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나는 왜 지금 과학을 하고 있을까?
배현진의 “연구실에서 만난 꿈, 고민, 미래” (2)
나와 우리 삶의 결정적 순간을 다시 생각하며
어릴 적에 위인의 전기를 읽다 보면 누구나 느꼈을 테지만, 그들은 마치 어릴 적부터 위인이 될 자질을 타고난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당연히 어느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위인인 것은 아니다. 과학을 연구하는 대학원생들도 역시 애초부터 과학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일반 시민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무언가 불의의(?) 사건이 그들에게 일어났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대학원에 갔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그들의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아보면 그들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은 내게 무엇이었고 무엇인가?
나는 왜 과학을 하고 있을까? 지금도 나는 가끔씩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팝업창처럼 갑작스럽게 떠오를 때가 있다. 물론 지금의 나는 이 답을 매우 잘 안다고 믿지만, 처음 이 질문이 떠올랐을 때에는 적잖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이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좀 더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나야만 했다.
어릴 적 나는 지방의 소도시에서 자랐다. 이사도 상당히 많이 다녔는데, 특히 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에는 제주도 해안가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매일 같이 나는 하늘과 바다와 들판을 보며 살았다. 운 좋게도 집 앞에는 해수욕장으로 쓰기에는 적당하지 않지만 상당히 넓고 괜찮은 백사장도 있었고, 그 주변에는 여느 제주도 해안가와 다르지 않게 각양각색의 현무암 바위들이 널려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풍경은 밤하늘의 별 뿐만 아니라, 날마다 바뀌는 자연 그 모든 것들이었다. 볕이 좋을 때에는 동네 뒷산(사실은 오름) 위에 올라가 미끄럼틀을 타거나 큰 구멍이 나 있던 현무암 바위에 들어가 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직접적으로 과학을 하도록 만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텔레비전 안에 나오던 과학자들의 이미지가 나를 사로잡았다. 당시 내가 만날 수 있었던 과학자라고는 주로 만화 속의 인물들뿐이었는데, 이를 테면 <독수리 오형제>에 나오는 남 박사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설정상 굉장히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다정하고 주인공들이 모두 믿고 따르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초등학교 시절 누군가 꿈을 물어보면 항상 당당하게 ‘과학자요’라고 말할 수 있었다. 과학자는 분명히 멋진 사람이니까.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과학자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초등학교의 ‘자연’ 과목에서 보던 것보다 과학은 더욱 복잡하고 외울 게 많았던 과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짧은 시간에 현대 물리학이나 생물학이 수백 년 동안 쌓아온 지식의 기본을 배우는 과정이 애초에 쉬울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제주도에 산 덕분인지 나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자연현상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과학 수업들은 항상 재미있게 들을 수 있었다.
이런 중학생 시절에 나에게는 과학에 대한 놀라운 체험이 딱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중1 여름방학에 했던 생물 해부 실습이었다. 과학에 관심이 많은 30명 정도 학생이 모여서 생물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개구리부터 토끼, 닭, 붕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물종을 조별로 해부했다. 내 생각에는 대부분 학생들이 처음에는 해부하는 것을 꺼려했던 것 같은데, 막상 해부를 시작하자 꽤 즐기는(?) 학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는 심지어 토끼 배를 가르려다가 바깥의 가죽만 가르고 그 뽀얀 뱃살을 차마 건드릴 수가 없어서 다른 학생에게 넘기고는 피비린내 나는 광경을 뒤에서 구경만 하다가 나왔다. 적어도 생물은 내 적성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체험은 중3 여름방학에 있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상당히 어두운 도시 변두리에 위치한 사립학교였는데, 일부러 그 학교를 찾아온 대학 아마추어 천문 동아리가 있었다. 그들은 학교에 미리 허락을 구한 뒤에 여름방학에 찾아가 천문캠프를 열겠노라 했다. 다행히도 우리 중학교에서는 그 일을 귀찮아하지 않고 적극 협조한 덕분에 이 일은 성사가 되었다. 학교 측에서는 캠프에 참가할 인원을 모집했지만 높지 않은 경쟁률 덕분에 나는 친구와 함께 별로 어렵지 않게 참가할 수 있었다.
