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연구자들의 "청춘 스케치"

연구의 맛과 멋을 배우는 젊은 연구자들이 실험실에서, 연구실에서, 그리고 사회와 만남에서 얻는 에피소드와 경험, 그리고 생활의 단상을 전합니다.

과학 연구하는 나는 과학을 ‘즐기고’ 있는가

홍주은의 ‘천문학 연구생의 동서남북'

[3]  가끔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00HJE_astro2.jpg » 2012년 5월 21일 연구실 옥상에서 교수님과 학생들이 부분일식을 관측하고 있다. 사진/ 홍주은 '성을 품은 해.'

해가 금성을 따스하게 품고 있던 날이었다. 2012년 6월 6일 금성은 태양면을 통과했다. 이번 세기의 마지막 금성일식이라 하여 우리 학과 사람들은 일반인을 위해 공개 관측행사를 열었고 샛별을 맞이할 준비로 연구실은 동트기 전부터 시끌벅적했다. 난 석사학위 논문 발표가 이틀 앞으로 다가와 연구실에서 밤을 샜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2117년에나 볼 수 있다니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금성일식 행사를 도울 기회이군’이라는 생각에 관측 행사를 돕기로 했다.


금성이 태양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사실 밤에만 관측하다가 낮에 관측하는 것 자체가 낯설고 어색했다. ‘바이센티니얼맨’이 아니면 죽을 때까지 다시 못 볼 광경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니 도우미라는 본분을 망각한 채 혼자 더 설레고 흥분하고 있었다. (태양을 관측할 때 맨눈으로 망원경을 들여다보면 매우 위험하다. 반드시 필터를 써야 한다. 바이센티니얼맨(Bicentennial Man)은 인간 감정을 느끼게 된 로봇을 다룬 영화. 주인공 로봇은 두 세기에 걸쳐 살았다)

 

오전 7시부터 6시간 넘게 100명도 넘는 시민이 태양 품에 고이 안긴 금성을 보러 왔다. 과학에 호기심이 많은 어린아이부터 부모님을 모시고 온 대학생까지 다양한 시민을 만났다. ‘조(Joe)’’라는 외국인은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는데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다.

 

조는 행사에 참석해 금성을 한참 보고 갔다. 금성이 태양면을 더디게 움직이는 동안에 조는 도우미들과 수다를 떨었고 나도 우연히 대화에 끼어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됐다. 교내 언어교육원에 다닌다던 그는 과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었다. 조는 미국에 있을 때부터 천문 현상에 관심이 많아 신기한 현상이 있을 때마다 미국에서도 천문 현상을 자주 보곤 했다고 한다.



알래스카로 온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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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천문학과 금성일식의 원리와 관련해 호기심 어린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과학 행사에 도우미로 일하다 보면 호기심 많은 어린이는 자주 보지만 어른이 신기해서 흥분하는 모습은 드물기만 하다. 하지만 조는 좀 달랐다. ‘흥미로워요(interesting)’을 외치던 표정. 그 표정에서 느낀 것이 참 많다. 조는 과학을 전공하지도 과학상식을 많이 알지도 않았지만 과학을 진정 즐기고 있었다.

 

사학위 발표를 무사히 마치고 다음날 학회를 위해 알래스카로 떠났다. 알래스카에 머무는 동안 생각지도 않게 조에게서 메일을 받았는데 석사학위를 받았는지 안부도 물으면서 혹시 다른 천문 관측 행사가 있으면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서울이 아니라도 좋으니 천체를 볼 수 있는 곳이면 가고 싶다고. 순간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조는 정작 과학을 연구하고 있는 나보다도 더 과학에 열정적이었다.

00HJE_astro_venus.jpg » 2012년 6월 6일 금성(왼쪽 위 검은 점)이 태양면을 통과하고 있다. 작은 점들은 태양 흑점이다.

지난해 1학기에는 부분일식, 금성 태양면 통과처럼 자주 볼 수 없는 천문 현상이 유독 많이 일어나 한 달에 한 번 꼴로 관측행사를 돕다 보니 솔직히 귀찮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금성일식 때는 밤새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가서 귀찮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지는 않았을까. 돌이켜보니 조에게 괜히 미안해진다. 조보다 더 큰 열정을 가지고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줘야 했는데…. 과학이 흥미롭고 우주가 궁금하다면서 언제부턴가 난 컴퓨터와 종이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며 우주를 즐기는 날은 점점 줄어들었다.

