 처음 라스베이거스에 왔다고 마중을 나온 분이 이곳저곳 차로 구경을 시켜주었는데 그 유명한 피라미드도, 스핑크스도, 자유의 여신상도 너무 가벼워 보였다. 어느 호텔 앞에 있는 화려한 분수쇼를 하는 곳은 거대한 목욕탕 같았다.

그렇게 도시를 빠져나와 거의 일직선으로 쭉 뻗은 고속도로를 달렸다. 이 도로는 세상에서 어쩌면 가장 인공적인 도시와 자연을 연구할 수 있는 곳을 연결해주고 있었고 카지노 덕분에 값싸고 편하게 식물의 생태를 연구하러 그곳에 갈 수 있었다.



산불과 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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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베이거스에서 15번 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두 시간 정도를 달리다가 갑자기 방향을 꺾어 비포장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달리면서 뒷쪽으로 만들어내는 먼지는 지나온 길을 순간적으로 사라지게 할 정도였지만 그곳을 달리는 차가 거의 없어서 시원하게 앞만 보면서 그곳을 달리고 있을 때였다. 얼마쯤 달렸을까 눈 앞의 풍경이 조금 이상해졌다.


길 한 쪽에만 자그마한 나무들이 빽빽히 자라고 있었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몇 년 전 이 지역에 큰 산불이 났는데 불길이 길 가까이 진행되다가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어 길을 건너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검게 탄 자국들이 멀리 산봉우리 근처에 듬성듬성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당시 산불이 났을 때 필드에서 일하고 있던 학생들의 증언을 따르면 멀리 보이는 연기가 갑자기 엄청난 속도로 다가와 귀중품만 겨우 챙겨 그곳을 탈출했다고 한다. 불길의 방향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때 필드에 있던 것들을 다 태웠을 뻔한 위험한 순간이었다.

00desert11.jpg » 야외 연구소로 가는 길. 몇 년 전 산불 때문에 도로 한 쪽에 있는 나무들이 소실됐다. 사진/김상규

건조한 미국 중서부에는 마른 번개로 인한 산불이 자주 일어난다. 산불이 났을 당시 필드에서 도망치면서 급하게 911에 신고를 했는데 정작 전화를 받았던 사람은 아무일 아니라는 듯이 처리를 하고 불이 다 꺼진 다음에야 소방서쪽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는 이야기는 이 지역에서 얼마나 자주 이런 산불이 일어나는지 잘 보여준다.


사람들에게는 골칫거리일지도 모르는 산불을 이용해서 살아가는 식물들이 있다. 우리가 연구하는 야생담배도 그 중의 하나인데 이 식물은 산불이 난 이후에 연기 속에 있는 어떤 물질을 인식해 이듬해 봄에 발아하는 식물이다. 주변에 경쟁하는 식물이 없을 때, 식물들이 타면서 남긴 영양분이 땅에 쌓여 있을 때, 발아해서 식물 성장에 최적인 환경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해가 지나고 다른 식물들의 씨앗이 날아와 그곳에서 자라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야생담배의 씨앗들은 발아하는 것을 멈추고 다음 산불을 기다린다. 그래서 세대 간의 차이가 수백 년 정도 될 때도 있다. 부모는 수백 년 후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산불을 기다리는 자식에게 그 기간을 버틸 수 있는 영양분을 씨앗에 담아주고 어떤 적(초식 곤충 등)을 만날지 모르는 그들에게 다양한 방어 물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유전 정보를 디엔에이(DNA)에 담아준다. 볼드윈 교수가 이 식물을 연구하기로 하고 막스플랑크재단에서 연구소를 만들어준 이유도 이런 발아로 인해서 가능했던 이 식물만의 특별한 생활사 때문이었다.



독일 통일과 막스플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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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국 자생종을 독일에서 돈을 들여가며 연구소까지 만들고 연구하게 되었을까? 연구소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늘궁금했던 점이었는데 지도교수(마중 나온 어떤 분이 지도교수였다)와 단 둘이 두 시간 넘게 차를 타고 달리면서 그 질문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연히도 그해 2010년은 독일 재통일 20주년이 되는 해였고, 그래서 그 무렵에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실린 글을 통해 막스플랑크재단과 통일, 그리고 화학생태학연구소의 관계를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막스플랑크 화학생태학연구소는 예나(Jena)라는 옛동독 지역에 1996년, 즉 독일 통일(1990년) 6년 뒤에 만들어졌다. 통일 이후 막스플랑크재단은 동독 과학의 재건을 위해서 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18개의 새로운 연구소를 동독 여러 지역에 설립했다. 이 과정 동안에 서쪽의 연구소는 긴축 재정으로 운영되었고 결국 4개의 연구소는 문을 닫게되었다.


