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폭력
[17] 데이트 폭력에 관한 심리학
» 연인 간의 폭력, 데이트 폭력. 출처/ 한겨레 자료그림
“내게 연애란, 세계를 줄이고 줄여서 단 한 사람에게 집어넣은 뒤, 다시 그것을 우주에 이르기까지, 신에게 이르기까지 확장시키는 경이로운 과정이었다. 그런 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좋다면, 나의 사랑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고유명사였다.”[1]
모든 관념의 의미를 언어로 다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사랑의 마음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 말은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상대방이 내 모든 것이라 말하고픈 마음을 박범신 작가는 소설 <은교>에서 이렇게 표현해놓았다. 사랑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깊은 생각이 필요치 않게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누군가와 긴밀한 애정으로 맺어지는 것을 ‘애착 관계(attachment relation)가 형성되었다’고 한다.[2] 애착이 생긴 대상은 본인만큼이나 소중하기에 상대의 고통에 더없이 민감해진다. 애착이 형성되면 상대방에 대한 관심을 넘어 종종 집착까지 하게 마련이고, 결코 원치 않았던 갈등과 괴로움이 생기기도 한다.
사랑의 두 얼굴
사랑에 빠지는 순간부터 우리의 두뇌에서 비판과 논리의 기능을 담당하는 부위의 활동은 둔해진다.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문제는 상대방에 대한 생각 자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향한 자신의 행동에도 결코 비판적이지 못하다는 것에 있다.
연애가 좋은 이유는 비난 당하지 않고 서로 욕구를 마음껏 표출할 수 있고 또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듯이,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특별한 권한은 특별한 의무가 따른다.
애착의 관계를 맺는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향상시키고 상대와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늘 행복할 순 없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은 실상 오해와 집착으로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나날이 훨씬 많지 않은가. 상대방을 향해 표출되는 감정은 분노나 화가 더 많다는 이야기가 된다.
'애증'이라는 단어처럼 사랑하는 감정과 미워하는 감정은 가깝다. <법구경>에서는 이런 애증의 고통에 대해 사랑으로부터 고통과 근심이 생기니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사람도 만들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평생 구도자의 길을 걷지 않는 이상 사랑의 괴로움을 피하기 힘들다. 피할 수 없다면 대비하는 수밖에 없다.
폭력이란 무엇일까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존엄하듯이 ‘연인 관계’에도 역시 서로 평등한 관계라는 뜻이 담겼다. 물론 절대적인 평등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지만, 상대방보다 내가 더 우선이라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서로 간 존중의 균형이 깨지고, 평등한 관계는 성립될 수 없다.
폭력의 사전적 정의는 ‘타인을 거칠고 사납게 제압할 때에 쓰는 물리적 수단이나 힘’이다. 하지만 이는 좁은 의미의 폭력일 뿐이다. 적어도 민주사회에서 자유를 가진 존엄한 인간에게 폭력을 규정하는 범위는 넓어야 한다. 그리고 민감해야 한다.
폭력의 씨앗은 상대방의 자유와 신뢰를 부정하고, 나에게 상대에 대한 통제의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미국 뉴햄프셔대학교 스트라우스(Murray A. Straus) 박사는 연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3] 심리적 폭력(psychological violence)은 상대방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언어적인 폭력을 포함하고, 신체적 폭력(physical violence)은 상대방을 해치겠다고 위협 혹은 협박하거나 힘이나 도구를 이용하여 신체적 손상을 입히는 것을 말한다. 또한 성적 폭력(sexual violence)은 상대방이 원하지 않음에도 일방적으로 성적 행위를 강요하는 것을 말한다.
