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연구자들의 "청춘 스케치"

연구의 맛과 멋을 배우는 젊은 연구자들이 실험실에서, 연구실에서, 그리고 사회와 만남에서 얻는 에피소드와 경험, 그리고 생활의 단상을 전합니다.

자나깨나 애먹이던 문제에 해법이 '찾아오시던' 순간

신동화의 “유럽에서 포닥으로 살기 -이탈리아”


[2] ‘저전력 설계’ 전공의 연구생활

00tonino11.jpg » 지난 2009년 소형 연료전지 시스템의 동작을 관련 전시회에서 시연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 왼쪽 책상 위에 제가 만든 연료전지 시스템이 있습니다. 저는 아마도 모니터링 결과를 살펴보고 있는 것 같은데 혹시나 시스템이 죽을까봐 초조했는지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가 찍혔습니다. 사진제공/ 신동화


녕하세요.

지난 글에서 ‘이방인’이라는 다소 뜬금없는 주제("이방인처럼 비친 나와 우리의 불편함, 그 정체는?")로 글을 썼던 이탈리아 토리노의 신동화입니다. 지난 번 글에서는 제가 글을 쓰는 기본적인 동기와 제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말씀드렸다면, 이번에는 제 연구주제에 관해서 말씀드리면서 이 분야의 연구문화를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연구목표: 전력 소모를 줄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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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형 시스템의 시스템 수준 저전력 설계기법.’ 참 깁니다. 일반인한테 너무도 낯설 법한 이런 주제로 저는 학위를 받았습니다. 조금 풀어서 설명 드리겠습니다. 먼저 “내장형 시스템”, 이건 우리가 흔히 쓰는 개인용 컴퓨터(PC)나 서버처럼 연산 자체를 목적으로 한 컴퓨터 시스템이 아니라, 다른 시스템에 내장돼(embedded) 필요한 연산만을 수행하는 컴퓨터 시스템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스마트폰, 자동차, 스마트 가전 등에 들어가는 작은 컴퓨터가 바로 대표적인 내장형 시스템이지요. “저전력 설계”는 말 그대로 이런 내장형 시스템의 전력 소비를 줄이자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스마트폰의 전력 소모를 줄여 배터리 수명을 늘리는 것과 같은 연구를 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흔히 컴퓨터 공학 전공자라고 하면 소프트웨어 개발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장형 시스템은 응용 분야가 많은 만큼 다양한 시스템을 접하게 됩니다. 대학원 시절에는 정말 여러 종류의 시스템을 만드는 데 참여했습니다. 소형 연료전지의 구동 시스템을 만들기도 했고, 무인 항공기의 제어 시스템이나, 해저 지진계의 데이터 저장 시스템을 만드는 데에도 참여했습니다.


이런 시스템을 ‘저전력’으로 설계하자는 것이지요. 연료전지 구동 시스템에서는 적은 전력으로 최대 전력을 만들 수 있도록 시스템을 최적화해야 했습니다. 무인 항공기에서는 시스템의 전력 소모량을 줄이고, 그렇게 전력이 줄어든 만큼 배터리 크기를 줄여 비행기가 더 오래 날도록 설계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해저 지진계는 배터리와 센서를 유리로 된 공 안에 넣어서 심해저에 떨어뜨려 두었다가 배터리가 다 방전되면 떠오르도록 설계한 것인데, 전력 소모가 줄어들면 수명이 늘어나므로 저전력 설계가 아주 중요한 장치입니다 (일본의 지진 해일 발생 이후에, 해저 지진계를 동해에 설치하는 정부 과제가 나와서 지질학 연구실과 공동으로 참여했습니다. 어떻게 쓰이는지 참 궁금했는데 안타깝게도 실제 사용했는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스템의 전력 소모를 줄이는 기법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사실 간단히 말하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안 쓸 때 잘 꺼두기'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을 티 나지 않게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전력 소모를 극단적으로 줄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사용자가 안 쓰고 항상 꺼두면 됩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시스템이 없는 것이나 다름 없으니, 사용자를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전력 소모를 줄이는 일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시스템을 부분적으로 끄기도 하고, 더 느린 속도로 동작하게 하기도 합니다. 더 성능 좋고 전력을 적게 소모하는 (그리고 대체로 더 비싼) 장치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데, 여러 측면을 잘 고려해야 균형 잡힌 설계를 달성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저전력 설계를 자동으로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도록, 시스템을 모형화하고, 최적화 알고리즘을 고안하는 것이 제가 하고 있는 연구입니다.


