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부다페스트 선언' 이후 세계는 지금, 한국은 지금

 

004 » 2009년 세계과학포럼. 사진 임현묵 팀장 제공

 

 

부다페스트에서 짚어본 한국 과학기술의 과제

임현묵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과학팀장

 

 

 

 

 

1999년: '과학과 과학지식의 이용에 관한 선언'

 

line » ■ 글을 쓴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임현묵 과학팀장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지난 한 해 동안 1999년 이후 10년간 한국 과학기술의 성과와 과제를 점검하는 과제의 연구책임을 맡았으며, 최근 과제의 결과물로서 <21세기 글로벌 사회의 과학기술 발전방향>이라는 제목의 연구보고서를 냈습니다. -사이언스 온

지금부터 10여년 전인 199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현대 과학사의 중대 이정표로 기록될만한 기념비적 행사가 열렸다. 각국 정부, 국제기구, 과학아카데미 등에서 온 2천명이 모여 개최한 세계과학회의(World Conference on Science)가 그것이다. '21세기를 위한 과학의 새로운 다짐'이라는 모토를 내건 이 회의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핵물리학자이자 퍼그워시 회의 창립자인 영국의 조셉 로트블라트는 모든 과학자에게 일종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게 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걸었다.

 

물론 로트블라트의 ‘과격한’ 요청이 21세기 과학기술의 글로벌 스탠다드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학의 눈부신 혜택과 이에 수반되어 발생하는 부작용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오늘날, 과학의 사회적 책임과 과학자의 윤리의식을 높이자는 그의 주장을 떨쳐버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회의의 결과물로 발표된 '과학과 과학지식의 이용에 관한 선언'은 과학이 인간 사회와 생태계의 관심사에 눈을 돌릴 것, 인문사회과학과의 학제적 활동을 강화할 것, 그리고 과학의 오용 가능성을 경계할 것을 주문했다.

 

과연 1999년 이후 지난 10여년 동안 세계 과학계는 스스로 쓴 반성문이라고도 할 '부다페스트 선언'의 약속을 제대로 지켰을까? 과학과 사회는 과연 이전보다 더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을까? 두나 강을 끼고 각기 발달한 부다페스트의 부다와 페스트처럼, 과학과 사회는 이따금 한번씩 만날 뿐 좀처럼 그 거리가 좁혀지기 어려운 사이일까? 10년만인 2009년에는 부다페스트에서 지난 10년을 돌이켜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더듬어보기 위해 세계과학포럼이라는 이름 아래 과학자, 과학행정가, 과학 저널리스트가 다시 모였다.

  

 

2009년: 부다페스트에서 본 세계 과학기술계의 풍향

 

2009년 부다페스트 세계과학포럼은 10년 전에 다짐한 ‘사회 안의 과학, 사회를 위한 과학’ 이념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여전히 세계 과학계의 최대 과제임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고 있는 주요 국가와 지역의 과학기술 행정가와 정책결정자들은 한 목소리로 오늘날 인간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현안 해결에 과학이 중대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동시에 과학이 사회와 소통을 위해 더 노력할 것과 시민의 요구를 더 잘 반영할 수 있는 과학 거버넌스 체계를 모색할 것을 주문했다. 아울러 현시대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과학계의 국제협력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개도국 과학계가 글로벌 무대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각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좀 더 구체적인 실천 방안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제시되었다. 과학과 사회의 소통 강화를 위해 모든 과학 연구에서 연구비 1%를 대중의 과학이해 증진에 사용하자. 과학언론을 발전시키고, 과학전시회와 공개토론회 등을 통해 과학과 사회의 간격을 줄여나가자. 국제기구 등도 과학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고 여성의 과학분야 참여를 촉진하자. 기초순수과학에 대한 연구지원 부족, 단기 성과주의나 상업주의 같은 외부압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경제학자나 사회과학자와 협력해 기초과학연구가 경제와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정도를 밝히자. GNP 대비 일정 비율 이상을 기초과학연구 지원 예산으로 책정하는 지침을 제정하자. 세계 여러 곳에서 과학교육은 교원 부족, 낙후된 교육과정 및 자료 등의 문제를 안고 있으므로 과학교사의 질적 향상을 꾀하고 교과과정과 교수법이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을 반영할 수 있도록 주기적으로 개정하자. 과학기술을 적절히 이용하도록 책임감을 높이고 사전예측을 실시하자. 

