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람 온기 느껴지는 기생충연구자의 천일야화
_올해의 과학책 - 5월 서평___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
정준호 지음 | 후마니타스
부끄러움과 실망이 교차하던 시간에 정준호의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를 만났다. 그리고 서문에서, 아프리카 스와질랜드에서 기생충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식 생산자로서 그 생산된 지식을 현실에 전달하고 적용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회의가 들었다...” 하며, 저자가 낮게 그러나 힘주어 내뱉는 회의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인간의 영혼을 아니 영혼의 온기를 아직 보유하고 있는 과학자를 만났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최근에 카이스트 학생들의 이어진 자살 사건과 이후 이것이 카이스트 내부는 물론 우리사회 전체에서 문제로 다루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한 때는 스스로 과학자를 꿈꾸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현재 과학자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이 동시에 몰려와서 한동안 우울했다. 부끄러움은 지금은 과학자가 아닌 과학사 연구자가 되었지만, 과학과 역사를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이 과학사이고 보니 지금도 여전히 한쪽 발은 과학에 담그고 있기에 사태의 책임은 나에게도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다른 한편의 실망은, 뛰어난 과학자로 칭송받는 사람들 중에서 이번 사태에 대해 내가 동의할 수 있는 문제의 원인 분석과 해결의 처방을 제시하는 사람을 내가 거의 한사람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아무런 실패도 없이 늘 영재라고 추임을 받아온 젊은 과학도들이 연이어 자살하는 이유는, 그리고 과학을 잘 하려면 대학이라는 경쟁 집단 안에서 1년에 몇 사람 정도 자살하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말하는 위대한 과학자 총장님을 우리 사회가 모시게 된 이유는, 우리의 과학교육이 학생들에게서 영혼을 지우고 있으며, 그 결과 우리나라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영혼이 있어야 할 자리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라고 믿게 되었다.
생태의 거시 시각, 꼼꼼한 참고문헌 돋보여
그처럼 부끄러움과 실망이 교차하던 시간에 정준호의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를 만났다. 그리고 서문에서, 아프리카 스와질랜드에서 기생충 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식 생산자로서 그 생산된 지식을 현실에 전달하고 적용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했는지 회의가 들었다. 안락한 연구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구가 실제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가 닿을 수 있는가에 대해 얼마나 고민해 보았는지......” 하며, 저자가 낮게 그러나 힘주어 내뱉는 회의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인간의 영혼을 아니 영혼의 온기를 아직 보유하고 있는 과학자를 만났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기쁨은 과학과 자연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에 관한 내 감정일 뿐, 저자는 책 속에서 줄이면 줄마다 쪽이면 쪽마다 과학자의 영혼을 직접, 그리고 반복해서 강조하여 흥미를 줄이지 않을 만큼 충분히 영민하고, 생태학과 진화론을 결합하여 다른 과학 분야보다도 그리고 생물학의 다른 분야보다도 더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지식과 문장력을 지녔다. 책에 담긴 과학 지식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혐오해 마지않는 기생충에 관한 것이지만, 작은 생물체의 기발한 생존전략을 볼 때의 신기, 기생충과 숙주가 서로 돕거나 빼앗거나 지키면서도 상대 없이는 살 수 없게 만들어 놓은 자연의 오묘, 기생충의 비밀을 위해 여러 사람의 똥 냄새를 일부러 맡아보는 희극적 불쾌, 기생충을 이용해서 불치병을 치유하는 신약이 개발되리라는 기대 등등, 듣고 또 들어도 여러 날 즐거움이 계속될 기생충에 관한 천일야화가 그 안에 있다.
내가 이 책을 대하여 느낀 또 하나의 기쁨은 아마도 내용들 사이사이에 걸어놓은 참고 문헌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과학도서로는 드물게 다양한 전문적 연구결과를 이해한 다음 이들을 저자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서로 연결하여 서술한 것이다.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기생충의 생태, 기생충과 진화, 기생충 연구의 역사, 기생충의 유용성(치료법, 약물 개발)을 서술하고 있는데, 고전적 연구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최신의 연구 성과들을 참고하여 서술하였다. 어떤 한 분야의 전문과학자가 되면, 좁고도 세밀하게 자기의 분야에만 집중하는 것이 과학자의 일반적인 모습일 텐데, 생태학과 진화론이라는 처음부터 거시적인 시각을 동원해야 하는 기생충학의 특성 때문인지, 저자는 일관되게 자연계 전체, 혹은 다른 생물체간의 상호작용을 살피는 거시적인 시각을 잃지 않는다.