저도 사실 대학원에 올 때까지 이런 분야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할 때에는 제가 흥미롭게 들었던 과목의 교수님들을 무작정 찾아가 그 연구실에서는 어떤 연구를 하는지 여쭈어 보았는데, 대부분 교수님들께서도 실제 어떤 연구를 하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시는 것을 난감해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만약 지금 제게 학부 4학년 정도의 학생이 와서 대뜸 뭘 연구하느냐고 물으면, 저도 어디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 한두 시간 안에 얼마나 설명할 수 있을지를 두고서 난감할 것 같기는 합니다). 


대학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도교수님과 연구실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다가, 연구실까지 걸어가는 최적의 경로가 어디인지를 놓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거리를 최적화해야 할지, 시간을 최적화할지, 이런 기준들과 에너지 사이의 관련성은 어떤지,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것은 없는지 등등을 한참 이야기하던 중에 교수님이 ‘보통 사람들은 최적화에 놀랄 만큼 관심이 없다. 이런데 관심 있는 건 우리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휴대전화에서 쓰지 않는 기능을 꼬박꼬박 끄고, 노트북 컴퓨터의 화면 밝기도 부지런히 조절하는 저를 발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실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에너지를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면 기분이 좋지 않아지는데, 그럴 때면 교수님이 그때 하시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갑자기 찾아온 문제해결 순간과 그때의 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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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플래시 메모리와 유기발광 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를 대상으로 전력 소모를 줄이는 기법을 연구한 논문으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사실 제 학위 논문과 관련된 주요한 아이디어들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난 것들입니다. 학위 과정 중에 다른 연구 주제로도 논문을 썼고, 기업이나 정부 과제도 수행했지만, 학위와 관련한 위의 두 주제는 참 특별하게 기억됩니다. 상당히 세부 전공 분야의 주제이기는 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플래시 메모리에 관한 연구는 어떤 데이터를 메모리에 저장할 때 에너지가 덜 드는 형태로 저장하는 기법, 그리고 디스플레이에 관한 연구는 비슷한 품질의 이미지를 전력을 덜 소모하면서 표시하는 기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석사 2년차 때 한 국내 기업에서 받은 연구과제 가운데, 해당 기업의 플래시 메모리의 전력 소비를 경쟁사의 제품과 비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전력 소비량을 비교하기 위해 회로를 구현하고 몇 가지 샘플 데이터를 저장하는 데 드는 에너지를 측정하였는데, 결과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플래시 메모리는 지우기 과정을 통해 모든 데이터를 1로 만들고, 이후에 선택적으로 0인 데이터를 써넣는 과정을 통해 데이터를 저장합니다. 저는 데이터 저장에 필요한 에너지가 선택적으로 써넣은 0의 개수에 비례할 것으로 생각하여, 저장되는 0의 개수를 늘려가며 실험을 해보았는데, 실제 측정 결과는 제멋대로였습니다.


무지 해석이 안 되어 고민하던 중이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연구실 선배들과 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가는 길에 복도에서 마주친 한 선배가 실험 대상이 엠엘시(MLC) 플래시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엠엘시 플래시 메모리란 하나의 데이터 셀(메모리의 저장 단위)에 여러 비트의 데이터를 저장하는 구조로, 한 셀에 들어 있는 여러 비트를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전력 소모의 형태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뒤에 밥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서 돌아와 결과를 새로 해석해보니 새로 예측한 값과 측정값의 추세가 거의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지금도 연구실 복도 계단에서 그 선배가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던 그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뭔가 만드는 것이 잘 안 되었던 경험(예를 들어 코딩 과제 등)이 있으신 분들은 이해가 쉬우실 듯 한데, 뒤죽박죽이었던 세계가 갑자기 사리에 맞게 조화로운 세계로 바뀐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 안 되던 게 되는 그 순간, 제 주변의 것들이 다 제때, 제자리에 있는 것만 같은 그런 참 표현하기 어려운 기분입니다.


사학위 논문으로 연결된 아이디어가 생각난 곳도 의외였습니다. 공동 연구를 위해 미국에 머물던 때, 연구실 동료들과 맥주를 마시며 OLED의 전력 소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방에 들어왔습니다. 자려고 침대에 누워서 어디를 조절하면 전력 소비량이 바뀔지 생각하다가, 잠이 들락말락한 상태에서 구동전압을 조절하면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이 떠올랐습니다. 어둑한 방안에서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종이에 메모를 했다가 다음날 살펴보았는데 느낌표가 몇개씩 들어간 갈겨 쓴 글씨는 이게 대체 뭐라고 쓰여진 건지 몰라 한참을 들여다봤습니다. 즐거운 기억들입니다.