'결정적 순간'은 그렇게 찾아오고
얼마 있지 않아 방학이 시작됐고 예정된 캠프가 차질 없이 진행됐다. 운 좋게도 캠프가 진행되던 2박3일 간 하늘에는 별이 총총했다. 대학생 형, 누나들은 우리에게 밤하늘의 별자리에 대한 강의도 하고 다양하고 무식하기까지 한 질문에 답도 해줬다. 캠프의 하이라이트는 천체 관측이었는데, 직접 가지고 온 망원경들을 통해 하늘에 밝게 빛나는 천체들을 하나하나 학생들에게 보여줬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망원경으로 목성과 토성을 만났다.
하늘에 스티커처럼 붙어 있는 줄 알았던 그 별들이 사실은 행성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프랑스의 유명한 사진가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은 그의 사진집에서 ‘결정적 순간(a decisive moment)’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단어는 17세기에 한 프랑스 추기경이 했다고 전해지는, ‘그 어떤 것도 결정적 순간을 갖지 않는 것은 없다’는 말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거나 나에게도 결정적 순간은 있었고, 행성을 들여다보던 바로 그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갈릴레오는 약 400년 전에 내가 그날 본 것과 똑같이, 자신이 처음으로 만든 작은 망원경을 이용해서 목성과 그 주위를 도는 위성들을 오래 관측했고 그 결과 지구 역시 태양을 도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미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행성들을 바라보는 사이에 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태양계 안에 있는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발붙이고 있는 작은 존재임을 확실히 느꼈던 순간이었다. 1994년 7월에 슈메이커-레비(Shoemaker-Levy) 혜성이 목성에 충돌하는 광경이나 1997년 7월에 소저너가 화성 위에 착륙하던 장면은 나에겐 아마 이 결정적 순간의 전조였던 것 같다. 그 날 내가 인식하는 공간은 지구 바깥까지 넓어졌고, 나는 결국 천문학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마치 영화 <메트리스>에서처럼, 빨간약을 먹어버린 네오랄까.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내가 과학을 하고 있는 이유이다. 나에게는 자연과 함께하며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고, 과학자를 동경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이런 결정적 순간을 만날 수 있었다. 장황하게 풀어 썼지만 지금 대학원생으로서 과학연구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 모두 이런저런 특별한 경험들과 결정적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다른 경험, 다른 기억을 갖고 있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본다면 내가 왜 과학을 하고 있는지, 내가 왜 과학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분명하게 내 스스로 갖고 있을 것이다.
과학이 다른 학문에 비해 특별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단지 누군가에게는 그런 피할 수 없는 경험들이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뿐이다. 만약 나의 결정적인 순간이 토끼를 해부하던 시점에 왔다면, 지금처럼 천문학이 아니라 생물학이나 수의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특별한 경험들이 진로를 선택하는 데나 연구를 하는 데나 큰 힘이 되어준다는 사실이다.
‘결정적 순간’이 가로막히는 경우
그 결정적 순간 이후 나는 꽤 적극적으로 변했다. 특히 누군가에게 천문학을 알리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아마추어 천문동아리 활동을 했고 나를 이해해주는 좋은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났다. 대학에 와서는 학과 교수님의 제안으로 ‘과학대중화 사업팀’을 결성하고, 동기 및 선후배들과 함께 천문학 강연과 야외 시민 관측회 등을 꾸려나갔다. 또한 어린이 과학캠프에 아동지도교사로 참여해서 초등학생 아이들과 과학 실험을 함께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던 이유 역시 모두 내가 겪은 ‘결정적 순간’ 덕분이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결정적 순간이 되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게 되고 싶다. 그런 순간들을 목격하고 함께하기 위해서 상당히 노력했지만 그 순간이 그렇게 쉽게 눈에 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척 속이 상하는 경험을 한 적은 있다.
