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강의 "뇌영상과 정신의학"

현직 정신과 의사인 필자가 최근 뇌영상과 정신의학 연구의 성과를 아우르며 뇌영상에 바탕을 둔 정신질환 해설에 나선다. 정신질환에 대해 여전히 큰 편견과 오해를 풀어주고자 한다.

‘어디서 본 듯한…’ 데자뷰는 어디에서 오는가

[21] 데자뷰(Déjà Vu)


00dejavu1.jpg » 과거의 경험을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현재에 경험하는 것을 프랑스어로 ‘데자뷰(Déjà Vu)라 한다.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의 ‘데칼코마니’. 출처/WikiArt
 
20대 후반에 로마에 갔을 때의 일이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지던 오후 포로 로마노를 뒤로 하고 콜로세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발치에서도 눈에 띄는 위풍당당한 자태에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빨리 안을 보고 싶은 마음에 허둥지둥 계단을 오르자 콜로세움의 내부가 눈앞에 펼쳐졌다. 주변 사람들의 환호성과 감탄사가 들려오는 순간, 기묘한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전혀 낯설지가 않아. 전에 여기 와본 것 같은데.’


내 평생 이번이 로마를 처음 방문한 것이었는데, 이상했다. 잠시 멍하게 서 있던 나를 다른 관광객이 스치고 지나가자 정신이 들었다. ‘아, 이런 게 ‘데자뷰(deja vu)’구나.’ 우리말로 번역하면 ‘기시감(旣視感)’, 즉 처음 본 대상을 ‘이미 본 것 같은 느낌’을 뜻하는 데자뷰를 실제 경험한 것이 매우 신기했다. 귀국 후 한동안은 데자뷰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바쁜 일상 탓에 호기심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달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행사를 접하면서 다시 데자뷰와 비슷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광화문 일대에 등장한 경찰 버스들의 행렬이 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대형 ‘차벽’을 처음 봤는데도 친근했던 까닭은 2008년 쇠고기 촛불 집회 때 등장했던 컨테이너 차단벽 ‘명박산성’ 때문이리라. 경찰의 도돌이표 대응을 보면서, 문득 오래 전 품었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아전인수격이긴 하지만, 덕분에 다시 데자뷰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되었으니 개인적으로 경찰 측에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이다.



데자뷰를 경험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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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전혀 낯설지 않은 이 기분

언젠가 한번 만난 것 같은 그 느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낯익은 말투

너무도 익숙한 웃음 그 몸짓 목소리

      - 김동률의 <Deja-vu>에서


자뷰란 단어는 100여 년 전만 해도 연구자들만 주로 사용했다. 그러나 요즘은 달콤한 사랑을 읊조리는 노래의 제목이 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단어가 되었다. 발음이 까다로운 이 프랑스어가 친숙해진 이유는 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다양한 형태로 데자뷰를 실제 경험하기 때문일 수 있다. 실제 41개 조사결과를 종합해 살펴봤더니, 일생 동안 적어도 한 번 이상 데자뷰를 겪은 사람의 비율이 평균 67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1] 하지만 경험하는 빈도는 나이에 따라 다르게 관찰되는데, 10대 후반과 20대 때에 가장 많고 나이가 들면서 점차 줄어든다.


00dejavu2.jpg » 연구에 따라 차이가 존재하지만 젊을 때 데자뷰를 많이 경험하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데자뷰를 덜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남. 출처/각주[1] 왜 젊은 사람들이 데자뷰를 많이 경험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나이 든 사람에 비해 젊은 사람이 새로운 용어나 개념을 더 잘 받아들인다. 따라서 젊은 사람이 데자뷰를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를 더 많이 겪는 것으로 보고했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나이 먹으면 귀가 둔해지듯이 나이 든 사람이 평소와 다른 인지적 경험을 한 뒤에도 둔감한 탓에 데자뷰로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도파민(dopamine)과 같은 신경전달물질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한다. 인간의 뇌는 나이가 들면서 도파민을 적게 만들어내고, 도파민에 반응하는 능력도 감소하기 때문이다.[2] 2001년에 이를 잘 보여주는 흥미로운 증례 보고(case report)가 있었다.[3] 39세의 남성 의사가 독감 치료를 위한 약물을 복용한 뒤부터 데자뷰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일 뒤 치료를 끝내자 데자뷰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복용한 아만타딘(amantadine)과 페닐프로파놀라민(phynylpropanolamine)은 다름 아닌 뇌에서 도파민의 활동을 증가시키는 약물이다.