[유기발광 다이오드 디스플레이의 구동전압 조절과 화질 보정에 대한 발표 슬라이드입니다. 동영상의 후반에는 시연 동영상이 나옵니다. 다시 보려니 무척 민망한데, 말이 빠른 것은 시간 제한 때문에 빨리 대본을 읽어서 그랬습니다.]



새로운 화두: 에너지·환경에 기여하는 시스템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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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요즘에 제가 연구하는 주제는 배터리의 공정 변이를 통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전기자동차 등에 쓰이는 대용량 배터리의 팩 내부에는 수십~수백 개의 배터리가 사용되는데 제조 공정의 오차로 인해 각 배터리의 특성이 모두 다릅니다. 이런 특성을 통계적으로 모델링 해서 통해 배터리 팩의 제조와 관리 기법 평가에 사용될 수 있는 통계적 배터리 샘플을 자동으로 생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근 연구의 목적입니다.


이탈리아에 와서 처음에 약간 놀란 것은 설계 기법이나 구현보다는 ‘방법론’의 비중이 높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였다면 실제로 몇 퍼센트의 효율을 높였는지, 비용을 얼만큼 줄였는지와 같은 결과적인 평가 항목이 중요하겠지만, 여기에서는 기법의 효과뿐 아니라 자동화 도구나 모델, 개념의 측면에서 얼마나 기여했는지도 중요하게 보는 것 같습니다.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회의에 참여했을 때, 논문으로 발표하려는 개념적인 설계 방법론의 이름을 뭘로 정할지를 두고 한참을 토론하던 모습은 제게는 참 낯설었습니다. 제가 처음와서 자기 소개 발표 때에 우리나라 연구실에서 만든 것들의 사진을 몇 장 보여주었을 때 학생들이 놀라워 하던 일도 재미있었던 기억입니다.


좋게 생각하자면 설계자동화 분야에서 기본이 되는 모형화, 개념적인 부분이 강조되어 대학과 같은 교육-연구기관이 연구할 거리가 많다는 것이고, 안 좋게 생각하자면 관련 산업의 인력이나 연구 수요가 우리나라에 비해 크지 않다보니, 연구자들이 역설적으로 연구 방향에 더 많은 자율성을 가지게 되고 기초적인 연구에 더 힘을 쏟을 수 있는 것도 같습니다.


제는 지금까지 연구해왔던 저전력 설계 기법들을 기초로 삼아서, 에너지 인지 설계(energy-aware design) 전반으로 연구 분야를 확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요새 점차 주목받는 분야가 ‘그린 컴퓨팅(Green computing)’이라는 분야인데, 특히 원자력발전, 화석연료 같이 상대적으로 공급이 안정적인 에너지원의 비중이 환경 문제로 인해 줄어들고, 풍력, 태양광 등 주변 환경에 따라 에너지 공급이 유동적일 수 있는 재생가능 에너지원의 비중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에너지 공급의 변동과 저장, 변환 효율, 그리고 사용자 요구 등을 두루 고려하는 시스템 설계 기법을 도입해서 우리가 마주한 에너지·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고 싶은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연구 분야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꾸 글이 길어지고, 사족이 늘어나 글을 쓰는 내내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흥미롭게 읽으신 분이 계시다면 기쁘겠습니다. 혹시라도 궁금한 게 있는 분은 제게 이메일을 주시면 아는 범위에서 답신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설계자동화란?

저의 전공인 반도체 설계자동화라는 분야가 일반인한테는 생소한 것이기에, 간략하게나마 조금 더 소개하고자 합니다. 학문적 분류 기준을 따르면, 제가 연구하는 주된 무대는 전자기기 설계 자동화(Electronic design automation: EDA)라는 분야의 학회나 학술지들입니다. EDA 분야는 컴퓨터공학(컴퓨터과학)과 전자공학에 걸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전자회로로 구성된 시스템을 컴퓨터를 이용해 자동으로 설계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컴퓨터공학 및 전자공학이 다른 분야와 맺는 연관성을 보면, 먼저 전자회로의 기본이 되는 반도체 소자 분야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연산장치의 구조를 연구하는 컴퓨터 구조 분야, 그리고 문제의 모형화와 문제 해결에 필요한 최적화 알고리즘을 연구하는 분야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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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화 이탈리아 토리노공대 박사후연구원, 컴퓨터공학
이탈리아 토리노공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있다. 공인된 분류를 따르자면 설계자동화 분야를 연구하고 있고, 구체적인 전공은 내장형 컴퓨팅 시스템의 저전력 설계 기법인데 사실은 납땜부터 코딩까지 가리지 않고 다했다. 취미랑 전공이 비슷해서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메일 : donghwa.shin@polito.it      
블로그 : http://mimosa.snu.ac.kr/~zira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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