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대의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박사우울증’이라는 게 있습니다. 많은 대학원생이 흔히 겪는 우울한 증상을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 시대 ‘박사우울증’을 앓는 많은 이공계 대학원생의 삶을 소설 형식에 담아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서로 이해하며 보듬을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카이스트 박사과정 김창대 님이 씁니다.

한 시간 만에 끝내버리는 건 좀 너무하지 않은가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pic_s02e23.jpg » 삽화는 이도연 님께서 그려주셨습니다.

 

[지난 줄거리]
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연구실을 옮긴다. 나머지는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8월, 학회의 논문 마감이 있다. 길영, 준상 팀은 논문 제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정원, 보영팀은 실패한다. 9월, 개강을 한다. 정길은 새로 만난 애인, 예은에게 푹 빠져 결혼을 결심한다. 정원은 추석 연휴에 우연히 보영을 만나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게 되고, 보영의 졸업연구에도 함께 하게 된다. 10월, 길영의 논문이 붙는다. 준상은 디펜스 일정을 잡고, 정원은 프로포잘을 하라는 교수님의 제의를 받는다. 드디어 11월. 정원의 프로포잘과 준상의 디펜스가 있는 날.
  



#2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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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다. 논문을 읽고, 논문 쓸 거리를 찾고, 구현을 해보다가, 잘 안 돼서 짜증이 난다. 초등학교 일기로 제출하면 딱이다. 속으로야 세계 최초를 추구하지만, 겉모습은 평범한 사무직이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나 두들긴다. 매일 매일.


물론 재밌는 일도 많이 생긴다. 새로 만든 것이 잘 돌아가면 짜릿하다. 어이없는 실수[1]로 실소할 때도 있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낸 논문도 재밌다. 하지만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건 불가능하다. 배경지식이 너무도 많이 필요하니까. 웃긴 동영상 하나를 보기 위해 다큐멘터리 한 편을 시청해야 한다면, 누가 그 동영상을 보겠는가. 더군다나 그 다큐멘터리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싫어한다는 수학이나 과학에 관한 것이라면.


이것이 이 소설에서 정원의 프로포잘 준비 과정이 통편집된 이유다. 한 달여 만에 프로포잘을 준비하느라 수많은 밤을 샜고, 수많은 낮을 잤다.[2] 구현[3]도, 실험[4]도 열심히 하고, 발표 자료도 수없이 다듬었다.[5] 인고의 시간이었다. 인고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재미는 없었다. 그러니 오늘은 정원이 프로포잘을 하고 준상이 디펜스를 하는 날이다.


그렇다고 통편집은 너무하지 않느냐고? 한 번만 봐주시라. 이제껏 연구 이야기를 재밌게 하려고 수없이 노력하지 않았는가. 위에 주석을 달아놓은 것처럼 이미 한 번씩 다룬 소재들이기도 하다.



“이게 왜 안 되지?”


정원은 프리젠터(프리젠테이션용 컴퓨터 리모콘)를 꾹꾹 눌러보았다. 컴퓨터가 반응하지 않는다. 왜지? 수신기를 다시 뺐다 꼽아봤다. 남은 시간 8분. 충분히 일찍 왔었다. 그런데 노트북이 갑자기 업데이트를 시작하는 것이다. 자동업데이트는 누가 걸어놓은 거야. 겨우 끝마쳤다 싶었는데, 이번엔 프리젠터가 문제라니. 하아.


“왜, 뭐가 잘 안 돼?”


준상이 물었다.


“프리젠터가 안 되네. 어제도 여기서 썼는데….”

“좀 전에 업데이트 했다더니, 그러면서 디바이스 드라이버[6]가 꼬인 거 아냐?”


그럴 수도 있겠다. 이런 분석을 순식간에 해내다니. 이래서 준상이 박사를 받는 건가.[7]


“내 꺼 한 번 써볼래?”


준상이 프리젠터를 하나 내민다. 노트북에 꽂았다. 몇 초 만에 반응한다. 정원은 버튼을 눌러봤다. 발표자료가 잘 넘어간다. 휴. 안도했다. 준비성 철저한 녀석. 이래서 준상이 박사를 받는 거다. 분석도 훌륭하고 대책도 훌륭하다.


“잘 된다. 고마워.”