대검찰청에서 발간하는 <범죄분석>에 따르면, 2014년 연인을 대상으로 저질러진 범죄의 경우가 전체 살인범죄의 12.6%, 상해는 2.9%, 폭행은 4%, 성폭행은 3%를 차지할 정도로 연인을 대상으로 저질러지는 폭력 범죄가 심각한 상황인 것으로 나타났다. 공식 범죄 통계에 드러난 사건 이외에도 친밀한 연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연인 관계라는 특성상 신고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므로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피해 사례가 있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4]
신체적 폭력에 중점을 두고 연구한 국내 연구들을 살펴보면, 적게는 20% 안팎에서 많게는 50% 가까이 연인과 갈등 관계에 직면했을 때 신체적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5] 최근 국내 연구들은 평균 40%가 연인에게 신체적 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드러나 연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우연한 결과로 치부할 수 없음을 밝힌다. 폭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폭력 피해의 발생률은 달라질 수 있다. 경미한 심리적 폭력까지 모두 포함한 연구를 살펴보면, 피해 발생률은 90% 이상에 달한다. 연애를 하면서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어떠한 형태든 폭력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 연인 간의 사랑과 전쟁을 다룬 미국 영화 <장미의 전쟁>(1989). 출처/ 영화 '장미의 전쟁'
데이트 폭력은 왜 일어나나
연인 간의 데이트 폭력은 어떨까? 이런 폭력은 그동안 일반적인 가해 행동의 연장에서 비롯했다는 연구가 지속되어 왔다. 예컨대 대표적으로 부모 폭력의 목격이나 아동 학대의 경험에서 비롯하며, 학교 폭력의 경험이나 음주, 흡연, 도박 문제와 같은 중독 성향 등이 이런 데이트 폭력의 가해 행동에 유의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고되어 왔다.[6]
최근 들어서는 여기에 더해서, 폭력에 대한 인식이나 편견이 데이트 폭력의 원인 또는 배경을 설명하는 주요한 변인으로 다루어지고 있다.[7] 폭력에 대한 낮은 인식이 폭력 관계를 정착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나타났으며, 폭력에 대한 왜곡된 믿음이 데이트 폭력의 가해 행동을 유발하는 데에 주요한 예측 변인이 될 수 있다고 보고되기도 했다.
연인 간의 폭력에 대한 태도 차이를 조사한 연구결과를 보면, 아무리 사소한 폭력이라도 허용되어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조건을 달아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맞을 만한 사람은 있다’라든가, ‘바람을 피우면 맞아야 한다’ 또는 ‘때려야 할 정도로 화가 날 때도 있다’, ‘상대를 폭행할 정도로 사랑이 깊어질 수도 있다’와 같이 폭력이 마치 상대의 잘못 때문이거나 사랑 때문이라는 정당화의 대답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8]
과거에 경험하거나 목격했던 폭력은 폭력에 대한 허용 정도를 넓히는 아이러니를 지녔다. 가정 폭력의 과거 경험은 폭력에 허용적인 태도를 지니게 하고 그 결과 데이트 폭력의 가해 행동을 증가시킨다는 연구도 있다.[9] 이뿐만 아니라, 폭력 가해 경험이 있는 사람과 가해 경험이 없는 사람의 특성을 비교한 연구를 보면, 가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자존감이 낮고 불안 애착 및 성격 장애 성향이 아주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폭력 가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신체적 폭력에 대한 태도가 ‘허용적’이며 폭력에 대해 긍정적이고 정당화 경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연인 간의 폭력은 단발적인 사건이나 순간의 실수가 아니다. 폭력의 씨앗은 깊고 넓게 퍼져 있기에 방치하면 독버섯처럼 다시 자란다. 폭력 사건의 높은 재범률이 그 표면적 증거가 된다.
연인 사이에서 갈등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개인 간의 생각과 기대는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대가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대의 정신이 건강함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각자에게 독립된 자아가 있다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그런 관계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관계의 발전은 닮음의 기쁨보다 다름을 인정하는 성숙함이 원동력이 아닐까.
