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숙주와 기생충, 뛰어라, 경쟁하라, 공존하라
» 아프리카 스와질랜드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지은이 정준호(왼쪽)씨와 어린 친구 '센조'.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
정준호 | 후마니타스
대변 봉투과 기생충의 추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가 주로 우리 사회의 경험에 주로 바탕을 두고 있었다면, 이 책은 기생충을 바라보는 그 시야를 자연과 생태계, 그리고 지구촌 공동체로 넓혀준다. 영국에서 기생충학 석사를 마친 뒤 지난 1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한 정준호씨의 책은 기생충을 박멸의 대상만이 아니라 기나긴 생물 역사와 현 생태계에서 함께해온 생태계의 일원으로 그려낸다.
오래 전, 연례 행사처럼 초등학교 교실에 풍기는 똥 냄새로 개구장이들 사이에서 왁자지껄하게 했던 ‘대변 봉투’의 추억은 이제 아스라하다.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같은 기생충의 감염률은 지난 1971년만 해도 84.3%였다가 기생충박멸협회의 위생 사업에 힘입어 1981년엔 41.1%, 86년엔 12.9%로 급속히 줄면서 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한 대변 검사도 사라졌는데, 그게 완전히 사라진 건 1996년 무렵이라고 한다. 갖가지 기생충들과 싸워야 했던 그 때 그 시절에, 우리는 저개발의 빈곤과 비위생의 상징으로서 기생충과 싸워야 했다. ‘박멸’해야 했다. 기생충 감염률은 2000년 2.51%였다가 2006년 4.45%로 조금 늘긴 했지만, 이제 기생충은 더이상 우리만의 관심사가 아니게 됐다.
기생충의 추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가 주로 우리 사회의 과거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면, 최근에 출간된 책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는 기생충을 바라보는 그 시야를 자연과 생태계, 그리고 지구촌 공동체로 넓혀준다. 영국에서 기생충학 석사를 마친 뒤 지난 1년 동안 아프리카 스와질랜드 시골마을에서 의료봉사를 한 정준호씨의 이 책은 기생충을 박멸의 대상만이 아니라 기나긴 생물 역사와 현 생태계에서 함께해온 생태계의 일원으로 그려낸다. 이 책에서 기생충은 어떤 경우엔 악당이며 어떤 경우엔 경쟁자이고 어떤 경우엔 생태를 구성하는 연결고리이다.
이 책이 다루는 ‘기생충’의 개념은 조금 다르다. 회충, 편충, 요충, 십이지장충이나 간디스토마처럼 우리 몸에 기생하는 ‘벌레’들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체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 생물체의 에너지를 빼앗아 오거나 이용하는 기생의 생물체들을 모두 아울러 이 책은 ‘기생충’으로 다루고 있다. 기생충학계에서 쓰는 더 정확한 말은 기생물 또는 기생생물이겠지만, 지은이는 일반인한테 이미 더 친숙한 말인 ‘기생충’을 기생생물과 같은 의미로 쓰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벼룩이나 진드기 같은 절지동물, 말라리아 같은 원생동물, 회충이나 구충 같은 선충에서 균류나 바이러스까지 다양한 질병과 생물들을 모두 포함한다). 그러니 이 책은 단순한 국민 위생 지침서가 아니다. 숙주와 기생충의 오래되고 다양한 관계들을 살피는 자연사이자 생태학, 그리고 인간과 기생충의 투쟁 역사와 기생충을 매개로 한 제국주의 역사를 다루는 세계사까지 포괄하는 기생충의 인문·사회와 과학 교양서인 셈이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기생충 또는 기생이란 무엇이냐’라는 기초에서 시작해서 그동안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진 숙주와 기생충의 다양한 생태학적 관계들을 보여주며(제1장 기생충이란 무엇인가, 제2장 붉은 여왕과의 뜀박질), 둘째는 인간의 역사에 기생충이 어떻게 개입했으며, 인간의 정치·경제·사회 안에서 기생충은 어떻게 다뤄져 왔는지, 즉 인간과 기생충의 상호작용 역사를 다룬다(제3장 기생충, 역사로 들어오다). 마지막은 인간과 기생충의 평화공존이 가능한지, 기생충의 미래는 어떠한지 등에 관해 조망한다(제4장 가능성의 생물, 기생충).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수많은 연구 사례들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 때문에 책을 읽다보면 숙주와 기생충 간에 벌어지는 쫓고 쫓기며, 속이고 속으며,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무궁무진한 사례들을 바이러스, 박테리아, 곤충, 포유동물의 생태계 네트워크에서 볼 수 있다. 때로는 ‘사례의 나무들’ 속에서 헤매다보면 '숲의 길'이 어디로 나 있는지 찾기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에서 지은이가 이야기의 뼈대로 쓰고 있는 열쇳말을 하나 찾으라고 누군가 요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붉은 여왕’이라는 기생충학 이론일 것이다.