의사는 데자뷰를 경험하면서 불쾌하기보다는 즐거운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짧은 동안만 겪었기 때문일 수 있다. 2014년 발표된 다른 증례 보고[4]를 살펴보자. 주인공인 영국의 23세 젊은 남성은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 줄곧 데자뷰를 겪어 왔다. 이로 인해 그는 일상에서 텔레비전 시청, 라디오 청취, 신문 읽기를 피했다. 이미 본 듯한 느낌 때문에 지루했고 언짢았던 것이다. 또한 이전에 방문했던 곳에 가면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일명 ‘타임 루프(time loop)’에 갇힌 느낌으로 고통을 받았다. 마치 영화 <사랑의 블랙홀(원제 Groundhog day)>의 기상 통보관 ‘코너스’처럼 말이다.


[ 영화 사랑의 블랙홀 중 한 장면. 타임 루프에 빠진 주인공은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새로워야 할 하루가 너무나도 익숙한 상황에 괴로워하며 애꿎은 자명종만 부순다] https://youtu.be/eZbtAFq7dP8


이 남성을 면밀히 살핀 영국의 웰즈(Wells) 교수는 지속적인 데자뷰가 불안에서 비롯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는 평소 과도한 불안을 지니고 있었는데, 특히 더러움에 예민한 편이어서 손을 자주 씻고, 하루에 두세 번씩 목욕을 하곤 했다. 이런 양상은 그가 대학에 들어갈 때쯤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의 뇌영상 분석 결과는 정상이었고, 여러 심리 검사에서도 특별한 이상 소견이 없었기 때문에 웰즈 교수는 데자뷰의 원인을 심리적인 부분에서 찾은 것이다.


39세 의사나 23세 청년이 경험한 데자뷰는 매우 흥미로운 증례다. 하지만 이런 경우만을 근거로 삼아 데자뷰의 원인이 도파민이나 불안과 연관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과학에서 한두 증례만 가지고 원인을 일반화하는 것은 너무 성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자뷰 연구들을 더 살펴보면, 측두엽 뇌전증(temporal lobe epilepsy)이란 질환이 많이 언급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왜일까? 그 이유는 측두엽 뇌전증을 앓는 사람들이 데자뷰를 자주 경험하는 것으로 보고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자뷰의 신경학적 기전을 찾는 여행의 시발점은 이 질환에서 시작된다.



친숙함과 회상의 오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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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 데자뷰.

트리니티 : 방금 뭐라고 했지?
네오 : 별거 아냐. 데자뷰를 경험했어.

트리니티 : 뭘 봤는데?

네오 : 검은 고양이가 지나갔는데, 비슷한 녀석이 또 지나갔어.

트리니티 : 얼마나 비슷했는데? 같은 녀석이었어?

네오 : 그럴지도. 확실친 않아.

모피어스 : 스위치.

네오 : 뭐야?

트리니티 : 데자뷰는 매트릭스의 오작동이야. 매트릭스에 어떤 변화가 생길 때 나타나지.

-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 에서 -


전증(腦電症)이란 병명이 낯설 수 있다. 예전에는 간질이라 불리다가 질환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편견을 줄이기 위해 2009년 개명이 이뤄졌다.[5] 뇌전증은 뇌에서 비정상적으로 발생한 전기신호가 뇌 조직을 타고 퍼져 나가는 과정에서 경련성 발작을 일으키는 질환으로, 뇌의 영역과 발작의 양상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나뉜다. 측두엽 뇌전증은 이름이 의미하듯이 측두엽에서 이상이 발생하는 것으로 성인 환자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측두엽 뇌전증 환자들은 보통 발작이 있기 전에 뭔가 곧 발생할 것 같은 느낌인 전조(前兆; aura)를 경험한다. 전조의 형태는 다양한데, 흔히 반복적으로 입맛을 다시거나 신체 한 부위를 문지르는 자동행동(automatism)를 하거나 배가 불러오고 얼굴이 빨개지는 식으로 자율신경계의 변화가 나타난다. 또한 공포, 공황, 우울 등의 정서 변화와 ‘몽롱한 상태(dreamy state)’에 빠지는 인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처음 봤는데 이미 본 느낌이 든다면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것처럼 데자뷰 역시 인지 변화의 일종이다.


