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과 진화론, 빅뱅우주론

   취재수첩   


2014년 프란치스코, 1951년 비오 12세, 그리고 교황청 과학원

00pope.jpg » 프란치스코 교황. 출처/ 교황청 과학원


난 10월27일(현지 시각) 바티칸에서 들려온 소식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연설에서 진화와 우주대폭발(빅뱅) 이론이 하느님의 존재에 반하지 않는다면서 ‘창세기를 읽으며 하느님을 마법지팡이 든 마법사처럼 상상하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 연설이 하느님을 부정하는 게 아님은 당연했고, 오히려 하느님의 창조가 있어 진화와 빅뱅이 가능했다고 강조해 신의 존재를 드높였습니다. 몇 대목만을 옮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연설문은 교황청 누리집에서 직접 보실 수 있어요.


창세기에서 창조의 대목을 읽을 때, 하느님을 전능한 마법 지팡이를 든 마법사인 양 상상하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that was not so). 하느님은 존재들을 창조하시고서 각각에 부여한 내적 법칙에 따라 그것들이 발전하도록 놓아두셨습니다.


세상의 기원이라고 오늘날 제시되는 대폭발우주론은 신적 창조자의 관여(intervention)와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진화는 창조의 개념과 충돌하지 않는데 그것은 진화가 나타나려면 진화하는 존재들의 창조가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교와 과학을 흔히 갈등과 대립의 틀로 바라보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시각에 이날 프란치스코 교황의 연설은 신선한 느낌을 줄 만했습니다. 영국 일간신문 <인디펜던트>가 교황의 연설에 각별한 의미를 두어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신문은 이번 교황 연설이 창조론과 지적설계론의 유사과학을 두둔하는 경향을 보였던 이전 교황 베네딕트 14세의 흐름에 마침표를 찍을 만한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견해를 함께 전했습니다.
  


사실 교황이 직접 나서 진화론과 빅뱅우주론이 하느님의 존재와 불일치하지 않는다는 연설을 행한 것은 당연히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자주 인용되는 사례가 반세기 훨씬 전에 교황 비오 12세(Pope Pius XII)가 행한 1951년 연설이었습니다.


오 12세는 1950년 회람서신을 통해 ‘창세기의 설명과 다윈 진화론이 반드시 화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는 요지로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견해를 발표한 데 이어, 이듬해인 1951년 11월22일에는 교황청 과학원에서 ‘종교는 비유기물인 우주 물질의 창조와 진화를 말하는 현대 과학과 모순되지 않는다’며 빅뱅우주론과 다른 여러 과학적 발견과 이론을 다루는 장문의 연설을 했습니다.


00Popel_Bigbang.jpg » 뉴욕타임스의 1951년 11월23일치 1면. 출처/ New York Times 1951년 당시에 교황의 연설은 사회적으로도 큰 관심사였던 모양입니다. 연설 다음날인 11월23일치 미국 일간신문 <뉴욕타임스>는 교황의 연설을 제1면과 6면에서 주요 기사로 다루었습니다.


[로마, 11월22일] - 교황 비오 12세는 오늘 교황청 과학원에서 한 연설에서, 생명 물질과는 구분되는 비유기 물질로 여겨지는 우주가 영원불변의 하느님에 의해 무에서 창조되었다는 가톨릭 교리를 확인했다. 현대의 과학적 발견들에 기초해, 교황은 창조의 시기를 50억 년 내지 100억 년 전으로 설정했다. 그는 창조 순간부터 점진적 진화가 이뤄져 결국에는 지금 우리가 보는 그런 우주와 세계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교황은 오늘 연설에서 비유기물의 창조와 진화만을 다루었으며 인간 창조에 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이 주제는 1950년 4월20일 회람서신에서 충분히 다루었는데, 교황은 그 서신에서 창세기의 설명이 다윈 진화론과 반드시 화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교황은 연설 내내 비유기물의 창조와 관련한 문제에서도 종교와 과학은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신문은 “그것(이번 연설)은 현 교황이 과학 주제에 관해 해왔던 발표 가운데 가장 중대한 것으로 여겨지며, 바티칸 관공리들의 견해로는 과학과 신학 사이에 있는 불화를 치유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긴 분량으로 전자, 원자핵, 분자의 미시계와 우주 물질 진화의 거시계를 종교적이고,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주제로 다룬 전문가 수준의 연설문에서 들머리엔 아래와 같은 문장이 담겼습니다.


과거에 성급하게 선언했던 것과는 반대로, 진실한 과학이 더욱 진보할수록 과학은 하느님을 더욱 많이 발견합니다. 마치 하느님이 과학이 여는 모든 문의 뒤편에 서서 지켜보며 기다리고 계시는 듯합니다.


00gamow1.jpg » 가모프의 1952년 '피지컬리뷰' 논문. 출처/ Physical Review (클릭 하면 영상 확대) 현실에 나타나는 과학 지식의 진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또한 하느님의 존재를 드높이는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당시에 현실 과학 이론을 가톨릭교회가 개방적이고도 통크게 받아들인 태도는 큰 울림을 주었고, 이에 빅뱅우주론의 주창자 중 한 명이었던 미국 핵물리학자 조지 가모프(George Gamow)는 1952년 물리학저널 <피지컬 리뷰>에 발표한 짧은 논문의 서두에다 비오 12세의 1951년 연설을 인용하고는 빅뱅우주론이 “의문의 여지 없는 진리처럼 여겨질 수 있게 됐다"고 반겼습니다.(당시에 우주론은 우주가 변함없는 상태를 유지한다는 정상우주론(steady-state cosmology)와 우주는 시작의 역사를 거쳐 진화해왔다는 대폭발우주론 또는 진화우주론이 맞수로서 논쟁을 벌이던 때였으니, 교황이 종교적 해석에 대폭발우주론을 수용한 것은 가모프한테 크나큰 힘이 되었겠지요.)