» 연인 간의 사랑과 전쟁을 다룬 한국 영화 <싸움>(2007). 출처/ 영화 '싸움'
사랑과 폭력은 가깝다
폭력은 인간의 본성일까? 심리학자 맥클리란드(D. McClelland)는 인간의 동기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인간의 공격 행위 자체를 본능의 한 행태로 보기보다는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본능의 다양한 발현 양상의 하나로 파악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설명한다. 공격 행위의 측면을 포함한 다양한 모습들이 있지만 이를 모두 폭력이라고 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의도가 있는지를 공격 행위의 판단에서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미국 조지타운대학교의 보웬(Murray Bowen) 박사는 사람이 정서적 자주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자아분화(self-differentiation)라는 개념을 설명한다.[10] 관계적 수준의 자아분화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율성과 친밀성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누군가도 사랑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겼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진짜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상대방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어쩌면 나약하고 두려움이 가득한 자신의 내면에서 출발할지도 모른다. 신경정신과 전문의 양창순 박사는 상대방에게 거부 당하거나 버려지는 것이 두려워 오히려 연인을 난폭하게 지배하려고 하는 행위는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11]
그중에 가장 흔한 경우가 사랑을 시험해보려는 심리의 발동이다. 상대방을 향해 사랑을 시험하려 드는 이유는 불안과 두려움이 가장 크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 싶은 열망이 클수록 불안과 두려움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의존성도 원인이 된다. ‘희생자 모드’로 모든 것을 의존하려 하거나 정반대로 상대를 시시때때로 괴롭히는 사람이 의존성이 강한 사람이다. 평생 내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나를 떠나지 않을 사람을 찾으려는 심리인데, 이는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상대를 소유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종하고 싶은 욕구를 충족시키려 하는 ‘조종 욕구’도 원인이 된다. 타인에 대한 분노와 피해 의식이 있을수록 상대방을 자기 뜻대로 움직여보고 싶은 욕구에 더 쉽게 굴복한다. 결국에는 불안과 두려움, 의존 욕구, 조종 욕구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사랑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은 물론 상대방까지 처참하게 파괴한다.
사랑을 갈구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본능이나 욕구는 나쁜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을 표현하고 얻는 과정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느냐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사랑일 수도 있고 폭력일 수도 있는 것은 스스로 어떻게 지켜내느냐에 달렸다. 나 자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자신의 사랑도 지켜낼 수 있다.
폭력에 대한, 관계에 대한, 그리고 평등에 대한 관심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더욱 상서롭게 변할 것이다. 일상의 폭력이 드러나고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일상이 재난인 것 같지만, 이는 문제를 부각했을 때 드러나는 명현현상이고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 믿는다.
드러내기 힘든 문제일수록 수면위에서 더욱 많은 논의와 관심이 필요하다. 폭력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폭력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폭력을 허락하지 않았고 절대 허락하지도 않을 것이다. ◑
[주]
[1] 박범신 (2010). 은교. 문학동네.
[2] Bowlby, J. (1980). Attachment and loss (Vol. 3). Basic books.
[3] Straus, M. A., Hamby, S. L., Boney-McCoy, S., & Sugarman, D. B. (1996). The revised conflict tactics scales (CTS2) development and preliminary psychometric data. Journal of family issues, 17(3), 283-316.
[4] http://www.spo.go.kr/spo/info/stats/stats02.jsp
[5] 강효진, 박기환 (2013). 데이트 폭력피해의 위험요인 및 관계지속요인. 한국범죄심리연구, 9, 27-54.
[6] 최지현 (2005). 아동기 가정폭력경험이 대학생의 데이트 폭력에 미치는 영향: 사회적 문제해결능력의 조절효과를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7] 정소영, 임채영, 이명신 (2011). 대학생의 데이트폭력 편견이 데이트폭력 가해행동에 미치는 영향. 사회과학연구, 27(4), 127-151.
[8] 홍영호 (2015). 데이트 폭력에 대한 효과적인 예방 및 대응방안. 한국형사정책연구원. 12(9).
[9] 김동기 (2009). 가정폭력 경험이 대학생의 데이트폭력 가해 행동에 미치는 영향: 폭력허용도의 매개효과를 중심으로. 청소년학연구, 16(6), 135-159.
[10] Bowen, M. (1993). Family therapy in clinical practice. Jason Aronson.
[11] 양창순 (2014). 나는 외롭다고 아무나 만나지 않는다. 센추리원.
이고은 부산대 인지심리학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사이언스온의 길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