어느 맑은 날 과학대중화 사업팀원들과 함께 서울 한강에 있는 선유도 공원에 망원경을 들고 가서 시민관측회를 열었다. 어린 학생들을 포함해서 지나가던 시민 분들이 꽤 많이 오셔서 우리가 망원경을 통해 미리 맞춰놓은 천체들을 들여다보시고는 상당히 신기해하고 재밌어하셨다. 그런데 부모님과 함께 지나가던 초등학생 한 명이 이쪽으로 다가와서 줄을 서더니 이내 망원경 접안부에 눈을 대고 들여다보았다. 아마도 토성을 보았던 것 같은데 학생이 무척 신기해하며 우리에게 이것저것 물어봤고, 마침내 자신도 천문학자가 되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그런데 옆에 서있던 어머니의 말이 그 순간에 찬물을 끼얹었다. “XX야, 너는 커서 의사가 되어야지.”
나는 옆에 서서 그 황망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주변에 있던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도 물론 좋은 꿈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진짜 꿈’이 아닐까? 더구나 내가 당황했던 것은 그 순간이 내가 그동안 보고 싶었던 ‘결정적 순간’과 그 결정적 순간이 가로막히는 순간을 동시에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마치고 그 어머니는 아이를 끌고 황급히 망원경에서 멀어져 갔다. 그 순간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부모님도 내가 천문학을 하겠다고 갑작스레 주장하던 무렵에는 약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셨지만 끝까지 나를 믿어주시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셨다.
대학교 2학년이 되어 천문우주학과에 배정받았을 때, 당시 학과장이셨던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기억난다. “여러분은 매우 고집이 센 사람들인 게 분명합니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곳 천문우주학과에 왔을 테니까요.” 그렇다. 나 역시 아마도 고집이 센 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 아이는 어떨까? 아이의 말처럼 천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역경이 예상되었다. 부디 아이의 고집이 그보다 세기를 바랄 뿐이다.
대학원생은 행복할 자격이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서 마지가 한 말처럼, 대학원생은 인생에서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일까? 나는 반대한다. 오히려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한 사람들에 가까울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진로나 직장을 결정하는 과정에 결정적 순간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혹시 해보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위에 나온 아이와 같은 이유로 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닐까?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을 면면히 살펴보면 대부분 자신이 강한 의지와 열정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고집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이러한 열정은 대학원생 개개인이 소중하게 갖고 있을 오래된 경험들과 결정적 순간들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모든 대학원생에게는 연구나 학업 혹은 경제적인 면에서 힘든 시기가 있지만 아마도 자신 스스로 과학자가 되기로 마음먹게 만들었던 그 시간들이 힘이 되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지도 모른다. ‘나도 여건이 뒷받침이 되었다면 꿈을 좇아갔을 것이다’라고. 물론 이 부분은 전적으로 동의한다. 개인의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있지 않느냐라는 말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대학원생이 되어 학업과 연구를 수행하는 데 자신의 의지와 열정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 꿈을 계속 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많은 돈이 필요해서, 어떤 경우에는 건강이 안 좋아져서 등등, 수 많은 상황들이 있을 수 있다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이자면 요즘에는 돈이 없어서 대학원에 가지 않는 경우는 많지 않다. 또래의 직장인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일 뿐, 대부분의 자연과학 박사과정 대학원생은 생계 및 등록이 가능한 수준의 인건비를 받는다. 이 주제는 나중에 더 깊게 다룰 계획이다). 그런 경우들을 살펴볼 때 어쩌면 지금 대학원에 있는 이들은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들일 수도 있다.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대학원생들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점만으로도 대학원생은 행복할 자격이 있다.
이 글을 보고 있을 독자 중에 자연과학을 전공하실 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꿈을 따라가라고. 또한 진로를 고민 중인 대학원생에게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마지막으로 자녀를 둔 부모님들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들의 꿈을 막지 말아달라고.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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