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하는 마음, 실험하는 마음
조범식의 ‘후배에게 들려주고픈 실험실 이야기’
“이 글을 통해 학부생연구원으로 살았고 2016년 대학원 생활을 시작한 나의 경험을 후배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고, 그래서 후배 아닌 자연과학 학부생들이 이 글을 통해 실험실을 선택하거나 진로에 대해 고민할 때 도움을 얻을 수 있었으면 한다. 앞으로 실험실 대학원생들의 고충, 연애, 진로, 취미활동, 군 입대 등등 술자리에서 술 한 잔 마셔야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9] 경험과 생각이 만드는 차이
얼마 전 졸업을 앞둔 친구 선물을 사주기 위해 서점에 들렸다. 내가 “선물 포장 해 주세요”라고 하니 계산을 해주던 점원이 “포장은 옆 쪽에서 따로 하셔야 하는데 오천 원 정도 추가됩니다”라고 하였다. 속으로 ‘무슨 포장을 오천 원이나 주고 해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냥 주기에는 밋밋해 보여 포장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포장을 다 하고 나니 오천 원이라는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선물이 고급스럽게 변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포장할 수도 있었던 선물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무언가가 좀 달랐다. 점원께서 포장을 해주시는 동안 ‘어느 분께 어떤 용도로 선물하실 건가요?’ ‘혹시 적으실 글귀는 따로 없으신가요?’라고 물어보더니 포장지 질감, 색상 등을 선물 받는 사람에 맞추어 포장을 해주셨다. 그 덕에 포장이 다 된 선물을 보니 여기서 포장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어떻게 보면 내가 하는 포장이나 점원께서 해주시는 포장이나 포장을 하는 행위 자체는 같은데 왜 결과물은 다를까?’
사람 손길에서 달라지는 실험과 요리의 결과
실험실에서 같은 방법으로 실험해도 하는 사람마다 잘 되는 실험이 있고 잘 안 되는 실험이 있다. 왜 다른 사람이 하면 잘 되는 실험이 꼭 내 손에서 하면 잘 되지 않는지. 특히 처음 실험을 하면 소위 데이터가 널뛴다고 하는, 데이터에 일관성이 없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 왜 똑같이 하는데 다르게 나오는가?
흔히 실험이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그것을 음식 만드는 과정으로 비유해 설명하곤 한다. 어찌보면 두 과정이 너무 비슷하기 때문이다. 물론 실험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배경지식을 설명하기에는 상대방과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고 이야기가 길어지면 서로가 힘들어 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을 실험 대신 음식으로 바꿔 이야기해보자. ‘내가 한 음식은 맛이 없는데 왜 엄마가 해준 음식은 맛있는지.’ ‘내 음식은 왜 항상 맛이 다른지’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음식을 만들 때를 떠올려 보자. 음식을 만들기 전에는 어떤 음식을 만들지 결정하고 그에 필요한 식재료를 구입한다. 그리고 레시피에 적혀있는 대로 조리한다. 맛은 보장할 수 없다. 다 만들어진 음식은 최대한 예쁘게 플레이팅 한 다음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둔다. 내가 먹는 음식이면 상관 없지만 누군가를 위해 만드는 음식이라면 내놓기 전까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다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솟구칠 때도 있지만 만든 음식을 일단 내놓는다. 마지막으로 다 먹은 음식을 설거지 한다.
실험도 이런 과정과 비슷하다. 처음에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 증명할 수 있는지 실험을 미리 머릿속으로 생각한다. 그러고서 실험에 필요한 시약과 샘플을 준비하고 실험실에 있는 프로토콜 혹은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프로토콜 등을 모두 동원해 실험을 진행한다. 물론 결과는 보장할 수 없다.
그리고 현미경 앞으로 가서 사진을 찍어 데이터로 만들어 둔다. 나만 볼 데이터면 상관없는데 교수님께 보여드리려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실험을 다시 하고 싶지만 랩미팅이 내일이라 프레젠테이션 파일이라도 잘 만들어본다. 글자 크기와 글꼴도 바꿔보고 그림도 만들어둔다. 마지막으로 실험에 사용한 기구들을 잘 정리해 둔다. 음식을 자주 하고 자주 실패하다 보면 실력이 늘 듯이 실험도 하면 할수록 요령이 생겨 다행히도 같은 방법의 실험은 이내 익숙해진다.
요리/실험에 대해 얼마나 깊게 생각해봤지?
최근 학회에서 현재 외국 대학에서 교수로 계신 분을 만나, 실험과 음식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일류 요리사라고 하는 사람들의 요리와 내가 만들어 먹는 요리가 무엇이 다르길래 일류 요리사의 음식은 비싼 돈을 주고 사 먹고 내가 만든 요리는 그렇지 못하는 걸까?”
“그건 아마도 요리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생각해 봤느냐에 대한 차이이지 않을까?”
“일류 요리사도 처음 요리를 시작할 때에는 우리가 만든 것처럼 맛이 그냥 그랬겠지 근데 왜 지금은 다르냐는 거야 그것도 일류로 말이지.”
“그건 그 요리를 만드는 사람이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떻게 맛을 내야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 아닐까? 실험을 시작하는 학생으로서 대학원생도 너희가 하는 실험을 무작정 선배가 했던 방식 그대로, 아니면 인터넷에 나와 있는 그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여기서, 이런 프로토콜을 사용하고 있는지 생각하면서 실험을 해야 정말 실험을 잘 할 수 있어”.