준상은 다시 세미나실 뒤쪽에 가서 후배들과 함께 앉았다. 준상은 바로 뒤이어 디펜스를 해야 한다. 그런데 정원의 발표를 들으려 하다니. 이래서 준상이 박사를 받는 거다.



제야 심사위원석이 눈에 들어왔다. 책상 위에 발표자료 인쇄본이 놓여 있다. 주변을 둘러 음료와 간식이 빼곡하다. 아메리카노, 생수, 과일 음료부터, 쿠키 두 가지, 과일 세 가지, 빵, 견과류, 초콜릿 까지. 심사위원들이 혹여나 목마르실까, 출출하실까, 당이 필요하실까 싶어 준비하는 것이다. 후배들이 대신 준비해준다.


“우와, 이건 누가 만들었니?”


책상 위엔 사과를 깎고 잘라 오리 모양을 만들어둔 것이 있었다.


“저요!”


뒤쪽에 앉아 있던 보영이 생글 웃으며 답한다.


“대단한데! 고마워!”


정원도 한껏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성이 고마웠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간식이 점수에 반영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도 사람 아닌가. 잘 차려놓은 음식을 보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그러면 심사도 조금 더 너그럽게 하지 않을까?


정원은 이어서 음식 배치를 확인했다. 여기에도 법칙이 있다. 먼저 건동수서(乾東水西)라 하여, 물기가 있는 과일 등은 왼쪽, 과자 등 마른 것은 오른쪽에 둔다. 오른손잡이 심사위원의 경우 펜을 오른손에 쥐고 잡고 왼손으로 음식을 먹는 경우가 많다. 물기 있는 음식을 오른쪽에 두면, 왼손으로 집어서 가져오는 동안 책상 중앙에 있는 자료에 물기가 떨어질 수 있다. 이걸 방지하려는 것이다. 또한, 쇄설순근(碎屑脣近)이라 하여, 견과류 등 가루가 생기기 쉬운 음식은 최대한 입 가까이에 둔다. 비슷한 목적이다. 음료수 배치는 서고동저(西高東低)를 따른다. 왼쪽 끝에 생수병 등 상대적으로 높은 것을 두고 가운데로 갈수록 캔이나 병 음료 등 작고 낮은 것을 둠으로써, 심사위원들의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함이다.


“배치도 완벽하네. 진짜 고마워, 내가 다음 주쯤에 크게 한 번 쏠게.”



때 권대성 교수님이 들어왔다.


“준비 잘 됐지?”

“아, 네. 열심히 고쳐 보긴 했는데요,”


정원은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때 얘기했던 거 있지. 지금 시스템의 문제점들을 잘 정리하고 나서, 그걸 어떻게 해결했고 더 해결할 것인지를 잘 설명해야 해. 어? 이야, 이거 사과야?”


교수님이 잔소리 도중 오리사과를 발견했다.


“네, 보영이가 준비했습니다.”


교수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뒤를 돌아 보영을 찾았다.


“대단한데, 시집가도 되겠어.”[8]


그래, 바로 이래서 음식을 준비한 것이다. 정원은 흐뭇했다.


뒤이어 네 분의 교수님이 더 들어와서 앉았다. 다들 오리사과를 보고 칭찬을 던진다. 정원은 보영에게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보영은 손으로 조그맣게 브이(V)를 그렸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오늘 프로포잘을 하게 된 박사과정 4년차 김정원입니다. 제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준비하고자 하는 내용은 멀티코어 환경에서의 캐시 간섭 문제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협력을 통해 더 잘 해결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딸깍. 프리젠터 버튼을 눌렀다. 두 번째 페이지로 넘어간다. 이제 시작이다.


이걸로 프로포잘을 해도 될까?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이다. 프로포잘이란 “이런 내용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하고 묻는 것이다. 그를 위해 한 분야의 박사라고 불려도 괜찮을 만큼의 넓이와 깊이를 가진 연구 계획을 구체적으로 발표해야 한다. 또한 전반부에 대해서는 결과까지 함께 제시함으로써 연구 주제의 타당성을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정원은 영 자신이 없다. 자신이 풀려는 문제가 박사를 받을 만큼 중요한 것인지 부터가 의문이다. 실험 결과가 약간 있긴 하지만 약점이 많고, 앞으로의 연구 계획도 허술하다.