1951년 뉴욕타임스는 기사에서 교황 연설은 성경의 창세기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보여준다고 전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동안 성경에서 창조를 말하는 대목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데 동의를 이루지 않아 왔다. 예를 들어, 성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창조의 엿새를 순수하게 비유적인 의미로서 해석했으며, 근현대의 일부 가톨릭 저자들도 창조가 행해진 “날들(days)”을 지질학적 시기로 받아들였고,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비난을 받지도 않았다. 교황 레오 13세(Leo XIII)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창세기를 쓴) 영적인 기자는 하느님이 사람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사람이 익숙한 표현으로 의미를 전해주신 바를 기록했다”고 말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uinas)는 창세기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이 문제들에서는 성 어거스틴이 가르치셨듯이 두 가지를 언급해야 한다. 첫째는 성서의 진실은 확고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 둘째는 신적인 성서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설될 수도 있으므로, 순수 이성이 성서에 잘못 담긴 것으로 여겨지는 진술을 증명한 이후에도 여전히 그것을 유지하려는 것처럼 자신을 어떤 하나의 견해에 엄격하게 고착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는 점이다.……



비오 12세의 1951년 연설 전문을 구경이나 해보고 싶어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보니 뜻밖에도 연설문을 너무나 손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비오 12세뿐 아니라 역대 교황들이 행한 과학 관련 연설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습니다. 교황청 과학원이 1917년부터 2002년까지 과학원 회의에 참석해 행한 역대 교황들의 연설문을 모은 전자책자(PDF)를 누리집에 공개하고 있으니까요.


설문을 슬쩍 살피면서 한번 더 놀란 점은, 교황의 연설문이 그저 가톨릭 교리를 방어하는 데 급급해 과학 내용을 이리저리 짜깁기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겉핥기로 이해하는 척하면서 적당한 절충이나 화해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당대에 종교나 인식론에 영향을 줄 만한 최신 과학 이론과 동향의 쟁점을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하는 연설문들이 종종 눈에 띄었습니다. 진화론과 우주론뿐 아니라 분자생물학, 신경과학, 핵물리학을 비롯해 많은 과학적 발견과 이론이 다뤄져 있었습니다. 13쪽에 달하는 비오 12세의 1951년 연설은 그 중에서도 가장 진지하고 전문적인 연설이라고 꼽더라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00papaladdress.jpg 이 책자를 출간하고 역대 교황들이 참석해 연설을 했다는 곳인 교황청 과학원(Pontifical Academy of Sciences)은 대체 어떤 기구일까 하는 궁금증이 새로 생겼습니다. 교황청 과학원의 누리집에서 과학원을 소개하는 간략한 글을 읽었습니다. 여기에서도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황청의 과학원이라면 언뜻보아 교황청 교리의 방패막이 구실을 하지 않을까 하는 오해를 할 법했지만, 과학원이 걸어온 역사와 그 전통은 만만찮은 것이었습니다. 먼저 과학원 과학자들의 진용을 살펴보니, 세계 각지의 저명한 과학자 80명이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1970년대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Werner Arber)가 과학원의 현 대표를 맡고 있으며, 멤버 중에는 널리 알려진 과학자인 스티븐 호킹과 일본 역분화줄기세포 연구자인 야마나카 신야도 있었습니다. 교황청 과학원은 17세기 갈릴레오가 활약했던 린체이아카데미의 전통을 이어받아 19세기(1847)에 재건됐으며 다시 20세기(1936)에 현재의 모습으로 개편됐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과학원을 거쳐간 노벨상 수상자만 닐스 보어, 에르빈 슈뢰딩거, 막스 플랑크를 비롯해 70여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교황청 지원을 받되 독립 연구기관으로 존립한다’는 규정도 눈에 띕니다. 교황 비오 12세는 일찍이 1940년에 과학원의 연구 자유를 강조하면서 “인류 기술과 학문의 숭고한 옹호자인 여러분께 가톨릭교회는 방법과 연구에서 완전한 자유를 인정합니다”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과학원은 누리집에서 "교황청 과학원은 수학, 물리, 자연과학의 진보, 그리고 관련한 인식론적 물음과 쟁점에 관한 연구를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과학원이 행하는 숙고와 연구는 어떤 한 나라, 정치, 종교의 관점에 의한 영향을 받지 않음으로써, 과학원은 교황청과 그 여러 기구들이 의지할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의 값진 원천을 만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학원이 제시하는 주요 관심과 활동 분야는 △기초과학, △지구적 물음과 쟁점을 다루는 과학과 기술, △제3세계 문제 해결을 위한 과학, △과학 윤리와 정책, △생명윤리, △인식론 등 여섯 가지입니다.


검색의 꼬리를 물며 좇으며 이런 배경을 대략 살피다 보니 역대 교황들이 과학원에서 행한 연설이 그저 종교적 수사가 아니라 현실 과학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다루고자 노력하며 열린 태도를 보여준 것은 과학원의 이런 전통 덕분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진화와 우주론, 분자생물학, 신경과학의 주제에 관해 1917~2002년 과학원에서 행한 역대 교황들의 연설문 모음 책자는 누리집(goo.gl/4arHnd)에서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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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우 한겨레신문사 과학담당 기자, 사이언스온 운영
1990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편집부, 사회부, 문화부, 생활과학부 등을 거쳤으며 주로 과학담당 기자로 일했다. <과학의 수사학>, <과학의 언어>, <온도계의 철학> 등을 번역했으며, <갈릴레오의 두 우주체제에 관한 대화>를 썼다.
이메일 :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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