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재연되지 않는 단 한번 ‘우리 우주’의 진화

  
 
이 글은 고등과학원이 내는 간행물인 <과학의 지평>(41호, 2009년 8월)에 실렸던 박창범 교수의 글입니다. 사이언스 온은 현대우주론의 지식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자 우주론 전문가가 쓴 이 글을 고등과학원과 저자의 허락을 받아 웹진에 두 차례로 나누어 옮겨 싣습니다. 사이언스 온은 앞으로도 전문가들의 좋은 글들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글의 게재를 허락해주신 고등과학원과 저자한테 감사드립니다. -사이언스 온 편집자
 
     

과학적 우주상 (1)

박창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교수
     

인류는 20세기에 우주의 실상과 변화 원리에 대한 이해에서 비약적인 성과를 이루었다. 약 한 세기 전, 우리의 인식 수준은 이제 겨우 태양계를 벗어나 그 너머에 별들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 정도에 머물고 있었다. 또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의 힘도 고전적 중력과 전자기력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선 문턱에서 중력을 이해하는 새로운 이론이 발견되었고, 또한 극미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미지의 현상들이 알려지면서, 강력과 약력이라는 새로운 힘들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물리법칙에 대한 포괄적 지식을 얻어가는 한편으로 인류는 20세기 초엽부터 전 우주를 향하여 대담한 탐사를 시작하였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세계의 여러 천문대에서 천체망원경들은 우주 전체를 샅샅이 들여다보고 있다.

 

과학자들의 지식은 극미한 소립자 세계에서 수백억 광년에 이르는 전 우주 공간까지, 또 우주탄생의 찰나에서 무한 미래의 우주 종말까지 확장되었다. 비록 현대 과학이 대자연에 대한 전지(全知)를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그리고 결코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인류가 이끌어낸 우주에 대한 총체적 상은 경이로운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이 글은 현재까지 과학자들이 도달한 현대 천문학의 핵심적 내용을 간추려 담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우주상이 인간의 세계관에 던지는 뜻 깊은 시사점을 찾고자 한다.

 

 

다우주(多宇宙), 그리고 우리 우주  

인간에게 우주란 질서를 갖추어 조화를 이루고 있는(cosmos), 존재하는 모든 것(universe)이다. 우주는 물리적으로 시공간, 물질, 그리고 자연현상으로 구성된다. 우주론이란 우주의 실상을 파악하고, 우주의 기원과 진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우주론 학자들은 우주의 물리적 성질을 규정한 명세 내역과 우주가 태어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일들을 수록한 한편의 각본을 작성하는 사람들이다.

 

우주론 학자들이 천문학적 관측과 물리이론을 총동원하여 현재까지 알아낸,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우주’의 실상을 파악해 보자. 먼저 우주 공간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많은 관측적·실험적 사실로부터 검증된 현재의 표준 우주모형에 따르면 우주공간은 삼차원으로 무한하다. 이 무한한 우주공간은 특정한 중심이나 끝이 없고, 거시적인 규모로 보았을 때 모든 곳에서의 기하학적 성질이 똑같다. 즉 넓게 보았을 때 우주의 모든 곳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성립하는 평탄한 공간이며, 물질의 양과 종류가 균일하다. 또 우주공간은 모든 곳에서 똑같은 비율로, 모든 방향으로 늘어나고 있다. 우주공간이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은 1929년에 외부은하의 후퇴속도로부터 처음 알려졌는데, 1990년대 말에는 공간이 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다는 새로운 사실이 알려졌다.

 

표준모형에 따르면 우주는 지금으로부터 수십억 년 전까지는 공간이 늘어가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는 감속적인 팽창을 해 왔으나, 현재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가속 팽창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균일·등방한 무한공간과 이러한 공간의 균일 가속팽창은 지난 세기에 이룬 위대한 천문학적 발견이었다.

 

둘째로 우주의 시간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 우주’는 지금으로부터 137억 년 전에 자연 발생하였다. 우주의 수명은 무한대이어서 앞으로 영원히 존재할 예정이다. 즉 우주는 137억년의 유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를 두고 있다.