정원이 박사 1년차 때 꿈꿨던 프로포잘은 이런 게 아니었다. 더 넓은 주제와 더 많은 연구 결과와 더 구체적인 연구계획을 담은 것이었다. 연구 결과는 이미 두 편 정도의 논문으로 발표되어 있으며, 연구 계획으로는 이미 한, 두 편 정도의 논문 제출을 준비 중인 상태로 말이다. 이게 안 되어서 프로포잘을 미뤄왔던 것이었는데. 꿈을 좇으려다 시간에 쫓겨버렸다.


어쨌거나, 오늘은 해내야 한다. 이미 시작해버렸는데 물러날 순 없지 않은가. 선배들도 그랬을까? “프로포잘? 난 아무 것도 없는데 그냥 했어”라고 했던 게, 엄살이 아니었던 걸까?


정원은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설명했다. 교수들은 표정이 없다. 이따금 간식을 먹을 때만 얼굴 근육을 썼다.




표를 마쳤다. 질의응답 시간이다. 지도교수이자 심사위원장인 권대성 교수가 진행 멘트를 한다.


권대성(교수): 이제 교수님들께서 질문도 해주시고 조언도 많이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부족한 면이 많으니까 많이 지적해주시면 디펜스 때까지 많이 보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 문장은 의례적인 수사였을 것이다. 준상의 프로포잘 때도 저런 말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원은 찔렸다. 정말 부족해서다. 그런데 정말로 ‘많이’ 지적해버리면, 디펜스는 얼마나 늦어져야 하는 건가?


교수들 간에 눈짓, 손짓이 오간다. 그 결과 첫 질문자는 A 교수로 정해졌다.


A 교수: 그래서 학생이 한 게 뭐죠?

김정원(박4): 네?


처음부터 세다.


A 교수: 멀티코어에서 캐시 간섭 문제야 오래된 문젠데, 오래된 문제를 다시 한 번 풀었다, 이게 끝이에요?

김정원(박4): 저는 이 문제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간의 협력 체계를 통해 풀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 하나만 이용했을 때보다 더 다양한 옵션을 가지고 해결할 수 있도록 한 겁니다.


정원은 발표 때 이미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A 교수: 그럼 오래된 문제를 새로운 방법으로 풀었다?

김정원(박4): 네.

A 교수: 그럼 이 문제가 정말 ‘풀렸다’는 건 어떻게 증명하지?


상상도 못 했던 질문이다. 정원은 대답할 말을 못 찾았다.


A 교수: 이 방식을 쓰면 캐시 간섭 문제가 정말로 해결이 된 건지 그걸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캐시 간섭 문제가 아예 없으면 성능이 어느 정도 나와야 하는데, 이 연구에서 거기의 90퍼센트 정도까지는 따라잡았다든가. 뭐 그런 분석이 있어야 될 것 같은데. 현실적으로 90퍼센트까지는 어렵더라도, 최적 값이 얼마나 되는지는 분석을 해줘야, 이 연구 결과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도 알 수 있을 거고, 앞으로 어디까지 더 할 수 있을 거다 이런 것도 알려주고, 그럴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안 했어요?

정원(박4): 아직 못 했습니다.


‘내가 그걸 이미 다 했으면 디펜스를 하고 있지 이제 프로포잘을 하고 있겠냐.’ 정원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참았다.


A 교수: 적어도 박사학위 논문이라면 내가 적어도 이 분야에 대해서는 끝까지 고민해봤습니다, 하는 게 있어야 되는 거예요. 문제 하나 풀어낸다고, 새로운 기법 하나 제시한다고 박사를 받는 게 아닙니다. 내가 제시한 기법의 장점과 단점, 한계점까지 정량적, 정성적으로 명확하게 분석할 수 있어야, 내가 한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다 할 수 있는 거예요.


너무 세다 싶자, 권대성 교수가 나섰다.


권대성(교수): 교수님, 아직 프로포잘입니다. 살살하시죠.

A 교수: 어쨌든, 내가 디펜스에서 다른 거 안 보고 이거 하나만 딱 볼 거야. 이거 안 하면 싸인 안 해 줄 테니까 그렇게 알아요.

김정원(박4): 네, 알겠습니다.


A 교수가 의자에 몸을 기댔다. 끝났다는 의미다. 이어서 B 교수다.