재단에서 연구소를 세우는 기본 방침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연구자가 원하는 연구소를 세운다‘이다. 이 기본방침(Harnack principle이라고 불린다)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기본적으로 △어떤 분야로 새로운 연구소를 만들지 정해지면 △그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모임에서 △젊고 유능한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으로 연구소를 구성한다.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생물을 연구하기 위해서 새로운 연구소를 만드는 과정의 하나인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극 지방에서 살아가는, 또는 해저화산 근처에서 살아가는 생물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지만 식기세척기나 냉장고에서 살아가는 생물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2박3일 동안 진행된 세미나의 발표자들은 그 분야에서 오래 연구한 분들도 있었고 중간중간에 젋은 연구자들도 보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젊은 사람들 중 몇 명은 새로운 연구소의 교수(정확하게는 ‘디렉터’라 부르는 직책) 후보자들이었다. 후보자들을 평가하고 선택하는 사람들은 연구소가 세워진 이후에도 2년에 한 번씩 연구소를 평가하는 역할도 한다. 뛰어난 연구자들이 지원해서 그렇겠지만, 그들을 알아보고 뽑는 사람들이 더 신기할 때가 있다. 항상 뽑힌 사람들이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평균적으로 연구소가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이유는 그런 가능성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을 시스템화한 점이 아닐까 한다.


기존의 화학생태학은 여러 생물체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그리고 그들의 언어인 화학물질을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에 들어 있는 카페인과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매운 맛을 내는 캡사이신의 원래 기능(‘날 먹지 마세요’라는)을 알고자 하는 학문이다. 새롭게 만들어진 화학생태학연구소는 식물과 곤충의 대화를 해독하기 위해 전통적 방법에다 분자생물학과 새로운 분석화학 장비를 더하고 또한 더 오래된 고전 생태학을 접목한 지점에서 만들어졌다. 이렇게 한 줄로 요약하니 굉장히 재미없는 연구로 들리는데 이 연재가 끝날 때쯤 재미가 잔뜩 묻어난 요약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태학은 동네학문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자연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원래 우리 연구그룹도 두 식물을 연구하고 있었다. 하나는 지도교수가 독일에 오기 전 미국에 있을 때부터 연구한 야생담배와 독일에 와서 연구소 근처 강가에서 채집한 까마중(Solanum nigrum)이라는 식물이다. 하지만 내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식물을 연구하던 마지막 학생이 졸업하고 지금은 연구를 하지 않고 있는데, 필드에서 진행되는 여러 가지 실험에 대한 독일 정부의 까다로운 심사 때문에 필드에서 하는 연구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멀리 돌아 미국 사막에서만 필드 실험을 하고 있다.



봄비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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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desert12.jpg » 야외연구소에서 숙소로 쓰는 두 대의 캠핑 트레일러와 일인용 텐트. 2010년, 그렇게 비행기와 차를 타고서 긴 여행 끝에 도착한 곳은 생각보다 야생은 아니었다. 숙소와 짐을 보관하기 위해서 쓰는 트레일러도 있었고 인공위성을 이용한 인터넷도 있었고 날씨만 좋으면 부족하지 않게 전기를 만들어내는 태양전지도 있었고, 해먹도 그늘진 곳에 달려 있었다. 일인용 텐트와 언제 샀는지 모르는 오래된 침낭도 거기에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그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거의 20년 동안 하나하나씩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왔다. 보통 필드 실험을 하다가 한가해지면 페인트 칠을 하는 등 유지·보수를 계속해준다. 


그곳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봄비가 두 번 정도 내렸다. 굉장히 드문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곳에 오래 있었던 동료도 보지 못했던 풍경을 보게 되었다. 행운이었다. 눈이 닿는 주변의 모든 곳이 다 핑크로 덮혀 있었는데 이름을 알지 못하는 한 식물의 꽃이 만들어내는 색깔이었다 (맨위 사진). 단 하나의 꽃을 피우는 식물이었다.다 자란 식물의 크기가 10 센티미터도 되지 않은 조그마한 식물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메마른 사막의 기운을 견디면서 봄비를 기다려왔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얼마나 많은 씨앗이 그곳에 있었는지는 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야생담배가 산불을 기다리듯이 언제 올지 모르는 다음 봄비를 기다리면서 이 식물은 씨앗을 남기고 얼마 뒤 사라졌다.


이런 풍경을 보면서 ‘적절한 때(타이밍)’에 대한 이야기를 동료들과 하게 되었다. 자연에서는 때를 놓치지 않고 살아 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때 이 즐겁고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서 나온 아이디어들이 2010년 필드 실험이 끝나고나서 2년 동안 다듬어져서 2012년 그리고 2013년 필드 실험을 하는 데 뼈대가 되었다. 필드에서는 이런 예상하지 못했던 현상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이 가득하고 그런 이야기들을 앞으로 조금씩 해나가고 싶다.


이 글이 사이언스온의 청춘 스케치에 올라갈 때쯤이면 나는 사막에 있을 것 같다. 선발대로 가 있는 동료들로부터 얼마 전 그곳에 비가 내렸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 내린  2012년 9월 이후의 첫 비였다. 그래서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다른 식물들도 많이 볼 수 있고 다양한 곤충들도 많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식물들은 원래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지만 우리가 몰라서 새롭다고 말하는 식물의 다양한 생활사를 올해도 볼 수 있는 행운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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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규 독일 막스플랑크 화학생태학연구소 프로젝트그룹 리더, 식물분자생태학
하얀 실험복보다 밀집모자가 더 편하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 언젠가는 농사 짓는 분들한테서 그들의 식물 이야기를 듣고 그분들과 함께 연구하고 싶다.
이메일 : skim@ice.mpg.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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