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호의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

영국 대학의 첨단 실험실에서 기생충학을 공부하던 정준호님이 어느 날 의료봉사단을 따라 아프리카 스와질랜드로 날아갔습니다. 실험실을 벗어나 세상 속으로 뛰어든 그가 아프리카에서 겪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전하며, 우리에게 익숙한 과학과 의학의 모습을 아프리카의 시선으로 낯설게 다시 바라봅니다.

[연재] "고백한다, 내가 배운 열대의학은 허깨비였다"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 (21)





00africaJJH » 기생충학을 배운 내가 가장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역시 장내 기생충 감염률 조사와 장내 기생충 약을 배포해주는 일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 열대의학에 관한 글을 <사이언스 온>에 연재한 지도 어느 새 반년이 넘게 흘렀다. 얼마 전에 의료봉사 활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이제는 이 연재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아프리카에서 만난, 잊지 못할 사람들의 얘기가 이 연재의 실제 마지막 글이 될 것이다). 연재 마지막 글을 앞둔 이 글에서는 그동안 내가 다뤄왔던 '열대의학'이란 것이 허깨비나 다름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하고 싶다.

 

오늘날 의학이 발달한 고소득 지역에서는 좀체 찾기 힘든 질병, 즉 기생충 질환 같은 '이국적인' 질환들을 다루는 분야를 열대의학이라 총칭하기는 하지만, 그 경계란 사실 모호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열대의학이라고 해서 여기에서 다루는 질병들이 꼭 열대지역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열대질환들은 폴 파머가 <권력의 병리학>에서 다룬 것처럼 지리적인 요인보다는 구조적인 폭력이나 빈곤, 소외 같은 요인들에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지난 글들에서 나는 질병, 특히 열대질병이 어떻게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영향에 의해 형성되었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생물학적 요인들도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사실 그 이상으로 사회 전반의 요인들이 사람들의 질병에 더 큰 영향을 주고 더 큰 역할을 주도해왔다. 그리고 열대의학도였던 내가 지금 "열대의학이 허깨비 같다"고 고백하는 이유는, 지금의 열대의학, 나아가 의학과 과학 전반이 이러한 관점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외 질환'이라고 불러야 마땅한 열대질환의 현실을 대부분을 놓치고 있는 열대의학은 사실상 허깨비나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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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열대의학 탄생의 배경

'제국의 구조를 지키는 융합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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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질병이라고 불리는 그런 질병을 연구하는 분야에서도 사회적 요인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은 열대의학의 역사적 배경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1898~1899년 사이 영국에서는 의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졌다. 모기가 사상충을 옮긴다는 사실을 발견해 매개성 질환 연구에 새 장을 연 패트릭 맨슨이 '열대의학'이라는 개념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을 대표하는 의학자로서 유명세를 얻은 맨슨은 자신의 정치력과 유명세를 충분히 활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당시 식민성 장관이었던 조셉 체임벌린은 이 열대의학이라는 개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구조적 제국주의'를 꿈꾸고 있던 체임벌린은 열대의학이 제국의 구조를 유지하고 영국의 경제와 사회적 제국주의를 전파시키는 데 필수 요소라고 생각했다.

 

기존 의학계의 수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또 체임벌린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1898년 영국 의학협회 회의에서(말라리아가 모기에 의해 매개된다는 로널드 로스의 발견이 발표된 바로 그 회의에서) 열대의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의 창립이 정식으로 공표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식민성의 지원을 등에 업고 새로운 의학 분야를 개척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맨슨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도 결부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 덕분에 열대의학은 식민과학의 대표 격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열대' 의학이라는 이름 역시 영국 식민지에서 가장 큰 가치를 지니고 있던 인도 아대륙의 열대지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셈이다.