 

001 » 2009년 세계과학포럼. 사진 임현묵 팀장 제공

 

한국, 1999-2009: 과학기술의 눈부신 양적 성장

 

이처럼 세계 과학계는 자기 성찰과 사회와의 소통 강화를 위한 실천을 모색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이 물음에 답하는 데 일조하고자,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1999년 이후 10년간 한국 과학기술의 성과와 과제를 점검하는 과제를 지난 한 해 동안 수행했다. 부다페스트 선언의 주요항목들인 과학기술정책, 과학연구, 과학교육, 과학윤리, 과학문화, 과학참여 확대에 초점을 맞춰,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연구를 맡았다.

 

먼저 우리가 이룩한 성과를 보자. 한국은 이 기간에 눈부신 양적 성장을 이뤘다. 정부와 민간을 합친 국가 총 연구개발투자는 2000년 약 13조원에서 2006년에 약 27조원으로 6년만에 2배 이상 늘었고, 2008년 그 규모가 약 34조원에 달해 세계 7위를 달렸다. 1997년에서 2007년 사이 연구개발투자 총액 연평균 증가율은 8.0%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연구개발 인력 또한 2000년 약 16만명에서 2008년 약 30만명으로 꾸준히 늘어나 세계 7위에 올랐다. 이렇게 투자한 결과, 특허출원 건수가 2000년 10만건에서 2007년 약 17만건으로 늘어났다.

 

이 기간에 국민의 과학기술 관심과 이해도 점차 높아지는 추세를 보였다. 한국과학창의재단(옛 한국과학문화재단)이 2002년부터 2년마다 실시한 '과학기술 국민 이해도' 조사 결과는 국민의 과학기술 분야 관심 및 이해도가 조금씩 증가해 성인의 경우에는 2004년 57.1%에서 2008년 62.4%로 상승했음을 보여주었다. 과학기술 대중화의 중요 인프라라고 할 수 있는 과학관도 과학관 육성 기본계획에 따라 2003년 56개에서 2007년 62개로 늘어났다. 2008년 수립된 제2차 과학관 육성 기본계획은 2012년까지 과학관 수를 100개로 늘리고 2022년에는 200개로 늘리는 야심찬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여성의 과학기술 참여 확대에서도 괄목할 성과가 있었다. 여성 과학기술자 채용 목표제가 2001년 25개 출연연에서 채택되었고, 2002년 여성 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법이 제정되면서 이 제도의 적용대상 기관이 출연연을 포함하여 74개 공공기관으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99개 공공연구기관의 여성 채용 비율이 2004년 20%에서 2008년 22.1%로 높아졌다.

 

 

@한국과학: 경제성장 도구에서 삶의 질을 위한 과학기술 정책으로

 