 

현재 ‘우리 우주’를 채우고 있는 물질은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첫째로 우주에는 아직 그 물리적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암흑에너지가 고르게 퍼져 있는데 우주질량의 약 75%를 차지하고 있다. 암흑에너지는 강한 음의 압력을 내는 물질로서 그로부터 발생되는 중력은 인력이 아닌 척력이다. 우주공간은 암흑에너지가 내는 척력 때문에 현재 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우주공간이 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암흑에너지의 존재가 인정되었다).

 

우주에는 차가운 암흑물질이라는,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물질이 있다. 차가운 암흑물질의 대부분은 양성자나 중성자와 같은 보통의 물질(바리온이라고 부른다)과는 다른 물질이지만 그로부터 발생되는 중력은 인력이다. 이것은 우주물질의 약 21%를 차지한다. 은하 속을 돌고 있는 별들과 은하단 속을 돌고 있는 은하들은, 은하나 은하단의 빛을 내는 물질이 붙들고 있을 수 있는 속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이 천체들에는 많은 암흑물질이 뭉쳐 있다고 믿어지고 있다. 암흑물질은 우주공간에 널리 퍼져 있기도 하다.

 

우리에게 친숙한 행성과 별들은 양성자와 중성자가 결합한 원자, 즉 보통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주물질의 약 4%는 이 바리온 물질이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주질량의 대부분은 암흑에너지, 차가운 암흑물질, 바리온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외에도 우주에는 빛, 중성미자, 전자와 같은 경입자, 자기장 등이 퍼져 있는데, 우주질량의 극히 일부에 해당된다.

 

‘우리 우주’에서 물리학자들이 현재까지 발견한 자연현상을 지배하는 힘에는 네 가지가 있다. 물질의 에너지 때문에 발생되는 중력, 전하와 자기장 때문에 발생되는 전자기력, 핵자 사이에 발휘되는 강력, 그리고 방사능 붕괴에 관여하는 약력 등이 알려져 있다. 이 네 가지 힘들은 과학자들이 우주의 진화와 천체의 생성, 나아가 생명의 기원을 이해하는 기본 토대이다.

 

SDSS » 우주의 일부 공간에서 본 은하들의 분포. 각 점들은 타원은하(붉은 점)와 나선은하(푸른 점)들이다. 그림에서 부채모양의 아래에 지구가 있고, 그림 오른쪽의 200 h-1Mpc는 우리로부터 약 9억 광년 떨어진 거리를 뜻한다.

 

 

 이처럼 우주의 공간과 시간, 물질과 자연법칙에 대한 총체적 지식을 가지고 우주론 학자들은 ‘우리 우주’의 기원과 진화를 재구성할 수 있다. 우주공간은 발생 직후에 이미 무한히 큰 상태였다. 그 무한 공간은 모든 곳이 균일하게 늘어나면서 더욱더 큰 무한공간으로 끊임없이 팽창을 해왔다. 태초에 발생한 우주의 물질은 극도로 높은 온도와 밀도로 시작하였으나, 공간팽창으로 말미암아 여러 차례 상전이(相轉移)를 일으키면서 (마치 온도가 내려가면 물의 상태가 기체에서 액체로, 다시 고체로 변하듯이) 서서히 차가워지고 희박해져 왔다. 빛과 중성미자는 우주나이가 수만 년이었던 때까지는 우주의 에너지밀도의 대부분을 차지했으나, 공간팽창에 따라 밀도가 빠르게 감소하였고, 공간팽창에 의해 밀도가 천천히 감소하는 물질들(암흑에너지, 암흑물질, 바리온)이 오늘날 우주질량밀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주공간 속에서 물질의 분포는 수십억 광년 이상의 큰 규모에서 보았을 때는 대단히 균일하지만, 작은 규모에서는 위치에 따라 약간의 밀도 차이가 태초부터 있어 왔다. 우주나이가 2만년 정도였던 때부터 밀도가 높은 곳으로 물질구름이 붕괴하기 시작하여, 수 억 년 뒤에는 수많은 별과 은하들이 찬란한 빛을 내며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빛은 태초부터 있었던 빛과는 달리 별 속에서 일어나는 핵융합 반응으로부터 나오는 빛이다.