B 교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협력을 해서 문제를 풀었다고 했잖아요.

김정원(박4): 네.

B 교수: 아까 그런 게 하나 더 있다고 했죠?[9] 그거랑은 뭐가 다르죠?

김정원(박4): 그건 하드웨어를 추가해서 하드웨어로 충분히 해결을 한 상태에서 스케줄러가 약간 도와주는 방법을 연구한 것이고요, 제가 제안한 것은, 이미 탑재되고 있는 하드웨어 기능을 스케줄러가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B 교수: 그런데, 학생도 똑같이 시뮬레이터(simulator)를 써서 연구한 것 아닌가요?

김정원(박4): 네.


정원은 B 교수의 다음 말이 두려웠다.


B 교수: 이미 비슷한 기법이 나와 있는 상황이면 여기서 그치면 안 되지 않나? 제안한 기법이 실용적이고 이미 나온 하드웨어로도 구현 가능한 것이라면, 실제로 구현을 해서 보여줘야지. 단지 성능 몇 퍼센트 더 올라가는 걸로만 보여줄 게 아니라.


그러니까, 결국, 운영체제에 구현하란 말이다. 누가 몰라서 안 한 줄 아나. 시뮬레이터에서 하는 게 훨씬 쉬워서 그랬다. 훨씬 쉬운 게 이미 몇 달이 걸렸다. 대체 언제 졸업을 하란 말인가.


그래, 당신이 운영체제를 연구하는 교수인 건 알겠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까지….


B 교수: 그런데, 그게 시간이 좀 걸리긴 할 텐데. 지금 몇 년차라고 했죠?

김정원(박4): 4년차입니다.

B 교수: 아, 그래요? 그럼 충분하겠네. 권대성 교수 생각은 어때요?


정원은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 아까 그 분석까지는 하겠다고 했지만, 이건 아니다. 몇 달이 걸릴지, 해서 잘 되기나 할지 장담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럴 듯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B 교수에겐 남 일이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니 설득을 시킬 만한….


권대성(교수): 그게 제품이 나오고 있긴 한데, 아직 시제품이기도 하고요, 기능도 완벽하진 않다고 들었습니다.


정원은 6년째 함께 해온 교수님이 이렇게 마음에 드는 순간은 처음이었다.


B 교수: 아, 그래요? 그래도 구현을 하면 좋을 텐데.

김정원(박4): 시제품이라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기능에 대해서도 좀 더 조사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심사 받는 주제에 어렵다고만 할 순 없지 않은가? 교수님이 충분히 안 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러니 정원은 노력해본다고 답하는 게 예의다. 결국 안 할 거지만.




C 교수님 차례. “왜 이제까지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협력해서 해결하는 방법이 안 나왔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은데”로 포문을 열었다. 정원은 또 말문이 막혔다. 나름 창의적이라고 생각해서 연구한 거란 말이다. 그렇게 물어보면 뭐라 답하나?


정원이 머뭇거리자 공격을 잇는다. 이제까지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서 시도하지 못했는지, 그리고 본인은 그런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설명하란다. 그제야 생각났다. 이 질문은 C 교수님이 들어가는 모든 프로포잘과 디펜스에서 나오는 단골 질문이다. 미리 준비했어야 했다. 발표 자료 준비하느라 이런 것까지 챙길 시간이 없었긴 하지만. 한편으론, 준비하면 답이 나왔을까 싶다. 아니, 다른 사람이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어떻게 아느냔 말이다. 정원은 발표했던 내용 중 그나마 관련 있을 만한 내용들을 다시 읊었다. 역시나 만족하진 못하신다. 어쩌랴. 이 순간만 지나가길 바랄 뿐.


다음은 D 교수님. 구현에 대해서 치고 들어온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교수님이다. 정원이 사용한 시뮬레이터를 박사과정 때 많이 써봤나 보다. 정원이 조금이라도 대충 구현해놓은 모든 부분을 지적한다. 엠아르아이(MRI)라도 찍히는 기분이다.


