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작가정신, 세포의 독해력
이대한의 책꽂이: '생명의 느낌' 연재
생명 또는 생명과학과 관련된 고전 및 최근 명저들에 대한 독서 에세이. 생명과학 박사과정 이대한 님이 책의 내용이나 주제를 소재로 생명에 대한 느낌과 감상을 담으면서 생명 현상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미학적 접근의 접목을 시도한다.
[3] 우주의 작가정신, 세포의 독해력 - 생명, 우주의 텍스트를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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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나선
제임스 왓슨 지음, 최돈찬 옮김, 궁리
The Double Helix,
James D. Watson, W. H. The Orion Publishing Group
작품은 독자의 독서 행위를 통해 완성된다. - 볼프강 이저
매체가 메시지다. -마샬 맥루한
‘바다’라는 두 글자에 바다가 들어 있다. 그 넓은 바다를 아주 작은 몇 개의 선이 품어낸다. 물기도 소금기도 없는 무언가가 바다가 된다.
‘바다’는 바다와 무관하다. ‘바다’가 바다처럼 생기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바다’를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이에게 ‘바다’는 ‘바다’일 뿐이다. 한글을 모르는 이에게도 ‘바다’는 ‘바다’에 그친다. ‘바다’는 바다에 대한 암호다. 파랗고, 넓고, 일렁이는 바다를 보며 “저것은 ‘바다’”라는 은밀한 해독 훈련을 받은 자에게만 ‘바다’는 바다가 된다.
모든 텍스트는 일종의 암호문이다. 읽는다는 것은 본다는 것과 차원이 다른 행위이며, 독해는 본질적으로 해독일 수밖에 없다. 소설은 오직 그 텍스트를 읽는 자, 정확히 말하면 해독할 수 있는 자에게만 하나의 세계가 된다.
인간은 쓰고 읽는 종(種)이다. 문자가 태어난 후에야 인간은 비로소 한 시대를 시작했다고 선언된다. 텍스트의 시대인 역사시대 말이다. 법(法)은 국가를 탄생시켰고, 경(經)은 인간의 의식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런데 오직 인간만이 작가가 될 수 있고, 역사를 가질 수 있을까. 텍스트가 오로지 인격을 통해서만 창출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난 세기에 인간은 자신이 쓴 적 없는 압도적인 텍스트와 마주하게 됐다. 바로 생명의 텍스트, 디엔에이(DNA)다.
…정자 속에 든 것…
» 정자 안에 작은 인간이 들어 있다고 여긴 옛 사람들의 상상 그림. 출처/ Wikimedia Commons
우리는 모두 하나의 세포에서 시작됐다. 수정란이 한 인간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바다’가 바다를 품고 있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다. 모차르트의 음악도, 피카소의 그림도 모두 하나의 세포에서 비롯됐다.
세포가 그런 위대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 상식적인 상상을 한 자들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정자 안에 작은 사람이 웅크리고 있다고 믿었다. 만약 호문쿨루스(homunculus)라고 불리는 이 작은 인간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라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정자의 머리에는 인간이 없다. 정자보다 훨씬 거대한 난자에도, 정자와 난자가 융합한 수정란에도 인간은 없다. 하나의 수정란이 완전한 인간이 되는 발생 과정은 난쟁이가 거인이 되는 성장 과정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세포가 인간이 되는 것, 그것이 발생의 본질이며 동시에 수수께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정란에 들어 있는 것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텍스트’다. 수정란이 발생하여 하나의 인간이 되는 과정은 세포가 텍스트를 읽어 나가는 독해의 과정이다. 인간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간주한다면, “작품은 작가의 독서 행위를 통해 완성된다”는 이저의 말은 여기서도 옳다.
호문쿨루스를 말한 사람들은 사실 이 텍스트의 본성을 예리하게 간파한 사람들이었다. 생식세포에 인간에 대한 무언가가 들어 있고, 그 무언가는 부모로부터 자식에게로 전달되며, 그 무언가를 통해 수정란은 수정란과 전혀 다른 인간이 된다는 사실 말이다. 순진한 그들은 그 무언가를 텍스트가 아닌 인간 그 자체라고 믿었을 뿐이다. 생명체의 텍스트는 세대에서 세대로 끊임없이 대물림되는 까닭에 ‘유전체(genome)’라고 불린다.