이듬해인 1899년에는 식민성이 직접 자금을 투자해 열대의학 전문학교인 런던 열대 의학 학교(지금의 런던 위생 열대 의학 대학원)를 열게 된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만 하더라도 열대의학과 임상의학은 한데 묶여 있었다. '제국의 하인'들과 제국의 기반을 굳건히 지켜주는 학문이라는 태성적 특성 때문에 열대의학은 임상의학, 공중보건, 위생, 자연과학, 미생물학 등을 한데 아우르는 복합적인 학문이었고, 따라서 기초연구와 임상의학의 접목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1929년까지 학교 건물 안에는 임상의학교실과 기초연구시설이 함께 있었으며, 이런 조합은 훌륭한 연구 실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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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의학에서 멀어진 열대의학

열대의학도가 아프리카에서 마주친 당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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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29년을 기점으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앞에서 얘기했다시피 열대의학이라는 분야는 오랜 기간에 걸친 의학적 개념의 변화나 급진적인 기술적 진보에 의해 나타났다기보다는 국가와 사회의 이익, 그리고 패트릭 맨슨이라는 인물의 수완에 의해 난데 없이 나타난 의학 분야였기 때문에 기존의 의학계는 식민성의 막대한 지원을 등에 업고 의학계의 자원과 인력을 빼앗아가는 열대의학을 그리 곱게 보지 않았다.

 

또한 1910~20년대를 지나며 건강과 의학을 바라보는 의학계의 시선도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1916년 미국 의학계에서 나온 발언을 보면, '의학은 개인의 건강을 다루는 분야와 집단의 건강을 다루는 분야로 나누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이, 미국에서도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세워진 블룸버그 공중보건 학교가 임상의학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임상과 연구의 분립이 나타났다. 영국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임상과 연구의 분립이 이뤄지면서 열대의학은 진보했는데도 역설적으로 영국으로 들어오는 열대질환 환자들은 점차 줄기 시작했다. 기존 의학계에서는 열대의학 학교에 너무 과도한 예산이 투자되고 있으며, 환자 규모에 비해 연구 시설이나 병동 시설이 너무 크다는 비판이 계속되었다. 결국에 1929년, 현 런던 위생 열대 의학 대학원은 기초 연구 시설로 임상 병동과 분리되어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열대의학은 임상의학과 기초연구의 긴밀한 관계에 기반을 둔 학문에서 기초연구에만 집중하는 연구실 속의 학문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오늘날 열대의학에서 임상의학과 기초연구 사이의 간극은 쉽사리 메꾸기 어려울 정도로 벌어져 버렸다.

 