인간 뇌에서 측두엽은 이름 그대로 뇌의 옆쪽에 있는 부위이다. 그중 내측 측두엽(medial temporal lobe; MTL)은 사실적 정보에 대한 장기 기억을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6] 사실적 정보란 의식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내용들로서 내가 전에 누구를 만났는지, 어디를 갔는지도 여기에 포함된다. 따라서 낯설어야 할 상황이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뇌의 내측 측두엽에 이상이 발생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측두엽 뇌전증 환자들이 경험하는 데자뷰는 이들 뇌의 내측 측두엽의 오작동이 원인인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경험한 데자뷰의 원인이 매트릭스에 발생한 문제(glitch)였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는 검은 고양이가 지나가는 상황에서 데자뷰를 경험하는데, 이는 매트릭스에 발생한 오작동 때문이었다.] https://youtu.be/z_KmNZNT5xw


억과 관련해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자. 인간의 뇌는 회상(recollection)과 친숙함(familiarity)이란 두 방법으로 익숙한 상황을 인식한다.[7] 회상을 사용할 때에는, 이전에 저장해놓은 기억에서 과거의 특정 내용을 인출(retrieve)한다. 예를 들면 어릴 적 다니던 학교를 다시 찾았을 때 수업을 듣던 교실을 떠올리면서 ‘전에 이 학교를 다녔구나’ 하고 깨닫는 것이다. 반면 친숙함의 경우에는, 구체적인 정보 없이도 과거의 경험을 느끼거나 이전에 겪은 것을 알게 된다. 다시 어릴 적 학교를 예로 들어보면, 도서관 옆을 지나면서 들어가지 않고도 익숙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회상과 친숙함이 뇌과학적으로 구분되는 이유는 뇌에서 각각 담당하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러 뇌영상 연구를 종합해보면, 회상은 해마(hippocampus) 및 해마주위피질(parahippocampal cortex)이 관련되는 반면에, 친숙함은 비주위피질(perirhinal cortex)과 연관된다.[8] 따라서 측두엽 뇌전증 환자가 데자뷰를 자주 경험하는 것은 이들 뇌에서 발생한 비정상적인 전기신호가 내측 측두엽의 기억과 관련된 영역을 오작동시키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00dejavu3.jpg » 측두엽(temporal lobe)의 주요 영역을 보여주는 뇌의 단면. 내측으로 회상과 연관된 해마, 해마주위피질, 비주위피질이 자리잡고 있음. 출처/각주[7], 변형

비정상적을 발생한 전기신호가 데자뷰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은 프랑스(데자뷰를 가장 정확히 발음할 수 있는 곳!)의 바르톨로메이 교수의 2012년 연구에서도 확인된다.[9] 연구진은 뇌전증 환자들의 기억 관련 영역에 전기 자극을 가해봤다. 그 결과 평소와 다른 전기신호가 해마보다 비피질(rhinal cortex)에 주어질 때 환자들이 데자뷰를 더 많이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친숙함을 담당하는 비피질이 자극 받으면 구체적인 내용을 회상하지 못해도 익숙하다고 느끼면서 데자뷰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과만으로 데자뷰의 원인을 내측 측두엽의 비주위피질 한 곳으로 몰아갈 수는 없다. 데자뷰가 발생하는 동안 비피질과 해마뿐 아니라 편도(amygdala) 사이의 뇌파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성을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뇌의 특정 부위가 아니라 여러 영역들이 함께 데자뷰 생성에 관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데자뷰를 유발하는 뇌 영역을 콕 집어 찾아보려 했던 여러 뇌영상 연구결과가 일치하지 않는 것[7]도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유사한 공간 배치에서 비롯한 낯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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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 (긴장하며) 나 전에 이 방에 왔던 것 같아.

부인 : 뭐라고?

남편 : (더욱 긴장하며) 나 전에 여기 왔었다고.

부인 : 맞아. 당신 호텔스닷컴에서 가상여행 했잖아.

남편 : (안도하며) 그랬지.