'붉은 여왕’!
과학 이론의 이름치고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일단 그 이름 짓기의 유래부터 들어보자. 지은이는 ‘붉은 여왕’이라는 말은 <거울 나라의 엘리스>에서 따와 새로운 기생충학 이론에다 붙인 이름이라고 전한다. 파워 블로거인 지은이 정준호씨가 운영하던(그는 얼마 전에 입대해 군 복무 중이다) 블로그의 간판도 ‘붉은 여왕의 기생충 세계’를 뜻하는 영문(Parasitic Realm of Red Queen)인데, 마침 그가 왜 이런 블로그 간판을 내걸었는지 과학웹진 <사이언스온>에 설명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을 옮긴다.
“블로그 간판인 “Parasitic Realm of Red Queen; byontae”는 유명한 기생충학 관련 이론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기생충이 성의 진화를 불러왔다는 ‘붉은 여왕(Red Queen)’ 가설은 지금까지 기생충을 바라봤던, 그리고 진화를 바라봤던 관점을 완전히 바꿔놓은 일대 혁명이었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등장하는 붉은 여왕은 엘리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달리더라도 결국은 같은 곳에 머물게 되지. 그러니 어디엔가 도달하고 싶다면 적어도 그 두 배는 빨리 달려야 하는 거야.’ 기생충과 숙주의 끝없는 줄다리기를 가장 잘 표현한 문구라 할 수 있지요. 모든 생물들은 기생충과 이런 끝없는 군비경쟁의 달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런 간판을 짓게 되었습니다.”(사이언스온과 과학 블로거들의 대담 기사 중에서)
책의 제2장은 제목(‘붉은 여왕과의 뜀박질’)처럼 붉은 여왕 가설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 붉은 여왕 가설은 미국 시카고대학의 리 벤 베일런이 처음 내놓아 알려지고 매트 리들리의 책 <붉은 여왕>을 통해 유명해진 기생충학 이론이라고 한다. 그것은 생명의 진화를 설명하는 개념이다. 진화론에서 이미 널리 받아들여진 ‘(환경에 대한) 적응’ 말고도 생태계 경쟁자들 간의 ‘경쟁’이라는 것도 생명 진화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개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쟁하는 생물체들의 번식 경쟁, 기생생물과 숙주의 감염과 면역의 경쟁, 먹이와 포식자의 달리기 경쟁 같은 경쟁들은, 똑같이 환경에 적응했더라도 경쟁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또하나의 진화 게임 원리가 된다. 그런데 그것은 달려도 달려도 종착지가 없이 더 빨리 달려야 하는 끊임없는 달리기이다. 숙주가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경쟁자인 기생충도 더 빨리 달리고 있기 때문에, 숙주는 다시 그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한다. 숙주와 경쟁하며 번식에 성공하려는 기생충의 처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숙주와 기생충은 늘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면서 더 열심히 달리는 경쟁의 관계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눈으로 볼 때엔, 기생충 그것은 늘 우리를 더 뛰게, 더 경쟁력 있게 바꾸는 붉은 여왕이다.
사실 제2장 뿐 아니라 1~4장 모두에서 숙주와 기생충의 관계는 대부분의 경우에 이런 붉은 여왕 가설의 구도 안에서 설명된다. 멈추지 않고 더 빠른 속도로 변신하며 새로운 무기를 들고 달려오는 기생충들의 감염 공격에서 벗어나 “머물러 있기 위해서라도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여러 숙주 생물체들의 변화를 보여준다. 성(유성생식)의 탄생은 붉은 여왕 가설의 대표적인 사례로 얘기된된다. 유성생식은 “숙주가 기생충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방어기제”로 설명된다(77쪽). 자웅이체 부모의 유전자가 뒤섞여 세대마다 다른 유전적 다양성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가설을 더 확장하면, 기생충은 동물들의 짝짓기 형태를 결정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수컷(공작)이 현재 유행하는 기생충에 저항할 수 있는 유전자가 있어 기생충에 덜 감염된다면, 장식들을 더 크고 화려하게 발달시킬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다. . . 기생충 감염률과 장식의 크기와 화려함이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여러 연구들이 지지해주고 있다”(81쪽). 이밖에도 흥미로운 여러 사례들이 있다.
