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감각이 일으키는 정서의 울림, ‘음악’
[16] 인간에게 음악이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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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서로 달라 의사소통을 할 수 없어도 우리는 ‘음악’을 통해 서로 정서를 충분히 공유할 수 있다.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누구나 나름의 방식으로 음악을 좋아한다. 음악은 말과 음률로 이루어진 형식만 따져도 그 종류와 형태를 다 헤아리기 힘들 만큼 다양하고, 그만큼 넓고 깊은 의미와 무게를 담고 있다. 우리가 태어나 들었던 음악에 대한 보편적인 경험은 전 인류가 아마 같을 것이다.
인류학에서는 ‘보편적’이라는 말을 모든 인간집단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행동 양상을 정의할 때 쓴다. 음악이 없는 문화는 예나 지금이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음악이 모든 인간의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토록 음악과 밀접하게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음악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
인간의 감각들과 청각
우리는 외부에서 오는 다양한 자극을 받아들이고 이를 소화해내며 산다. 인간이 가진 감각기관은 대단히 우아하고 효율적이며 다재다능하다. 사물을 보는 시각과 냄새를 맡는 후각, 그리고 소리를 듣는 청각은 꽤 멀리 떨어진 대상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감각들 중에서, 특히 소리를 듣는 청각은 다른 감각들과 구별되는 특성을 갖는다. 우선 청각은 차단이 가장 어려운 감각이다. 찝찝한 촉감이 느껴지거나, 구역질나는 맛이 느껴지면 그 대상과 접촉을 피하면 된다. 코를 막고 입으로 숨 쉬면 냄새가 차단되고, 보고 싶지 않으면 시선을 돌려버리면 된다. 그런데 청각은 선택적으로 차단하기 매우 어렵다. 듣기 거북한 소리를 없애려면 귀를 막으면 될 것 같지만 소리의 차단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청각은 매우 일차원적인 감각이다.[1] 촉감을 느낄 때, 우리 피부는 무수한 신경 말단에서 오는 신호를 처리해야 한다. 맛을 느끼는 혀나, 냄새를 맡는 코도 무수한 수용기를 지니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특정 물질에만 반응한다. 또한 눈의 망막에는 약 1억 2000만 개의 간상체와 600만 개의 원추체가 있으며 이 광수용기들 덕분에 2차원 그림과 3차원의 세상을 감각한다.[2]
반면에 귀는 단 한 가지 신호만을 처리한다고 볼 수 있는데, 바로 ‘공기 압력의 시간적 진동’이다. 우리는 그 진동에서 음악을 포함한 소리 세계 전체를 알아차리며 반응한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매질을 통한 진동을 느낄 수 있는 아주 섬세한 감각을 느낀다는 의미가 된다. 어디 그뿐인가. 멀리 떨어진 위험의 감지나 말소리를 통한 정보 전달은 물론, 노래나 교향악과 같은 정서적 의미까지 전달받는다. 소리를 지각한다는 것은 청각적인 능력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소리는 바로, 음악과 언어의 전신이기 때문이다.
» 영화, <마지막 4중주>((A Late Quartet, 2012).
인류, 소통, 음악…자장가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박사는 진정한 적응의 결과가 다름 아닌 언어라고 말한다.[3] 언어를 지닌 인간은 사회 구성원들에게 지식을 전달할 수 있을 뿐더러 문화적 성과를 다음 세대에 전달할 수도 있게 해준다. 그런데 음악이 바로 진화의 산물인 언어와 아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토록 언어가 정교화 되기 이전에 서로 간의 소통을 위해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도, 정서를 공유하기 위해서도,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소리의 신호가 필요했을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 음악은 진화한 언어의 부산물이라기보다 언어를 포함할 수 있는 소통 형태였으며 지금도 그 몫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인간에게 음악이라는 존재가 발생한 이유는 일찍이 진화론의 아버지인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도 고민했다. 다윈의 견해를 요약하면, 음악은 이성에게 사랑을 구하기 위한 활동의 중요한 한 가지라는 것이다.[4]
진화심리학자 제프리 밀러(Geoffrey Miller)는 춤사위를 포함한 음악적 행위는 싸움과 사냥을 상징하는 의식으로 여기고, 구석기 시대의 젊은 남성은 아름다운 노래와 춤으로 창조성과 신체 건강을 과시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예나 지금이나 여성들은 그런 남성을 좋은 짝짓기 상대로 여긴다는 것이다. 음악은 서로를 연결해주는 매개로서 충분히 기능한다. 그는 특히 음악이 언어의 관점에서 신체적 건강성 외에 지적 능력과 친절함을 과시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주장을 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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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발생을 설명하는 또 다른 가설은 ‘자장가’의 존재에 그 의미를 둔다. 이 세상 모든 문화에는 자장가가 존재하고, 자장가는 어느 문화를 막론하고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3] 무력하고 덜 성숙한 상태의 아기에게 엄마를 비롯한 가장 밀접한 보호자들은 자연스럽게 음악을 전달한다.
일례로 베트남에서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잊지 않기 위해 ‘아가야, 아가야, 너는 기억하거라…’로 시작하는 노랫말을 자장가로 만들어 지금도 아기들에게 들려준다는 보도처럼, 언어에 익숙하지 못한 아기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듯이 자장가와 같은 음악을 들려준다.[6] 아기에게 공유하고 전달하는 대화의 형태가 음악인 것이다.