유전체는 오직 세포만이 읽을 수 있는 텍스트였다. 이 텍스트는 세포에게 가이드북이 되고, 레시피가 되고, 처방전이 된다. 하지만 세포를 제외한 모든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암호문일 뿐이었다. 1953년 4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네이처>에 한 쪽짜리 짧은 논문 "DNA의 구조"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생명의 매체, DNA…
»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의 1953년 논문. 출처/ http://www.nature.com/nature/dna50/archive.html
모든 텍스트는 매체 의존적이다. 매체 없이 텍스트는 생성될 수도, 전달될 수도 없다. 소설의 텍스트는 종이책이건, 이북(e-Book)이건, 친구의 목소리건 오로지 매체를 통해서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수용될 수 있다. 생명의 텍스트도 마찬가지일 테다. 생물학자들은 생명의 텍스트를 가능케 하는 매체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중나선>의 저자 제임스 왓슨은 그 매체의 정체가 베일을 벗던 시기에 본격적인 연구 활동을 시작했다. 생물학자들은 이미 유전체의 매체는 세포 안에 들어 있는 염색체이며, 텍스트는 염색체를 이루는 분자에 새겨져 있다는 데 공감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염색체를 이루는 분자가 단백질과 DNA, 둘이라는 점이었다.
슈뢰딩거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 단백질이 매체가 될 것이라 짐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연구자들의 이목은 DNA에 쏠렸다. 점점 더 많은 증거들이 DNA가 모든 생명체가 가진 텍스트의 보편적 매체라는 가설을 지지했다. 1952년, 허쉬와 체이스가 DNA가 매체라는 결정적 실험을 성공시켰고, 논란은 종지부를 찍었다.
매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매체가 메시지다”고 했다. 매체 자체가 콘텐츠가 형성되고 전달되는 방식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콘텐츠가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고 전달되는지 이해하려면, 매체 자체의 형식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생물학자들은 오랜 여정 끝에 DNA가 생명체가 전달하는 텍스트의 매체라는 사실을 확정했지만, “DNA가 유전체다”라고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없었다. DNA가 매체라고 말하면서도 그 매체의 형식과 구조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이 매체가 어떻게 생명의 텍스트를 담을 수 있는지, 어떻게 끝없이 스스로 복제돼 세대에서 세대로 대물림될 수 있는지에 대해 누구도 분명히 말할 수 없었다. 1940년대부터 많은 연구자들이 DNA가 유전의 매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식했음에도, 그 매체의 구조를 규명하는 데에는 극히 소수의 과학자만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DNA가 유전 매체임이 확실시되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던 바로 그 시기에 지구 반대편에선 유전암호의 비밀을 풀 열쇠인 DNA의 구조를 두고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다. 라이너스 폴링, 로잘린드 프랭클린, 모리스 윌킨스, 프랜시스 크릭, 제임스 왓슨이 뛰어든 이 경쟁에서 왓슨-크릭 듀오는 1953년 4월, "DNA의 구조"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승리를 거둔다.
왓슨과 크릭이 밝힌 것은 단순히 DNA라는 유전 매체의 구조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들의 발견은 DNA의 매체적 가능성과 매체가 싣고 있는 텍스트의 형식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왓슨과 크릭은 첫 논문을 발표한 지 정확히 한 달 뒤에 "DNA 구조의 유전적 함의"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여기서 그들은 유전체란 염기서열이라는 문법으로 쓰인 방대한 텍스트이며, DNA라는 매체는 염기의 상보적 결합이라는 형식을 통해 텍스트를 끝없이 자기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짚어냈다.
» 젊은 시절에 DNA 이중나선 모형 앞에 선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출처/ blog.nature.com
…DNA 정복기…
» DNA 이중나선 구조의 모형. 출처/ Wikimedia Commons
<이중나선>은 DNA를 두고 벌어진 경쟁에서 승리한 주인공 중 한명인 왓슨이 직접 쓴 일종의 자전(自傳)이자 승전기(勝戰記)다. 왓슨은 마치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마냥 의기양양하게 승자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언덕길을 터벅터벅 걷는 동안 런던의 학회에서 그와 만났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그 당시만 해도 DNA는 아직 신비에 쌓여 있었다. 따라서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든 주제로 선택할 수 있었지만 누가 그 비밀을 밝혀낼지, 그리고 과연 DNA가 그렇게 가치 있는 주제인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 그러나 이제 경쟁은 끝났다. 이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경쟁이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았고, 신문에 보도된 기사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도 알고 있다.(<이중나선>, 22쪽)
"DNA의 구조" 논문을 발표할 당시 고작 스물다섯에 불과했던 왓슨이, 어떻게 라이너스 폴링(1954년 노벨화학상 수상) 같은 거장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사실 DNA 구조를 밝히는 데 왓슨이 한 ‘실험적 기여’는 거의 전무하다. 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결정적으로 입증한 엑스(X)선 회절 실험은 윌킨스와 프랭클린이, DNA의 염기 조성을 밝혀 염기의 상보적 결합에 대한 결정적 힌트를 제공한 실험은 샤가프가 했다. DNA 모델을 만드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계산 역시 그의 파트너였던 크릭이 했다. 심지어 DNA 구조에 접근하는 방법론은 경쟁자였던 폴링의 방법을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나는 곧 폴링이 거창하고 복잡한 고등수학이 아니라 단순한 상식을 통해 나선을 발견했음을 알게 되었다. ... 폴링은 연필을 가지고 종이 위에서 계산한 것이 아니라 유치원 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분자 모형을 가지고 알파 나선을 생각해냈던 것이다. ... 우리도 이렇게 하면 DNA의 구조를 밝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분자 모형을 만들어 이리저리 끼워맞추다 보면, 운 좋게 DNA의 구조가 나선형으로 맞아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중나선>, 66-67쪽)
왓슨이 한 일은 스스로 표현하듯 ‘유치원 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분자 모형을 가지고’ 논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그는 크릭과 함께 완성본의 형태를 모르는 DNA 프라모델(plamodel, 조립모형)을 조립한 셈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장난간 부품은 단 네 종류였다. 부품들은 거의 비슷하게 생겼는데 서로 다른 염기, 즉 아데닌(A)/티민(T)/구아닌(G)/시토신(C)을 가진다는 점에서만 달랐다.