 -Hotels. Com 광고에서


두엽 뇌전증 환자들을 통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궁금증이 조금 풀린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부분도 있다. 건강한 일반인도 데자뷰를 겪는다는 점이다. 더욱이 2010년 일본에서 시행된 연구에 따르면, 뇌전증 환자 집단보다 일반인 집단이 데자뷰를 더 많이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10] 자연스럽게 우리 데자뷰 여행의 다음 목적지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들이 된다. 이를 통해 내가 로마에서 기묘한 경험을 한 뒤에 갖게 된 답답함이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외국의 한 광고에서 데자뷰를 경험한 남편이 부인의 설명을 듣고 나서 안심한 것처럼.


[한 호텔예약회사의 광고 장면. 으스스하게 다가올 수 있는 데자뷰 현상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https://youtu.be/BfAjdIm6AX8


신경과학자들은 뇌에 들어온 정보를 처리하는 지각(perception)이나 과거에 경험했던 것을 떠올리는 기억(memory)이 평소와 다르게 진행될 때 데자뷰가 발생한다고 추측한다.[11] 물론 깊이 들어가면 많은 이론과 논쟁이 존재하는데, 이를 다 공부하려면 끝도 없이 암기하던 의대 시험 기간을 데자뷰로 경험할 것 같아 두려워진다. 그러니 일단 위에서 소개한 광고처럼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이용한 최근의 연구[12] 하나를 살펴보도록 하자.


미국의 클리어리(Cleary) 교수 연구진은 실험에 참가한 대학생들에게 가상현실 장치를 통해 ‘데자 촌(Deja ville)’을 경험하도록 했다. 데자 촌은 생활 시뮬레이션 게임 <심즈 2(The Sims 2)>를 이용해 제작되어 참가자들은 실제처럼 마을을 경험할 수 있었다. 연구진은 방, 건물, 풍경 등의 장면 64가지를 준비하면서 형태가 유사한 64가지 장면을 더 만들었다. 짝이 되는 장면들은 격자무늬(grid)를 이용해 벽, 마루, 천장, 가구, 조명, 예술 작품, 구조물, 지형 등이 정확하게 일치하도록 제작되었다. 참가자들은 장면들을 볼 때마다 얼마나 익숙한지, 데자뷰를 경험하는지와 함께 새로운 장면인지 아니면 이전에 본 것인지를 표시했다.

00dejavu4.jpg » 원래 장면과 형태상 유사하게 만들어진 장면의 예. /출처/각주[12],변형

구 결과 새로운 장면이 이전에 경험했던 장면과 구조적인 배치가 같은데도 참가자들이 이전에 봤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할 때, 데자뷰를 더 많이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새로운 장면이더라도 이전에 봤던 장면과 형태가 유사하지 않으면 데자뷰는 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아래 그림의 수족관(B)과 안내실(C)의 구조를 살펴보자. 전혀 다른 장면 같지만 어항이 의자로, 바닥 타일이 카페트로, 벽의 유리창은 업무를 보는 칸으로 바뀌었을 뿐 구조적인 틀은 유지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형태가 동일할 때 기억하지 못해도 익숙함을 느끼면서 데자뷰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00dejavu5.jpg » 연구에 사용된 가상현실의 평면도. A : 장면 제작에 쓰인 격자무늬. B : 수족관. C : 대기실. 출처/각주[12], 변형

이런 관점에서 보면 로마에서 내가 경험한 데자뷰의 원인도 역시 과거의 경험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전에 방문했던 원형(로마의 콜로세움과 비슷한) 구조의 경기장을 기억해 봤다. 여러 경기장이 떠올랐는데, 비슷하기는 하지만 구조적인 배치까지 똑같지는 않았다. 끄덕여지던 고개가 멈췄다. 그러면 뭘까? 내 기억이 온전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 이 연구에서도 참가자들이 종종 이전에 봤던 장면을 다시 경험하고도 새로운 장면처럼 받아들이곤 했다. 이때 참가자들이 데자뷰를 더 느꼈던 만큼 나 역시 다른 방식으로 콜로세움을 이미 경험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기억의 오류 말고도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내 지각의 문제일 수도 있다. 이도 아니면 정신분석적으로 내가 평소에 인식하지 못하던 무의식적인 소망이 데자뷰로 표출된 것인지 모른다. 무의식적인 소망? 가만, 그러고 보니 오래 전에 콜로세움이 배경인 영화 <글레디에이터(Gladeiator)>에 쏙 빠져 영화를 수십 번 반복해서 봤던 적이 있다. 나도 모르게 용감하고, 리더십이 있던 ‘막시무스’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초심리학자들은 데자뷰를 통해 전생을 경험한다고 하는데 차마 ‘어머, 내가 전생에 막시무스였나봐’라는 말은 민망해서 못하겠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한 장면. 콜로세움에서 벌어진 검투에서 막시무스는 용맹함과 리더십으로전력의 열세를 뒤집고 승리한다.] https://youtu.be/v59OMxekXo4