공생 관계 뿐 아니라 기생 관계도 생태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연결고리라는 사실을 다시 환기할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을 읽는 재미다. 숙주와 기생 둘만의 관계로 보면 불평등만이 보이지만, 생태계 순환의 차원에서 보면 기생충은 생태계의 흐름을 조절하고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무엇보다 “기생충은 숙주의 유전적 다양성을 유지시키는 역할”(274쪽)을 하고 있음은 누구도 부정하기 힘들지 않은가? 또한 숙주의 생물학적, 사횢적 행동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은가? 그러니 이런 ‘관계’를 알아야 생태계에 대한 풍부한 이해도 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기생충은 생태계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좋은 모델이 된다”(24쪽).
이 책이 다루는 인간과 기생충의 세계사는 기생충학 교과서가 보여줄 수 없는 ‘기생충의 정치경제학’이다. 주로 근대 유럽 제국 팽창의 시기를 다룬는 이 장에서 지은이는 인간의 세계사에 비인간인 기생충이 어떻게 개입했는지 보여준다. 기생충학은 제국 팽창의 학문적 도구 중 하나가 되었으며, 유럽에서 식민지로 옮아간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들은 식민지 점령의 강력한 무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제국들의 식민지 개발 전략과 기생충의 번식 조건들이 별개가 아니라 밀접하게 상호 영향을 끼치는 관계였다.
“감염학의 발달과 함께 기생충학은 17~18세기 유럽이 아프리카와 인도, 남아메리카를 중심으로 광대한 식민지를 점령하면서 크게 발전했다. 식민지 사업은 나날이 번창하고 있었지만 인도나 아프리카에서 유럽인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토착민들의 반발도, 다른 유럽 국가와의 경쟁도 아닌, 바로 질병이었다. 특히 아프리카 서남부 지역은 ‘백인들의 무덤(white men’s grave)이라고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유럽에도 말라리아나 장내기생충 등 다양한 기생충 질환이 유행하고 있었지만 아프리카나 인도에서 유행하는 질병들은 유럽인들이 처음 겪는 것이었으므로 면역성이 없어 파견 인력들에게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138~139쪽)
“식민지 주민들은 더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대단위 집약식 농업이 이루어지면서 인구밀도가 높아졌고, 인구 증가를 뒷받침할 만한 위생시설은 갖추어지지 않아 질병이 유행하기 좋은 환경이 되었다. 급속도로 성장하던 영국과 유럽의 면직물 산업을 지탱하기 위해 개발된 대규모 목화 농장 지역이 특히 큰 피해를 입었다. 무차별적인 개발은 모기 같은 질병 매개체들이 폭발적으로 번식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강제 이주는 질병에 면역력이 없는 사람들을 기생충 유행 지역으로 끌어들였다.”(139~140쪽)
기생충의 사회학, 또는 기생충의 정치경제학에 관한 이 책의 이야기는 근대 제국주의과 그 이후에 전개되고 있는 지구촌 공동체의 기생충 문제들까지 아우르며 이어진다. 지은이는 “기생충은 역사를 형성해왔고 역사는 기생충을 형성해왔다”며 “생태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사회에도 오랜 시간 뿌리 내려온 기생충은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기생충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208쪽). 지은이는 지난 1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하며 이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들을 부지런히 써서 국내 독자들에게 들려준 바 있다(사이언스온의 연재물 ‘아프리카에서, 살며 배우며’)
이 책은 기생충을 혐오스러운, 또는 박멸·멸종시켜야 하는 기생생물로만 바라보는 제한된 시야에서 벗어나기를 권한다. 당연히 인류에 위협을 가하는 기생충에 대응해 나쁜 기생충을 퇴치하고 인류를 보호하려는 노력은 필수적이며 지속되어야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더 큰 시야에서 기생충을 이해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은이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아마도 더 넓은 지구 생태계의 시야에서, 생물다양성과 생태 네트워크의 시야에서, 기생충을 이용하고 그에 이용되는 정치경제학의 시야에서, 기생충의 일면이 아니라 기생충의 이모저모를 모두 다 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일 게다. 이 책은 다양한 연구 사례들을 인용하고 있다는 데 장점이 있는데, 정작 그런 사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하는 색인(찾아보기)이 책 뒷부분에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관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