왓슨과 크릭이 선택한 방법론은 일종의 조형예술에 가까웠다. 주어진 재료로 미적으로 가장 완벽한 작품을 만드는 것. 수(數)와 식(式)에 길들여진 과학자들에게 그들의 연구는 엄밀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과학으로 취급받았다. 수학도 잘 못하고 화학도 나을 게 없는데다가 장난감만 만지작거리던 왓슨은 여기저기서 무시당했고, 누구도 풋내기 과학자의 작업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주변의 예상을 깨고 그의 직관과 미적인 접근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정말로 분자 모형을 이리저리 끼워맞추다 DNA의 구조가 나선형으로 완벽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구조는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행복에 겨워 점심을 먹었다.(<이중나선>, 216쪽)
왓슨은 샤가프의 법칙처럼 모두에게 공개된 힌트들, 비정상적인 경로로 훔쳐 본 프랭클린의 X선 회절 사진, 한 연구실을 사용하던 도나휴의 조언 등을 감각적으로 버무려 크릭과 함께 DNA 이중나선을 조립했다. 이를테면 DNA 구조 연구에서 왓슨은 남들이 마련한 (심지어 일부는 훔친) 재료로 그럴듯한 음식을 감으로 만들어 낸 영악한 요리사였다. 1962년 크릭, 윌킨스와 함께 수상한 노벨상은 바로 그 미감에 대한 인정일 테다.
…지구라는 도서관…
얼마 전 물리학자들이 입증해낸 힉스가 ‘신의 입자’라고 한다면, DNA는 생물학자들에게 ‘신의 인자’였다. 왓슨과 크릭에 의해 마침내 신의 인자가 이중나선의 모습으로 최초로 위엄을 드러내자 동시에 우주의 ‘작가적 본성’이 드러났다. 우주는 DNA라는 매체와 염기서열이라는 문법으로 어떤 작가보다 치열하게 생명의 텍스트를 생성해왔고, 생명체는 그 텍스트를 읽어낸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한다. 진화란 생명의 텍스트를 창출하는 우주의 작가정신이며, 생명은 텍스트를 읽어내는 우주의 상상력이다. 생명의 기적은 문학의 기적과 같으며, 아주 작은 수정란이 커다랗고 복잡한 인간을 품을 수 있는 힘은 소설이 하나의 세계를 품을 수 있는 힘과 같다.
지구에서 숱한 생명이 태어난 역사는, 꼭 그만큼의 텍스트가 태어나고 읽힌 역사다. 텍스트의 시대가 역사라면, 지구에서는 유전체라는 텍스트와 함께 생명의 역사시대가 시작됐다. 지구는 엄청난 양의 사서(史書), 그것도 모두 같은 언어로 쓰인 저작들을 소장하고 있는 서고(書庫)다. 우리가 DNA를 읽게 된 것은 오직 세포만이 읽을 수 있던 비밀스러운 우주의 저작들을 읽을 수 있게 된 엄청난 사건이다. 생명의 보편적 언어가 마침내 인간에게도 허락되었고, 우리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 즉 생명의 독자(讀者)가 되었다.
그러나 아직 지구라는 도서관에서 우리 인간은 아주 형편없는 독자다. 우리에겐 수정란이 인간이 될 수 있는 그런 독해력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본다는 것과 읽는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행위다. DNA의 서열을 분석한 게놈 프로젝트는 인간의 텍스트를 ‘볼 수 있게끔’ 그저 출력해낸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제 겨우 텍스트를 가졌을 뿐이며, 작품은 텍스트를 오롯이 읽어낼 때만 완전한 작품이 된다.
세포에게 생명의 텍스트인 것이 우리에겐 여전히 대부분 암호문이다. 우리가 만약 세포들이 가진 독해력에 경외를 표하고 그들이 어떻게 텍스트를 읽어내는지 배운다면, 그 배움으로 생명의 세계가 지금과 전혀 다른 작품으로 우리 눈앞에 펼쳐질지도 모른다. ‘바다’가 바다가 되고, 소설이 세계가 되는 기적처럼.◑
이대한 서울대 생명과학부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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