아름다운 데자뷰를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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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여중생을 보면서 순간 어디서 본 듯한, 이전부터 알고 지낸 듯한 익숙함을 느꼈다. 하지만 ‘혹시 우리 아는 사이…’ 이런 말을 건네면 변태 아저씨로 오해 받을까봐 그냥 지나쳤다. 집에 와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데자뷰를 느낀 까닭은 여중생이 쓰고 있던 안경알이 동그란, 일명 ‘잠자리 안경’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내가 좋아했던 여학생도 늘 그런 안경을 쓰고 있었다. 최근의 복고 열풍이 안경에도 불어오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데자뷰가 꼭 달콤하지는 않다.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를 떠올려 보자. 주인공 ‘케이지’는 전쟁터에서 죽은 뒤 다시 신병 훈련소에서 살아나 동일한 하루를 반복해서 보내는 ‘타임 루프’에 갇히게 된다. 군 복무를 마친 우리나라 남성들에게 이런 설정은 악몽 그 자체일 수 있다. 낯설어야 할 훈련소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재입대라니, 상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괴롭다.


[타임 루프에 갇힌 케이지는 정신을 차릴 때마다 매번 훈련소에서 깨어난다.]

https://youtu.be/CRfPNZ0Xghs


처럼 데자뷰 경험은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내용에 따라 아름다울 수도 악몽일 수도 있다. 걱정스러운 것은 최근 일련의 사회적 흐름에서 부정적인 데자뷰를 더 많이 경험하는 점이다. 비근한 예로 세월호 1주기 추모행사 때 차벽을 이용해 사람들의 통행 자체를 원천봉쇄한 장면에서 이미 30년 전에 폐지된 통금(통행금지)의 데자뷰가 느껴졌다. 우리 사회는 혹 퇴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데자뷰의 신경학적 기전을 밝히려는 연구의 흐름이 계속 발전해온 것처럼 우리 사회도 과거가 아닌 미래로 걸어나가길 희망해본다.


[주]


[1] Brown, A.S., A review of the deja vu experience. Psychol Bull, 2003. 129(3): p. 394-413.

[2] Dreher, J.C., et al., Age-related changes in midbrain dopaminergic regulation of the human reward system. Proc Natl Acad Sci U S A, 2008. 105(39): p. 15106-11.

[3] Taiminen, T. and S.K. Jaaskelainen, Intense and recurrent deja vu experiences related to amantadine and phenylpropanolamine in a healthy male. J Clin Neurosci, 2001. 8(5): p. 460-2.

[4] Wells, C.E., et al., Persistent psychogenic deja vu: a case report. J Med Case Rep, 2014. 8: p. 414.

[5]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life20/359269.html

[6] Squire, L.R. and S. Zola-Morgan, The medial temporal lobe memory system. Science, 1991. 253(5026): p. 1380-6.

[7] Illman, N.A., et al., Deja experiences in temporal lobe epilepsy. Epilepsy Res Treat, 2012. 2012: p. 539567.

[8] Slotnick, S.D., The nature of recollection in behavior and the brain. Neuroreport, 2013. 24(12): p. 663-70.

[9] Bartolomei, F., et al., Rhinal-hippocampal interactions during deja vu. Clin Neurophysiol, 2012. 123(3): p. 489-95.

[10] Adachi, N., et al., Two forms of deja vu experiences in patients with epilepsy. Epilepsy Behav, 2010. 18(3): p. 218-22.

[11] Ross, B.H., The Psychology of Learning and Motivation: Advances in Research and Theory. 2010: Elsevier Science.

[12] Cleary, A.M., et al., Familiarity from the configuration of objects in 3-dimensional space and its relation to deja vu: a virtual reality investigation. Conscious Cogn, 2012. 21(2): p. 969-75.


최강 의사, 르네스병원 정신과장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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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 의사, 서울명병원 정신과 과장
우울하던 의과대학 시절에 운명처럼 찾아온 정신과학과 여전히 연애 중인 정신과 의사. 환자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고 정신과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줄이고자 늘 고민한다.
이메일 : ironch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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