아차, 하는 부분이었다. 실험 프로토콜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실험에 중요하다는 점은, 대학원에 들어와 수업을 들으면서 정말 많이 들었지만 ‘실험을 성공적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에만 매달리다보면 금세 잊어버리곤 하였다. 내가 사용하는 여러 가지 시약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고 실험을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점이, 실험 결과를 이야기할 때 매우 중요하다는 말을 한 학기 내내 수업 시간에 교수님한테 들었는데도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학부 시절에는 이런 이야기를 교수님들이 수업 시간에 해주지 않았다.
여기에서 학부생과 대학원생의 차이가 생기는 것 같다. 학부생 시절부터 인턴도 많이 해보고 실험도 다른 학부생보다는 더 많이 해보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단지 실험을 많이 해본 것일 뿐이고 실험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한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 요리를 해보듯이 그저 요리를 몇 번 만들어보는 경험을 해봤을 뿐이고, 대학원에 와서야 내가 어떻게 요리를 해야 할지에 대해 조금 더 깊고 섬세하게 배워나가는 과정을 경험하는 것 같다.
» "같은 재료, 다른 기술". 출처/ jtbc
생각의 깊이를 넓혀가는 과정
실험에 대한 생각도 그렇지만, 대학원 과정에서는 참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 현재 석•박 통합 3년차에 접어든 학부 동기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박사 학위를 받고 난 뒤 직업을 구할 때까지 잠시 대학원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이 대학원 생활 동안에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 왔는지,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생활의 치열함에서 피어난 생각도 있지만 학문의 길에서 피어난 생각들도 많이 있었다.
‘생각의 과정’. 이런 긴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박사 학위를 받을 때 ‘필로소피 닥터(Philosophy Doctor(Ph.D)’라는 이름이 따라오게 된다고 들었다. 내가 아직 경험해 본 것은 아니지만 박사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교수님들이 심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실험 연구에 대해서 ‘디펜스’를 하게 되는데, 이때 교수님들이 단순히 실험에 대해서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내가 전공하는 생명과학의 경우에 “생명과학을 왜 전공하게 되었는지? 자신에게 생명과학이란 어떤 의미인지?” 등과 같이 하나의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열린 질문들도 던진다고 한다. 이를 통해 이 사람이 대학원 생활 동안에 얼마나 생각의 과정을 겪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고 들었다. 어느 교수님은 자신이 박사로서 다른 사람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기에, 자신이 심사하는 박사 학위 수여자는 다른 이들보다 더 깊이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이런 부분에 더 신중한 관심을 둔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작더라도 진정한 기쁨이 내게 있다면
대학원 한 학기가 지나갔다. 한 학기 동안이지만 대학원을 다니면서 우리 학교가 아닌 다른 학교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고 그들의 고충도 들을 수 있었다. 나보다 먼저 대학원에 입학했던 학부 시절 동기는 이번에 정부에서 주는 국가장학금을 받게 되었다면서 기뻐했고, 또 다른 학부 시절 동기는 대학원 생활이 자신과 잘 맞지 않는지 다른 길을 가겠다며 대학원의 꿈을 접었다. 그동안엔 잘 몰랐는데 교수님은 교수님에게 주어지는 의무와 책임 때문인지 가끔씩 지쳐 보일 때도 있었다. 회사에 취직한 친구는 오랜만의 전화에서 ‘취직하고보니 이제는 퇴사를 생각하게 되더라’며 자신의 고충을 이야기하였다.
» '나의 대학원 생활 첫 해.' 대학원에 진학하여 정말 대학원생다운 대학원 생활을 했던 2016년 한 학기의 경험만으로, 대학원 생활에 관해 다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학부생 시절에 바라보았던 대학원과 대학원생의 눈으로 바라보는 대학원 사이에는 공통된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멀리 바라보게 되었다’라고 표현하기엔 아직 내 수준이 낮고 지금으로선 이 분야를 더 깊게 바라보는 눈을 가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학부생 중에 나처럼 실험실 경험이 즐거워 대학원에 진학하고자 하는 친구 혹은 후배가 있다면, 나는 그 친구가 앞으로 계속 공부하려는 흥미를 갖고 있다면 대학원 진학을 추천해주고 싶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 주변 친구들의 안정적인 회사 생활이 많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는 연구가 아주 잠시일지라도 그 모든 부러움을 보상할 만큼 내게 알 수 없는 보람과 기쁨을 줄 때가 있는데 이건 대학원에 진학해야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진학한 뒤에 이런 경험을 한 번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회사 생활에선 도무지 알기 어려운 무언가를 반드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부모님께서 언젠가 한 번은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 네가 하는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셨듯이, 당신들의 고단한 삶 속에서도 힘든 내색을 한번 안 하셨다. 지금의 대학원 생활에서, 그리고 어떤 일을 하고 있건 지금 이 자리에 내게 진정한 기쁨을 주는 작은 무언가가 있다면 지금의 생활을 계속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아직 대학원에 갓 입학한 새내기이지만, 앞으로도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대학원 생활이 되기를 기대한다.◑
조범식 한양대 대학원생(시스템신경생물학 연구실)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사이언스온의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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