인류에게 자장가가 존재하는 이유를 미숙한 상태로 태어나는 인간의 특성과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겠다. 인간은 두개골이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큰데, 여성의 골반은 직립보행 때문에 그 크기에 한계를 지닌다. 그래서 인간 아기는 머리가 충분히 성장하기 이전에 어미 몸 밖으로 나와야 한다. 다른 동물에 비해 훨씬 오랜 시간 어미 몸 밖에서 아기를 돌보아야 하는 인간은 ‘언어를 배우기 이전의 언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자장가와 같은 음악은 인류의 생존과 밀접히 관련이 있는 소중한 소통 방법인 셈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음악은 서로 연결하는 접합제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오래 전 인류는 집단 구성원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면서 유대를 강화했을 것이다. 지금의 우리가 음악을 공유하는 문화만 생각해보아도 쉽게 유추해볼 수 있는 과거의 모습이다. 노래와 춤은 내부 경쟁을 억제하고 다른 집단과 혈족에 맞서 싸울 때 사기를 북돋우는 역할을 했다. 오늘날의 응원가와 크게 다르지 않게끔 말이다.
음악과 정서, 그리고 기억
많은 이들이 음악은 우리의 감정과 직접 맞닿아 있다는 견해에 동의할 것이다. 음악을 듣다가, 혹은 노래를 감상하다가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려본 기억이 없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음악은 우리에게 직접 정보를 전달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음악을 통해 우리는 나름대로 기억을 더듬거나 의미를 부여하는 일 등에서 적극성을 발휘한다. 감정은 진화가 우리에게 남긴 ‘동기 부여의 강화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음악은 삶의 동력을 이끄는 감정을 일으킨다. 이는 사람이 음악을 어떤 사건이나 경험과 연결하는 능력을 지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음악을 듣는 것은 냄새를 맡는 경험과 마찬가지로 회상을 일으키는 강력한 촉매 구실을 한다.[7] 음악은 매우 총체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통한 기억은 추상적인 소리 자극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음악과 같은 해당 소리의 자극을 받아들였을 때의 전체적인 맥락으로 이루어지며 그 맥락은 음악과 관련해 우리 내면에 일어났거나 동반되었던 감정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 음악’을 회상하면 ‘그 감정’도 빠르게 고개를 드는 것이다. 그래서 음악은 대단히 강렬하고 인상적인 체험이다. 감성이 풍부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 그 시절에 좋아했던 음악이 평생에 거쳐 선호하는 취향으로 자리 잡는 것도 아마 이와 일맥상통하는 설명이 될 수 있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음악 한 자락은 경계가 명확하게 그어진 별개의 단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 감정은 음악이라는 상자에 담아둘 때 온전히 보존되고 회상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영화 <하모니>(2010)의 한 장면. [줄거리: 저마다 아픈 사연을 가진 채 살아가는 여자교도소에 합창단이 결성되면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가슴 찡한 감동의 무대를 만들어가는 이야기. 출처/씨네21].
삶과 음악…낯익음과 낯설음
말과 음악을 포함하는 소리 자극은 시간상에서 흘러가는 감각 인상이다. 그림이나 건축과 같은 예술과는 달리, 음악은 전체 인상을 제공하지 못하고 항상 순간적인 인상만 제공한다. 철학자 괴테는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했다. 바꿔 말하면 음악은 ‘흐르는 건축’인 셈이다. 순간과 흐름이라는 특성을 지닌 예술인 탓에 아직 닿지 않은 미래의 전개는 불명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불확실성을 꺼린다. 그래서 기대에 부응하는 전개를 좋아하고 그런 익숙함을 주는 음악을 선호한다. 예상대로 흐르는 음악을 익숙한 음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익숙함을 좋아한다.
하지만, 익숙함뿐인 모든 행태는 진부해지고 그것이 집단에 갇히면 고립된다. 익숙함에 대한 선호만큼 낯설음에 대한 두려움도 자연스럽다. 우리는 동일 언어 안에서도 다른 지방의 지역 언어에 거부감을 느끼거나 하찮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확연히 다른 언어에 큰 거북함을 느끼기도 한다. 낯설음에 대한 반응은 자연스러울지 모르지만, ‘다른 소리’에 대한 넓은 이해가 아닌, 혐오나 조롱을 한다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역사가 크세노폰은 ‘무엇인가 배우려면 다른 이들에게 들어라’라고 했다.
인류는 보편적 언어인 음악과 소리에 대한 특별한 정서를 공유한다. 이 축복받은 공통의 형질은 적대적 집단 간의 벽을 허물고 나아가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끊임없이 가질 수 있게 할 것이다. 음악이 지닌 불변의 의미를 이해하고 수용한다면 다름에 대한 불편함을 넘어 익숙함과 특별함의 공존으로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긍정적 대화나 서술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하다’라기보다는 ‘노래하다’라고 곧잘 표현한다. 인류가 평화와 희망을 끝없이 노래하길 간절히 바란다.◑
[주]
[1] Drosser, C. (2011). Der Musikverfuhrer: warum wir alle musikalisch sind. Rowohlt Verlag GmbH.
[2] Goldstein, E., & Brockmole, J. (2016). Sensation and perception. Nelson Education.
[3] Huron, D. (2001). Is music an evolutionary adaptation?. Annals of the New York Academy of sciences, 930(1), 43-61.
[4] Patel, A. D. (2010). Music, language, and the brain. Oxford university press.
[5] Brockman, M. J. (2011). The Mind. Harper Collins.
[6]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26443.html
[7] Stone, R. (2015). Theory for ethnomusicology. Routledge.
이고은 부산대 인지심리학 박사과정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사이언스온의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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