프로포잘 리허설을 몇 번 했었다. 후배들과 함께 했다. 그 때마다 여러 질문과 지적들이 나왔다. 연구의 장점을 더 강조했다. 논리가 매끄럽게 이어지도록 만들었다. 어수선한 말을 빼고 쉬운 그림을 넣었다. 연구가 가진 한계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후배도 있었다. 그런 질문들에 대비하기 위해 보충 발표자료도 꽤 만들어두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교수들은 그런 걸 지적하지 않았다. 후배들이 포탄을 쏜 것이라면, 교수들은 지진을 일으켰다. 아예 판을 흔들고 엎어버렸다.


정원은 오래된 노래가 떠올랐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10] 목이 말랐다. 프로포잘이니 지적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연구 방향을 함께 잡아가자는 목적이니까. 하지만 너무 많다. 너무 세다. 이걸 언제 다 한단 말인가. 벌써 박사 4년차인데.


다행히도 권대성 교수는 추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만 나가보라고 했다. 끝났다. 프로포잘은 어쨌거나 끝났다. 정원은 자율신경계에게 감사했다. 정신이 완전히 빠져나가버렸지만, 걸어서 나갈 수는 있었으니.



 
나는 게 맞다. 비행기라도 타러 가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정원은 다시 준상의 디펜스에 들어왔다. 웨딩박람회를 쫓아다니는 예비부부의 마음으로.


디펜스와 프로포잘은 형식이 비슷하다. 학생의 발표 뒤에, 심사위원의 매서운 공격이 이어진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완성판’이라는 것이다. 학생의 발표는 완성된 연구 결과여야 한다. 장점들은 충분히 가치 있어야 하고, 단점마저 모두 자세하게 분석되어 있어야 한다. 심사위원의 공격도 끝장을 본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박사를 줄지 말지 결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탈락이 있다. 디펜스가 끝나면 심사위원들이 회의를 하고 합격 여부를 결정 짓는다.


준상의 디펜스도 정원의 프로포잘과 비슷했다. ‘완성판’이라는 차이점만 빼면. 발표도 발표지만 질의응답도 훌륭했다. 교수님들은 이번에도 판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준상은 디스코 팡팡이라도 타는 듯이 꿋꿋이 버텼다. 정말, 이래서 준상이 박사를 받는구나, 싶었다.


정원은 한 명의 박사가 탄생하는 순간을 함께 했다. 그걸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박사란 무엇인가? 누가 박사라 불리는가? 결국, 박사가 박사라고 불러야 박사다. 아무리 좋은 시를 써봐야, 시인들이 시인이라고 불러주기 전엔 시인이 될 수 없듯이. 과학적 결과들이 있지 않느냐고? 과학적 결과라고 모두 인정되는 게 아니다. 그중 가치 있는 것만 인정된다. 그리고 ‘가치’의 기준은 기존의 박사들이 세운다. 이거야 말로 카르텔[11] 아닌가. 물론 정원도 안다. 교수들이 얼마나 실력이 있는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얼마나 우리의 실력을 평가할 만 한 존재인지.[12]


그래도, 1시간 만에 평가해버리는 것은 좀 너무하지 않은가. 준상이가 4년 동안 얼마나 열심히 연구했는데. 준상이니까 4년이지, 5년, 6년, 7년, 8년, 9년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렇게 끝내는 건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병원의 짧은 진료 시간이 싫은 건 의사가 못 미더워서가 아니다. 내가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펜스가 끝나고 30분 뒤, 준상이 연구실 모두에게 메일을 보냈다.


교수님이 오늘 회식 한 번 하자고 하십니다.

6시에 출발하겠습니다.

장소는 제가 예약해두겠습니다.


- 강준상


교수님이 학교를 옮긴다고 발표하신 뒤로,[13] 첫 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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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프로그래머는 설치파일에 띄어쓰기를 하나 잘못 넣는 바람에, 자신의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모든 사람들의 사용자 폴더를 날려버리기도 했다. ‘/사용자_폴더/특정폴더/특정폴더/특정파일’을 지워야 하는데, ‘/사용자_폴더 /특정폴더/특정폴더/특정파일’를 지워버린 탓이다. (두 개 이상의 파일을 지우고 싶을 때 파일 이름들을 띄어쓰기해서 나열한다.) - https://github.com/MrMEEE/bumblebee-Old-and-abbandoned/issues/123

[2]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8) 직감 - http://scienceon.hani.co.kr/282571

[3]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19) 샛길 - http://scienceon.hani.co.kr/350763

[4]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7) 최초 - http://scienceon.hani.co.kr/277956

[5]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9) 마케팅 - http://scienceon.hani.co.kr/176519

[6] 디바이스 드라이버: 마우스 같은 기기를 컴퓨터와 연결했을 때, 컴퓨터가 기기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이를 디바이스 드라이버라고 한다.