이와 같은 성과는 그야말로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만큼 독보적인 것이다. 하지만 풀어야 할 숙제도 만만치 않다. 우선 과학기술은 산업발전이나 경제성장의 도구로 봉사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삶의 질 향상과 지구촌 현안 해결을 위해 과학기술 발전이 중요하다는 쪽으로 인식이 전환되어야 한다. 산업발전이나 경제성장을 위한 과학이 아니라, 사회를 위한 사회 안의 과학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삶의 질 향상이나 물, 에너지, 기후변화, 생물다양성 감소 문제와 같은 사회의 요구와 필요를 과학기술정책에 더 잘 반영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은 여전히 행정관료, 관련 기구, 소수 전문가들이 모여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전략산업과 전략기술을 선정하는 과거 발전국가 방식에 따라 입안되고 있다. 이 방식은 우리가 산업선진국을 따라잡는 데 집중하던 시기에는 유효했지만, 사회의 요구와 필요를 폭넓게 담아내는 과제에는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새로운 거버넌스 모형을 개발하여 실행하는 것이 시급하다. 소수 행정관료와 전문가가 한국 과학기술이 어디로 갈지를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결정하는 현재 시스템을 어떻게 하면 사회 구성원의 요구와 필요를 폭넓게 결집하여 이를 근거로 과학기술 관련 정책이 결정되는 시스템으로 바꿀지, 모두 지혜를 모아야 한다.

 

둘째, 기초연구 홀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한때 이공계 기피 현상이 사회 문제로 부각된 적이 있다. 그런데 이공계 학생의 기초과학 기피도 그에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다. 요즘 미래 연구인력이 의학전문대학원으로 몰리고 있다. 오늘날 세태에서 소득이 높고 안정된 일자리를 찾는 학생들만을 탓할 수는 없다. 오히려 기초과학 연구자의 삶을 택해도 사회에서 존경받고 생계가 보장되도록 기초학문을 진흥하고 전문연구기관을 늘리지 못한 기성세대의 잘못이 더 크리라. 지금까지는 선진국을 따라잡느라 단기성과 위주의 연구에 집중한 결과 그랬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변명이 통할 수 없다. 2008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국가 연구개발비 총액 대비 기초연구개발비는 16.1%를 차지한다. 마침 정부는 이를 2012년까지 50% 수준으로 높이기로 했다. 연구개발비 증액과 함께 기초과학 연구를 진흥하기 위한 종합적인 정책이 추진되어야 한다.

 

셋째, 과학교육은 과학기술 역량을 키우는 주춧돌 역할을 한다. 그러나 과학창의재단의 국민 과학기술 인식조사에서도 과학교육에 대해 부정적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과학교사 질 향상, 암기위주 수업 방식 탈피 등과 같은 과학교육 강화 조치와 함께, 과학윤리를 과학교육에 통합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넷째, 황우석 사건은 이제 세계 과학계에서 지난 10년을 대표하는 과학 스캔들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일본 과학계가 세계과학포럼을 대비해 작년 9월에 연 심포지엄에서 이 사건이 언급되었고, 세계과학포럼에서도 미국 과학진흥협회 앨런 레시너 회장이 과학과 사회간 긴장의 사례로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거론할 정도였다. 그동안 정부와 과학기술계의 노력으로 연구결과 조작이나 과장, 표절 같은 연구윤리 문제에 대해 경각심을 높이고 통제 장치를 마련하는 성과가 있었다. 연구윤리 법령과 규정이 제정되고 각종 위원회도 설치되었다.

 

문제는 이런 노력과 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학기술계는 과학윤리를 과학 발전을 방해하는 성가신 장애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너무 연구윤리에 치중한 것도 문제다. 외국의 검증된 과학기술을 모방하는 단계에서 선도적인 연구와 개발 활동을 늘리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윤리적 쟁점이 그만큼 더 많이 더 자주 발생하고 있고 과학기술이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놓이는 일이 더 잦아지고 있다. 이는 대중의 과학기술에 대한 신뢰 저하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다섯째, 법률 제정과 정책 추진으로 여성의 과학기술 참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민간분야나 공학분야의 성비 불균형은 여전히 높은 편이고 30대 이후 여성과학자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매우 낮다. 출산육아 이후 경제활동 재진입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 여성 이외에도 소득, 연령, 거주지에 따라 과학 참여가 저조한 계층도 있다. 이들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지원도 강구되어야 한다. 

 

 
임현묵 과학팀장 유네스코한국위원회 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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