 

각각의 은하 내에서는 수많은 별들이 성간구름으로부터 태어났다가 죽어 되돌아가는 순환 과정을 겪고 있다. 수소와 헬륨같은 가벼운 원소들의 비율은 우주의 나이가 약 3분이었을 때에 결정되었는데, 이보다 무거운 원소들은 은하 내에서 태어난 무거운 별들이 핵융합 반응을 일으켜서 만들어진다. 무거운 별들은 일생을 마치며 폭발하는데, 이 때 함께 터져나간 중원소(수소와 헬륨보다 무거운 모든 원소)들은 새로운 별을 만드는 데에 섞여 들어가고, 별 주변의 행성과 생명체의 몸을 형성하는 필수 물질로 사용되었다.

 

‘우리 우주’는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우주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 우주’는 시공간과 물질, 자연법칙에 있어 특정한 물리적 성질을 지니고 있다. 137억년의 긴 세월을 견디고 팽창해 온 ‘우리 우주’. 별을 잉태하고 중원소를 보존해 온 우리 은하. 행성이 생성될 때까지 기다려 주고 빛을 쪼여준 태양. 대기와 물을 붙들고 생명의 요람이 된 지구.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우주 물질밀도의 양과 불균일성의 정도, 소립자들의 개수와 질량, 네 가지 자연의 힘들의 상대적 크기와 성질 등에 부여된 놀랍게도 정밀한 균형 때문이다.

 

그런데 단 한번 발생한 ‘우리 우주’의 돌이킬 수 없는 일방적 진화과정을 지켜보면서 이 우주의 물리적 특성과 기원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에 동원되는 고(高)에너지 자연현상에 대한 물리법칙들은 개연성과 확률만을 알려주기 때문에 재연이 불가능한 단 하나의 표본으로는 검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과학적 이론이 객관적 진실로서 인정될 수 있는 때란 그 이론이 재연 가능한 자연현상과 비교가 가능한 경우이다. 우주론은 우주 전체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궁극적인 문제에 있어서 우주가 단 한 개로 유일하여 재연이 불가능하다는 문제와 연구주체도 연구대상에 포함된다는, 주체-객체 분리가 불가능한 비과학적 주제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 어려움을 우회하는 하나의 착상이 다우주(多宇宙, multiverse) 가설이다. 다우주란 비록 서로 교신할 수 없어 인지될 수는 없지만 물리적 성질이 조금씩 다른 무한한 개수의 우주들로 이루어진 우주집단이다. 한 우주는 다른 우주와 전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있으며, 다른 우주의 한 곳에서 발생할 수도 있다. 은하와 별을 키워내서 행성과 생명을 태어나게 한 ‘우리 우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극도의 정교함을 필요로 한다. 또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특수한 성질을 갖춘 하나의 우주가 우연히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다우주 세계에서는 무수한 우주 중에 별과 생명의 탄생에 적합한 조건을 지닌 우주가 반드시, 그리고 무한히 많이 있게 마련이다. 마치 인간이 하나의 평범한 은하 속에 있는 천억 개의 별들 중에서 평범한 하나의 별인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들 중에 생명의 탄생과 진화에 적합한 행성인 지구에서 발생했듯이, 무한개의 우주 중에 우연히도 이 모든 드라마를 가능하게 한 적합한 우주가 필연적으로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계속)

 

 
박창범 고등과학원 교수 |  서울대학교에서 천문학을 전공하고, 1990년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천체물리과학과에서 우주론 분야를 연구했다. 1990년부터 칼텍 물리학과 연구원으로 재직하다가 1992~2003년에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교수로, 2003년부터 지금까지는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천체물리, 우주론, 고천문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인간과 우주>, <한국의 천문도>, <동아시아 일식도>,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Astronomy - Traditional Korean Science 등이 있다. 박창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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