전문적인 연구 성과에 대해 저자가 제시한 해석, 그리고 그것을 다른 연구 성과에 대한 해석과 연결시켜 제시하는 새로운 해석에 대해 이 분야의 다른 전문가들이 얼마나 동의할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나는 저자가 한국어로 된 몇 안 되는 성과는 물론이요, 영어로 된 많은 연구 성과들을 성실하게 수집하고 분류하고 자신의 시각으로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했다는 것은 알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일은 그런 종류의 일을 업으로 삼은 사회과학자나 인문학자에게도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과학자이면서도 이를 수행해낸 저자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다.
쉽지 않은 '기생충'의 정의
책과 저자에 대해서 내가 받은 긍정적인 인상은 독자들이 책을 읽으면서 반복해서 확인하게 되리라 믿는다. 다만 상찬의 언사만으로는 서평에 부응하지 못할 것이니 독자로서 느낀 한 가지의 의문과 또 한 가지의 조언으로 의무를 면하고자 한다. 먼저, 혹시 내가 생물학에 문외한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제목에도 나와 있거니와, “기생충”이라고 써 놓고는 기생생물 전체, 혹은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생물 전체를 서술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저자도 인정하고 있듯이, 기생충을 개념적으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그렇다면 책의 제목은 기생충보다는 “기생”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저자에 따르면, 기생충학자는 다른 생물의 에너지를 빼앗아서 살아가는 생물이라고 보고, 생태학자는 숙주의 생식력을 저하시키거나 사망을 초래하는 관계라고 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런 정의로 포괄되는 기생충이라는 대상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보다는 좁은 것 같다. 저자는 정의의 대상을 더 넓히기 위해서 “두 생명체가 밀접한 연관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관계”이면서 “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의 체내 혹은 그 위에 살아가는 관계”라는 19세기 후반의 독일학자 안톤 드베리의 오래된 정의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관계”라고 하고 보니 개별 생명체인 기생충보다는 관계를 의미하는 “기생”이 책의 제목으로 더 타당하리라는 내 생각이 힘을 얻는 것 같다.
한편, 기생이라는 관계에 집중하다 보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다루어야 할 지경에 이르고 말 수도 있어서 오히려 기생충에 대해 적당한 정의가 없다는 저자의 고충이 이해되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구상의 생물체들 중에서 다른 생물과 밀접한 연관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신체에 함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또 현재로서는 기생 관계가 아닌 것으로 보이는 두 생물이 좀 더 깊은 연구를 통해 기생 관계에 있음이 확인될 수도 있다. 책에도 나오듯이,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처럼 연구가 깊어지면서 잘못 알려진 기생 관계의 실상이 분명하게 밝혀지거나 알지 못했던 기생 관계가 새로 드러나는 경우는 대단히 많다. 어찌 해도 답은 분명하지 않으나, 이 책에서는 제목에 나온 기생충이 지칭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생물을 다루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네 개의 모둠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세 번째 모둠인 “기생충 역사로 돌아오다” 부분의 서술과 참고문헌에 관한 저자의 부주의를 지적해야 하겠다. 이 부분은 기생충 연구의 역사, 기생충 퇴치의 역사, 기생충으로 인한 사회 변화의 역사 등 기생충과 관련된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 부분은 과학자가 보기에는 흥미가 덜한 부분일 수도 있지만, 나 같은 과학사학자가 보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무엇 때문인지, 이 모둠에서는 다른 모둠에서와 달리 참고문헌을 생략한 서술이 많다. 기생충에 관한 실험을 소개할 때는 한 줄에 불과한 통계 수치에 대해서도 근거한 문헌을 굳이 밝혀주던 저자가 말라리아와 이것을 일으키는 모기를 퇴치하기 위해 벌인 인간의 사투, 그 사이에 일어난 생태계의 변화, 그리고 인류 사회의 변화 등에 대해서는 왜 근거 문헌을 주지 않는 것일까. 그런 흥미진진하면서도 과학의 한계이자 어두운 면, 나아가 인간과 생태계의 관계 등에 대해서 새로운 통찰을 주는 소중한 역사를 연구하여 밝혀낸 사람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이 책을 보는 독자들이 원할 때는 더 깊은 지식을 찾아가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도 저자가 의지한 참고 문헌을 밝혀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글쓴이
전용훈/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한국과학사
[알림]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