[7]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디펜스를 통과해야 한다. 이 시점은 아직 디펜스를 시작하기 전이다. 하지만, 디펜스는 사전에 지도교수의 검증을 거친 뒤에 하게 된다. 또, 다른 심사위원들과도 프로포잘을 통해 어느 정도하면 디펜스를 통과할 수 있을지 미리 이야기하게 된다. 따라서 디펜스 때 떨어질 확률이 크지는 않다. 애초에 디펜스를 안 시켜주니 어려운 것이다. 물론, 디펜스에 떨어져서 다시 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8] 왜 여자가 음식을 잘 하면 “시집가도 되겠네”라고 하는 걸까요? 음식을 잘하면 요리사가 되기를 권유하는 게 좀 더 논리적이고 매끄럽지 않나요?

[9]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6) 쓰다” 마지막 부분에서 교수님이 보내준 그 논문이다. - http://scienceon.hani.co.kr/274724

[10] 1993년에 발매된 듀스(Deux)의 앨범 <Deuxism>의 타이틀곡인 “우리는”의 가사이다.

[11] 카르텔: 기업 간의 담합을 의미하는 경제용어. 담합을 통해 폭리를 취하는 경우를 비판하려는 경우에 주로 쓴다. 확장된 의미로, 특정 집단의 사람들이 담합을 통해 특권을 유지하려는 경우에도 사용된다. 물론, 박사가 된다고 대단한 특권이 있지는 않다. 정원이 혼자만의 생각이다. 작가의 생각은 아니다.

[12] 맥락상 소설 속에 심사위원으로 등장하는 교수에 한정된 말이다. 물론, 내 주변의 교수들도 다 실력 있고 머리 좋다. 절대 카이스트 총장님이 볼까봐 사족 다는 것이 아니다.

[13]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2> (1) 멘탈파쇄 - http://scienceon.hani.co.kr/242496


  ■ 작가의 말

제 소설은 약간 용두사미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특히 이번 편이 그렇죠. 정원의 프로포잘은 길게 써놓고 준상의 디펜스는 몇 문단으로 끝내잖아요. 이제껏 연구하는 이야기 잔뜩 써놓고 프로포잘과 디펜스 준비 과정은 통편집해버리는 건 또 어떻고요.


하지만 그게 다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면 지루하니까 새로운 부분만 재미있고 간결하게 전달하려는 노력입니다. 아시겠죠? (좋아, 자연스러웠어!)


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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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대 카이스트 전산학 박사과정
20대를 공대에서 보내고 30대도 공대에서 맞이한 전산학도. 그리고 소설 쓰는 사람. 무언가를 고찰하여 글로 표현해내는 것을 좋아한다. <용감한 작가들> 회원이며 페이스북 페이지 <글 쓰는 김창대>를 운영 중이다. https://www.facebook.com/holypsychowrites
이메일 : holypsych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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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실은 남극 속 냉동창고일 뿐이다’‘현실은 남극 속 냉동창고일 뿐이다’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김창대 | 2016. 04. 15

    연재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시즌Ⅱ [지난 줄거리]권대성 교수가 학교를 옮기게 됐다. 고민 끝에 석사 1년차와 박사 1년차 학생들은 연구실을 옮긴다. 나머지는 좀 더 힘겨운 대학원 생활을 지속한다. 8월, 학회의 논문 마감이 있다. 길영, ...

  • 소설: ‘케이-알파맨’소설: ‘케이-알파맨’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김창대 | 2016. 03. 18

    김창대의 단편소설알파고 쇼크 또는 열풍이 한국사회에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아니 여전히 많은 담론과 화제를 낳고 있습니다. 사이언스온의 연재소설 작가이자 카이스트 전산학과 박사과정 대학원생인 김창대 님이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 2'의 연재를...

  • 행복과 불행의 사이클이 완성되었다행복과 불행의 사이클이 완성되었다

    소설- 박사를 꿈꿔도 되나요김창대 | 2016. 03.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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