열대의학 학교의 탄생과 굴곡에 대한 지난 100년의 이야기는 내게는 이제 그저 역사 속 이야기가 아니다. 이렇게 세워진 런던 열대 의학 학교에서 공부한 나도 학교를 졸업하고 아프리카에 오기 전까지 이런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열대의학 형성의 배경은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 왔다. 건강과 안녕에 대한 의학의 관점이 공중보건과 개인 건강, 그리고 기초 연구를 깊숙히 분리시키면서, 기초연구 분야는 점차 현실과 마주치는 지점들을 놓치고 있었다. 기초연구자를 양성하는 학교에서 1년 동안 역학에 대한 수 많은 수업을 들었지만, 정작 열대의학 분야의 역학이란 공공의 건강과 개인의 건강에 대한 개념이 분리되면서 나타난 간극을 메우기 위한 절박한 노력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역학은 이러한 간극을 메우기 위해 기초연구의 생태적 이해를 통계적으로 풀어내 개인과 공공의 건강으로 이어내는 작업이라는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열대의학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말라리아 수업은 한 학기 가까이 들었지만, 누구도 왜 말라리아가 지금 열대 지역에 거의 국한해 나타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열대질환이 열대에서만 폭증하는 현상이 구조적 폭력과 소외, 세계 경제에 강제로 편입되며 나타나는 '인재'라는 사실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우리는 통계 자료를 어떻게 분석하고, 질병의 유행을 이해하는 수리적 도구들을 배우고, 기생충의 생물학적 특성과 진단법을 훈련받고, 질병 관리와 박멸 사업 방식들을 공부했지만, 정작 이런 배움들을 실제 현실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맥락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결국 학교에서 1년 간 많은 것을 배웠지만, 정작 현실의 열대의학 의료 현장에 나와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 없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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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건 의학이건 결국 사람을 향해야"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 얻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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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 1년 간 생활하며 학교에서 배운 것을 써먹은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던 적도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클리닉 방문 때 드렸던 약간의 차비, 화상 입은 아이가 올 때마다 쥐어 주었던 계란 하나, 에이즈로 상태가 악화일로에 있던 환자에게 주었던 닭 한마리 등이었다. 또한 학교에서는 매주 수십, 수백 편씩 쏟아져 나오는 최신 연구 논문들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하게 보이는 '적정기술'이 차라리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나는 이전에 처음 보는 진단 기술들에 경도되었고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기술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 때 접한 기술들 중 아프리카 스와질랜드에서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은 하나도 없었다. 몇몇 교수들은 적정기술에 대해 열심히 고민했지만, 그 역시 기술적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 왜 사람들에게 적정기술이 필요하고, 왜 그러한 적정기술이 필요한 환경이 조성되었는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는 간단한 문제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학 = 건강'이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건강에서 의학이 차지하는 부분은 그야말로 일부분에 불과하다. 과학적, 기술적, 의학적 성과가 아무리 놀랍더라도 불평등과 소외가 존재하는 한 언제나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한 상태가 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재생산될 수 밖에 없다. 현재 의학이 질병을 바라보는 관점, 즉 거대하고 복잡한 질병의 유행이라는 사태를 현대 의학과 과학이 사유하고 관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잘게 잘라 보는 관점에서는 언제나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어디에서든 시작점은 필요하다는 점에서 볼 때 질병을 생물학적 현상으로 국한해 바라보는 데엔 반대하지 않지만, 그 사유의 한계에 붙잡혀 질병이라는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인 기반, 그리고 무엇보다 경제적인 기반에서 자라난다는 사실을 잊고서, 개인의 건강이란 사회와 집단의 건강에서 나온다는 개념을 재구성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실수는 목숨을 앗아가고 고통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내가 배운 것은 아주 간단한 진실이다. 과학이건 의학이건 결국 사람을 향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가장 약하고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해.

 

글의 서두에서 얘기했다시피 제국주의에 기반을 둔 열대의학은 허깨비다. 그리고 세계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헤 충분히 고민하고 있지 않다면, 제국의 소수를 위해 봉사하는 열대의학이 점차 허깨비가 되어간 것처럼 지금의 과학과 의학도 역시 허깨비가 되어갈 것이다. 사람이라는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과학이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과학은 과연 그 맥락에서 어디쯤 서있는가.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며 우리가 말하는 '과학'이 정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시금 회의해 본다.


▶ 정준호의 글 모두 보기

 

 

참고문헌

Horton R. (2000) "How sick is Modern Medicine?". New York Review of Books, XLVII(17) (2 Nov): 46-50

Cook & Zulma. (2009) Chapter 1. History of Tropical Medicine, and Medicine in the Tropics. Manson's Tropical Diseases (21st ed). Saunders. London.



임상의학에서 멀어진 열대의학

열대의학도가 아프리카에서 마주친 당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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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호 기생충 애호가,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 저자
영국 런던대학 위생열대의학대학원에서 기생충학 석사학위를 받았다(2008). 아프리카 스와질랜드에서 자원봉사자로 1년간 기생충 관리 사업과 의료봉사 활동에 참여했으며(2010-2011), 다시 1년 간 굿네이버스 탄자니아에서 주혈흡충 관리사업 책임자로 있었다(2013-2014). 지은 책으로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2011)가 있으며, 우리말로 옮긴 책으로 <말라리아의 씨앗>(2014), <바이러스 사냥꾼>(2015)이 있다. 2016년 현재는 소속 없이 독립 연구자로 활동 중이다.
이메일 : byontae@gmail.com       트위터 : @byont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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