 

알래스카에서 조의 메일을 받아 읽고서 잠시 커튼 뒤로 비치는 해를 바라보았다. 해는 하얗게 눈 덮인 산 옆에 낮게 떠있다. 자정이지만 밖은 여전히 밝았다.


 

과학을 싣고 과학을 즐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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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는 8월에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래서 국립과천과학관을 소개해 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국립과천과학관 말고는 소개해줄 곳이 마땅치 않았다. 과학에 관심이 많은 그에게 관측 행사가 있는 곳을 많이 알려줄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 그래도 요즘은 어릴 적에 비해 지방에 과학관도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고 과학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이나 행사가 많아지고 있어 한결 기쁘다.

 

득 어렸을 적 생각이 떠오른다. 그때는 인터넷도, 번듯한 과학관도 없어 과학을 접할 수 있는 곳은 과학잡지가 유일했다. 달 표면도 15년 전 쯤 과학잡지에서 처음 보았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의 용돈으로 사기에는 과학잡지가 비싸서 살 엄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마침 오빠가 과학잡지 한 권을 사들고 와서 잡지를 펼치며 말했다.

“이게 달이야. 크레이터도 있고”

우리 남매는 한참 달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점점 가슴 깊은 곳에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었다.

 

십수 년 동안 과학 수업 시간은 나에게 과학을 가르쳐주었지만 보여주거나 느끼게 해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과학잡지 책은 과학을 즐기고 직접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비록 나는 과학잡지에서 달 표면을 처음 봤지만 요즘 아이들은 과학을 직접 체험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에 스무살에 상경한 뒤 한 동안 방학 때이면 과학관이나 청소년수련관을 찾아 봉사활동을 했고 그중에서 이동과학교실은 나 스스로 많은 것을 느끼게 했던 활동이었다.

 

온갖 장비를 실은 대형 트럭은 대한민국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과학을 실어 날랐다. 대형 텐트와 무대가 설치되고 과학 연극이 막을 열었다. 실제 연기를 전공한 연극배우들이 과학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연기하자 평소 과학을 좋아하지 않던 학생들도 재밌는 연극에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문득 과학은 과학자만의 것도 아니며 과학자를 꿈꾸는 아이들만의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관 같은 시설이 꼭 아이들에게 과학자를 꿈꾸게 하지 않더라도 조 같은 사람들이 과학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과학자는 과학을 궁금해 하는 이들에게, 즐기고 싶은 이들에게 궁금증을 풀어주는 사람이 아닐까.

00HJE_astro_moon.jpg » 소형 망원경과 핸드폰으로 찍은 달의 표면.

 

가끔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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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거리의 간판은 분명 과학의 산물이다. 도시의 빛 공해에 불과 30년 만에 밤하늘의 별은 쏙 들어갔다. 과학이 발달할수록 우주를 즐기기 더욱 어려워졌다니 참 아니러니한 상황이다.

 

명은 고도로 발달헀지만 우리는 정작 놓치고 사는 것들이 많아 안타깝다. 조금만 세상을 둘러보면 더 많은 것들이 있다. 봄철 퇴근길에 떠 있는 오리온자리와 한가위 때 가득 차오른 달, 바람에 스치우는 별…. 그토록 밝게 빛나고 있는 천체는 도심 속 공해로 뒤덮여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하늘을 올려다 볼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일 거다. 지옥철에서 탈출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앞만 보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추석 때 더욱 요란한 텔레비전 소리와 화투 소리, 책에만 박혀 있는 ‘별 헤는 밤’.

 

그저 누구든 퇴근길에 크게 떠오른 ‘슈퍼 문(super moon)’을 즐길 수 있었으면. 수많은 별이 보이지는 않아도 늘 항상 내 위에 떠있다는 걸 느꼈으면. 가끔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하늘과 바람과 별을 보며 노래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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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은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박사과정, 대학원생
활동성 은하핵의 기작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천문학도. 퀘이사의 환경, 초거대 블랙홀의 성장과 은하진화에 관심이 많다. 죽기 전에 이집트 피라미드는 꼭 직접 보고 싶다.
이메일 : jueunhong.astro@gmail.com      
블로그 : http://ju-o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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